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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명수 교수
신자의 신실한 신앙 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기도가 빠지지 않을 것이다. 이 기도를 외형적으로 보면 소리내어 하는 구송기도, 마음속으로 드리는 묵도가 있다. 내용을 중심으로 보면 중보기도, 통성기도, 탄원기도, 참회기도, 방언기도, 예언기도, 관상기도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기도를 기독교 전통에는 관상기도라고 여겨 왔다.
관상(觀想)기도 (contemplative prayer)는 구교와 동방교회, 개신교의 일부에서 실천되고 있다. 이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이 주도적으로 시작은 하지만, 주님과 하나되어 그 분 안에 머무르게 되면, 인간의 주도적 의지는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신자의 영혼 속에서 주도적으로 역사하신다. 필자는 이런 기도로 유지되어 가는 영성에 관심을 갖고 이해를 넓혀 가던 중, 오늘 다루고져 하는 토마스 키딩의 글을 접하면서 관상기도를 직접적으로 실천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키딩의 글을 통해 접하고 실천한 관상 기도는 필자에게 낯설지 않았다. 외면적으로 동양에서 오랫동안 행해온 좌선이나 명상과 비슷해서인가 보다. 키딩의 쉽고도 친절한 안내로 어렵지 않게 관상기도의 맛을 보게 되어 필자의 영성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회보에 키딩의 관상기도의 이해를 소개하여, 독자들의 영성 생활의 성숙과 발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램을 갖고 이 글을 쓴다. 더불어 독자의 직접적인 실천과 수련의 결과에 대한 경험담을 기다리면서....
기독교 영성사를 보면, 관상기도에 대한 이해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리 하였음을 보게 된다. 예를 들면, 동방교회에서는 그리스도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예수의 기를 쉬임없이 기도함으로 종국에는 하느님과 연합하고져 하였다. 이를 통해, 자신이 신성화(deification)되어 가는 것을 관상기도의 최고 수준과 궁극적 목적으로 삼았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주도적으로 기도의 수련을 통해 성화에 이르며 또 자신의 영이 하느님과 일치코져 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 신자의 삶이 점점 주님의 모습으로 닮고져 하였다.
이에 비해 서방교회의 전통에서는 다른 양상을 띄고 있다. 서방교회의 관상기도 이해가 지역의 넓음과 오랜 시기로 인해 한마디로 요약 정리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럼에도 중세 시대의 초반에 서방교회를 대표하는 인물인, 대 그레고리 (Gregory the Great, 540-604)의 관상기도 이해를 들어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관상기도란 하나님의 환상 (vision)을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류의 기도를 觀想기도, 즉 상을 보는 기도라고 번역하여 사용해오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키딩의 관상기도 이해는 동방교회에 가깝게 느껴진다. 그의 관상기도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어 주께서 그 안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내면을 열린 자세로서 하느님께 보여드리고, 성령께서 인간의 심령에 내주하시어 그 분이 하시고져 하시는 일을 하도록 한다. 이 영역에로 들어가는 것은 인간의 의지적 관할의 영역을 벗어나, 미지의 세계에 자신을 내맡기는 대단한 모험을 의미하기에,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믿음이 기본적으로 요청된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순수한 믿음이 없이는 나 자신을 열어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로 열어 놓지 못하기 때문이
다. 이렇게 순수한 믿음 가운데 자신을 열어 하나님께 나아가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다린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고 우리는 그 기도에 동의하는 상태를 전통적으로 관상 (contemplation)이라고 불렀다 (로마서 8:27-28).
키딩은 관상기도와 관상 생활과 구분한다. 전자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상태로 이끌어주는 일련의 경험이라면, 후자는 하나님과 일치를 이룬 그 상태 자체를 의미하며, 이 속에서 기도와 행동이 성령에 의해 움직인다. 이 말은 관상기도를 통해서 여러 기도 경험들을 한다고 해도, 그 열매는 관상생활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즉, 관상기도는 자신 만의 개인적인 영역에서 기도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기도의 열매는 일상의 삶 속인 관상생활에서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래서 키딩은 일상생활에서 ... 큰 평화와 겸손과 사랑의 존재 여부가 이 기도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라고 말한다 (167쪽).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관상 기도의 경험이 세속 속의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남으로, 삶이 기도가 되고 기도가 삶이 되는 생활을 지향한다. 행동과 기도가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통전적으로 조화함으로 통합된다.
그런데, 관상 기도 이해에 몇가지 고려할 사항이 있다. 첫째, 이 기도는 내적 침묵으로부터 시작된다. 관상 기도는 어떤 바램이나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 보다는 생각 자체를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을 벗어나서 텅 빈채로 하나님께 자신을 열어드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의식을 거부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내버려 두어, 그 너머에 있는 상태로 나아가고져 한다. 키딩은 의식 너머의 상태에 이르고 거기에 머무는 데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를 부잣집에 입양된 아이를 적응시키려고 가르치는 능숙한 가정부 란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새 집에 입양된 아이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능숙한 가정부는 서두르지 않고 사랑으로 친절하게 아이를 가르치기도 하고 격려도 하면서 새 삶으로 인도한다. 그래서 키딩은 관상기도의 수련을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교육이라고 부른다.
