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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진목사 (와싱톤한인교회)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기 위함입니다.
내게서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과연 그분을 믿고 있습니까?
나는 오늘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까?
새로운 한 해가 밝아왔습니다. 우리 모두 희망과 기대를 안고 2005년을 맞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값있고 보람있는 삶으로 채워가야 하는 기회입니다. 오늘부터 시작해서 저는 “생명의 복음”이란 큰 제목 밑에서 요한복음 연속설교를 드리려고 합니다. 아마도 1년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생각되는데, 교우 여러분의 많은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치심을 전해주는 요한복음서는 공관복음서라고 불리우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와는 다른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성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제4복음서라고 부릅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같은 관점에서, 비슷한 줄거리를 따라서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치심을 전해주기 때문에 공관복음서라고 부르는데, 요한복음서는 공관복음서와 비교할 때 여러 가지 다른 점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의 전도활동의 중심지가 공관복음서에는 갈릴리 지방인데 비해서 요한복음서는 예루살렘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전도활동 기간도 공관복음서는 2년 미만인데, 요한복음서는 3년 내외로 추정이 됩니다. 또 예수님의 가르치심의 핵심내용이 공관복음서는 하나님의 나라인데 비해서, 요한복음서는 생명, 영생을 강조합니다. 복음서의 내용 가운데 가나의 혼인잔치, 나고데모,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나사로를 살리신 일,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고별설교를 하신 일 등은 요한복음서 만이 전해주는 독특한 내용입니다. 공관복음서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과 연관되어 귀신을 쫓아낸 기사가 많은데, 요한복음서에는 한번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도 독특합니다. 이밖에 종말이나 심판에 대한 이해라든지 보혜사 성령님에 대한 가르침도 요한복음서 만이 보여주는 특징있는 가르침입니다. 전통적으로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였던 사도 요한이 주후 85년 전후해서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I.
오늘 저는 복음서의 순서에 따라 1장부터 시작하지 않고 먼저 20:30, 31의 말씀을 택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요한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하지 않은 다른 표징도 많이 행하셨다. 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먼저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서는 단순히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모아놓은 collection이 아니라, 그 많은 이야기 가운데서 선택된 이야기들의 모음, selection임을 밝힙니다. 이 사실은 요한복음 21:25, 맨 마지막 절에서도 되풀이 됩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어서 그것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기록한 책을 다 담아두기에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많은 기억과 전승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 전승들 가운데서 선택된 내용들이 요한복음서 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김동길 교수님께서 신앙강좌에서 역사가의 중요한 임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을 빼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역사가의 일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름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건들을 빼는 것입니다. 그런데 포함시키거나 뺄 때 무슨 기준 위에서 이런 일을 합니까? 그 기준을 우리는 역사관 혹은 사관이라고 부릅니다. 역사가는 사관에 따라서 판단하고 기록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순수하고 객관적인 역사는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역시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가르침과 사건들 속에서 선택되어진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나 전승들이 선택된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 기준은 단순한 사실 전달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사건들, 또 그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난 생명 회복의 역사들이 선택되어 요한복음서에 기록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요한복음서는 신앙의 사건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기대를 안고 기록되었습니다. 믿는 사람들 안에서 생명이 회복되는 역사, 참 생명을 누리는 열매가 맺혀지기를 소망하면서 기록되었습니다.
요한복음 연속설교를 전하게 된 저 자신의 목표와 기대도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함께 나누는 요한복음서의 말씀 속에서 여러분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를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깨달으실 뿐 아니라 그분을 믿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생명, 풍성한 생명을 누리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II.
좀 더 구체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먼저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전해줍니다.
