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410
이중표 목사 (딤후 4:9-21)
오늘 읽어드린 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의 옥중에서 순교직전에 그의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이요. 제자요.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어서 속히 내게 오라 겨울 전에 오라” 이렇게 간절히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겨울 전에 오라고 간절히 호소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겨울에는 지중해가 항해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만약에 이 겨울에 오지 아니하면 “내가 네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다.”하는 그러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형을 받고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옥중에서 순교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순교하기 전에 생각나는 사람도 많고, 보고 싶은 사람도 많고, 또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그의 육체적으로도 겨울 추위의 체감을 느끼면서 인생의 겨울을 느끼고 있습니다. 바울이 옥중에 서 쓴 서신 가운데 먼저 쓴 서신은 옥중서신이라고 해서 예배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가 있고, 또 나중에 쓴 서신은 디모데전,후서로서 목회자에게 보내는 개인적인 목회서신이 있습니다. 오늘 여기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는 개인적인 것으로 디모데 개인적으로 보내는 사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목회자로서 애정을 담은 그 동안의 고뇌와 깊은 우정을 담은 그런 편지의 내용입니다. 사실 생각하면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어서 행복한 사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또 하나 그를 생명 걸고 도와주는 동역자들이 곁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사도 바울은 참 행복한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특별히 디모데는 믿음의 아들이고, 그를 너무 사랑하는 그런 인간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는 편지를 보내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다. 그런데 누가만 나와함께 있다.”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자기와 함께 해주는 사람, 이 죽임이라고 하는 인생의 종말이 오기 전에 자기와 끝까지 함께 해주는 사람, 이 사람이 너무 고마운데 사도 바울은 우리가 찬송을 부른 대로 “천국에서 만나보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천국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천국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들과 천국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디모데는 천국에서 만나야할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특별히 여기 11절에 보면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이 누가라고 하는 사람은 사도 바울과 함께 있지만 천국에서 함께 있어야할 사람입니다. 누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의사면서 문학을 가진 그런 지성인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사도 바울을 동행하기 위해서 의사를 포기하고, 주치의로 사도 바울의 건강을 살펴주면서 따라 다니는데 결국 그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위대한 문학자입니다. 성경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의 필체를 가지고, 기록된 책들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으로 우린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누가가 은혜를 받고, 사도 바울이 로마로 호송될 때 지중해에서 파선되어 죽을 고비를 같이 넘기면서 살아남아 바울 곁을 떠나지 않고, 일생을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보낸 편지에도 누가를 사랑 받는 의원 누가라고 했고, 또 평생의 누가와 함께 있으면서 누가의 그 겸손과 온유와 헌신과 그런 인격에 큰 감동을 받았던 것입니다. 누가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돕는 것이 하나님을 돕는 것이고, 사도 바울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사도 바울을 위해주는 것이 곧 주님을 위해 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누가는 철저하게 기도의 생활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는 일생을 기도하면서 은혜를 받아서 그렇게 신비한 책을 남겼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 마음속에 “누가만 나와함께 있느니라” 이 말씀은 천국에서 함께 있을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고마운 사람이 많이 있지만 누군가 내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 참 고마운 사람입니다. 어려울 때 감옥에 있었던 바울 그가 심히 어려울 때 같이 있었던 사람, 또 어려울 때 다 떠나버려 그 슬픔의 마음을 기록한 사람도 있지만 누가, 디모데는 떠나지 않고 있었던 사람으로 그들을 보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사랑하는 교인들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자기 생애를 회상하면서 좋을 때 좋은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어려울 때 같이 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들 주변에 어렵게 된 사람 생각나면 찾아가서, 전화로라도 격려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노년에 외로운 부모님을 잘 찾아 볼보는 그 자녀가 효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저는 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부산 상해교회의 부흥회를 갔을 때에 음성 나환자촌에 가서 부흥회를 하는데 놀라운 사실 하나는 남자들이 문둥병이 들어서 자기 고향을 떠나게 될 때 부인들이 다 따라 나섰습니다. 함께 갔습니다. 왜냐하면 “내 남편 병들면 나도 병들어야지. 