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영 목사 (생명의전화 사이버상담위원장) 2003.09.23 조회 : 326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 여러 가지 실제적인 상담을 하셨다. 여기서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사례들을 연구하고자 한다. 기독교는 개인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무의식적 요소들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기본 입장은 인간은 의식적으로 결단을 내릴 자유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적 인간은 인생을 받아들이는 인간이고 또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라도 사는 것의 가치를 확신하며 자기의 삶을 직시하는 인간이다.

1. 광야의 유혹(눅 4장 1-13절)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려는 인간의 고투(苦鬪)와 보다 낮은 인생에 만족하도록 유혹하는 악마적인 힘은 누가복음 4장 1-13절에서의 예수님의 광야에서의 유혹의 기록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모든 인간이 직면하는 악마적인 유혹을 악마와의 대화 이상으로 생생하게 나타낼 수는 없을 것이다. 광야에서의 예수님의 세 가지 유혹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주치고 또 해답을 내려야 할 기본적인 문제임을 알면, 그것은 예수님이 더욱 넓은 공적인 사역을 수행하기 위한 준비 이상의 것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사람이신 예수님이 자기의 내부에서 지배권을 잡으려는 어떤 힘을 알고, 언제나 엄습해 오는 유혹을 의식적으로 극복함으로써, 자신의 가치체계에 의거하여 인생의 방향을 잡아가는 모양을 그리고 있다.

2. 고독한 삭개오의 용기(눅 19장 1-10절)

삭개오는 흔들리는 자존심을 지키려고 자신의 민족을 내버리고 미움받는 지배자들과 운명을 같이 했다. 그러나 그는 행복하지가 않았다. 예수에게 호기심을 갖고는 있었지만 굳이 그와 직면하려 들지 않고 그저 멀리서 그를 바라보려고만 했다.
주위의 인간과 화해하는 것만이 아니라 신과 화해하여 모든 수준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 한 완전한 변화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의 보다 높은 단계나 예수님의 영적인 갈망, 신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모든 정신요법은 삶의 중요한 영역을 빠뜨리는 것이 되는 것이다.

3. 부자 청년의 방황(막 10장 17-22절)

성경의 기록 속에 나오는 부자 청년은 오늘날의 젊은 기업가다. 오늘날의 우리의 문화 속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인데 성장의 초기 단계에 있는 많은 사람들처럼 그는 이미 신분과 지위, 부와 명성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는 생활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가 없었으며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고 자신의 생애의 사업에 뚜렷한 신념을 찾을 수 없었다.
우리들 중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의미 있는 사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지 못하는 인간이다. 때로 순간적이나마 의미 있는 일을 약간 엿볼 수는 있어도 그것이 실현되기란 힘들다.
삶에는 의미가 있으며 개개인에 있어서 삶의 의미는 특정한 평생의 길을 이룩함으로써 찾아지는 것이다.

4. 진실에 굶주린 사마리아 여인(요 4장 4-27절)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자의 이야기는 내적인 공허 즉 정신적 공백이 생활의 특징이 되어 있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요구는 이 공백을 메우는 일, 말하자면 인생에 개인적인 의미를 발견하는 일에 있다. 인간이 인생의 의미를 확고하게 파악했을 때의 곤란에 대처하는 힘은 무한하다. 흔한 인생경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은 삶의 근거가 된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피하려고 먼 길을 돌아가지만 예수님은 유대에서 곧장 사마리아를 거쳐 갈릴리로 가셨다. 영국의 제임스 1세가 47명의 학자에게 영어로 번역시킨 흠정역 성경(King James Version)은 이 이야기를 그림처럼 아름다운 말을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그는 꼭 사마리아를 거쳐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And He must needs go through Samaria.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이었으므로 꼭 그녀와 만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될 것은 그녀가 자신의 곤경을 솔직하게 토로했을 때 비로소 진실 되게 문제에 직면했다는 사실이다.

