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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규 (순복음인천교회)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죽음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정말 믿으십니까? 저는 오늘 새벽에 묵상기도하면서, 저는 뭐 가사를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동요 생각이 나서 한 번 바꿔봤어요. 제목은 “꽃들과 아이들”, “꽃들과 아이들.” 먼저 아이들이 꽃을 보고 질문합니다. “꽃님아, 꽃님아 너희는 무얼 먹고사느냐?” 꽃님이 대답합니다. “나는, 나는 새벽에 내리는 이슬 먹고산단다.” 그랬더니 또 꽃들이 아이들에게 물어봅니다. “얘들아, 얘들아, 너희는 무얼 먹고사느냐?” 아이들이 대답합니다. “나는,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 먹고산단다.” 아멘. 내가 다시 읽어볼까요? “꽃님아, 꽃님아 너희는 무얼 먹고사느냐?” “나는, 나는 새벽에 내리는 이슬 먹고산단다.” “얘들아, 얘들아, 너희는 무얼 먹고사느냐?” “나는,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 먹고산단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부활이고,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받고 살고, 믿고 살고, 전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결정적 차이가 뭐냐? 빈 무덤입니다. 다른 종교들도 천국을 말합니다. 지옥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오직 기독교만이 부활을 말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님만이 부활하셨습니다. 공자도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죽었습니다. 다시 살지 못했습니다. 석가도 훌륭한 사람입니다. 죽었습니다. 다시 살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세주, 우리의 메시아, 하나님 아들 되시는 오직 예수님만이 죽은 지 삼일만에 사망, 권세 이기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이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은 헛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보세요. 고린도전서 15장 14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에 영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에 천국이 있는 것입니다. 2천년 전,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지금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성령으로 오셔서, 말씀으로 오셔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은혜 주시고, 힘 주시고, 복 주시는 것입니다.
이 시간,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알아봄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큰 은혜, 큰사랑, 큰 축복을 받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첫째, 떠난 자를 찾아오시는 예수님
첫째로, “떠난 자를 찾아오시는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 중에 첫째가 뭐냐? “떠난 자를 찾아오시는 예수님.” 여러분, 사람이 떠난다는 것은 당해본 사람만 압니다. 여러분, 자기와 함께 있던 자가 떠났을 때, 얼마나 얼마나 마음이 아파요. 그런데 예수님을 떠난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떠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다시 사랑해주시고, 다시 잃어버린 신앙 회복해주시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예수님.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이라고 오늘 제가 설교제목을 정한 것입니다.
보세요. 누가복음 24장 13절에 보니까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찾아가셔서 그들의 신앙을 다시 회복시켜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오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6절에 보니까 의심 많은 도마에게 찾아가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 도마는 말합니다. 도마가 말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정말로 보지 않고는 못 믿겠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찾아가셔서 못 박히신 예수님의 손 보이셨습니다. 창에 찔린 예수님의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그러나 보고 믿는 자보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다”(요 20:29) 그랬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요한복음 21장 1절 이하에 보니까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 부활하신 주님을 두 번씩이나 만났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말합니다. 베드로가 먼저 선동을 합니다. “나는 고기 잡으러 간다.” 다른 제자들도 “나도 간다.” 보세요. 이건 내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 3절로 이하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부활의 주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떠난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한 나머지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떠났어도,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고 찾아오시는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아리랑” 노래 안 부른다는 것입니다. “나를 버리고 가는 님 십 리도 못 가 발병 난다”, 그런 말 안 한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떠났어도,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만나주시고, 회복해주시고, 필요마다 채워주시는 예수님, 그 사랑을 다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약속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8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한복음 14장 1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처소를 예비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에 영접하리라”(요 14:2-3) 말씀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찾아오셔서 이전보다 더 친밀한 관계로 더 많은 은혜를, 더 많은 사랑을 부어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 5절 상반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고기가 있느냐” 그랬습니다. 『얘들아』, 그 말은 뭡니까? 아주 “친구들아”, 그 말입니다. “친구들아”, “사랑하는 자들아”, “아주 친밀한 자들아”, 그 말인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은 오늘 이 자리에,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찾아오시고, 말씀으로 찾아오신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위로하십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을 넉넉하게 이기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우리가 경건하게도 살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실패자도 사랑하시는 예수님