내 남편 문둥병 들면 나도 들어야지” 그런 심정을 가지고 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부인들이 같이 산다고 해서 병든 사람 없습니다. 남자만 조금 보기 흉하지 여자는 건강합니다. 그런데 여자가 문둥병 들었을 때 남자가 따라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이 가운데 속으로 부인이 문둥병에 들어서 음성 나환자촌에 간다고 한다면 “나도 따라가야 되겠다” 하는 분들은 속으로 아멘 하십시오. 그리고 부인의 손을 잡아 주십시오. 부인의 손을 잡아 준 사람은 “그 소중한 마음을 가졌다. 당신이 어렵게 되면 나도 함께 해주겠다.” 하는 이 마음이 얼마나 신사적이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자 이겠습니까? 어려울 때 함께 해주는 사람은 천국에서 만나도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좋을 땐 좋고, 나쁠 때는 배신하는 사람은 천국에서 만나기가 껄끄럽습니다. 여기서 지금 사도 바울은 천국을 생각하고,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천국에서 만나기 위해서 모든 허물과 섭섭함을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이 마가라는 사람과 사도 바울은 서로 마음에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이였습니다. 이 마가라고 하는 사람은 원래 마가복음을 쓴 사람인데 부자이고, 바나바의 조카이면서 부잣집 아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마가의 다락방에서 집이 크니까 마가의 다락방을 빌려서 만찬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은혜를 받아서 사도 바울이 1차 복음전도를 나설 때 같이 따라 나섰습니다. 그런데 따라 다녀보니까 낯설고, 산설고, 물설고, 그 험악한 광야 길을 걸어가면서 전도한다는 것이 너무 힘이 들어서 중도에 포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또 은혜를 받아서 제2차 전도에 나섭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네 과거 경력으로 봐서 너는 안 된다” 하고 거절합니다. “너와 동행하지 않는다.” 그런데 마가의 삼촌 바나바가 사정을 합니다. “데리고 갑시다” 끝내 바울의 고집으로 마가를 안 데리고 갑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고 헤어집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고 바울은 다른 제자들과 함께 갑니다. 여기에서 서로 사이가 나빠져서 마가를 마음에 섭섭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죽을 날이 임박할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성경은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면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했습니다. 11절 말씀에 “누가만 나와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마가가 무슨 일로 바울에게 유익이 되겠습니까? 바울이 마가를 데려다가 일을 시키겠습니까? 바울이 마가를 데려다가 부잣집 아들이라고 용돈을 받겠습니까? 무슨 의미에서 “나에게 유익이 되겠느냐” 이것은 천국에 가는데 “천국 가는 나의 길에 마가와 풀어야 내게 유익이 되겠다. 풀지 않고 가면 내게 유익이 안 된다” 그래서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생에 겨울이 오기 전에 찾아 달라는 사람 많습니다. 사도 바울이 노년에 찾아 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여러분들에도 찾아 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모님께서 “나를 좀 찾아와라 내가 외롭다” 하실 지 모릅니다. “어버이 살아 계실 때 섬기기를 다 해라. 지나가는 어버이 애달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치 못할 일뿐일까 하노라” 그 부모님이 섭섭하게 한 맺혀 돌아가시면 내가 천국에서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찾아와 달라 “옛날에 내가 너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았느냐 네가 내가 그렇게 박절하게 할 수 있느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 받은 사람을 찾아서 감사의 뜻을 전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이 설교를 쓰기 전에 이 설교를 하려고 그랬는지 옛날에 45년 전 폐병 걸린 저에게 전도를 해서 교회에 가자고 했던 그 친구를 찾아서 불렀습니다. 정중하게 옛날의 고마운 뜻을 전하고, 후히 대접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내가 대접하겠노라고 얘기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나에게 생명의 은인입니다. 나에게 고맙게 복음을 전해준 친구였습니다.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면서 과거를 회상하면서 “나를 좀 찾아다오. 그때는 내가 좋았지만 지금은 어렵다. 지금 인생에 겨울이 오고 있다. 내 인생의 사업에 겨울이 왔고, 직장에 겨울이 왔고, 찬바람 분다. 낙엽이 지듯 다 떨어져버리고, 내게는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이렇게 하소연하면서 “나를 찾아다오” 하는 사람을 만약에 찾아주지 않으면 “네가 그럴 수 있느냐 너는 참 은혜를 모르는 구나” 그런 섭섭한 마음을 그에게 남겨준다고 한다면 천국에서 만나기가 부끄럽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사도 바울이 “저 마가를 데리고 오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16절에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이 처음 재판을 받을 때에 함께 했었던 사람들이 다 떠나버리고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 대하여 “허물을 돌리지 아니하고, 그들을 용서한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떠날 때 마음을 아프게 하고 떠난 사람, 여러 종류의 상처를 남기고 떠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의 허물도 저희에게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이 사람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나도 그 사람들의 허물을 말하고 싶지 않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면서 나이가 들수록 한가지를 해야 합니다. 남의 허물을 들어내지 말아야 합니다. 좋은 것을 보고 살아도 인생이 짧은데 남의 허물을 보고 산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남의 허물을 말하는 사람은 벌써 남의 허물을 말하려니까 얼굴이 밝지 않습니다. 남의 허물을 보고 사는 사람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끝까지 좋은 것을 보면서 하늘나라에 가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자기가 잘못된 것을 깨달으면 즉시 뉘우치고 사과를 해야 합니다.