5. 마음의 병을 가진 사람(막 2장 2-12절)

중풍으로 다리가 마비된 젊은이의 이야기는 죄의식이 신체기관에 영향을 준다는 좋은 예다. 정신 신체의학의 출현보다도 훨씬 이전에 유대의 사상가들은 신체와 마음과 정신이 본질적인 통일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이미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것들은 상호간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6. 바리새인 시몬의 결점(눅 7장 36-50절)

바리새인 시몬의 이야기는 자기 자신의 현실의 모습과 일치하지 않는 인간을 잘 그리고 있다. 자신만이 올바르며 자기 만족에 취해 있던 그는 인생에서 남을 용서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이 사건 속의 이야기에서 강조되고 있는 사랑에 관해서 거의 아무것도 몰랐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즉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는 말이다. 종교상의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킴으로써 그는 자기실현을 해 왔지만 자신의 정당성만을 추구한 나머지 그의 인생에는 타인이 들어올 여지가 전혀 없었다. 그는 율법으로써 자기 실현을 이룩하려고 했으므로 예수님이나 죄 많은 여자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려고 하지 않았다. 확실히 자기 실현이 인간 실존의 목표라고 단언하는 학파가 있으며 그것은 진실처럼 생각된다. 자기의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는 인간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설리반은 삶의 목표로서의 행복감이란 미해결의 개인문제나 자아가 채워지지 않는 신경질적 요구로 저지되지 않고 자유로운 방향으로 이동되는 긴장이 풀린 상태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긴장이 풀린 상태는 아무리 바란다고 해도 항상 가능할 지 의심스럽다. 긴장이 없는 삶의 추구는 행복의 추구와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목표다. 마음의 평안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얻고자 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다른 것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의미 있는 활동의 부산물로써 얻어지는 것이지 그 자체에 어떤 목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가장 완전한 마음의 평안은 대체로 어떤 일-자기 자신을 자신보다 더 위대한 어떤 것으로 이끄는 듯한 일-이 완성되고 성공한 후에만이 경험할 수 있다. 진정한 마음의 평안은 긴장 없는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긴장할 만한 일을 완성함으로써 얻어진다. 상식과는 반대로 편안하고 즐거운 긴장 없는 상태는 진정한 마음의 평안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실존의 공허라는 욕구 불만을 일으키는 것이다.

7. 베드로의 고백(마 16장 13-19절, 눅 22장 31, 54-62절)

시몬 베드로의 이야기는 극적인 인간 변혁의 이야기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인간에게 끼친 영향에 관한 하나의 감명 깊은 증언이다. 또한 이것은 의미 있는 목적이 인생의 기반이 되는 때에 일어날 수 있는 변화를 증명하는 것이다. 기록의 첫 부분에서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인간으로 묘사되어 있다. 즉 그가 의도하는 것은 언제나 올바르지만 충동적으로 한 말을 절대로 실행할 수 없는, 사람은 좋으나 바보짓을 하는 인간이다. 그는 일찍이 예수님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미리 경고된 것처럼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다. 그것은 압박을 받았을 때에 마음이 변하는 인간의 전형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후 베드로는 사도들의 대변자가 되며 예수님의 가장 친밀한 그룹 속의 주요 멤버로서 예수님 사후에는 지도자로 인정받은 인물이다. 그가 예수님과 처음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 권유했던 말이 그의 인생에 중심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눅 5:4).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은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였으며 안정성을 주었다. 바야흐로 그는 약한 인간에서 강한 인간으로 변했던 것이다. 가치 있는 직분이 뚜렷하게 되면 인생은 변화한다.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체험은 어떻게 하여 한사람의 인간이 그때까지 인식하고 있었던 것보다도 더욱 깊은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일까 하는 것을 나타내는 좋은 예이다. 인생에 있어서 오래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을 언제나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생의 과제를 완수하는 데는 중간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여기셨다. 그분은 자신에게 접해 오는 인간에게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었다. 시몬 베드로에게는 예수의 도전이 긍정이며 희망이었다. 예수와 베드로의 관계는 예수의 베드로의 모든 행위에 대한 전적인 수용이었다. 예수님의 사려 깊은 수용에 의하여 베드로는 지도자의 위치로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우선 수용되어지고 나서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인간을 돕는 일은 끊임없이 이렇게 진전해 간다. 확실히 변화는 도전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도전은 항상 수용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의 인생에서 일어난 근본적인 변화는 자신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보다도 훨씬 위대한 힘에 의지하게 된 것이다. 그의 인간적인 실패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개인적인 실패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에게 부여된 사명의 성취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베드로는 부여된 직분을 완수할 수 있도록 수용되어졌으며 그 직무에 대처함으로써 힘을 얻었고, 자신이 감히 그렇게 되리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아주 강한 인간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수용되어져 있었으므로 가능성 있는 인간으로의 변화를 꾀했던 것이다.

