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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영목사 (부천제일교회)
지금 강원도 양양 남대천에는 연어 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미국의 시애틀에는 물고기 사다리란 관광 명소가 있다고 합니다. 산란기를 맞아 바다에서 호수로 회귀하는 연어를 위해 항구 위 갑문 한 쪽은 터놓았다고 합니다. 이 곳에 물고기 사다리를 만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 벽면을 유리로 해 두어서 거센 물살 을 필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 떼를 상세히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연어는 알에서 깨어난 뒤 석 달이 지나 4-5㎝로 자라면 민물에서 바다로 나간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3-6년 후 40-85㎝까지 자라면 산란을 위해 자신이 태어난 모천으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길고 긴 여행 끝에 마침내 모천에 이르면 상류로 가기 위해 물살을 거슬러 오르기 위해 사투를 벌한다고 합니다. 때로는 3m 이상 되는 폭포를 뛰어 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하루 14㎞ 헤엄칠 때는 먹이조차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드디어 모천에 이르면 1m 되는 맑은 물 속에 자갈 깔린 곳에 구멍을 만들어 알을 낳습니다. 어미는 알을 낳자마자 기진맥진해서 죽고 만다고 합니다. 수컷은 알 위에 정액을 뿌리고 1주일쯤 지나다 죽고 만다고 합니다. 가야할 곳을 꼭 가는 물고기 여행을 보면서 배워야 할 바가 크다고 봅니다.
한서에는 송백지조새한연후라는 글이 있습니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찬 겨울이 와야 그 변함 없는 자태로 가치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옛 사람들은 이러한 뜻을 세워서 사는 삶을 삶이라고 했습니다. 가풍을 이어가고 전통을 유지하며 전승을 살리고 소신대로 도를 세우고 뜻을 세우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였습니다. 시련도 환란도 있었습니다. 장애도 방해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한 번 세운 뜻을 굽히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것을 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현대인의 삶의 모습은 편함만을 추구하는 삶 같아서 사는 것이 사는 것인지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다. 특히 지성인들의 문제가 심각합니다. 글을 많이 씁니다.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비겁합니다. 실제 생활에 있어서 자기의 뜻을 세운 대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말로만 선을 하고 실천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문제는 지도자가 없는 시대입니다. 앞장선 기수가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삶의 방향도 진로도 없이 뿔뿔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재판을 받기 위해 황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황제는 교회개혁 95개조를 취소할 마음이 없느냐?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대로 나아가면 사형언도가 내려질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나의 양심은 하나님 말씀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취소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하는 것은 옳지 못하며 온전치도 못합니다. 여기에 내가 서 있습니다. 나는 다른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습니다."
"HERE I STAND"
"하나님이여 나 여기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지 정치가 어떻게 되든 지 사회가 어떻게 바뀌든지 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 사랑 안에 하나님의 말씀 안에 진리 안에 거기 서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외칩니다. 35절 말씀에 보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 나 칼이랴'' ''누가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우뚝 서 있음을 저지하리요.'' 신앙자가 산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삶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비신앙자는 땅의 것을 찾고 신앙자는 하늘의 것을 찾습니다. 비신앙자는 소원을 이루려고 하고 신앙자는 언약에 매달려 있습니다. 비신앙자는 상황을 보고 결단을 하고 신앙자는 진리에 의하여 결단을 합니다.
윤리에 상황이 있습니까? 상황 윤리란 인간의 기준으로 용서하고 하나님 앞에는 영원히 사함 받지 못하는 죄인으로 남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진리, 그곳에만 우뚝 서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상황은 여호와의 부르심에 응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고향은 우상을 섬기는 차원을 넘어 우상을 만들어 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부르심에 응할 수 없었습니다. 부모를 버리는 것은 동양에서는 금기로 알고 있습니다. 친지를 포기하는 것은 배신 행위입니다. 결코 의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라''라는 여호와의 말씀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습니다. 요셉 은 젊습니다. 정욕의 때입니다. 환경은 완전 범죄가 가능했습니다. 그것도 여인이 먼저 요구해 왔습니다. 노예인 요셉은 여주인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상황을 뛰어 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상황은 기독인답게 살기에는 힘든 상황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해서 주일을 범할 수 없습니다. 매춘부의 숫자가 11만을 넘는다고 해서 음란할 수 없습니다. 생활비가 부족하다고 해서 십일조를 훔칠 수 없습니다. 피곤하다고 해서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없습니다. 가정이 귀하다 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경험했습니다. 그런고로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까지의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가히 초우주적인 행동이였습니다. 29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구원할 자를 미리 예정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신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생성되기 전, 창세 전에 나를 택하셨고 구원시키시기로 예정하셨습니다.