두 번째입니다. “실패자도 사랑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을 떠난 자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성가 가사에 그런 가사가 있습니다. “물을 떠난 고기는 혹시 산다 하여도, 예수 떠난 인생은 살 수 없다” 그랬습니다. “아멘”입니까? 물을 떠난 물고기가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물을 떠난 물고기가 혹시 산다 하여도, 예수 떠난 인생은 살 수 없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떠난 사람은 결코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고기잡이 실패합니다. 요한복음 21장 3절 하반절에 보니까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예수님이 물어봤습니다. “얘들아, 고기가 있느냐?” 그랬습니다. 그들이 대답합니다.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나이다”, 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의 가장 큰 실패는 뭐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 4절에 보니까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이 만남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첫 번 만나는 게 아니라, 벌써 한 번 만났고, 두 번 만났고, 세 번째 만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누구이신 지 몰라요. 여러분, 마음으로 예수님을 떠나면, 마음에서 예수님을 떠나면 예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참, 정말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 성경 어디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보고 “너는 실패했다”, 그런 말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삼십 냥에 팔았습니다. 그 때도 예수님은 뭐라고 말합니까?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라고 아주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 없는 자는 꾸짖으시면서도, 실패 만난 인생은 도와주셨습니다. 실패를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부활의 주님이 도와주실 것을 믿으면 분명히 다시 회복하고, 다시 성공하고, 다시 건강하고, 다시 사랑하며 살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여러분, 모두가 다 믿음 있는 자가 되어서 세상을 넉넉하게 이기며 살아가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주신 예수님
세 번째입니다. “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주신 예수님.” 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떠난 자를 찾아오셨습니다. 실패자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랑만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인생을 성공으로 살 수 있을까, 방법을 제시해주셨습니다.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인생에서 승리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셨다, 그 말인 것입니다. 보세요. 요한복음 21장 6절에 보니까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실패 만난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 고기를 못 잡은 것을 확인하신 예수님이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얘들아,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성경에서 “오른편”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실패 만난 제자들에게 고기를 많이 잡게 하시기 위하여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그랬습니다. 아마 그 동안 제자들은 계속 왼편에만 던졌는가봐요. 왼편에만 던졌나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아니다. 오른편에 던져라. 오른편에 던져라.” 그 뿐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인 두 강도, 왼편 강도는 지옥 갔습니다. 그러나 우편 강도는 구원받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셨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 어디 계시느냐?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우리가 종말을 말할 때,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있다, 그랬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오른손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른편에 있다는 것은 곧 뭐냐?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6편 8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그랬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본주의로 사는 것이 인생 성공의 방법이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10장 2절입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느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느니라』. 이 세상 사람들도 뭐, “좌다. 우다.”, “좌익이다. 우익이다.”, 이런 말들 많이 합니다. 성경대로 산다면, 성도들은 어느 환경이나, 아무리 어떤 고통의 다리나, 환경이 어려울 때라도 우리는 어느 위치에 서야 할까? 분명히 우리는 좌편에 서지 아니하고 우편에 서야 될 줄 믿습니다. 좌익이 되지 아니하고 우익이 되어야 성경대로 살아가는 거예요. 성경대로 인생을 성공으로 살 수 있는 길이 되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은 실패 만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정말로 성공하는 법칙을 알려주셨습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넷째, 떡과 생선을 구워주신 예수님
네 번째입니다. “떡과 생선을 구워주신 예수님”, “떡과 생선 구워주신 예수님.”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음만 주지 아니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병든 자를 치료하십니다. 절망하는 자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천국 복음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 복음을 전할 때, 배고픈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헐벗은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먹을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예수님. 오늘 본문만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6장 5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 살아 계실 때, 디베랴 광야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남자만 오천 명, 부녀자까지 수만 명이 모였습니다.