8. 마리아와 마르다의 개성(눅 10장 38-42절)

많은 관심사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궁극의 관심사를 발견하는 것은 매우 의의 있는 일이다. 예수님이 마르다를 조용히 비난한 것은 그녀의 행위가 나빴기 때문이 아니라 마리아 쪽이 보다 올바르기 때문이었다. 마리아는 개인적인 인간관계를 정당하게 우선시켰던 것이다. 그녀는 만남을 ‘업적’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녀는 물질보다도 인간 쪽에 가치를 두었던 것이다. 마르다처럼 명예를 위해서 말하는 것도 중요하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경험적인 가치에 관해서 가장 의미 깊은 개인적인 만남은 보람 있는 일을 부단히 하고 있는 가장 좋은 상태에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마르다가 예수님의 지시에 순종하여 그녀의 역할을 바꾸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한 습관은 용이하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녀는 마리아도 방법이 틀리기는 하지만 손님 접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었을 것이다. 마르다 같은 행동주의자는 영혼과 영혼의 깊은 수준의 만남을 지나쳐 버리기 쉽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마리아를 지지했던 것은 타당한 것이었다. 그는 창조적 가치의 길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다른 인간과의 만남의 체험은 창조적 가치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것이라는 것을 명백히 하였다.

9. 베데스다 연못가의 병자(요 5장 2-15절)

예수님이 베데스다의 병자를 고친 이야기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 중심적인 의의는 병에 대한 신선한 접근에 있다. 일반적으로는 병의 증상에 초점을 맞추지만 예수님은 병에 대한 태도를 중요시했다. 건강의 본질은 신체적 건강이 태생되는 전체로서의 내적 상태와 관계가 있다고 해도 좋다. 이 내적 마음의 상태라고 하는 것은 신체의 상태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며 고뇌에 의존하고 있다. 고뇌 자체가 내적 완전성이나 평안에 기여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고뇌를 피하려고 할 때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고통 속에서 매우 큰 구원이 생겨나올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고뇌도 쾌락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일부이며, 인생에 훨씬 큰 공헌을 한다. 월터 휘트만도 로버트 브라우닝도 고뇌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프랭클도 고뇌에 큰 위치를 부여하였다. 그는 융과 마찬가지로 고뇌를 피하려고 하는 시도를 신경증적 경향으로 보았다.
고뇌와 곤란은 운명이나 죽음과 마찬가지로 인생에 속해 있는 것이다. 이들 중에서 하나만이라도 인생에서 제거한다면 인생의 의미는 없어져 버린다. 곤란이나 죽음, 운명이나 고뇌를 인생에서 제거한다는 것은 인생의 모습이나 형태를 없애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운명이 내리치는 철퇴 밑에서만이 고뇌는 작열하며 인생은 비로소 그 모습과 형태를 얻는 것이다.

10. 봉사하는 사람 예수(요 13장 3-5절, 12-16절)

예수님은 봉사를 하나의 중요한 가르침으로 여기셨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줌으로써, 즉 하나님께 봉사함으로써 그분의 사역의 성격을 분명히 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봉사의 길을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예수님은 봉사를 가장 우선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려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셨다. 그 때 제자들은 그들 사이에서 ‘자기들 사이에서 누가 제일 높은가’(눅 22:24)라는 논쟁을 시작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잘못된 사고방식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
예수님은 잘못된 인생관을 바르게 하는 것에 주의를 돌렸다. 부자 청년이나, 사마리아 여인, 마르다나 시몬 그리고 귀신들린 거라사인이나 제자들에게 인생에서의 그들의 관심을 다른 시점에서 보도록 하는 것이었다.
인생의 궁극의 의미는 인간을 초월한 세계에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을 인간의 관념으로 이해하려 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이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사역도 하나님과의 밀접한 연대로 사람들에게 봉사할 때, 그의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