먼저 예수님은 그리스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하도 두 단어가 같이 붙어 다니니까 first name과 last name처럼 보여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말로는 “메시야”란 말인데, 문자적인 뜻은 “기름부음을 받은 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보내 주실 구원자, savior의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말은 우리의 구원자, 내 인생 뿐 아니라 오늘의 이 세상, 이 역사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요한복음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합니다. 공관복음서와 비교해 볼 때,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밝힙니다. 예수님 자신도 이 점을 확실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단순한 인간, 위대한 스승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이같은 고백에 동의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인류의 위대한 4대 성인의 한사람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은 그분 선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밝힙니다. 예수님, 그분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인생의 목적과 길이 결정됩니다. 죽음너머 영원한 우리의 운명도 결정됩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시인 구상 선생님께서는 “나사렛 예수”라는 시 속에서 이렇게 고백하셨습니다.
나자렛 예수!
당신은 과연 어떤 분인가?
마굿간 구유에서 태어나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기구망측한 운명의 소유자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 다니며
상놈과 창녀들과 부역자들과
원수로 여기는 딴 고장치들과
어울리며 먹고 마시기를 즐긴 당신
가난한 사람들에게
굶주린 사람들에게
우는 사람들에게
의로운 일을 하다 미움을 사고
욕을 먹고 쫓기고 누명을 쓰는 사람들에게
<행복된 사람은 바로 당신들>이라고
<하나님 나라는 바로 당신들 차지>라고
엄청난 소리를 한 당신
소경을 보게 하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고
죽은 사람을 살려내고도
스스로의 말대로
온 세상의 미움을 사고
욕을 먹고 쫓기다가
마침내 반역자란 누명을 쓰고
볼꼴없이 죽어 간 철저한 실패자
내가 탯줄에서 떨어지자 맺어져
나의 삶의 바탕이 되고 길이 되고
때로는 멀리하고 싶고 귀찮게 여겨지고
때로는 좌절과 절망까지를 안겨 주고
때로는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생판 낯설어 보이는 당신
당신의 참모습은 과연 어떤 것인가?
당신은 사상가가 아니었다
당신은 도덕가가 아니었다
당신은 현세의 경륜가가 아니었다
아니 당신은 종교의 창시자도 아니었다
그래서 당신은 어떤 지식을 가르치지 않았다
당신은 어떤 규범을 가르치지 않았다
당신은 어떤 사회 혁신운동을 일으키지 않았다
또한 당신은 어떤 해탈을 가르치지도 않았다
한편 당신은 어느 누구의
과거 공적이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았고
당신은 어느 누구의
과거 죄악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았고
당신은 실로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생각이나 말을 뒤엎고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고
고통받는 인류의 해방을 선포하고
다만,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오
그지없는 사랑 그 자체이시니
우리는 어린애처럼 그 품에 들어서
우리도 아버지가 하시듯 서로를 용서하며
우리도 아버지가 하시듯 다함없이 사랑할 때
우리의 삶에 영원한 행복이 깃들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라고 가르치고
그 사랑의 진실을 목숨 바쳐 실천하고
그 사랑의 불멸을 부활로써 증거하였다.
(2) 이어서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예수님을 믿게하는 책인 것을 밝힙니다.
그렇습니다.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것 중요합니다. 아는 것은 바로 믿음의 출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아는 것을 넘어서지 못하고 망설이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예수님을 믿음은 예수님에 관한 사실을 믿는 것 이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과거 속에 묻혀 죽어 계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것으로 끝났다면, 그분에 관한 사실을 믿음으로 족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은 부활하셔서 오늘도 살아계십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살아계신 예수님과의 교제입니다. 그분을 내 삶 속에 모셔드림입니다. 그리고 그분께 우리의 삶을 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신뢰하며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는 바로 이 믿음의 결단을 요청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 나의 주님으로 인정하고 모셔드리는 결단을 요청합니다. 이 결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 모두의 응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열어주시는 새날, 새로운 인생, 새로운 역사에 대한 우리 모두의 응답입니다. 그러므로 믿지않는 것은 단순한 나의 선택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사랑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받아드리지 않고 자신의 고집에 매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3) 한가지 더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중요합니까? 왜 성경은 우리에게 믿어야 됨을 강조합니까? 그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요한복음은 이 새로운 세상, 새로운 인생을 “생명”이란 말로 표현합니다. 여러분, 생명은 그저 살아있다고 다 생명을 누리는 것 아닙니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삶입니다. 풍성한 삶입니다. 그저 목적도, 끝도 모른채 떠밀려 가는 인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능력을 맛보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임하는 풍성한 삶입니다.