에베소서 1장 4절 말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했습니다. 나를 택하시고 사랑의 예언자로 택하신 것은 우주가 생성되기 전이었습니다. 우주의 창조의 목적은 나를 사랑하시기 위한 도구로서의 창조였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할 자를 부르셨습니다. 28절,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이라고 했습니다. 부른다는 말을 의역하면 사랑의 고백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전율 을 느낄 때가 어느 때입니까? 아마도 처음 사랑의 고백을 들었을 때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부부 중에 누가 먼저 사랑의 고백을 하셨습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결혼합시다."
만약 부인이 먼저 했다면 그 충격적인 행복감을 남편에게 선물한 것입니다. 만약 남편이 먼저 했다면 인생 최대의 감격을 아내에게 선물 한 것입니다. 피조물끼리의 사랑의 고백도 이렇게 전율적인 감동을 느끼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한 사랑의 고백에 영적인 전율이 없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다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을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말로만 우리를 사랑한 것이 아니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사랑하는 독생자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나보다 너를 더 사랑한다''라고 사랑의 고백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내가 너를 사랑한다 는 것은 값싼 사랑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나보다 너를 더욱 사랑한다'', ''나는 죽어야하고 너는 살아야 한다''라는 고백은 값비싼 사랑의 고백입니다. 여러분, 복음의 의역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에 죽어야 하고 너는 나로 하여금 살아야 한다'' 이 언어를 초월한 사랑의 고백을 들었습니까? 그리고 받아들였습니까? 받아 들였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복음을 요약해서 요즘말로 하면 나는 너를 사랑하기에 나는 죽노라 그리고 너는 영생 하라인 것입니다. 언어를 초월한 사랑의 고백적 행위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의롭다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의란 나 자신의 윤리적인 의이거나 영적인 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사랑의 눈으로 보는 견해가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이시기에 우리의 죄는 보이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불쌍함, 처절함, 비참함만 보시고 사랑의 열정이 더 뜨거워졌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이 모든 조건이 다 구비되어 부족한 것이 없다면 사랑의 나눔이 원활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병들었거나 가난하거나 무지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으면 더욱 사랑은 불타고 열정적이며 적극적이며 헌신적인 것입니다. 사랑 받는 자보다 사랑하는 자가 더 행복합니다. CC, 캠퍼스 커플 중에 이런 사연이 있습니다. 대학 4학년 2학기에 서로 사귀게 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R.O.T.C 훈련을 받았기에 바로 소위로 임관되고 여자 친구는 친구로서 면회 한 번 정도 한 사이였는데 부대에 부임하자마자 사고로 두 다리가 절단되어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비보를 받고 그때서야 비로소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고 더욱더 사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쓴 사랑의 고백에는 나는 오직 당신을 위해 존재케 하려고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심판아래 놓였을 때 하나님의 사랑은 절정에 달았습니다. 그 때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고 나의 죄를 씻기 위해 보혈의 피를 다 소모하시기까지 사랑하셨기에 그는 우리의 죄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셨던 오직 그 흔적만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롭다고 외치시는 것이며 자랑하는 것입니다. 사단에게 자랑하는 것이며 사단에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사단에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의롭다고 확증시켜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일방적입니다. 너무나 하나님은 주관적입니다. 사랑은 객관적일 수 없습니다. 주관적이며 일방적입니다. 그래서 사랑 하 는 사람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면서 객관적으로 권면해 봐야 오히려 결과적으로 사랑을 깨뜨리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영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믿는 자와 구원받은 자의 소망은 천국에 가서 하나님과 함께 영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랑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예정, 소명, 칭의, 영화, 이 구원의 역사를 믿는 바울은 다시 외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있습니다. 나는 이제 하나님이 나는 사랑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런고로 그가 나에게 하시는 모든 일은 사랑입니다. 그리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도 바울의 일생은 고난, 핍박, 역경, 편함, 성공, 행복, 건강, 병약, 삶의 전 영역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니 주신 것이요 전 영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다. 바울은 나의 삶의 전영역은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성취하시기 위한 과정이라고 고백합니다. 8장 28절을 의역하면 나는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삶을 살게 하셔도 모두 사랑이심을 믿습니다. 그러하기에 그는 옥중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사도바울은 결코 그는 땅에 속하여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매달려 사는 사람입니다. 이 인간상이 기독인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결단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개혁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땅에서 하늘로, 상황에서 진리로, 나에게서 하나님에게로 결단해야 합니다. 개혁신앙은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에 의한 ''나''로 고백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상황을 바꾸어 놓는 것에 몰두해 왔습니다. 상황을 바꾸어 주겠다는 약속의 극치가 교회의 역사 중 면죄부 사건입니다.
