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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선희목사 (소망교회)
어느 때에 런던 타임즈가 친구의 정의에 대해서 현상 모집을 한일이 있다고 합니다. 도대체 친구란 무엇이냐? 어떤 사람을 참 좋은 친구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이 현상모집에서 당선된 1, 2, 3등 세 대답만 소개하게 됩니다. 3등으로 당선된 대답은 이렇습니다. 친구란.. 기쁨을 더 해주고 슬픔을 나누는 자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쁠 때 만나면 기쁨이 더 커지고, 슬플 때 만나면 슬픔이 반으로 감해는 자다. 그러니까 기쁠 때에 만나면 내 기쁨을 함께 하고 기쁨을 극대화 해주는 사람 그게 친구예요. 기쁠 때 만나면 기쁘다고 뭐 얘기하면 그까짓 거 가지고 그러냐 초쳐버려 가지고 영 기분 잡쳐 버리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건 친구 아닙니다. 다시 만나지 마세요. 그건 안되구요. 기뻐서 만나면 너무 더 기쁘게 만들어 주고, 슬플 때 만나면 그 근심을 반으로 감해 주는 그런 친구가 진짜 친구다. 또 2등으로 당선된 것은 친구란... 한 보따리의 동전이다.
그저 이해해 주는 거다. 내 모든 사정을 다 이해하고 동정하는 바로 그가 친구다. 뭐 비판하고 설명하고 뭐 어쩌고 그건 아니요. 깊은 동정 그것 이 친구다. 1등으로 당선된 대답은 이렇습니다.
친구란 온 세상이 나에게서 떠날 때 다 나를 버릴 때 내게로 오는 자이다. 그것이 진정한 친구다. 미국의 유명한 설교 가인 웹 박사는 우정을 지속하기 위해서 이 친구의 정을 지속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다는 겁니다.
첫째는 내가 남의 친구가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좋은 친구가 되어 주기를 바라지말고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의 사정을 깊이 이해하면서 내 먼저 좋은 친구가 되려고 노력할 때만이 또 다른 사람도 내게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 있다. 하는 것이구요. 두번째는 진실이올시다.
사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비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비밀이 있다구요. 그러나 친구에게는 비밀이 없습니다. 또 비밀이 없어야만 친구입니다. 이 사이만은 완전한 진실이 있습니다. 친구에게 거짓말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실만이 친구의 정을 지속하는 아주 중요한 조건이 된다. 세번째는 평등 의식이올시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은 봉건주의적 행복관을 가진 사람은 영원히 친구가 없습니다. 친구가 없다면 여러분이 가지는 가치관과 행복관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평등의식을 가져야 됩니다. 너와 나는 똑같다. 지위가 높든 낮든, 학벌이 있든 없든, 나이가 많건 적건, 심지어는 남녀 어른 상관없어요.
문제는 나와 너는 똑같다. 그런 평등의식을 가진 사람만이 친구가 있습니다.
자기 아내를 소개할 때 옛날 사람들은 제 집사람입니다. 제 아내입니다. 제 처입니다. 그랬는데 요새는 유행어가 바꼈어요. 제 친구입니다. 그러더라구요. 마이 걸프랜드 아! 그게 사실이라면 참 좋은 일이예요. 친구죠. 그런데 평등의식 속에만 진정한 친구는 가능해요. 혹이라도 내가 더 잘났고, 더 똑똑하고, 더 높고 낮고.. 이래 가지고는 혹은 열등의식 이 있어도 친구 될 수 없습니다. 오직 겸허한 가운데에서 평등의식을 가져야 친구가 되고, 또 친구를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스티븐 존슨박사는 이렇게 친구에 대해서 질문을 합니다. 네가 곤경에 처했을 때 금방 부를 수 있는 친구가 있느냐? 당장 달려올 사람이 있는가? 없다면 당신은 친구가 없는 사람이요. 또 내가 함께 기뻐할 사람이 있는가?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내가 기쁜 일이 있을 때 찾아가서 붙들고 얘기하면 그래 그래 그거 참 좋겠다. 아무 시기 질투가 없이 내 기쁨에 동참해 줄 사람이 있는가? 그래 그건 친구요. 그러나 내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그거는 친구가 아니요. 또한 내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선뜻 내게 돈을 빌려 주고 만일에 저가 없으면 믿고 다른 사람에게 가서 돈을 꿔서라도 빚을 갚아 주고 내 어려운 사정을 도와줄 사람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긍정적 대답을 하지 못한다면 그는 친구가 없는 사람이요. 당신 자신이 좋은 친구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올시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랑하는 제자들을 앞에 놓고, 너희는 곧 나의 친구다. 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나의 친구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 제자들을 지금 최고로 최고의 지위로 우대하는 시간입니다.
높이 대하는 시간이올시다. 예수님 지금 십자가 지시기 전야밤에 말씀하시는 거요. 이제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일단 제자로 통합니다. 예수님은 스승이요 랍비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제잡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로부터 배우고, 예수를 따르고, 예수를 모방합니다. 제자와 스승입니다.