이 생명은 죽음에 매이지 않습니다. 유한성의 굴레로부터 자유합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사는 동안 이미 맛보다가 주님께서 부르시면 그 나라에 가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이 생명을 누리는 사람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굴레로부터 자유합니다. 죽음은 바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생명의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도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생명의 사람들은 살아도 감사하고 죽어도 감사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맛보며, 누리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III.
요한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이 회복되는 이 역사를 위하여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생명을 살려왔습니다. 오늘도 이 말씀 속에서 생명 회복의 역사는 능력있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복음으로 사람과 세상을 변혁시키는 교회”를 꿈꾸며 지향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장기계획의 두 번째 해를 맞으면서 저는 함께 요한복음서의 말씀을 나누면서 이 생명의 역사, 이 변혁의 역사가 능력있게 펼쳐지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생명을 살리는 역사를 위하여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국진 목사님께서 쓰신 예수는 있다 라는 책에서 소개하는 주선태 교수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면서 제 설교를 줄입니다.
아름다운 시작, 이 책은 칠성님을 섬기고 점쟁이를 찾아다니며 원불교나 대순진리회에 푹 빠졌던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나 고려대에서 축산학을 전공한 후 국립 경상대학교 축산과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주선태 교수가 예수를 빋게 된 과정을 그린 책입니다.
주선태 교수는 대광고를 나오고 고려대를 다신 수재였습니다. 고려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위스콘신대 연구원으로 있기도 했던 그는 국립 경상대학교 축산과학부 교수로 있다가 안식년에 코네티컷대학에서 객원 교수로 지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는 동안 그는 철저하게 과학적 진리만이 참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스스로 효자임을 자처한 그는 “정치하지 마라, 개고기 먹지 마라, 예수 믿지 마라”는 어머니의 3대 유언을 잘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던 중 코네티컷대학 객원 교수로 있는 동안 그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소영이란 딸을 둔 주선태 교수는 미국 코네티컷대에서 1년 간 객원 교수로 머물면서 처음 6개월 동안은 열심히 연구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골프도 배우며 나름대로 보람찬 하루 하루를 보냈습니다. 특히 일요일에 집에 있기 심심해하는 소영이를 옆집 집사님이 교회에 데리고 가주었기 때문에 더욱 활기찬 주말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소영이가 분명히 같이 교회에 가자고 제안할 것을 예상하고 각종 대비책까지 마련해 두었습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를 앞둔 주말, 교회 사람들이 소영이가 고아인 줄 안다는 교묘한 말에 넘어간 주선태 교수는 난생 처음 아내와 함께 하트포드제일장로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사십이 다 된 나이에 처음으로 교회에 나간 그 날, 그는 목사님의 설교에 눈물을 참지 못하는 경이로움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사우스캐롤라이나 여행을 마친 1월 둘째 주일에는 제 발로 교회를 다시 찾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는 데는 여러 거지 장애가 있었습니다. 가장 큰 장애는 어머니의 유언이었고, 또 하나의 장애는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과학적 사고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을 느낀 주선태 교수는 예수를 영접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기로 한 후 첫 번째 다가온 어머니의 제삿날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제사를 안 지내다고 알고 있었지만 그는 제사상을 차려놓았습니다. 주교수는 이렇게 썼습니다:
제사상을 차렸다. 소영이는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매우 재미있어 한다. 신난 소영이를 무릎 꿇려 앉힌 다음 나고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소영아, 지금부터 하나님께 기도 드릴 거야. 아빠가 뭐라고 기도 드리는지 소영이가 증인이다. 알았지?”