아침부터 저녁, 황혼까지 예수님이 천국 복음을 전했습니다. 천국이 어떤 곳인지 그들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그들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죄인이 회개하고 용서받았습니다. 병든 자가 치료받았습니다. 저녁 황혼 때, 많은 사람들이 이제 집에까지 돌아가려면 먹어야 됩니다. 허기가 졌습니다. 예수님이 그냥 보내지 아니하시고, “저들에게 먹을 것을 갖다가 주라” 명령하셨습니다. 어린 소년이 가지고 있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어리를 예수님이 축사하사 떼셨더니 거기에 모인 남자만 오천 명, 부녀자까지 수만 명이 원대로 다 먹었다, 그랬습니다.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 그랬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난 제자들, 실패 만난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예수님은 고기 잡는 방법만 가르쳐주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밤새 고기를 잡은 제자들은 배가 매우 고팠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서 모닥불을 피워주셨습니다. 추우니까 따뜻하게 해주고, 배고픈 그들에게 떡과 생선을 구워 예비해놓으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 9절입니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그렇습니다. 배고픈 그들에게, 추운 그들은 그 숯불도, 그저 숯불에 구워있는 떡도, 숯불에 구워있는 그 생선도 누가 준비하십니까? 예수님이 준비해주셨기 때문에, 그것도 복음이다.
배고픈 제자들에게 떡과 생선을 직접 또 집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냥 “먹어라”, 그게 아니라, 직접 주어서 “먹으라.” 요한복음 21장 13절입니다.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배고픔을 아셨습니다. 제자들의 그 추운 것도 아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제자들의 예수님만이 아니라, 우리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지금 우리의 예수님, 우리의 구세주, 우리의 메시아, 그 부활하신 예수님. 나나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또 교회 안에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성도들의 배고픔을 아신다, 헐벗음을 아신다, 그 문제까지 해결해주시는 사랑의 예수님이신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구하기도 전에 아시는 분이십니다. “아시지요”보다는 아십니다. 우리 주님은 다 아세요. “아시지요”, 그 얘기는 “혹시 모를 수도 있지요”이지만, “아십니다”는 100%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좋은 것 주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그 분을 바라보며, 그 분을 믿으며, 그 분을 자랑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다섯째, 사명을 주신 예수님
다섯 번째, “사명을 주신 예수님.”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앞의 것 4가지 다 주셨다 하더라도, 우리 예수님이 그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떠난 제자들, 실패 만난 제자들, 다시 회복시킴을 받은 제자들에게 다시 사명을 주지 아니하셨다면, 예수님의 사랑은 더 큰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근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 실패 만난 제자, 예수님을 떠난 제자 베드로에게 우리 예수님은, 부활의 예수님은 사명을 다시 회복해주셨어요.
그렇습니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것은 뭘까요? 사명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명이 있으면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명이 없으면 짐승처럼 살아간다는 거예요. 아무리 잘 먹고 좋은 집에 산다 하더라도, 사명이 없다면 살았다 하나 죽은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저주하며 부인한 베드로에게조차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는 예수를 피했습니다. 피했다가 어린 비자 앞에서까지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또 그가 만났습니다. 두 번이나 만났습니다. 세 번째 만났습니다. 실패 만난 베드로에게 이제 필요한 것 다 채워주셨습니다.
그런데 더 귀한 것은 뭐냐? 귀한 것은 뭐냐? 정말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사랑하신 최고의 사랑이 뭐냐? 사명을 잃어버린 베드로에게 사명을 다시 회복해주신 것입니다. 보세요. 요한복음 21장 15절에 보니까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제자들이 아침 먹은 후에, 베드로가 아침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양을 먹이라
여러분, 사명, 사명은 아무에게나 주시나요? 여러분, 구역장, 아무에게나 주시나요? 오십부장, 아무에게나 주시나요? 성가대원, 아무에게나 하라 그러나요? 설교자, 아무에게나 하라고 하나요? 아무에게나 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 또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정말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사명을 주시는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확인했습니다. 잔뜩 먹고, 잔뜩 마시게 하고, 함께 고기 잡으러 간 동료 친구들 다 있는 그 자리에서 너는 이 떡보다, 이 생선보다, 네가 고기 잡으러 갈 때 함께 따라온 저 친구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참, 베드로가 얼마나 고민했겠어요? 베드로의 고백은 뭡니까? “주님이 아시나이다. 염체가 없나이다.” 그 고백을 확인한 후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가라사대 내 어린양을 먹이라』.
