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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교수
가족들과 함께 보내기 위하여 출국을 서둘렀던 지난 7월 초에 동료 교수들과 영화를 보았다. 보고 싶었던 것은 시간이 맞지를 않아 볼 수 있는 영화를 고른 것이 『스파이더 맨 II』였다. 첫 편을 보지 않고도 줄거리가 연결될까 염려했지만 기우였다.
흥행을 중시하는 최근 영화들은 속편(sequel)만 보아도 볼만하다. 전편을 보지 않은 채 봐도 영화의 흐름을 적당히 따라 잡을 수 있도록 제작하는 모양이다. 만화를 기초로 리메이크한 것이지만 아동들만의 영화가 아니라 가족들과 함께 즐기도록 만든 영화였다. 아이들을 빙자하여 어른들도 즐길 수 있는 영화! 조금 더 포용적인 표현을 쓴다면, 아이들과 함께 어른들이 가족간의 추억거리를 만들 수 있는 영화이다. 이 즈음에 밝혀 둘 것은 이 칼럼은 아무런 사심 없이 쓰는 글이다.
마음속에 깊은 인상을 주었던 장면 하나를 고른다면 그것은 주인공이 자기의 스파이더 맨 아이덴티티를 버리고 나서 홀가분해 하는 장면이었다. 자신이 엄청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스파이더 맨 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살아가지만 자신의 문제는 잘 해결하지 못하는 얼간이 같은 사람이다.
일이면 일, 연애면 연애, 가족과의 애틋한 삶이면 삶 어느 것 한 가지 제대로 할 줄 알고 되는 것이 없는 친구이다. 한심하기 그지없는 평범한 실수투성이의 보통 사람이다. 그러나 스파이더 맨 으로서 그는 어려운 일들을 나서서 해결한다. 그 도시의 경찰관과 소방관들을 돕는 손길이요, 흉악범들에게 피해를 당하는 시민들에게 구세주와 같은 존재이다.
일 하다가 친구 아버지를 죽인 것(전편을 보아야 알 수 있는 이야기였다)과 사랑하는 여인을 마음놓고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 삶의 깊은 상처요 고통이었다. 자기의 정체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이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스파이더 맨 아이덴티티를 포기하며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살아가는 삶은 아름답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기쁨과 삶의 의미를 불러 일으켜주고 위로와 위안을 나누려는 사람들은 모두가 상담가이다.
미국에 왔으니 여기의 한 단면을 소개해야겠다. 뉴저지에 위치한 한 이민 교회에는 한 때 유학생들이 특히 많이 출석하는 교회였다. 교인들의 대다수가 자신들도 유학 또는 취업이민으로 와서 미국시민이 되어 살아가고 있었다. 자신들의 옛 유학시절의 애환을 추억하는 그들은 갓 온 유학생들이 오면 김치도 퍼다 주고 자동차도 태워주고 온갖 궂은일을 해주곤 했다. 나누는 삶을 살았고 함께 그들과 울고 웃었다.
하지만, 한 해 두 해, 혹은 몇 달간 연수와 학위 과정을 끝내고 떠나는 학생들이 뒤도 안돌아보고 가는 모습에 적지 않은 상처를 받은 교인들은 이제는 어느 누구가 처음 교회를 찾아도 자신도 모르게 정과 관심주기를 두려워하였다. 준 사랑에 자신이 상처를 받는 것이었다.
사랑의 상처를 두려워하면 할수록 사랑의 도움은 사라진다. 상처가 두려워 나누는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에게 잠간의 위안과 휴식은 있으나 자기정체성을 포기하고 몸을 지탱하는 거미줄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스파이더 맨이 되고 만다.
독자들에게 던지는 도움주다 받는 상처에 관한 두 개의 질문이 있다.
“내게 주어진 능력을 통하여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주다가 상처를 입을 것인가?”
“상처가 두려워 나의 능력을 파묻어 둔 채 도움도 주지 않고 받지도 않고 살아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