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44
몬떼리(Monterrey) 경찰서에는 사고 차량의 유가족들이 몰려와 야단법석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사고 현장의 유일한 목격자인 꼬르손(Korson)을 만나기 위해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경찰서 구내식당에서 간단히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저녁이긴 하지만 오늘 처음 먹어보는 식사였습니다. 그리고 경찰서 회의실에서 사고 현황을 유가족들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오늘 하루 종일 현장에서 경찰들에게 목구멍이 아프도록 설명했던 이야기를 또 반복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부터 시작이었습니다. 사고 차량 모두가 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멕시코의 보험료는 미국의 3-4배정도 되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자동차보험에 가입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밤늦도록 경찰 간부들과 의논을 했지만 뚜렷한 해결 방법이 없었습니다. 자정이 넘어서 인근 모텔에 들어가 눈을 붙일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하루가 피곤했는지 눈을 감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이번 사고의 모든 피해 보상을 포기하고, 차를 미국 국경 택사스주 Del Rio시티로 견인하여 정비소에 수리를 맡겨놓고 버스를 타고 L.A.로 일단 돌아왔습니다.
이야기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1982년 말 나는 한국에서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취업 이민 왔습니다. 한국에서의 사업이라 함은 고등공민학교와 유치원을 직접 설립하여 교육부에서 인가를 받고 한국 최연소 교장으로 승인받아 10여 년 동안 재직한 사업이며, 그리고 사회사업에도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국으로 와서는 상업미술에 취미가 있어서 상업미술을 직업으로 하여 돈벌이를 하면서 신학을 공부하였고, 신학석사(M.Div) 목회학박사((D.Min) 과정을 공부 하고 학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림 공장도 차려 그 수입이 제법 짭짤하였습니다.
미국은 정직했습니다. 그때 낸 세금이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연금으로 돌려받기 때문에 지금은 어떤 교회의 도움 없이도 선교를 계속 할 수 있으며, 평생 보장되어 있습니다. 기본적인 선교비로 인한 불안감은 전혀 없습니다.
그때 미국 시민권도 얻었지만 미국에서 돈을 벌면서 살기는 싫었습니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 장애인 학교를 하고 싶었지만 한국에 가보니 정부에서 그 일을 잘 하고 있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한국의 경제 사정이 좋아서 모두들 잘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내가 할 일이 없었습니다. 나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가까운 멕시코 시골 원주민 선교를 선택했습니다. 때마침 밸리제일장로교회에서 낸 파송선교사 구인 신문 광고를 보고 이력서를 제출했고 밸리제일장로교회 파송 선교사로 화려한 출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파송예배를 드릴 때 교회는 나를 파송선교사로 나는 남은 생애를 선교사로 주님께 헌신 할 것을 교회 앞에서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얼마 가지 않아 이 약속을 깨트려 버린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마귀가 역사한 것입니다. 목사와 장로가 한판 붙었습니다. 결국 따지고 보면 목사는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장로는 교회를 자기 손아귀에 넣고 싶은 쟁탈전에 선교사가 그 중간에 재물이 된 것입니다.
교회는 깨어졌고 장로는 선교사를 지원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교인들을 끌고 나와 또 다른 교회를 세우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나는 그 장로를 목사 만드는데 주역 역할을 했고 목사가 된 그 장로는 나와의 약속은 헌신짝처럼 던져 버린 두 목사 모두 똑 같은 먹사였습니다. (먹사라 함은 먹고 살기위한 직업목사를 말함)
이런 와중에 몬떼리 교통사고가 났고, 선교비지원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차를 멕시코 자동차 보험에 들 수가 없었습니다. 멕시코에서 난 교통사고는 미국보험이 책임지지 않습니다.
"주님!
어찌해야 합니까?
나는 항상 부족하오며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 가운데서는 심신을 가누지 못하는 연약한 피조미조물입니다. 나는 당신의 도움이 없이는 도저히 이일을 감당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나로 하여금 주님과 약속을 지키지 아니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하옵소서. 환란 가운데서도 주님과 약속이 빗나가지 않고 걸을 수 있는 빛을 주시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갈 수 있는 내적인 힘과 능력을 주시고, 주님께서 쓰시고자 하시는 곳에 충성스러운 봉사를 하기 원하오니 항상 나와 동행하셔서 충성스러운 청지기가 되게 하소서." 나의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자동차는 나성서부교회(김승곤목사)가 중심이 된 지원으로 수리를 마쳤고, 산 파블로교회는 내가 소장하고 있는 그림을 모두 팔아서 작은 교회건물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많은 어려움으로 나를 연단하게 하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연단 뒤에는 감추어 놓은 더 큰 것이 준비되었음을 보았습니다. 미국인 선교단체에서 선교 지원을 약속받게 되었습니다.
1990년대의 선교는 미국인 선교단체에 의해서 여러 곳에 교회와 기도처를 세우고 많은 부모 없이 버려진 아이들을 입양할 수 있었으며, 아이들 입양 덕분에 멕시코 시민권도 받을 수 있었고, 멕시코는 법으로 선교를 금하고 있지만 같은 시민의 전도는 위법이 아니므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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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가 선교사 은퇴 후 아래와 같이 단원을 나누어 회고록을 쓰려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 나면 맛보기로 선교 칼럼에 지금처럼 단원(연대)을 오르내리면서 글을 올리려 합니다.