우리가 사명을 잘 감당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사명을 감당할 때, 하늘의 상이 있고 면류관이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 사명을 잘 감당할 이 땅의 복이 있고, 자손이 잘 되는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시편 37편 26절입니다.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말이 뭡니까? “종일토록 사명을 감당하니.” 누가 복 받느냐? “네 자손이 복을 받는 도다.”
그렇습니다. 또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성화 되어져 갑니다. 성경에 말씀하십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예수님은 우리 각자에게도 사명을 주셨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나 여러분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명이 뭘까요? 교회를 섬기는 사명, 기도하는 사명, 전도하는 사명, 양육하는 사명,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사명, 또 하나가 뭐가 있을까요?
“헌금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이 “헌금하는 사명”은 십일조 한다, 그것은 사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무입니다. 주일헌금, 그것도 의무입니다. 그리고 좋은 일이 생겨서 감사헌금 하는 것, 그것도 의무입니다. 그러나 헌금하는 사명이 뭐냐? 나는 다른 건 좀 못해도 하나님이 나에게 많은 물질을 주셨다. 하나님은 나에게 물질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이 물질을 주셨다. 깨닫고 감사함으로 헌금하는 사명에 동참하고, 감사로 참여하면 우리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무슨 복을 주실까? 물질을 더 주실 거예요. 적어도 30배, 60배, 100배 더 많이 주시게 될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돌보고 사랑하셨습니다. 지금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오셔서 지금 만나주시고, 지켜보고 계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서 지금도 가장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위해서 지금도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믿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틀림없이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이 땅에 평화가 옵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죽음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정말 믿으십니까? 저는 오늘 새벽에 묵상기도하면서, 저는 뭐 가사를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동요 생각이 나서 한 번 바꿔봤어요. 제목은 “꽃들과 아이들”, “꽃들과 아이들.” 먼저 아이들이 꽃을 보고 질문합니다. “꽃님아, 꽃님아 너희는 무얼 먹고사느냐?” 꽃님이 대답합니다. “나는, 나는 새벽에 내리는 이슬 먹고산단다.” 그랬더니 또 꽃들이 아이들에게 물어봅니다. “얘들아, 얘들아, 너희는 무얼 먹고사느냐?” 아이들이 대답합니다. “나는,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 먹고산단다.” 아멘. 내가 다시 읽어볼까요? “꽃님아, 꽃님아 너희는 무얼 먹고사느냐?” “나는, 나는 새벽에 내리는 이슬 먹고산단다.” “얘들아, 얘들아, 너희는 무얼 먹고사느냐?” “나는,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 먹고산단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부활이고,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받고 살고, 믿고 살고, 전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결정적 차이가 뭐냐? 빈 무덤입니다. 다른 종교들도 천국을 말합니다. 지옥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오직 기독교만이 부활을 말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님만이 부활하셨습니다. 공자도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죽었습니다. 다시 살지 못했습니다. 석가도 훌륭한 사람입니다. 죽었습니다. 다시 살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세주, 우리의 메시아, 하나님 아들 되시는 오직 예수님만이 죽은 지 삼일만에 사망, 권세 이기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이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은 헛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보세요. 고린도전서 15장 14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에 영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에 천국이 있는 것입니다. 2천년 전,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지금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성령으로 오셔서, 말씀으로 오셔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은혜 주시고, 힘 주시고, 복 주시는 것입니다.