우리 둘은 눈을 감았고 나는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 처음으로 목소리를 내어 기도 드립니다. 왜 제가 이렇게 기도 드리는지 다 아시죠? 하나님께 기쁜 마음으로 다가가기 위함인 것 아시죠? 지금부터 엄마 제사를 지낼 겁니다. 다 아시겠지만 노파심에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질투하실 그런 우상이 아닙니다. 엄마하고 지낸 시간들을 추억하기 위한 우리들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꼭 엄마에게 드릴 말씀도 있어요. 하나님도 다 아실 거에요. 그동안 지켜보고 계셨으니... 제가 얼마나 엄마를 그리워하고 엄마 때문에 가슴 아파했는지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잖아요. 하나님, 사랑해요. 질투하지 마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예수님 이름으로 드린 나의 어설픈 첫 번째 기도에 아멘을 해준 사람은 소영이었다.
10시까지 열심히 할머니께 절하던 소영이를 2층으로 올려보내고 자정 무렵에 드디어 엄마와 단둘이 마주하고 앉았다. 엄마는 내가 무슨 말을할지 이미 알고 계신 듯했다. 엄마를 만나자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 나왔다. 한동안 말을 못하고 있었다. 그냥 울기만 했다. 그러다가 말문을 열었다.
“엄마, 엄마가 틀렸어. 이때까지 나 엄마 말 잘 들었지? 나 엄마의 멋진 아들이었지? 그니까 이번엔 내 말대로 해...” 엄마는 말없이 나를 쳐다보고 계셨다.
“엄마, 내가 엄마보다 똑똑하고 많이 배웠지! 엄마보단 현명하게 살라고 그렇게 힘들게 나 가르쳤잖아. 그래서 엄마 아들, 박사 되고 교수 됐잖아. 이제 엄마보다 똑똑한 아들 말 들어. 엄마가 잘 못 알았어...”
내가 계속 울면서 이야기하니 우리 엄마도 같이 우셨다.
“엄마! 우리 집에서 굿할 때 창피하게 동네 사람들 다 쳐다보는데 내게 무당이 시키는 대로 이리 절하고 저리 절하라고 했지? 나 그때 왜 엄마가 시키는대로 절했는지 알아? 엄마가 원하니까. 대학생 아들이 엄마가 시키면 창피한 것도 무릅쓰고 다 한다고, 그만큼 효자라고 으쓱대는 엄마 모습 보고 싶어서 그래서 무당이 시키는대로 나 다 했어. 경동시장에서 사온 자라가 들어있는 물통을 들고 학생들에게 자리 양보 받아가며 몇번씩 버스 갈아타며 그렇게 대성리 팔당댐으로 방생 다니는 엄마가 안쓰러워 엄마 모시고 나도 많이 따라다녔잔아. 강물 속으로 들어가는 자라를 보면서 두손 모으고 허리 숙여 절하라고 하면 나 그렇게 했잖아. 엄마가 좋아하니까. 양초, 과일, 쌀, 마른 북어 들... 바리바리 싸들고 힘들게 북한산에 기도 갈 때도 나 엄마 좇아갔어. 엄마가 그랬지, 아들 차 타고 북한산 가면 구름 위에 있는 것 같다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내가 이런 덕 보려고 그렇게 고생했나 보다라고... 그렇게 좋아하는 엄마 모습 보고 싶어 나 엄마 따라다녔어. 지나가는 등산객들이 우릴 쳐다보든지 말든지... 바위 밑에 한 상 차려놓고, 나 엄마 따라 절했어. 엄마 좋아하라고... 이제 엄마 차례야. 엄마의 그 잘난 아들이 하나님에게 선택되었어. 엄마가 그렇게 싫어했던 예수쟁이가 되고 싶어. 엄마가 그랬지? 이런 것은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거라고. 어쩌면 좋을까? 엄마 버려두고 나만 혼자 하나님께 갈까? 엄마가 믿었던 미신들 다 버리고 나랑 같이 교회 가면 안될까? 그동안 아무 생각없이 엄마가 좋아하니까 내가 엄마 좇아갔듯이. 이제 엄마가 엄마의 똑똑한 박사 아들, 교수 아들 좇아오면 안될까? 엄마, 같이 가자, 응? 교회에 하나님 만나러 가자, 응?”
생명을 살리는 역사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 나에게서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과연 그분을 믿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을 나는 누리고 있습니까?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기 위함입니다.
