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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난 아빠 없으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던 딸이었다. 아빠가 학교에 출근하시려고 양복 입으실 때부터 대문에 지키고 앉아 서럽게 울며 아빠를 못 가게 했던, 아빠 따라 간다고 버스 정류장까지 징징 울며 갔던 나였다. 아빠는 내 낮은 코를 걱정하시면서 빨래집게로 집어주시기도 했다.
그러던 우리 사이가 나빠진 것은 사춘기 무렵. 수학 교사인 아빠와 수학을 제일 싫어하는 난 당연히 대립할 수밖에. 아빠는 내가 창피했는지 "누가 네 아빠 뭐 하시냐고 물으면 시장에서 야채 판다고 해"라고 하셨다. 수학 점수를 불러줄 때마다 난 창피를 당했고 애들은 네 아빠 수학 선생님 맞냐며 놀려댔다. 아빠는 내가 이것저것 물어보면 피곤하다며 피하셨고 아예 대답조차 안 하셔서 상처를 주셨다. 그 후로 난 아빠의 질문에 답하는 것 외에 말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살다가 머리 커진 대학생이 되었고 학교가 멀어 할머니 계신 이태원으로 옮긴지 2년.
어렸을 땐 아빠가 최고인줄 알았는데 철들면서 그게 아님을 깨달았다. 아빠는 키가 작으시고, 사업 실패로 집을 몇 채 날리시고, 늦게 교사가 되어 호봉도 낮았다. 내가 가장 싫어했던 것은 아빠의 술주정이었다. 아빠는 내성적이라 평소에는 거의 표현이 없다가 술만 드시면 꾹꾹 참았던 걸 다 터뜨리셨다. 자는 식구들을 다 깨워서 새벽 2시가 넘도록 한 소리를 또 하고, 또 하고. 아침이 되면 자신이 가족에게 어떻게 했는지 기억 못하셨다. 표현력이 부족한 아빠는 엄마나 할머니, 할아버지와 생긴 문제의 중재자로 꼭 나를 내세우셨다. 아빠의 말을 전하러 갔다가 아빠 대신 싫은 소리를 듣거나 눈물 쏙 빠지게 혼나는 억울함을 당해야 했다. 그럴 때마다 난 아빠가 미웠다. 그래서 점점 더 아빠를 피하게 되었고, 거실에서 재미있게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아빠가 오시면 내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대화의 단절 이후 내게 아빠의 위치는 용돈 주는 사람으로 전락해 버렸다. 어쩌다 입을 열면 용돈 떨어졌다는 말 밖에 .
아빠는 상담교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대학원 공부를 하고 계시는데 리포트 편집을 내게 부탁하셨다. 난 속으 웃었다. 자기 자식 상담도 못 하면서 남의 자식 상담을 하신다니. 요즘 내가 무슨 고민을 하는지 아실까? 학교에 도착해 아빠가 계시는 상담실로 들어갔다. 아빠는 내가 온 게 그렇게 반갑고 기쁘셨는지 밝게 웃으셨다. 그리고 간혹 들어오시는 선생님들에게 딸 자랑을 하셨다. 나는 컴퓨터 앞에서 하루종일 많은 리포트를 세심히 읽으며 편집에 열중했다. 아빠의 리포트 중 자신의 진로 결정 과정에 대해 쓴 것을 보고 난 아빠에 대해 객관적인 눈으로 보게 되었다. 성공하기 위해 애썼지만 실패했고, 그 속에도 좌절하지 않고 가족을 위해 다시 일어난 아빠. 나처럼 수학을 못한 아빠가 사업실패 후 대학원에 들어가 취직이 잘된다고 억지로 선택한 수학과, 그리고 수학 선생님. 당신이 겪으신 그런 시행착오를 학생들은 겪지 않게 도와주고 싶다는 그 맺음말에 내 시선이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남들보다 10년 늦은 교직 생활. 동년배들은 교장, 교감인데 평교사이신 아빠. 수업 종이 끝나고 들어오시는 아빠의 소매에 묻어있는 하얀 분필가루. 아빠보다 덩치 크고 반항적인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힘들까? 그 이마와 눈가의 주름살이 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그날 우리는 늦게까지 이야기를 했다. 다 큰 딸과 늙은 아버지 사이의 깊은 골짜기가 평지로 변하던 날이었다. 아빠가 행복해 하시며 내 어깨를 토닥이셨다. 즉석에서 나는 아빠에게 전자우편 주소를 만들어 드렸다. 아빠의 함자와 급할 때 거는 전화 번호 119를 더해 기억하기 쉽게 만든 ID 'yongjin119'.
요즘 내 전자우편함에는 아빠가 와 계신다. 이젠 부쩍 늙으신 아버지, 자식에게 이해받길 원하시는 아버지를 예전처럼 마음에서 밀어내지 말아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