이 시간,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알아봄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큰 은혜, 큰사랑, 큰 축복을 받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첫째, 떠난 자를 찾아오시는 예수님
첫째로, “떠난 자를 찾아오시는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 중에 첫째가 뭐냐? “떠난 자를 찾아오시는 예수님.” 여러분, 사람이 떠난다는 것은 당해본 사람만 압니다. 여러분, 자기와 함께 있던 자가 떠났을 때, 얼마나 얼마나 마음이 아파요. 그런데 예수님을 떠난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떠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다시 사랑해주시고, 다시 잃어버린 신앙 회복해주시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예수님.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이라고 오늘 제가 설교제목을 정한 것입니다.
보세요. 누가복음 24장 13절에 보니까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찾아가셔서 그들의 신앙을 다시 회복시켜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오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6절에 보니까 의심 많은 도마에게 찾아가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 도마는 말합니다. 도마가 말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정말로 보지 않고는 못 믿겠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찾아가셔서 못 박히신 예수님의 손 보이셨습니다. 창에 찔린 예수님의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그러나 보고 믿는 자보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다”(요 20:29) 그랬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요한복음 21장 1절 이하에 보니까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 부활하신 주님을 두 번씩이나 만났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말합니다. 베드로가 먼저 선동을 합니다. “나는 고기 잡으러 간다.” 다른 제자들도 “나도 간다.” 보세요. 이건 내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 3절로 이하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부활의 주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떠난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한 나머지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떠났어도,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고 찾아오시는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아리랑” 노래 안 부른다는 것입니다. “나를 버리고 가는 님 십 리도 못 가 발병 난다”, 그런 말 안 한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떠났어도,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만나주시고, 회복해주시고, 필요마다 채워주시는 예수님, 그 사랑을 다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약속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8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한복음 14장 1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처소를 예비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에 영접하리라”(요 14:2-3) 말씀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찾아오셔서 이전보다 더 친밀한 관계로 더 많은 은혜를, 더 많은 사랑을 부어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 5절 상반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고기가 있느냐” 그랬습니다. 『얘들아』, 그 말은 뭡니까? 아주 “친구들아”, 그 말입니다. “친구들아”, “사랑하는 자들아”, “아주 친밀한 자들아”, 그 말인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은 오늘 이 자리에,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찾아오시고, 말씀으로 찾아오신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위로하십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을 넉넉하게 이기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우리가 경건하게도 살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실패자도 사랑하시는 예수님
두 번째입니다. “실패자도 사랑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을 떠난 자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성가 가사에 그런 가사가 있습니다. “물을 떠난 고기는 혹시 산다 하여도, 예수 떠난 인생은 살 수 없다” 그랬습니다. “아멘”입니까? 물을 떠난 물고기가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물을 떠난 물고기가 혹시 산다 하여도, 예수 떠난 인생은 살 수 없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떠난 사람은 결코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고기잡이 실패합니다. 요한복음 21장 3절 하반절에 보니까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예수님이 물어봤습니다. “얘들아, 고기가 있느냐?” 그랬습니다. 그들이 대답합니다.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나이다”, 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의 가장 큰 실패는 뭐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 4절에 보니까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이 만남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첫 번 만나는 게 아니라, 벌써 한 번 만났고, 두 번 만났고, 세 번째 만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누구이신 지 몰라요. 여러분, 마음으로 예수님을 떠나면, 마음에서 예수님을 떠나면 예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참, 정말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 성경 어디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보고 “너는 실패했다”, 그런 말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삼십 냥에 팔았습니다. 그 때도 예수님은 뭐라고 말합니까?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라고 아주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 없는 자는 꾸짖으시면서도, 실패 만난 인생은 도와주셨습니다. 실패를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부활의 주님이 도와주실 것을 믿으면 분명히 다시 회복하고, 다시 성공하고, 다시 건강하고, 다시 사랑하며 살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여러분, 모두가 다 믿음 있는 자가 되어서 세상을 넉넉하게 이기며 살아가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주신 예수님