둘째, 관상기도란 어떤 기도의 기술이나 전략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인격적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되는 역동적 과정이다. 관상기도에 이르는 절차나 기술들이 도움이 되는 면이 있겠으나, 그것보다는 보다 근본적으로 기도자가 하나님과의 인격적 신뢰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기도 생활에 힘쓰는 자세가 무엇보다 요구된다. 기도의 체험과 결과에 대한 관심보다는 믿음과 신뢰 가운데에 있음이 우선한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관상기도는 세속의 신자들에게 절실히 요청된다. 전통적으로 관상기도는 수도원에서 수도하는 수도사들의 전유물로 여기어 왔다. 그러나 키딩은 세속 속의 신앙공동체가 진정한 관상기도의 실천 장소여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도원의 핵심은 따로 떨어진 수도원의 외부적 구조에 있지 않고, 그 내면적 상태인 관상기도에 있기 때문이다 (47-8쪽). 그래서 진정한 수도 생활의 실천에 있어 중요한 관상기도는 수도원이나 세속 속의 신자들 누구에게도 문이 열려 있어야 한다. 특별히 세속 속의 평신도와 신앙 공동체들에게는 관상기도가 더욱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세속 속의 유혹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적 필요때문에 키딩은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 관상기도의 세계로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실천적 안내서를 저술하였다. 그는 어렵다고 여겨졌던 관상기도에 이르는 장애를 줄이려고 향심기도 (Centering Prayer)란 이름으로 발전시켰다. 키딩은 향심기도를 관상기도에 이르는 사다리의 맨 밑에 있는 제일 첫 번째 다리일 뿐 만아니라, 관상의 세계로 쉽게 인도하는 매우 좋은 길이며 유일한 길이라고 평가한다. 그래서 향심기도는 수도 영성의 정수의 하나라고 까지 말한다. 필자가 향심 기도를 몸소 실천하고 느낀 바에 의하면, 향심 기도는 기도의 방법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기도라고 하는 사실이다.
향심기도의 구체적인 실천에 대해서는 직접 키딩의 책자를 참고해야 할 것이나,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간략하게 소개한다. 기도자는 조용한 장소와 시간을 마련한 후, 편한 자세를 취하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 마음 속에 떠오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조용히 바라보며 저절로 사라지길 기다린다. 그러나 계속해서 생각이 떠오르거나 졸음이 올 경우에 성스런 이름이나 거룩한 단어를 마음 속으로 한 두 번 불러, 마음 속의 생각들에서 마음이 침묵가운데 계속 있기를 지향한다. 이런 과정을 정해진 시간 동안 계속 반복한다. 향심기도가 관상기도의 효과가 있기 위해서는 키딩의 경험에 의하면 20 - 25분 정도를 하루 두 번 하기를 권한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기도하는 중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에 신경이 쓰여 깊은 기도에 들어가기에 방해가 되곤했다. 그래서 자명종 시계나 예정된 시간이 지나면 음악이 나오도록 테이프를 틀어 놓고 기도에 들어가는 방법을 권하고 싶다. 음악이 끝나면 1-2분 정도 침묵을 지키다가 눈을 뜬다.
향심기도는 아주 성서적이고 초대 교회전통에 닿아 있다. 일세기 초대 교회는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즉 성서를 읽되 성서가 말하는 바를 듣고져 했다. 이것은 3단계가 있는데, 첫째 단계는 성서구절을 읽으면서 묵상하고 (meditatio), 둘째 단계는 읽고 묵상한 내용에 응답하고 (oratorio), 마침내는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의 쉼 (contemplatio)으로 옮겨 갔다. 향심기도는 거룩한 독서의 마지막 단계의 하느님 안에서 쉼에 해당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성서를 사랑하고 애독하는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성서를 읽음과 함께 향심기도를 사용하면 많은 영성적 도움이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키딩은 향심기도가 단순히 관상기도에로 인도하는 역할만 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는 자신의 후속 저서인 <사랑에의 초대>와 <하나님과의 친밀관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향심기도를 통하여 심령 속의 상처가 치유되었다는 간증들과 그 근거들을 다루고 있다. 즉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잠재하여 의식치 못하는 상처의 기억들이 향심기도를 통해 의식 속으로 떠올라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신자에게 심리적, 영적 성숙에 기여함을 발견하였다.
이 글을 읽는 신실한 신앙 생활을 염원하는 모든 신자들이 향심 기도를 통해 주님과 교통하는 관상생활의 경지에 이르러, 기도와 세상속의 활동이 서로 조화을 이루는 진솔한 영성생활을 영위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