내게서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과연 그분을 믿고 있습니까?
나는 오늘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까?
새로운 한 해가 밝아왔습니다. 우리 모두 희망과 기대를 안고 2005년을 맞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값있고 보람있는 삶으로 채워가야 하는 기회입니다. 오늘부터 시작해서 저는 “생명의 복음”이란 큰 제목 밑에서 요한복음 연속설교를 드리려고 합니다. 아마도 1년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생각되는데, 교우 여러분의 많은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치심을 전해주는 요한복음서는 공관복음서라고 불리우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와는 다른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성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제4복음서라고 부릅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같은 관점에서, 비슷한 줄거리를 따라서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치심을 전해주기 때문에 공관복음서라고 부르는데, 요한복음서는 공관복음서와 비교할 때 여러 가지 다른 점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의 전도활동의 중심지가 공관복음서에는 갈릴리 지방인데 비해서 요한복음서는 예루살렘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전도활동 기간도 공관복음서는 2년 미만인데, 요한복음서는 3년 내외로 추정이 됩니다. 또 예수님의 가르치심의 핵심내용이 공관복음서는 하나님의 나라인데 비해서, 요한복음서는 생명, 영생을 강조합니다. 복음서의 내용 가운데 가나의 혼인잔치, 나고데모,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나사로를 살리신 일,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고별설교를 하신 일 등은 요한복음서 만이 전해주는 독특한 내용입니다. 공관복음서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과 연관되어 귀신을 쫓아낸 기사가 많은데, 요한복음서에는 한번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도 독특합니다. 이밖에 종말이나 심판에 대한 이해라든지 보혜사 성령님에 대한 가르침도 요한복음서 만이 보여주는 특징있는 가르침입니다. 전통적으로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였던 사도 요한이 주후 85년 전후해서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I.
오늘 저는 복음서의 순서에 따라 1장부터 시작하지 않고 먼저 20:30, 31의 말씀을 택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요한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하지 않은 다른 표징도 많이 행하셨다. 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먼저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서는 단순히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모아놓은 collection이 아니라, 그 많은 이야기 가운데서 선택된 이야기들의 모음, selection임을 밝힙니다. 이 사실은 요한복음 21:25, 맨 마지막 절에서도 되풀이 됩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어서 그것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기록한 책을 다 담아두기에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많은 기억과 전승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 전승들 가운데서 선택된 내용들이 요한복음서 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김동길 교수님께서 신앙강좌에서 역사가의 중요한 임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을 빼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역사가의 일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름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건들을 빼는 것입니다. 그런데 포함시키거나 뺄 때 무슨 기준 위에서 이런 일을 합니까? 그 기준을 우리는 역사관 혹은 사관이라고 부릅니다. 역사가는 사관에 따라서 판단하고 기록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순수하고 객관적인 역사는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역시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가르침과 사건들 속에서 선택되어진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나 전승들이 선택된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 기준은 단순한 사실 전달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사건들, 또 그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난 생명 회복의 역사들이 선택되어 요한복음서에 기록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요한복음서는 신앙의 사건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기대를 안고 기록되었습니다. 믿는 사람들 안에서 생명이 회복되는 역사, 참 생명을 누리는 열매가 맺혀지기를 소망하면서 기록되었습니다.
요한복음 연속설교를 전하게 된 저 자신의 목표와 기대도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함께 나누는 요한복음서의 말씀 속에서 여러분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를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깨달으실 뿐 아니라 그분을 믿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생명, 풍성한 생명을 누리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II.
좀 더 구체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먼저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전해줍니다.
먼저 예수님은 그리스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하도 두 단어가 같이 붙어 다니니까 first name과 last name처럼 보여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말로는 “메시야”란 말인데, 문자적인 뜻은 “기름부음을 받은 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보내 주실 구원자, savior의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말은 우리의 구원자, 내 인생 뿐 아니라 오늘의 이 세상, 이 역사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요한복음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합니다. 공관복음서와 비교해 볼 때,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밝힙니다. 예수님 자신도 이 점을 확실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단순한 인간, 위대한 스승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이같은 고백에 동의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인류의 위대한 4대 성인의 한사람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은 그분 선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밝힙니다. 예수님, 그분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인생의 목적과 길이 결정됩니다. 죽음너머 영원한 우리의 운명도 결정됩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시인 구상 선생님께서는 “나사렛 예수”라는 시 속에서 이렇게 고백하셨습니다.
