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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교수 2004.02.23 조회 : 409
인간의 심리 가운데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부분인 무의식을 탐색하는 정신분석을 창안해 낸 프로이드는 무의식은 자기 자신의 죽음을 알지 못한다고 보았다. 정신분석가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기독교적 죄론(罪論)에 상응하는 인간의 죄악과 불행의 씨앗에 대한 이론을 여기 이 부근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부인하면서 육신의 쾌락을 얻기 위한 쉼 없는 씨름을 계속한다. 보다 큰 만족과 쾌락의 맛을 보는 것이 도리어 죽음을 재촉하는 일임을 알지 못한 채 그 일들을 갈망하고 추구한다. 자기합리화와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 환상을 좇아 쾌락경험의 축적을 위하여 생명 에너지를 허비하고 만다.
칼 G. 융은 사람이 진정한 성숙에 이르기 위하여 서른 살쯤 되어 중년기의 문턱에 이르게 될 때 다음의 두 가지를 준비해야 한다고 하였다. 하나는 은퇴 후에 할 일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죽음을 맞을 준비이다. 새로운 한 해를 희망차게 시작하는 마당에 무슨 죽음에 대한 넋두리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으나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고 깊이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죽음을 명상하는 것보다 진지하고 가치 있는 행위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 칼럼을 시작하는 계미년 벽두에 세계적으로 많은 독자들을 울리고 감동시켰다는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원제: Tuesdays with Morrie: an Old Man, a Young Man, and Life''s Greatest Lesson)」(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한 권을 손에 쥐고 무수한 독자들 대열에 함께 서서 나 자신에게 의미 있었던 사람들을 회상하게 되었다. 그들을 나의 삶으로부터 떠나보낼 때 겪었던 슬픔이 가져오는 눈물과 함께 아려오는 가슴으로 아파했다. 추억 어린 만남과 사랑과 죽음이 주는 허전한 느낌들로 몸서리쳤다. 신경체계가 무너져 결국은 온몸이 굳어지는 병인 루게릭 병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브렌 다이스 대학의 사회학교수인 모리 슈와츠 박사는 오래 전 캠퍼스를 떠났으나 스승의 소식을 듣고 다시 찾아 온 사랑하는 제자 미치와 함께 그들이 명명한 바 ''마지막 논문''을 쓴다. 인생의 의미를 서로 이야기하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는 프로젝트였다. 발끝부터 시작하여 폐까지 굳어지면 죽게되는 병과 씨름해야 하는 몸을 가지고 도피할 수도 없는 죽음을 굳이 피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죽음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을 인정하는 용기를 갖는다. 스승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는 아픔을 깊이 느끼면서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잃지 않는 의연함을 지니고 "끝까지 스승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스승이 채택한 전략은 자신에게 밀려오는 죽음을 자신의 삶에 온전히 스며들게(penetrate)하고 그런 후에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을 떠나보내는 것이었다. 죽음이 주는 공포와 외로움,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야 하는 상실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경험한다. 스승의 표현에 의하면 죽음과 상실, 외로움과 소외감등이 경험을 통해 ''자신을 뚫고 지나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벗어남(detachment)을 말한다.
인생의 고통스러운 경험이 어떤 것이든지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두려움과 근심 때문에 피해 달아나는 것이 아니다. 생에 집착하려 하거나 소유하기보다 그 모든 것을 품어주는(to embrace) 수용의 태도에서 얻을 수 있다.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모리의 한 마디 한 마디의 이야기와 철학이 등장하면 무릎을 치거나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해하고, 때로는 모리가 울면 함께 눈물을 흘렸다. 책을 읽었다고 말하기보다 책의 주인공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슬플 때 안아주고 기쁠 때 얼싸안았다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린다. 복잡하고 분주한 일정에 엉켜버린 삶으로 지쳐 있는 몸과 마음에 쉼을 주고 헌데를 쓰다듬고 약을 바르고 붕대로 감싸주는 시간이었다. 인생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은 퍼즐게임을 푸는 것과 같다. 안 풀리다가 어느 한 순간 하나의 조각을 맞추게 되면 갑자기 모양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아픔의 경험과 자신들이 맞이해야 하는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몹쓸 병으로 죽음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삶의 형태인 죽음을 경험함으로 지금껏 발견하지 못했던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스스로 묻게 되는 질문이 있다. "사람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겪었던 모든 경험들을 회상하며 참된 가치와 의미들은 가질 수 있게 되는가? 살면서 겪었던 분노, 절망, 좌절, 미움, 고통, 초조와 불안감 모든 것을 떨쳐 버리지 못하였던 것은 모든 것을 손에 쥐려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죽음 앞에 보다 더 단순하게 그 모든 것들을 놓아버리고 홀가분해져야 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