세 번째입니다. “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주신 예수님.” 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떠난 자를 찾아오셨습니다. 실패자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랑만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인생을 성공으로 살 수 있을까, 방법을 제시해주셨습니다.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인생에서 승리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셨다, 그 말인 것입니다. 보세요. 요한복음 21장 6절에 보니까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실패 만난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 고기를 못 잡은 것을 확인하신 예수님이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얘들아,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성경에서 “오른편”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실패 만난 제자들에게 고기를 많이 잡게 하시기 위하여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그랬습니다. 아마 그 동안 제자들은 계속 왼편에만 던졌는가봐요. 왼편에만 던졌나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아니다. 오른편에 던져라. 오른편에 던져라.” 그 뿐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인 두 강도, 왼편 강도는 지옥 갔습니다. 그러나 우편 강도는 구원받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셨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 어디 계시느냐?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우리가 종말을 말할 때,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있다, 그랬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오른손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른편에 있다는 것은 곧 뭐냐?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6편 8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그랬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본주의로 사는 것이 인생 성공의 방법이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10장 2절입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느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느니라』. 이 세상 사람들도 뭐, “좌다. 우다.”, “좌익이다. 우익이다.”, 이런 말들 많이 합니다. 성경대로 산다면, 성도들은 어느 환경이나, 아무리 어떤 고통의 다리나, 환경이 어려울 때라도 우리는 어느 위치에 서야 할까? 분명히 우리는 좌편에 서지 아니하고 우편에 서야 될 줄 믿습니다. 좌익이 되지 아니하고 우익이 되어야 성경대로 살아가는 거예요. 성경대로 인생을 성공으로 살 수 있는 길이 되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은 실패 만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정말로 성공하는 법칙을 알려주셨습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넷째, 떡과 생선을 구워주신 예수님
네 번째입니다. “떡과 생선을 구워주신 예수님”, “떡과 생선 구워주신 예수님.”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음만 주지 아니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병든 자를 치료하십니다. 절망하는 자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천국 복음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 복음을 전할 때, 배고픈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헐벗은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먹을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예수님. 오늘 본문만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6장 5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 살아 계실 때, 디베랴 광야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남자만 오천 명, 부녀자까지 수만 명이 모였습니다.
아침부터 저녁, 황혼까지 예수님이 천국 복음을 전했습니다. 천국이 어떤 곳인지 그들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그들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죄인이 회개하고 용서받았습니다. 병든 자가 치료받았습니다. 저녁 황혼 때, 많은 사람들이 이제 집에까지 돌아가려면 먹어야 됩니다. 허기가 졌습니다. 예수님이 그냥 보내지 아니하시고, “저들에게 먹을 것을 갖다가 주라” 명령하셨습니다. 어린 소년이 가지고 있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어리를 예수님이 축사하사 떼셨더니 거기에 모인 남자만 오천 명, 부녀자까지 수만 명이 원대로 다 먹었다, 그랬습니다.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 그랬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난 제자들, 실패 만난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예수님은 고기 잡는 방법만 가르쳐주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밤새 고기를 잡은 제자들은 배가 매우 고팠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서 모닥불을 피워주셨습니다. 추우니까 따뜻하게 해주고, 배고픈 그들에게 떡과 생선을 구워 예비해놓으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 9절입니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그렇습니다. 배고픈 그들에게, 추운 그들은 그 숯불도, 그저 숯불에 구워있는 떡도, 숯불에 구워있는 그 생선도 누가 준비하십니까? 예수님이 준비해주셨기 때문에, 그것도 복음이다.