나자렛 예수!
당신은 과연 어떤 분인가?
마굿간 구유에서 태어나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기구망측한 운명의 소유자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 다니며
상놈과 창녀들과 부역자들과
원수로 여기는 딴 고장치들과
어울리며 먹고 마시기를 즐긴 당신
가난한 사람들에게
굶주린 사람들에게
우는 사람들에게
의로운 일을 하다 미움을 사고
욕을 먹고 쫓기고 누명을 쓰는 사람들에게
<행복된 사람은 바로 당신들>이라고
<하나님 나라는 바로 당신들 차지>라고
엄청난 소리를 한 당신
소경을 보게 하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고
죽은 사람을 살려내고도
스스로의 말대로
온 세상의 미움을 사고
욕을 먹고 쫓기다가
마침내 반역자란 누명을 쓰고
볼꼴없이 죽어 간 철저한 실패자
내가 탯줄에서 떨어지자 맺어져
나의 삶의 바탕이 되고 길이 되고
때로는 멀리하고 싶고 귀찮게 여겨지고
때로는 좌절과 절망까지를 안겨 주고
때로는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생판 낯설어 보이는 당신
당신의 참모습은 과연 어떤 것인가?
당신은 사상가가 아니었다
당신은 도덕가가 아니었다
당신은 현세의 경륜가가 아니었다
아니 당신은 종교의 창시자도 아니었다
그래서 당신은 어떤 지식을 가르치지 않았다
당신은 어떤 규범을 가르치지 않았다
당신은 어떤 사회 혁신운동을 일으키지 않았다
또한 당신은 어떤 해탈을 가르치지도 않았다
한편 당신은 어느 누구의
과거 공적이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았고
당신은 어느 누구의
과거 죄악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았고
당신은 실로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생각이나 말을 뒤엎고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고
고통받는 인류의 해방을 선포하고
다만,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오
그지없는 사랑 그 자체이시니
우리는 어린애처럼 그 품에 들어서
우리도 아버지가 하시듯 서로를 용서하며
우리도 아버지가 하시듯 다함없이 사랑할 때
우리의 삶에 영원한 행복이 깃들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라고 가르치고
그 사랑의 진실을 목숨 바쳐 실천하고
그 사랑의 불멸을 부활로써 증거하였다.
(2) 이어서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예수님을 믿게하는 책인 것을 밝힙니다.
그렇습니다.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것 중요합니다. 아는 것은 바로 믿음의 출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아는 것을 넘어서지 못하고 망설이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예수님을 믿음은 예수님에 관한 사실을 믿는 것 이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과거 속에 묻혀 죽어 계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것으로 끝났다면, 그분에 관한 사실을 믿음으로 족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은 부활하셔서 오늘도 살아계십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살아계신 예수님과의 교제입니다. 그분을 내 삶 속에 모셔드림입니다. 그리고 그분께 우리의 삶을 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신뢰하며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는 바로 이 믿음의 결단을 요청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 나의 주님으로 인정하고 모셔드리는 결단을 요청합니다. 이 결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 모두의 응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열어주시는 새날, 새로운 인생, 새로운 역사에 대한 우리 모두의 응답입니다. 그러므로 믿지않는 것은 단순한 나의 선택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사랑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받아드리지 않고 자신의 고집에 매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3) 한가지 더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중요합니까? 왜 성경은 우리에게 믿어야 됨을 강조합니까? 그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요한복음은 이 새로운 세상, 새로운 인생을 “생명”이란 말로 표현합니다. 여러분, 생명은 그저 살아있다고 다 생명을 누리는 것 아닙니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삶입니다. 풍성한 삶입니다. 그저 목적도, 끝도 모른채 떠밀려 가는 인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능력을 맛보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임하는 풍성한 삶입니다.