"연보궤의 바닥에 금전이 떨어지는 순간에 연옥에 있는 영혼이 천국으로 간다라 고 주장 할 수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사람이 연옥의 영혼도 천국에 옮겨 놓을 수 있다고 할 정도면 교회가 상황을 바꾸어 주겠다는 극치라고 보아지지 않습니까? 아직 여기까지는 가지 아니했다고 하더라도 오늘의 교회는 삶의 상황을 바꾸어 놓는 일입니다. 예수님 의 거룩하신 이름을 사용하여 예수님의 뜻에 합당치 않는 많은 오류가 있었습니다. 이제 용기가 필요합니다. 상황이 바뀌기보다 내 자아가 개혁되어야 할 시점에 와있습니다. 지금에 우리의 현실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제적 어려움을 통하여 우리의 개혁을 강요하셨습니다. 한강의 기적과 88올림픽의 홍보, 1500$의 GNP시대에서 200만에 가까운 실업자, 부동산과 금융의 파산, 기업의 도산 등 견디기 힘든 상황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나의 개혁을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극도의 이기심만 창궐하고 부정과 부패, 윤리와 도덕도, 선도 무시한 생활 방식의 추구, 극단적인 자기위주의 역사 해석, 가치관 혼란, 미래를 버린 현 재의 선택, 이런 모습을 보면서 주님은 근심하고 계십니다.
사람의 개혁, 이것은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 우뚝 서는 것입니다.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진리대로 판단하고 선택하여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시대 조류에 따라서 좋은 것이 좋으며 편하고 빠른 열매 만 찾는 사람과 더불어 흘러 갈 수는 없습니다. 배가 항구에 안전하게 정박하려면 닻이 내려져야 하고 밧줄을 부두에 메어 두어야 합니다. 오늘의 사회의 구원은 내 자아가 사회 속에서 흔들림 없이 서 있어야하 고 하나님의 사랑의 메는 줄로 사회가 묶이어 있어야 안정과 질서와 번영이 오래 되는 것이며 이 사회가 은총의 항구에 정박해 있을 수 있습니다.
11월 첫 주 우리는 결단하여야 할 것입니다. 나의 개혁, 이것은 교회의 개혁이요, 오늘 사회의 개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온전히 바로 서 있어야 합니다. 루터가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흔들림이 없는 진리의 자리에 바로 서 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도 하나님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떤 악도 너를 하나님과 분리시킬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환란, 즉 위에서 무거운 것이 짓누르는 것 같고, 곤고, 즉 막다른 골목에서의 답답함, 핍박, 즉 이방사람에게 생명이 노출되어 위험을 당하는 상황이 된다 하더라도 기근에 예수를 믿으며, 직장과 집에서 쫓겨나 광야에서 방황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끊어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개혁의 결단이 있어야 되는 주일입니다. 교회는 개혁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개혁은 나 자신의 신앙의 개혁입니다. 이제 여러분께서 하나님 앞에 참된 신앙자로 설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로 하여금 기수 없는 시대에 기수로 세워 주실 것입니다.
