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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영 교수 2004.01.18 조회 : 352
누구에게나 첫 번째라는 것은 색다른 인상과 특별한 의미를 남긴다. 처음 학교에 가던 날이라든지, 첫 사랑, 처음 방문한 곳, 처음 먹어본 색다른 음식까지도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이다. 짧지만 나의 상담 여정에서도 처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만남이 내 기억에 남아있다.
나의 첫 번째 내담자는 11살 미국 조지아에 사는 흑인 소년이었다. JS(약자)를 만난 곳은 미국 남부 조지아 주립 정신병원의 아동담당구역이었는데 이곳은 12살 미만의 아동만을 환자로 받아들이는 곳이다. 나는 이때 사회사업인턴으로 이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고 JS는 내가 오기 이미 오래 전부터 이 병원에 수용되어 있었다. JS는 기질적 손상증후군으로 판단된 병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행동이나 말은 매우 거칠고 험해서 다루기 어려운 환자로 알려져 있었다. JS의 기질적 손상은 이미 그의 생명의 시작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의사들은 판단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JS를 임신했을 때 이미 자궁암을 가지고 있었던 탓으로 암 덩어리와 태아가 함께 자궁에서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JS를 낳고 어머니는 얼마를 함께 살았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그의 아버지를 떠나버렸고, 트럭 운전사였던 JS의 아버지가 JS를 돌보며 JS가 입원해 있는 동안에는 가끔 병원에도 방문을 했다. 그의 가족은 조지아의 먼 남쪽 시골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JS와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적었다. 그의 몸은 11살이었지만 정신 연령은 그보다 무척 떨어졌고, 그는 누구와 상호작용을 쉽게 하지 못했다. 그의 심한 남부 사투리는 다른 병원직원들도 알아듣기 어려운 정도였는데, 나는 이제 막 수련을 시작한 애송이에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한국인 여성으로 그의 말을 알아듣기가 무척 어려웠다.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의 대부분은 그 병원 안에 있는 놀이치료실에서 게임을 하거나 놀이를 하면서 보냈다. 그 병원에서 놀이터는 야외에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허락이 있어야 나갈 수 있었는데 JS는 항상 가장 높은 단계의 경계환자로 분류되어 있어서 밖에 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처음으로 그를 만났을 때 기억나는 것은 얼굴과 몸이 까만데 눈만 반짝반짝하던 그의 모습이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한 야생동물과 같다고나 할까. JS와의 만남이 계속되었고 별로 상담이라는 느낌 없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시간을 때우곤 했다. 그래도 꾸준히 그를 병동으로부터 데려와서 놀이치료실에 들어가면 그는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장난감이나 놀이기구를 가지고 놀면서 그 시간을 즐거워했다. 가끔 병동을 지나다보면 그의 폭발적 행위 때문에 독방에 갇혀있거나, 방에 남아있어야 하는 JS를 보곤 했다. 그럴 때면 JS는 나를 알아보고 유일하게 병원에서 자기에게 가까운 사람으로 생각했던지 안타깝게 호소하는 눈길을 보내곤 했다.
어느 날 JS가 병동에서 사라져서 찾는 소동이 벌어졌다. 아마 어느 직원이 JS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그는 폭풍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지하통로로 달아나 버렸던 것이다. 그 통로는 병원의 각 구역을 연결하는 여러 통로가 있어서 잘못 길을 잃어버리면 찾기가 무척 어려운 곳이었다. 직원들이 나에게 알려와서 함께 JS를 찾으려고 한참 지하통로를 헤매는데 어딘가에 숨어있던 JS가 내 목소리를 듣고는 뛰어나왔다. 나는 그를 해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 나의 존재의 의미를 JS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것만 같았는데 그래도 내 마음은 전달되었던 것 같다. 그는 나를 신뢰했고, 또 나를 따라주었다. 그 일은 내 기억 속에 오래 남아있다.
JS는 아마 평생 병원이나 수용소와 같은 곳에서 살아가야 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을 것이다. 인간의 가치가 생산과 소비의 규모로 측정되는 사회 속에서 아무런 가치 없는 의존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괴롭고 슬픈 일일까. 생각해보면 JS는 인간의 모든 고통, 슬픔, 외로움과 절망을 한 몸에 담고 살아가는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어하고, 또 사랑에 반응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나름대로 인간의 가치를 색다르게 제시하고 있는 존재이다.
상담에서 어떤 때는 무엇을 해야하나, 어떻게 해야하나 막막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JS를 떠올리면서, 함께 있어주는 것,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는 것, 그리고 관심과 존중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인간적 끈으로 묶여진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괴로움과 슬픔, 외로움은 인간으로 살아가는 조건들이다. 이것을 통해 사랑을 알게되고 함께 있음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상담도 이런 맥락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으리라고 보며, 누군가의 곁에서 그와 함께 있는 것, 그와 함께 고민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