이 생명은 죽음에 매이지 않습니다. 유한성의 굴레로부터 자유합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사는 동안 이미 맛보다가 주님께서 부르시면 그 나라에 가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이 생명을 누리는 사람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굴레로부터 자유합니다. 죽음은 바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생명의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도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생명의 사람들은 살아도 감사하고 죽어도 감사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맛보며, 누리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III.
요한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이 회복되는 이 역사를 위하여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생명을 살려왔습니다. 오늘도 이 말씀 속에서 생명 회복의 역사는 능력있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복음으로 사람과 세상을 변혁시키는 교회”를 꿈꾸며 지향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장기계획의 두 번째 해를 맞으면서 저는 함께 요한복음서의 말씀을 나누면서 이 생명의 역사, 이 변혁의 역사가 능력있게 펼쳐지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생명을 살리는 역사를 위하여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국진 목사님께서 쓰신 예수는 있다 라는 책에서 소개하는 주선태 교수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면서 제 설교를 줄입니다.
아름다운 시작, 이 책은 칠성님을 섬기고 점쟁이를 찾아다니며 원불교나 대순진리회에 푹 빠졌던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나 고려대에서 축산학을 전공한 후 국립 경상대학교 축산과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주선태 교수가 예수를 빋게 된 과정을 그린 책입니다.
주선태 교수는 대광고를 나오고 고려대를 다신 수재였습니다. 고려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위스콘신대 연구원으로 있기도 했던 그는 국립 경상대학교 축산과학부 교수로 있다가 안식년에 코네티컷대학에서 객원 교수로 지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는 동안 그는 철저하게 과학적 진리만이 참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스스로 효자임을 자처한 그는 “정치하지 마라, 개고기 먹지 마라, 예수 믿지 마라”는 어머니의 3대 유언을 잘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던 중 코네티컷대학 객원 교수로 있는 동안 그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소영이란 딸을 둔 주선태 교수는 미국 코네티컷대에서 1년 간 객원 교수로 머물면서 처음 6개월 동안은 열심히 연구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골프도 배우며 나름대로 보람찬 하루 하루를 보냈습니다. 특히 일요일에 집에 있기 심심해하는 소영이를 옆집 집사님이 교회에 데리고 가주었기 때문에 더욱 활기찬 주말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소영이가 분명히 같이 교회에 가자고 제안할 것을 예상하고 각종 대비책까지 마련해 두었습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를 앞둔 주말, 교회 사람들이 소영이가 고아인 줄 안다는 교묘한 말에 넘어간 주선태 교수는 난생 처음 아내와 함께 하트포드제일장로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사십이 다 된 나이에 처음으로 교회에 나간 그 날, 그는 목사님의 설교에 눈물을 참지 못하는 경이로움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사우스캐롤라이나 여행을 마친 1월 둘째 주일에는 제 발로 교회를 다시 찾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는 데는 여러 거지 장애가 있었습니다. 가장 큰 장애는 어머니의 유언이었고, 또 하나의 장애는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과학적 사고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을 느낀 주선태 교수는 예수를 영접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기로 한 후 첫 번째 다가온 어머니의 제삿날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제사를 안 지내다고 알고 있었지만 그는 제사상을 차려놓았습니다. 주교수는 이렇게 썼습니다:
제사상을 차렸다. 소영이는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매우 재미있어 한다. 신난 소영이를 무릎 꿇려 앉힌 다음 나고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소영아, 지금부터 하나님께 기도 드릴 거야. 아빠가 뭐라고 기도 드리는지 소영이가 증인이다. 알았지?”