지금 강원도 양양 남대천에는 연어 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미국의 시애틀에는 물고기 사다리란 관광 명소가 있다고 합니다. 산란기를 맞아 바다에서 호수로 회귀하는 연어를 위해 항구 위 갑문 한 쪽은 터놓았다고 합니다. 이 곳에 물고기 사다리를 만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 벽면을 유리로 해 두어서 거센 물살 을 필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 떼를 상세히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연어는 알에서 깨어난 뒤 석 달이 지나 4-5㎝로 자라면 민물에서 바다로 나간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3-6년 후 40-85㎝까지 자라면 산란을 위해 자신이 태어난 모천으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길고 긴 여행 끝에 마침내 모천에 이르면 상류로 가기 위해 물살을 거슬러 오르기 위해 사투를 벌한다고 합니다. 때로는 3m 이상 되는 폭포를 뛰어 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하루 14㎞ 헤엄칠 때는 먹이조차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드디어 모천에 이르면 1m 되는 맑은 물 속에 자갈 깔린 곳에 구멍을 만들어 알을 낳습니다. 어미는 알을 낳자마자 기진맥진해서 죽고 만다고 합니다. 수컷은 알 위에 정액을 뿌리고 1주일쯤 지나다 죽고 만다고 합니다. 가야할 곳을 꼭 가는 물고기 여행을 보면서 배워야 할 바가 크다고 봅니다.
한서에는 송백지조새한연후라는 글이 있습니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찬 겨울이 와야 그 변함 없는 자태로 가치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옛 사람들은 이러한 뜻을 세워서 사는 삶을 삶이라고 했습니다. 가풍을 이어가고 전통을 유지하며 전승을 살리고 소신대로 도를 세우고 뜻을 세우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였습니다. 시련도 환란도 있었습니다. 장애도 방해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한 번 세운 뜻을 굽히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것을 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현대인의 삶의 모습은 편함만을 추구하는 삶 같아서 사는 것이 사는 것인지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다. 특히 지성인들의 문제가 심각합니다. 글을 많이 씁니다.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비겁합니다. 실제 생활에 있어서 자기의 뜻을 세운 대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말로만 선을 하고 실천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문제는 지도자가 없는 시대입니다. 앞장선 기수가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삶의 방향도 진로도 없이 뿔뿔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재판을 받기 위해 황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황제는 교회개혁 95개조를 취소할 마음이 없느냐?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대로 나아가면 사형언도가 내려질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나의 양심은 하나님 말씀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취소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하는 것은 옳지 못하며 온전치도 못합니다. 여기에 내가 서 있습니다. 나는 다른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습니다."
"HERE I STAND"
"하나님이여 나 여기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지 정치가 어떻게 되든 지 사회가 어떻게 바뀌든지 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 사랑 안에 하나님의 말씀 안에 진리 안에 거기 서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외칩니다. 35절 말씀에 보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 나 칼이랴'' ''누가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우뚝 서 있음을 저지하리요.'' 신앙자가 산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삶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비신앙자는 땅의 것을 찾고 신앙자는 하늘의 것을 찾습니다. 비신앙자는 소원을 이루려고 하고 신앙자는 언약에 매달려 있습니다. 비신앙자는 상황을 보고 결단을 하고 신앙자는 진리에 의하여 결단을 합니다.
윤리에 상황이 있습니까? 상황 윤리란 인간의 기준으로 용서하고 하나님 앞에는 영원히 사함 받지 못하는 죄인으로 남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진리, 그곳에만 우뚝 서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상황은 여호와의 부르심에 응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고향은 우상을 섬기는 차원을 넘어 우상을 만들어 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부르심에 응할 수 없었습니다. 부모를 버리는 것은 동양에서는 금기로 알고 있습니다. 친지를 포기하는 것은 배신 행위입니다. 결코 의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라''라는 여호와의 말씀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습니다. 요셉 은 젊습니다. 정욕의 때입니다. 환경은 완전 범죄가 가능했습니다. 그것도 여인이 먼저 요구해 왔습니다. 노예인 요셉은 여주인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상황을 뛰어 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상황은 기독인답게 살기에는 힘든 상황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해서 주일을 범할 수 없습니다. 매춘부의 숫자가 11만을 넘는다고 해서 음란할 수 없습니다. 생활비가 부족하다고 해서 십일조를 훔칠 수 없습니다. 피곤하다고 해서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없습니다. 가정이 귀하다 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경험했습니다. 그런고로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까지의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가히 초우주적인 행동이였습니다. 29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구원할 자를 미리 예정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신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생성되기 전, 창세 전에 나를 택하셨고 구원시키시기로 예정하셨습니다.