그래서 제자라고 합니다 만은 두 번째 말씀은 사도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사명을 지워서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보냄 받은 사람은 보낸 자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그가 그들에게 넘겨준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이게 사도입니다. 그런데 제자도 사도도 아니요. 오늘 이 시간에는 친구라고 말합니다. 십자가 지시기 전 날밤에 제자들을 앞에 놓고 너희는 나의 친구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제자들을 동등하게 높이 추대하는 시간입니다.
동시에 예수님 자신은 아주 낮추고, 낮추어서 그들과 수평관계에서 만나는 시간입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사건입니까?
여러분 가끔 그런 경우가 있어요. 이 친구라는 말도 조심해야 됩니다. 같은 동창 대학교 고등학교 동창들 보면은 동창들끼리라는 게 그저 이렇게 출발할 때는 같이 출발했지만 한 20년 지나고 나면 한사람은 출세하고 한 사람은 못하고 한 사람은 잘되고 한 사람은 못되고 다 그렇지요. 그게 다 똑같이 잘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친구가 되는데 이런 때 문제예요.
친구는 친군데 가령 아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아주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은 여러 사람에서 소개하면서 이 사람 내 친구요. 아주 죽마고우요 좋은 친구라고 이렇게 말하면은 이거는 자기는 낮추고 친구는 높이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아주 형편없이 인격적으로나 무엇으로도 형편없는 사람이 아 거 높이 추대 받는 존경받는 사람을 텔레비전에서 보고 저 친구 내 친구야 웃기지 마세요. 언제 친구요. 그게. 이런 이야기는 잘못된 거요. 이건 다른 사람은 격하시키는 거요. 그러니까 나보다 못한 사람을 대할 때는 내 친구요. 할 것이고 나 보다 높은 사람을 향해서 거기다 대고 저 사람 지금 거드름 피우는데 옛날에 형편없는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정말 형편없는 친굽니다 이거는요. 말조심해야 됩니다.
친구라는 말도 함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요. 그래 저는 그래서 죄송합니다만은 찬송 부를 때 예수 내 친구 하는 거 조금 거북스러워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더러 친구하는 건 고맙지만 내가 예수님더러 당신 내 친구. 이거 말 돼요. 좀 말이 안 돼요. 이 사람들 버릇없는 찬송이예요. 그렇지 안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이 친구라는 말도 친구라는 말 하 는 순간에 자기는 낮추고 내 친구는 높이는 그런 결과가 되는 것이예요. 그런데 오늘 깊이 생각하면은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친구로 그렇게 표명하고, 친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느니라.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그러한 좋은 친구로 자기 자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대로 예수님의 자기 표명하는 말씀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만은 그 중에 하나 또 설명하면 목자라는 겁니다. 조금 전에 찬송가, 성가대에서 부를 때 어린양 목자 의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만은 어린양을 사랑하는 목자, 또는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좋은 말씀이예요. 그렇습니다. 정말로 양을 사랑해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그러나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거 하고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거 하고 얘기가 다릅니다 이거는요. 양을 아무리 사랑해서 해도 그건 동물이요 미물입니다. 친구라는 것은 인격입니다. 그리고 친구는 선택적 사랑이요. 자발적 사랑이요.
특별히 중요한 것은 라이벌의식을 넘어서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친구가 왜 어렵습니까? 친구 사랑이 힘든 거예요. 동물사랑은 쉬워요. 그러나 또 불쌍한 사람 사랑하는 것도 쉬워요. 정말로 어려운 것이 친구사랑 하는 거. 왜 그것은 라이벌이기 때문에 시기, 질투하기 때문이요. 그래서 유명한 한 학설이 있지 않습니까?
가까운 사람하고 멀고 먼 사람하고 가까워요. 먼 사람은 나하고 이해관계가 없거든요. 그러나 친구란 나하고 가깝고 이해관계가 있어요. 그래서 저가 올라가는 동안 나는 내려가고, 저가 내려가면 내가 올라가고... 요거 아주 어렵단 말이예요. 시소 게임을 하거든요.
보세요. 여러분 친구, 또 아내도 아내 나름이겠지만은 자 친구가 출세하면 곧 좋지 못한 마누라는 꼭 거기서 말을 하거든요. 당신 친구는 이렇게 출세를 하는데 당신은 친구라면서 이게 뭐요. 이런 여자하고 살려면 힘들죠. 이것이 문제가 된다구요. 그러나 목자가 양을 사랑한다고 해서 누가 질투를 합니까? 시기를 합니까? 친구사랑은 이래서 어려운 거예요.
그래 예수님 말씀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라는 말씀이 말인데 깊이 생각하면요. 그것은 아주 정신을 말하는 것이 예요. 이 몸뚱아리 목숨이 아니예요. 이 목숨이라는 말은 그래 그 푸쉬 케라는 말에서 사이컬리 지라는 말이 나왔어요. 사이코라는 말이 그러니 까 마음을 친구를 위하여 마음과 몸을 다 바치는 그거 최고의 사랑이라는 말이죠. 친구사랑이 가장 높은 사랑이요. 왜 인격적이니까 시기 질투라 하는 그것을 다 넘어서서 사랑하는 것이니까요. 나를 낮추고 그를 높이는 거니까요. 정신적인 엄청난 사랑이 거기 들어있는 거요. 그리고 또한 제자들을 친구로 대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니까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친구란 누군가가 먼저 주도적으로 출발을 해야 됩니다. 인씨에이티브가 중요한 거예요.
