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춘교수  2003.11.10 조회 : 378  

1. 해묵은 감정을 정화하기 지난 번 글에서 언급한 바 있는 耀부부는 19년 동안 부부생활을 해 오는 동안에 끊임없이 갈등하며 살아왔다. 남편은 아내를 무시하여 아내가 하는 일마다 잔소리하고 아내에게 스트레스를 주었다. 아내는 자기를 무시하는 남편의 흠을 잡으려고 하였으며 남편을 공격하고 미워했다. 그러면서 耀부부는 서로에게 심각한 마음의 상처를 주어왔고 그 상처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잊혀진 것 같았으나 아직도 그들의 심층의 밑바닥에 고스란히 쌓여 있다. 그 상처와 아픔은 보이지 않은 듯 했으나 기회만 있으면 표면으로 떠올라서 분노하게 만들고 갈등하게 만들고 서로를 무시하며 반목하게 만들고 있다. 그들 부부의 마음의 잔 속에는 해묵은 감정의 찌꺼기들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컵에 아무리 좋은 것을 담는다고 하여도 이전에 남아 있는 부정적 인 감정의 찌꺼기들이 그 좋은 것들을 오염시키고 부패시키고 있다. 이들 부부가 진정으로 새로워지기를 원한다면 새로운 어떤 것을 담기 전에 자기들의 잔을 메우고 있는 해묵은 감정들을 깨끗하게 정화시켜야 한다. 考목사에게 있어서도 이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는 여러 가지 주위의 환경들로부터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러는 가운데서 자기의 무능력을 절감하였으며, 자존감의 상처를 입고 자신감을 잃었으며, 자기에게는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는 능력이 남 아 있지 않다고 결론을 내리고 좌절에 빠졌다. 그의 마음의 잔 속에는 환경이 그에게 주었던 스트레스와 그것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낮은 자존감, 자신감 상실, 그리고 그것을 경험하면서 생겨난 마음의 상처들이 쌓여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여 하늘의 사랑과 평안을 준다고 할지라도 그의 마음에 쌓여 있는 해묵은 감정들 이 그것을 오염시키고 부패시켜서 진정한 사랑과 평안을 누릴 수 없게 만든다. 考목사도 耀부부와 마찬가지로 해묵은 감정을 씻어내는 것이 영적인 건강에 이르는 첫 단계가 될 것이다.

해묵은 감정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그 하나는 자기 속에 숨어있는 해묵은 감정을 찾아내어 그것들을 상담자 또는 믿을 수 있는 이웃에게 고백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해묵은 감정들과 거기에 관련된 사건들, 사람들, 생각들, 결과들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이다. 해묵은 감정들은 믿을 수 있는 사람들과 나누면서 정화되기 시작하고, 그런 감정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 용납을 받으며 이해 받으면서 정화되어 간다. 이 과정에서 보상이라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우리 속에 쌓인 부정적인 감정들은 날카로운 무기와 같아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상해를 입힐 수 있다. 이 것을 함께 나누고 상해를 입은 사람들을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고 손해 끼친 것을 갚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혼자서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상담자나 믿음의 이웃들의 도움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 耀부부의 경우나 考목사의 경우라고 할지라도 그들을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여 줄 수 있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된다. 그들이 상담자라는 이름을 가져도 좋고, 목회자이어도 좋고, 친구나 어떤 다른 이름을 가져도 상관이 없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해 묵은 감정들은 믿을 수 있는 이웃의 도움을 받으면서 정화되어 까는 것이다. 해묵은 감정들은 믿을 수 있는 사람들과 나눔을 통해서만은 완전하게 정화될 수 없다. 해묵은 감정들은 그 감정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 그
러나 이 과정에서도 믿음의 이웃이 필요하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이런 믿음의 이웃을 제사장이라고 불러 왔다. 제사장은 두 가지의 일을 한다. 하 나는 사람을 대신하여 그들의 죄와 문제와 위기와 상처들과 아픔들을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치료와 위로를 전달하는 것이다. 제사장은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서서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고 사람들의 죄와 아픔들을 전달한다. 기독교는 종교개혁을 하면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제사장이라고 선언하였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잠재적으로 제사장이라는 뜻이다. 지금 그가 제사장의 일을 하지 않는다 하여도 그는 언제든 지 제사장으로서 일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제사장을 통하여 인간의 고난과 상처들과 죄를 받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제사장을 통하여 치료와 용서와 사랑을 전달한다. 耀부부와 考목사는 자기들 속에 있는 해묵은 감정들과 그것들로 말미암아 생겨난 마음의 상처들을 치료받기 위하여 제사장이 필요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제사장 을 만나서 자기들의 상처와 감정들과 죄와 허물들을 하나님께 고백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의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치료를 받아야 한다.

