글 수 410
정성민교수 (총신대학교 교수)
믿음은 삶의 열매를 동반한다.
개혁주의 전통의 두드러진 특징을 요약하자면,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 회복, 즉 하나님의 주권이 구원의 복음에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의 교리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과 또한 그 주권이 삶의 전 영역(문화)에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배경 하에 종교개혁의 핵심과제는 이신칭의의 구원론이었다. 유일한 구원의 길은 타락한 인간의 어떤 의나 공로로 불가능하며 하나님이 의롭다하시는 절대 은혜의 사역을 오직 믿음으로만 수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제공된 하나님의 의, 즉 구원의 복음을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는 구원관을 오늘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면서 많은 오해를 낳은 것 같다. 이신칭의 복음이 마치 삶이나 인격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마치 미래의 천국티켓처럼 생각되고 현실에서는 세속적 가치관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으로 이해되며, 혹은 소위 좋은 믿음이란 단지 교회생활에 충실한 것과 현세적 축복을 위한 도구 정도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이런 복음과 믿음에 대한 오해 때문에 오늘날의 교회가 세상을 변혁시키기보다는 점점 세속화되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구원의 복음은 단순한 지식적 고백의 차원에만 머물지 않는다. 구원이란 이 세상에 살지만 세속적 가치를 버리고 예수를 주라 고백하며 그의 뜻대로 살겠다고 고백하고 순종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선택받은 자들의 구원이 말씀 및 그리스도의 성령사역과 함께 믿음의 은혜로 되어지는 것일 뿐만 아니라 믿는 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로 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믿음은 말씀에 대한 순종과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고 그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며 순종하여 올바른 관계를 맺는 실제적 사건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생명과 지상의 삶을 위해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실존적 존재이며, 그리고 의존적 존재라는 것은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이다.
따라서 순종의 삶이 없다면 믿음의 형식만 있고 믿음의 내용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보듯이, 가지와 열매 사이에 존재하는 필연적인 인과성이 믿음과 행위사이에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선한 행위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엡 2:8-10). 특히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의 핵심구절인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의인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과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이중적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즉 칭의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이 가능하지만 믿음은 삶을 동반한다는 것과 삶은 믿음을 더욱 강화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믿음과 삶을 이원화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토저(A. W. Tozer)가 지적했듯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한순간의 의롭다 함을 느끼는 스릴을 즐기고자 하는 반면, 지속적으로 의롭게 사는 데 따르는 불편함을 기꺼이 감내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복음의 본질을 왜곡한 것으로서 교회가 바르게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믿음은 그 안에 수동성과 능동성을 내포하고 있다. 수동성이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 인간 스스로 선을 행하며 분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행위에 자신을 완전히 의존하여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인간적인 노력이나 공로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은 단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전적으로 수용하는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능동적이고 적극적 의지를 동반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의 관계를 통한 인격적 순종의 행위가 사람의 의식적 행위에 표현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선한 행위를 향해 끊임없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의지적 노력이 요구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적극적이고 의지적 순종의 삶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도록 책임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인간 스스로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든지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룰 수 있다는 자율주의(autonomy)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구원이 가능하고, 이러한 책임을 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잘못된 결과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선한 삶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길이며 교회가 새롭게 거듭나는 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은 삶의 열매를 동반한다.
개혁주의 전통의 두드러진 특징을 요약하자면,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 회복, 즉 하나님의 주권이 구원의 복음에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의 교리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과 또한 그 주권이 삶의 전 영역(문화)에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배경 하에 종교개혁의 핵심과제는 이신칭의의 구원론이었다. 유일한 구원의 길은 타락한 인간의 어떤 의나 공로로 불가능하며 하나님이 의롭다하시는 절대 은혜의 사역을 오직 믿음으로만 수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제공된 하나님의 의, 즉 구원의 복음을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는 구원관을 오늘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면서 많은 오해를 낳은 것 같다. 이신칭의 복음이 마치 삶이나 인격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마치 미래의 천국티켓처럼 생각되고 현실에서는 세속적 가치관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으로 이해되며, 혹은 소위 좋은 믿음이란 단지 교회생활에 충실한 것과 현세적 축복을 위한 도구 정도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이런 복음과 믿음에 대한 오해 때문에 오늘날의 교회가 세상을 변혁시키기보다는 점점 세속화되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구원의 복음은 단순한 지식적 고백의 차원에만 머물지 않는다. 구원이란 이 세상에 살지만 세속적 가치를 버리고 예수를 주라 고백하며 그의 뜻대로 살겠다고 고백하고 순종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선택받은 자들의 구원이 말씀 및 그리스도의 성령사역과 함께 믿음의 은혜로 되어지는 것일 뿐만 아니라 믿는 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로 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믿음은 말씀에 대한 순종과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고 그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며 순종하여 올바른 관계를 맺는 실제적 사건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생명과 지상의 삶을 위해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실존적 존재이며, 그리고 의존적 존재라는 것은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이다.
따라서 순종의 삶이 없다면 믿음의 형식만 있고 믿음의 내용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보듯이, 가지와 열매 사이에 존재하는 필연적인 인과성이 믿음과 행위사이에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선한 행위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엡 2:8-10). 특히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의 핵심구절인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의인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과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이중적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즉 칭의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이 가능하지만 믿음은 삶을 동반한다는 것과 삶은 믿음을 더욱 강화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믿음과 삶을 이원화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토저(A. W. Tozer)가 지적했듯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한순간의 의롭다 함을 느끼는 스릴을 즐기고자 하는 반면, 지속적으로 의롭게 사는 데 따르는 불편함을 기꺼이 감내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복음의 본질을 왜곡한 것으로서 교회가 바르게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믿음은 그 안에 수동성과 능동성을 내포하고 있다. 수동성이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 인간 스스로 선을 행하며 분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행위에 자신을 완전히 의존하여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인간적인 노력이나 공로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은 단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전적으로 수용하는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능동적이고 적극적 의지를 동반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의 관계를 통한 인격적 순종의 행위가 사람의 의식적 행위에 표현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선한 행위를 향해 끊임없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의지적 노력이 요구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적극적이고 의지적 순종의 삶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도록 책임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인간 스스로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든지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룰 수 있다는 자율주의(autonomy)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구원이 가능하고, 이러한 책임을 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잘못된 결과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선한 삶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길이며 교회가 새롭게 거듭나는 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