제가 며칠 전에 해미 순교지와 제암리 교회를 탐방하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같이 간 집사님, 권사님께서 “목사님을 생각해서 음식을 만들어 왔습니다. 목사님, 드시지요” 또 조금 있다가 와서 “목사님 잡수시지요” 그런데 저는 어렸을 때부터 소식을 해왔기 때문에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식사시간에 사도 한사람이 저에게 말합니다. “목사님, 정성껏 준비해왔는데 같은 것이면 집사님, 나중에 먹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을 해주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듣고 보니까 그 말이 맞습니다. 그래서 제가 집사님을 불러서 “집사님, 용서하소서. 나중에 먹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인사를 즉시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잘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살았지만 그분의 정성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에 제가 그 즉시 사과를 했더니 그 옆에 있던 사도가 “목사님, 목사님은 어쩌면 그렇게 어린아이와 같이 즉시 깨달으면 그것을 바로 행동으로 옮기십니까?” “그래야 저의 마음이 편합니다. 무슨 체면을 세울 것이 있나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교회에서 무슨 체면을 세우고, 한번 잘못을 했어도 고집을 세우고 그럴 것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기 때문에 언제나 자기의 잘못을 남의 마음에 상처가 되고 아픔이 된다면 즉시 풀고 평화를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렸을 때는 공부를 못했어도 일단 결혼을 하고 난 후에는 정중하게 아들에게 사과를 해야합니다. 그리고 아들도 장가를 가서 아들을 낳으면 부인이 있는 가장입니다. 일단 가장의 위치를 생각해서 함부로 말하면 안됩니다. 인격적 관계입니다. 우리는 이제 어느 때든지 인생이 겨울이 오기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보이셨던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목 박혀 원수들이 그를 처형할 때에 당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요. 상처 입는 분은 예수님이신데 “아버지여, 저들이 알지 못하여 그러하오니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 오히려 저들에게 화해를 청하십니다. 스데반이 예수님을 닮아 자기를 처서 머리를 깨뜨리고, 가슴을 부서뜨린 그 원수들에게 “주 예수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왜 그랬습니까? 죽으면서 까지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맺어야만 새 생명의 세계에 자기가 자유를 누린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헨리 나우웬 이라고 하는 영성 학자가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교수도 포기하고, 장애자 촌에 가서 그 사람들을 돌보다 위대한 생을 마쳤기에 성자로 인정받은 사람인데 그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입원을 했다가 회복되었을 때 일입니다. 그가 회복이 되어서 쓴 글이 있는데 “겨울 너머의 세계” 이것은 죽음을 넘는 세계에 대한 글입니다. 그의 글 가운데서 “죽어 가는 사람은 남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풀어줄 아주 특별한 기회를 가지고 있다. 죽어 가는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은 죄책감, 후회와 분노까지 자유를 주는 죽음을 가져와야 한다. 자기가 죽는 사람을 한 맺히게 했다든지, 상처를 주었다든지, 억울하게 하고 내가 끝나버리면 그 사람은 상처, 억울함 때문에 평생에 그 사람을 부자유케 함으로 내가 죽기 전에 그들에게 자유를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죽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세계로 가기 때문에 나도 생명의 자유를 누린다” 이것은 아주 깊은 경지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스데반이 겪은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죽은 후에 영생을 생각하며 살아 왔다. 죽은 후에 천국에 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 안에 생명으로 계신다는 사실을 이 진리를 깨달은 후에는 죽음과 삶은 다른 세계가 아니고, 하나의 세계인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교통사고로 죽음의 고비를 넘겼을 때에 ‘당신의 회복을 축하합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인사는 받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 그 인사가 와 닿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또 하나의 죽음의 골짜기를 향해서 가야 하는 내 세계의 인생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는 별세라고 하는 한국적인 제 사상의 표현을 갖지 않았지만 가장 별세를 죽음과 삶의 세계를 하나로 엮어 실패도 성공도 분리하지 않습니다. 실패도 성공도 하나입니다. 