2. 시각을 교정하기 하나님의 치유의 다음 단계는 시각을 교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해묵은 감정들을 만들어 낸 우리의 사고를 전환하는 것이다. 돼지를 아무리 깨끗하게 씻었다고 하드라 도 그 돼지를 더러운 우리에 집어넣으면 다시 더러워진다. 우리의 내면의 부정적인 감정들과 상처들을 깨끗이 정화하였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사고가 변하지 않으면 또 다시 이전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생겨나고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시각을 교정하는 단계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2장에서 육에 속한 사람과 성령 의 사람 (신령한 자, 고전. 2:15)을 대조하여 말씀하고 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세상의 지혜와 영을 받은 사람으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은 과학적으로 생각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며 합리적인 사고를 한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이다. 성령의 사람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성령의 사람은 자기의 시각에서 판단하지 않고 예수님의 시각에서 세상을 보고 판단을 내린다. 그는 성령께서 가르치는 것을 말하고 행한다. 성령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일을 보고 말하고 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를 만나든지, 또는 어떤 사건 을 당하든지 먼저 거기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께서 거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할 것인지를 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거기에서 하시고자 하는 그 일을 하나님과 함께 행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각을 교정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을 바꾼다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과학적이요 이성적인 시각, 곧 인간의 시각을 예수님의 시각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耀부부의 경우에 남편은 자기 아내가 하는 일들과 아내의 태도 와 아내의 인격을 자기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대로 마음으로 판단하였다. 남편의 시각에서 볼 때에, 그의 아내는 언제든지 덤벙대고, 게으르며, 품위가 모자라며, 칠칠치 못한 행동을 한다. 그러므로 남편은 자기 아내를 무시하고 깎아 내리고 불신하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아내의 시각에서 볼 때에 그의 남편도 마찬가지이다. 자기 남편도 별 것이 아니면서 툭하면 싸잡아 야단이나 치고 자기를 무시하고 주제에 맞지 않은 기대나 하는 자에 불과하다. 그러니 남편을 존중할 수 없고 소중히 여기지 않는 다. 그들 부부는 합리적이요 이성적인 인간의 사고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서로 잔소리하고 무시하고 갈등하고 상처 입히는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육에 속 한 사람의 시각을 버리고 성령의 사람의 시각을 가져야 한다. 그들이 성령을 받아서 성령님이 가르치는 대로 보고 듣고 판단한다면 그들 부부 관계는 전혀 다른 관계가 될 것이다.
예수님은 耀부부를 모두 사랑하신다. 예수님 은 耀부부를 사랑하셔서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 예수님은 耀부부 를 위하여 욕을 먹으면서도 기뻐하였고 피 흘리면서도 흔들리지 않았고 죽으면서도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기의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耀부부가 생명을 얻고 행복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지금도 耀부부를 사랑하셔서 그들의 상처를 치료하시고 죄를 용서하시며 풍성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도울 것이다. 이런 예수님의 시각에 서서 남편이 아내를 보고 아내가 남편을 보면 거기에는 이전과 전혀 다른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게으르고 덤벙대고 어리석은 아내는 사라지고 예수님께 사랑을 받고 존중받는 아내가 나타날 것이다. 아내를 무시하고 잔소리나 하던 남편은 사라지고 예수님께서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사랑하고 존중하는 남편이 거기에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성령님이 거기에 오시기 때문에 육체의 일들은 사라지고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와 같은 성령님의 열매들이 거기에 충만하게 될 것이다. 耀부부의 제사장은 이런 사명을 받고 耀부부에게 파송된 하나님의 사자이다. 耀부 부의 제사장은 耀부부가 가지고 있는 육에 속한 시각이 얼마나 문제를 일으키고 부정 적인 감정을 쌓이게 했는지를 발견하게 도울 것이다. 제사장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 것을 그들에게 소개할 것이다. 제사장은 예수님의 시각을 가지는 것이 무엇임을 밝혀 줄 것이다. 제사장은 그 부부가 성령충만을 받아서 성령님의 열매를 열리게 도울 것이다. 제사장은 거기에 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耀부부를 도울 것이요, 성령의 사람의 시각을 가지고 살게 도울 것이다.