에베소서 1장 4절 말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했습니다. 나를 택하시고 사랑의 예언자로 택하신 것은 우주가 생성되기 전이었습니다. 우주의 창조의 목적은 나를 사랑하시기 위한 도구로서의 창조였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할 자를 부르셨습니다. 28절,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이라고 했습니다. 부른다는 말을 의역하면 사랑의 고백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전율 을 느낄 때가 어느 때입니까? 아마도 처음 사랑의 고백을 들었을 때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부부 중에 누가 먼저 사랑의 고백을 하셨습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결혼합시다."
만약 부인이 먼저 했다면 그 충격적인 행복감을 남편에게 선물한 것입니다. 만약 남편이 먼저 했다면 인생 최대의 감격을 아내에게 선물 한 것입니다. 피조물끼리의 사랑의 고백도 이렇게 전율적인 감동을 느끼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한 사랑의 고백에 영적인 전율이 없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다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을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말로만 우리를 사랑한 것이 아니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사랑하는 독생자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나보다 너를 더 사랑한다''라고 사랑의 고백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내가 너를 사랑한다 는 것은 값싼 사랑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나보다 너를 더욱 사랑한다'', ''나는 죽어야하고 너는 살아야 한다''라는 고백은 값비싼 사랑의 고백입니다. 여러분, 복음의 의역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에 죽어야 하고 너는 나로 하여금 살아야 한다'' 이 언어를 초월한 사랑의 고백을 들었습니까? 그리고 받아들였습니까? 받아 들였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복음을 요약해서 요즘말로 하면 나는 너를 사랑하기에 나는 죽노라 그리고 너는 영생 하라인 것입니다. 언어를 초월한 사랑의 고백적 행위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의롭다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의란 나 자신의 윤리적인 의이거나 영적인 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사랑의 눈으로 보는 견해가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이시기에 우리의 죄는 보이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불쌍함, 처절함, 비참함만 보시고 사랑의 열정이 더 뜨거워졌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이 모든 조건이 다 구비되어 부족한 것이 없다면 사랑의 나눔이 원활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병들었거나 가난하거나 무지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으면 더욱 사랑은 불타고 열정적이며 적극적이며 헌신적인 것입니다. 사랑 받는 자보다 사랑하는 자가 더 행복합니다. CC, 캠퍼스 커플 중에 이런 사연이 있습니다. 대학 4학년 2학기에 서로 사귀게 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R.O.T.C 훈련을 받았기에 바로 소위로 임관되고 여자 친구는 친구로서 면회 한 번 정도 한 사이였는데 부대에 부임하자마자 사고로 두 다리가 절단되어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비보를 받고 그때서야 비로소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고 더욱더 사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쓴 사랑의 고백에는 나는 오직 당신을 위해 존재케 하려고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심판아래 놓였을 때 하나님의 사랑은 절정에 달았습니다. 그 때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고 나의 죄를 씻기 위해 보혈의 피를 다 소모하시기까지 사랑하셨기에 그는 우리의 죄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셨던 오직 그 흔적만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롭다고 외치시는 것이며 자랑하는 것입니다. 사단에게 자랑하는 것이며 사단에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사단에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의롭다고 확증시켜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일방적입니다. 너무나 하나님은 주관적입니다. 사랑은 객관적일 수 없습니다. 주관적이며 일방적입니다. 그래서 사랑 하 는 사람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면서 객관적으로 권면해 봐야 오히려 결과적으로 사랑을 깨뜨리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영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믿는 자와 구원받은 자의 소망은 천국에 가서 하나님과 함께 영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랑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예정, 소명, 칭의, 영화, 이 구원의 역사를 믿는 바울은 다시 외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있습니다. 나는 이제 하나님이 나는 사랑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런고로 그가 나에게 하시는 모든 일은 사랑입니다. 그리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도 바울의 일생은 고난, 핍박, 역경, 편함, 성공, 행복, 건강, 병약, 삶의 전 영역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니 주신 것이요 전 영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다. 바울은 나의 삶의 전영역은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성취하시기 위한 과정이라고 고백합니다. 8장 28절을 의역하면 나는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삶을 살게 하셔도 모두 사랑이심을 믿습니다. 그러하기에 그는 옥중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사도바울은 결코 그는 땅에 속하여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매달려 사는 사람입니다. 이 인간상이 기독인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결단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개혁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땅에서 하늘로, 상황에서 진리로, 나에게서 하나님에게로 결단해야 합니다. 개혁신앙은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에 의한 ''나''로 고백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상황을 바꾸어 놓는 것에 몰두해 왔습니다. 상황을 바꾸어 주겠다는 약속의 극치가 교회의 역사 중 면죄부 사건입니다.