밤과 낮이 같이 있듯이 밤이 와야 낮이 오고, 낮이 와야 밤이 가듯이 이것은 하나의 세계입니다 여러분들이 실패를 할 때 실패가 아닙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성공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 모든 것이 다 이런 경지의 세계로 넘어 가는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천국을 향해서 가는 “천국에서 만나보자” 하는 땅에서부터 천국으로 이어지는 삶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여기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보면 13절에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 오라” 그는 양식이 달랐습니다. 대개 사람들이 늙으면 보약을 먹으려고 애를 씁니다. “어디 좋은 보약 없나” 하면서 녹용, 보약을 많이 먹으면 좋은 줄 아는데 보약을 너무 많이 먹은 사람은 죽을 때 편히 죽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너무 고급 보약만 먹은 사람 제대로 편히 못 갑니다. 무슨 보약을 먹어야 하는가? 하나님 말씀의 보약을 드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먹어야 됩니다. 병원에 가서도 잡지나 여성 주간이나 그런 것을 가지고 가지 마십시오. 혹시 병원에 입원될 때에는 성경을 들고 가십시오.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목사님이 심방가지 않을 줄 알고 잡지를 보고 제가 심방 가서 그런 것을 보면 솔직한 심정으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심방을 가졌는데 어머니는 차를 준비하기 위해서 부엌으로 가셨고, 아이가 있어 아이에게 “네 어머니는 잘 보시는 책을 가져와 보아라” 그런데 이상한 책을 가져옵니다. “아니 네 어머니가 잘 보시는 책 있지 않니?” 하니까 “저희 어머니는 이 책을 잘 보시는데요” 미장원에서 보던 책이었습니다. 제가 이것 말고 잘 보시는 책을 가져오라고 하니까 어디선가 먼지가 부옇게 쌓인 책을 가져옵니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보약으로 잡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마지막 말을 하고 있습니다. 17절 읽겠습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사도 바울이 지금 자기가 열심히 환난과 역경 속에서 복음을 전한 것은 천국에 데리고 가야할 사람들 만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사업에서 만난 사람은 돈 때문에 만납니다. 그러므로 돈 관계가 없으면 끝납니다. 직장에서 만난 사람, 직업으로 만납니다. 그런데 퇴직하면 끝납니다. 학교에서 만난 사람, 공부할 때 만납니다. 공부가 끝나면 각각 다 갑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사람들을 만날 때 복음을 전하면서 천국에서 만날 사람으로 “복음 전파를 위해서 내가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만났고, 건져주었는데 결국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천국에 같이 가야할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며칠 전에 어떤 자매님이 “목사님, 저희 남편은 도저히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자매님, 남편이 지옥가면 같이 가십시오. 자매님은 천당 간다고 찬송하고, 남편은 예수님 안 믿는다고 탄식하지 말고 남편을 향해서 ‘당신이 지옥가면 나도 따라 가리다. 부부는 한 몸이니 같이 가리이다’ 그런 마음을 가지면 우리주님께서 자매님을 구원시키기 위하여 남편도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갈 테면 가고 말 테면 마시오. 나는 천당에 갈 테니” 이런 마음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같이 천국으로 가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당신을 지옥에서 내가 끌어내리다” 이런 각오를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성 프랜시스가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어찌 천국에서 혼자 즐길 수 있사오리까 저들이 지옥에서 구원받을 수 없거들랑 나를 지옥에서 저들을 구원해 주시고, 함께 고통을 겪게 하여 주옵소서” 그런 심정을 가지고 매달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 또 내가 인생의 겨울이 되기 전에 내 삶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바르게 세우고 가야할 그 문제 오늘 찬바람이 불고, 겨울이 올 때, 나무에서 낙엽이 떨어집니다. 낙엽이 떨어질 때 여러분 머리 속에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찬바람에 낙엽이 떨어집니까? 나무가 낙엽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입니까?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어느 편입니까? 낙엽이 떨어지는 것입니까? 나무가 버리는 것입니까? 낙엽이 찬바람에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가 겨울 너머의 세계를 위하여, 겨울을 맞이하기 위해서 버립니다. 왜냐하면 나무가 겨울을 맞이하기 위한 것입니다.
인생의 겨울을 우리가 맞이하기 위해서 다 버려야만 나의 인생은 또 하나의 봄의 생명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 움켜지고 겨울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겨울은 또 하나의 세계를 맞이하는 신비의 세계입니다. 내 인생의 겨울 이것은 죽음이 아닙니다. 또 하나의 세계를 맞이하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끊을 것은 끊고, 청산 할 것은 청산하고 한때 우리에게 맺혀 있던 과거의 모든 것을 다 청산하고, 오직 주님과 나만의 깊은 세계에 들어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