3. 하나님의 치유에 참여하기 오늘의 하나님의 치유는 교회와 믿음의 사람을 통한 치유이다. 하나님은 사람들 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치유하신다. 그러나 이 말은 사람의 치유가 곧 하나님의 치유라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을 통하여 사람들을 치유하시지만 사람들에게 만 맡기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치유 속에 임하여서 치유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인간의 치유를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말은 아니다. 인간이 주연이고 하나 님이 조연이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치료하시고 사람들에게 풍성한 생명의 삶을 선물로 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이를 위하여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고난을 받게 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구하기 전에 먼저 인간을 구원하는 일을 시작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인간을 치유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은 직접 자기의 손으로 사람들을 치료하시지 않고 사람들의 손을 빌려서 사람들을 치료하신다. 그러므로 치료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부름 받은 사역자들이다. 이런 하나님의 치유는 어떻게 사람들에게 나타나는가? 이것은 씨뿌리는 농부와 싹을 나게 하시고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에 비하여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농부는 씨에 싹을 나게 할 수 없지만 그러나 씨를 심을 수 있다. 하나님은 씨를 심지 않지만 농부들이 심은 씨에 싹이 나게 하신다. 곡식을 가꾸는 일은 농부가 하지만 하나님은 곡식을 자라나게 하시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신다. 농부와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일한다. 농부가 일할 때에 하나님께서 농부가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신다. 하나님은 농부가 하는 일 속에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 농부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일 속에 임하여 역사할 줄 알기 때문에 열심히 심고 가꾼다. 사람들을 치유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을 직접 찾아와서 그들을 고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상처 입은 사람들을 찾아갈 때에 함께 찾아가시며, 사람들이 상처 입은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자리에 함께 계시면서 역사 하신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병든 자를 위하여 일할 때에 거기 오셔서 하늘의 신비를 베푸시며 생명을 선물하신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치유의 사역 속에 임하여서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그 일을 행하신다. 이것은 눈이 어두워진 사울이 유다의 집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아나니아를 억지로 거기에 보내셔서 사울에게 안수하게 하시고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손을 얹고 예수님을 증거할 때에 아나니아가 다시 보게 된 것과 같다. 사울은 인간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있다. 사울은 인간 아나니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기도할 때에 다시 보게 되었다. 아나니아의 치료 속에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아나니아가 할 수 없는 그것을 행하셨다. 사울을 치료하는 것은 아 나니아의 뜻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계획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나니아에게 직접 안수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믿음의 사람 아나니아를 보내어서 그가 안수하고 기도할 때에 거기에 임하셔서 사울을 치료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치료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의 손을 통하여 치료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기의 치료에 참여하기를 원하신다. 선한 농부 하나님은 심고 가꾸는 일을 사람들에게 위임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기의 치료 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하신다. 어떤 치유의 사건에서도 인간의 참여는 필수적이다. 위에 언급한 考목사의 경우에 하나님은 여러 가지 신비한 일을 보여서 考목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신비한 일들이 考목사의 병을 치료한 것은 아니다. 考목사는 하나님의 치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인 제사장들을 만나서 함께 아픔을 나누었다. 그들의 기도와 말씀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상담을 받고 도움을 받았다. 개인상담과 집단상담, 기도 와 예배, 교육과 섬김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였다.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하나님은 그곳에 임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하나님의 치유는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