1) 1990년대 멕시코 원주민선교
2) 2000년대 북한선교
3) 2010년대 멕시코 미전도종족선교
4) 기타
최근 방문한 산 파블로교회
밸리제일장로교회(선교사 파송예배)
첫번째 양녀
경찰서 구내식당에서 간단히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저녁이긴 하지만 오늘 처음 먹어보는 식사였습니다. 그리고 경찰서 회의실에서 사고 현황을 유가족들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오늘 하루 종일 현장에서 경찰들에게 목구멍이 아프도록 설명했던 이야기를 또 반복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부터 시작이었습니다. 사고 차량 모두가 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멕시코의 보험료는 미국의 3-4배정도 되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자동차보험에 가입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밤늦도록 경찰 간부들과 의논을 했지만 뚜렷한 해결 방법이 없었습니다. 자정이 넘어서 인근 모텔에 들어가 눈을 붙일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하루가 피곤했는지 눈을 감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이번 사고의 모든 피해 보상을 포기하고, 차를 미국 국경 택사스주 Del Rio시티로 견인하여 정비소에 수리를 맡겨놓고 버스를 타고 L.A.로 일단 돌아왔습니다.
이야기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1982년 말 나는 한국에서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취업 이민 왔습니다. 한국에서의 사업이라 함은 고등공민학교와 유치원을 직접 설립하여 교육부에서 인가를 받고 한국 최연소 교장으로 승인받아 10여 년 동안 재직한 사업이며, 그리고 사회사업에도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국으로 와서는 상업미술에 취미가 있어서 상업미술을 직업으로 하여 돈벌이를 하면서 신학을 공부하였고, 신학석사(M.Div) 목회학박사((D.Min) 과정을 공부 하고 학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림 공장도 차려 그 수입이 제법 짭짤하였습니다.
미국은 정직했습니다. 그때 낸 세금이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연금으로 돌려받기 때문에 지금은 어떤 교회의 도움 없이도 선교를 계속 할 수 있으며, 평생 보장되어 있습니다. 기본적인 선교비로 인한 불안감은 전혀 없습니다.
그때 미국 시민권도 얻었지만 미국에서 돈을 벌면서 살기는 싫었습니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 장애인 학교를 하고 싶었지만 한국에 가보니 정부에서 그 일을 잘 하고 있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한국의 경제 사정이 좋아서 모두들 잘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내가 할 일이 없었습니다. 나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가까운 멕시코 시골 원주민 선교를 선택했습니다. 때마침 밸리제일장로교회에서 낸 파송선교사 구인 신문 광고를 보고 이력서를 제출했고 밸리제일장로교회 파송 선교사로 화려한 출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파송예배를 드릴 때 교회는 나를 파송선교사로 나는 남은 생애를 선교사로 주님께 헌신 할 것을 교회 앞에서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얼마 가지 않아 이 약속을 깨트려 버린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마귀가 역사한 것입니다. 목사와 장로가 한판 붙었습니다. 결국 따지고 보면 목사는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장로는 교회를 자기 손아귀에 넣고 싶은 쟁탈전에 선교사가 그 중간에 재물이 된 것입니다.
교회는 깨어졌고 장로는 선교사를 지원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교인들을 끌고 나와 또 다른 교회를 세우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나는 그 장로를 목사 만드는데 주역 역할을 했고 목사가 된 그 장로는 나와의 약속은 헌신짝처럼 던져 버린 두 목사 모두 똑 같은 먹사였습니다. (먹사라 함은 먹고 살기위한 직업목사를 말함)
이런 와중에 몬떼리 교통사고가 났고, 선교비지원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차를 멕시코 자동차 보험에 들 수가 없었습니다. 멕시코에서 난 교통사고는 미국보험이 책임지지 않습니다.
"주님!
어찌해야 합니까?
나는 항상 부족하오며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 가운데서는 심신을 가누지 못하는 연약한 피조미조물입니다. 나는 당신의 도움이 없이는 도저히 이일을 감당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나로 하여금 주님과 약속을 지키지 아니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하옵소서. 환란 가운데서도 주님과 약속이 빗나가지 않고 걸을 수 있는 빛을 주시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갈 수 있는 내적인 힘과 능력을 주시고, 주님께서 쓰시고자 하시는 곳에 충성스러운 봉사를 하기 원하오니 항상 나와 동행하셔서 충성스러운 청지기가 되게 하소서." 나의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자동차는 나성서부교회(김승곤목사)가 중심이 된 지원으로 수리를 마쳤고, 산 파블로교회는 내가 소장하고 있는 그림을 모두 팔아서 작은 교회건물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많은 어려움으로 나를 연단하게 하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연단 뒤에는 감추어 놓은 더 큰 것이 준비되었음을 보았습니다. 미국인 선교단체에서 선교 지원을 약속받게 되었습니다.
1990년대의 선교는 미국인 선교단체에 의해서 여러 곳에 교회와 기도처를 세우고 많은 부모 없이 버려진 아이들을 입양할 수 있었으며, 아이들 입양 덕분에 멕시코 시민권도 받을 수 있었고, 멕시코는 법으로 선교를 금하고 있지만 같은 시민의 전도는 위법이 아니므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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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가 선교사 은퇴 후 아래와 같이 단원을 나누어 회고록을 쓰려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 나면 맛보기로 선교 칼럼에 지금처럼 단원(연대)을 오르내리면서 글을 올리려 합니다.
1) 1990년대 멕시코 원주민선교
2) 2000년대 북한선교
3) 2010년대 멕시코 미전도종족선교
4) 기타
최근 방문한 산 파블로교회
밸리제일장로교회(선교사 파송예배)
첫번째 양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