"연보궤의 바닥에 금전이 떨어지는 순간에 연옥에 있는 영혼이 천국으로 간다라 고 주장 할 수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사람이 연옥의 영혼도 천국에 옮겨 놓을 수 있다고 할 정도면 교회가 상황을 바꾸어 주겠다는 극치라고 보아지지 않습니까? 아직 여기까지는 가지 아니했다고 하더라도 오늘의 교회는 삶의 상황을 바꾸어 놓는 일입니다. 예수님 의 거룩하신 이름을 사용하여 예수님의 뜻에 합당치 않는 많은 오류가 있었습니다. 이제 용기가 필요합니다. 상황이 바뀌기보다 내 자아가 개혁되어야 할 시점에 와있습니다. 지금에 우리의 현실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제적 어려움을 통하여 우리의 개혁을 강요하셨습니다. 한강의 기적과 88올림픽의 홍보, 1500$의 GNP시대에서 200만에 가까운 실업자, 부동산과 금융의 파산, 기업의 도산 등 견디기 힘든 상황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나의 개혁을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극도의 이기심만 창궐하고 부정과 부패, 윤리와 도덕도, 선도 무시한 생활 방식의 추구, 극단적인 자기위주의 역사 해석, 가치관 혼란, 미래를 버린 현 재의 선택, 이런 모습을 보면서 주님은 근심하고 계십니다.
사람의 개혁, 이것은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 우뚝 서는 것입니다.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진리대로 판단하고 선택하여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시대 조류에 따라서 좋은 것이 좋으며 편하고 빠른 열매 만 찾는 사람과 더불어 흘러 갈 수는 없습니다. 배가 항구에 안전하게 정박하려면 닻이 내려져야 하고 밧줄을 부두에 메어 두어야 합니다. 오늘의 사회의 구원은 내 자아가 사회 속에서 흔들림 없이 서 있어야하 고 하나님의 사랑의 메는 줄로 사회가 묶이어 있어야 안정과 질서와 번영이 오래 되는 것이며 이 사회가 은총의 항구에 정박해 있을 수 있습니다.
11월 첫 주 우리는 결단하여야 할 것입니다. 나의 개혁, 이것은 교회의 개혁이요, 오늘 사회의 개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온전히 바로 서 있어야 합니다. 루터가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흔들림이 없는 진리의 자리에 바로 서 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도 하나님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떤 악도 너를 하나님과 분리시킬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환란, 즉 위에서 무거운 것이 짓누르는 것 같고, 곤고, 즉 막다른 골목에서의 답답함, 핍박, 즉 이방사람에게 생명이 노출되어 위험을 당하는 상황이 된다 하더라도 기근에 예수를 믿으며, 직장과 집에서 쫓겨나 광야에서 방황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끊어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개혁의 결단이 있어야 되는 주일입니다. 교회는 개혁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개혁은 나 자신의 신앙의 개혁입니다. 이제 여러분께서 하나님 앞에 참된 신앙자로 설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로 하여금 기수 없는 시대에 기수로 세워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