우리 둘은 눈을 감았고 나는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 처음으로 목소리를 내어 기도 드립니다. 왜 제가 이렇게 기도 드리는지 다 아시죠? 하나님께 기쁜 마음으로 다가가기 위함인 것 아시죠? 지금부터 엄마 제사를 지낼 겁니다. 다 아시겠지만 노파심에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질투하실 그런 우상이 아닙니다. 엄마하고 지낸 시간들을 추억하기 위한 우리들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꼭 엄마에게 드릴 말씀도 있어요. 하나님도 다 아실 거에요. 그동안 지켜보고 계셨으니... 제가 얼마나 엄마를 그리워하고 엄마 때문에 가슴 아파했는지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잖아요. 하나님, 사랑해요. 질투하지 마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예수님 이름으로 드린 나의 어설픈 첫 번째 기도에 아멘을 해준 사람은 소영이었다.
10시까지 열심히 할머니께 절하던 소영이를 2층으로 올려보내고 자정 무렵에 드디어 엄마와 단둘이 마주하고 앉았다. 엄마는 내가 무슨 말을할지 이미 알고 계신 듯했다. 엄마를 만나자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 나왔다. 한동안 말을 못하고 있었다. 그냥 울기만 했다. 그러다가 말문을 열었다.
“엄마, 엄마가 틀렸어. 이때까지 나 엄마 말 잘 들었지? 나 엄마의 멋진 아들이었지? 그니까 이번엔 내 말대로 해...” 엄마는 말없이 나를 쳐다보고 계셨다.
“엄마, 내가 엄마보다 똑똑하고 많이 배웠지! 엄마보단 현명하게 살라고 그렇게 힘들게 나 가르쳤잖아. 그래서 엄마 아들, 박사 되고 교수 됐잖아. 이제 엄마보다 똑똑한 아들 말 들어. 엄마가 잘 못 알았어...”
내가 계속 울면서 이야기하니 우리 엄마도 같이 우셨다.
“엄마! 우리 집에서 굿할 때 창피하게 동네 사람들 다 쳐다보는데 내게 무당이 시키는 대로 이리 절하고 저리 절하라고 했지? 나 그때 왜 엄마가 시키는대로 절했는지 알아? 엄마가 원하니까. 대학생 아들이 엄마가 시키면 창피한 것도 무릅쓰고 다 한다고, 그만큼 효자라고 으쓱대는 엄마 모습 보고 싶어서 그래서 무당이 시키는대로 나 다 했어. 경동시장에서 사온 자라가 들어있는 물통을 들고 학생들에게 자리 양보 받아가며 몇번씩 버스 갈아타며 그렇게 대성리 팔당댐으로 방생 다니는 엄마가 안쓰러워 엄마 모시고 나도 많이 따라다녔잔아. 강물 속으로 들어가는 자라를 보면서 두손 모으고 허리 숙여 절하라고 하면 나 그렇게 했잖아. 엄마가 좋아하니까. 양초, 과일, 쌀, 마른 북어 들... 바리바리 싸들고 힘들게 북한산에 기도 갈 때도 나 엄마 좇아갔어. 엄마가 그랬지, 아들 차 타고 북한산 가면 구름 위에 있는 것 같다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내가 이런 덕 보려고 그렇게 고생했나 보다라고... 그렇게 좋아하는 엄마 모습 보고 싶어 나 엄마 따라다녔어. 지나가는 등산객들이 우릴 쳐다보든지 말든지... 바위 밑에 한 상 차려놓고, 나 엄마 따라 절했어. 엄마 좋아하라고... 이제 엄마 차례야. 엄마의 그 잘난 아들이 하나님에게 선택되었어. 엄마가 그렇게 싫어했던 예수쟁이가 되고 싶어. 엄마가 그랬지? 이런 것은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거라고. 어쩌면 좋을까? 엄마 버려두고 나만 혼자 하나님께 갈까? 엄마가 믿었던 미신들 다 버리고 나랑 같이 교회 가면 안될까? 그동안 아무 생각없이 엄마가 좋아하니까 내가 엄마 좇아갔듯이. 이제 엄마가 엄마의 똑똑한 박사 아들, 교수 아들 좇아오면 안될까? 엄마, 같이 가자, 응? 교회에 하나님 만나러 가자, 응?”
생명을 살리는 역사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 나에게서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과연 그분을 믿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을 나는 누리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