배고픈 제자들에게 떡과 생선을 직접 또 집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냥 “먹어라”, 그게 아니라, 직접 주어서 “먹으라.” 요한복음 21장 13절입니다.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배고픔을 아셨습니다. 제자들의 그 추운 것도 아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제자들의 예수님만이 아니라, 우리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지금 우리의 예수님, 우리의 구세주, 우리의 메시아, 그 부활하신 예수님. 나나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또 교회 안에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성도들의 배고픔을 아신다, 헐벗음을 아신다, 그 문제까지 해결해주시는 사랑의 예수님이신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구하기도 전에 아시는 분이십니다. “아시지요”보다는 아십니다. 우리 주님은 다 아세요. “아시지요”, 그 얘기는 “혹시 모를 수도 있지요”이지만, “아십니다”는 100%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좋은 것 주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그 분을 바라보며, 그 분을 믿으며, 그 분을 자랑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다섯째, 사명을 주신 예수님
다섯 번째, “사명을 주신 예수님.”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앞의 것 4가지 다 주셨다 하더라도, 우리 예수님이 그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떠난 제자들, 실패 만난 제자들, 다시 회복시킴을 받은 제자들에게 다시 사명을 주지 아니하셨다면, 예수님의 사랑은 더 큰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근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 실패 만난 제자, 예수님을 떠난 제자 베드로에게 우리 예수님은, 부활의 예수님은 사명을 다시 회복해주셨어요.
그렇습니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것은 뭘까요? 사명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명이 있으면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명이 없으면 짐승처럼 살아간다는 거예요. 아무리 잘 먹고 좋은 집에 산다 하더라도, 사명이 없다면 살았다 하나 죽은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저주하며 부인한 베드로에게조차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는 예수를 피했습니다. 피했다가 어린 비자 앞에서까지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또 그가 만났습니다. 두 번이나 만났습니다. 세 번째 만났습니다. 실패 만난 베드로에게 이제 필요한 것 다 채워주셨습니다.
그런데 더 귀한 것은 뭐냐? 귀한 것은 뭐냐? 정말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사랑하신 최고의 사랑이 뭐냐? 사명을 잃어버린 베드로에게 사명을 다시 회복해주신 것입니다. 보세요. 요한복음 21장 15절에 보니까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제자들이 아침 먹은 후에, 베드로가 아침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양을 먹이라
여러분, 사명, 사명은 아무에게나 주시나요? 여러분, 구역장, 아무에게나 주시나요? 오십부장, 아무에게나 주시나요? 성가대원, 아무에게나 하라 그러나요? 설교자, 아무에게나 하라고 하나요? 아무에게나 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 또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정말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사명을 주시는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확인했습니다. 잔뜩 먹고, 잔뜩 마시게 하고, 함께 고기 잡으러 간 동료 친구들 다 있는 그 자리에서 너는 이 떡보다, 이 생선보다, 네가 고기 잡으러 갈 때 함께 따라온 저 친구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참, 베드로가 얼마나 고민했겠어요? 베드로의 고백은 뭡니까? “주님이 아시나이다. 염체가 없나이다.” 그 고백을 확인한 후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가라사대 내 어린양을 먹이라』.
우리가 사명을 잘 감당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사명을 감당할 때, 하늘의 상이 있고 면류관이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 사명을 잘 감당할 이 땅의 복이 있고, 자손이 잘 되는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시편 37편 26절입니다.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말이 뭡니까? “종일토록 사명을 감당하니.” 누가 복 받느냐? “네 자손이 복을 받는 도다.”
그렇습니다. 또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성화 되어져 갑니다. 성경에 말씀하십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예수님은 우리 각자에게도 사명을 주셨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나 여러분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명이 뭘까요? 교회를 섬기는 사명, 기도하는 사명, 전도하는 사명, 양육하는 사명,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사명, 또 하나가 뭐가 있을까요?
“헌금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이 “헌금하는 사명”은 십일조 한다, 그것은 사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무입니다. 주일헌금, 그것도 의무입니다. 그리고 좋은 일이 생겨서 감사헌금 하는 것, 그것도 의무입니다. 그러나 헌금하는 사명이 뭐냐? 나는 다른 건 좀 못해도 하나님이 나에게 많은 물질을 주셨다. 하나님은 나에게 물질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이 물질을 주셨다. 깨닫고 감사함으로 헌금하는 사명에 동참하고, 감사로 참여하면 우리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무슨 복을 주실까? 물질을 더 주실 거예요. 적어도 30배, 60배, 100배 더 많이 주시게 될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돌보고 사랑하셨습니다. 지금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오셔서 지금 만나주시고, 지켜보고 계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서 지금도 가장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위해서 지금도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믿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틀림없이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이 땅에 평화가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