모든 사람이 내게 친구 되어 주기만을 바라고 기다리면 죽을 때까지 친구 못 만납니다. 내가 좋은 친구가 먼저 되어야 되죠. 내가 너희를 택하였다. 주도적으로 인씨에이티브를 가지고 내가 너를 사랑했다. 택했다. 먼저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스스로 자기를 크게 비하시킨 것이올시다. 그리고 제자를 높이는 시간이요. 그러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참 눈물이 겹도록 귀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친구가 소화가 안돼요. 이상하게 소화가 안되기 시작하면서 점점 입맛도 없고 괴로워요. 몸은 자꾸 마르고 자기 친구를 불러 가지고 내가 요새 소화도 잘 안 되고 위가 좀 아프다고 속이 아프다고 하니까 아 그럼 병원에 가서 진찰을 좀 해보지. 알았어. 병원에 안가요. 왜 안 가느 냐? 이 사람이 소심한 사람이라 갔다가 위암 꼭 그럴 것 같거든요. 꼭 위장병 이거 고장난 거 같거든요. 큰 병이 걸린 거 같아서 그 진찰이 나올까 봐 위암이라는 진찰이 나올까봐 겁이 나서 병원에 안 갑니다. 또 한 가지는 위장병 조사할 때는 내시경 하면서 뭘 이렇게 복잡하게 한다며 아유 그거 힘들다며 그러면서 이 사람이 병원에 못 가요. 그 친구가 몇 번 권면했지만 이 친구가 병원에 안가요. 얼마 후에 그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자 네가 소화가 안된다고 하더니 나도 소화가 안돼. 나도 위장이 안된 거 같애 나하고 병원에 같이 가세. 그래 둘이 같이 가서 진찰을 받는데 진찰 받아 보니까 뭐 견딜만 하더래요. 두 사람이 같이 진찰을 하고 난 다음에 의사가 말하기를 둘 다 병이 없습니다. 건강하다고 얘기해 줬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병원을 나오면서 그 먼저 위장병 걸렸던 사람은 생각했습니다. 아내 친구는 위장이 아프지 않은데 나를 위해서 아프다고 하고 나하고 함께 와서 진찰을 받았구나. 참으로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참 좋은 친구는 남을 비판하는 게 아니예요. 의지가 있느니 없느니 그런 설교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자기를 낮추어서 그와 나를 동격시 해 버리는 거예요. 그거서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오늘 성경에도 보니까 기쁨을 나누자고 합니다. 나의 기쁨을 너희에게 준다. 내 기쁨을 이 신비로운 기쁨을 함께 나누자. 이렇게 말씀하시구요. 또한 비밀이 없다고 말합니다. 너희와 나의 사이에는 비밀이 없다. 종은 주인의 뜻을 모르지만 나는 너희에게 모든 말을 다 했다. 절대 비밀 없이 모든 말을 다 했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너희가 이해해 줄 거다.
여러분 친구라고 말하면서 말 못 알아듣는다는 얘기하면은 그건 친구가 아니예요. 다 이해할 줄로 믿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줄로 믿어요. 그래 예수님 참 생각하면 얼마나 고마우신 분입니까? 그 답답한 제자들 몇 일 있다가 몇 일도 아니죠 몇 시간 후에 예수님을 모른 다고 다 도망갈 사람들이요. 그 사람들을 앞에 놓고 예수님 말씀하고 발을 씻기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이후에는 알리라. 너희들 다 들어둬라. 충분히 알꺼다. 내 속뜻을 다 알꺼다. 이걸 믿고 있어요. 이해 능력을 충분히 믿고 있구요. 그뿐입니까? 참 놀라운 것은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도망가서 물고기 잡을 때 찾아가서 말씀하실 때 말입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성경이 너무 너무 고마워요. 예수님 참 좋으신 분이예요. 아 그 자리에 가서 나 같으면 꼭 한마디가 있거든요. 그러기에 깨어 기도하라 하지 않더냐? 아 모른다고 한 마디 했으면 되지 뭘 세 번씩하고 맹세까지 했냐? 넌 어째서 이 모양이냐? 한 마디 꼭 할 것 같은데 아무 말이 없어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양을 먹이라. 거기다가 제 가 좀 사족을 달면은 과거는 묻지 않으마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나를 위하여 네가 십자가를 져야 되겠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믿어요. 전적으로 믿어요. 예수님의 그 모든 말씀하신 거 충분히 이해하고 그 말씀 안에 사는 것으로 믿어요. 믿어 주었어요. 이게 친구라구요. 의심하는 건 친구가 아니요. 완전히 믿었어요. 그리고 나아가서는 제자들이 좋은 친구가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친구라고 하는 것은 평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지거든요. 절대로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적인 것이예요.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좋은 친구다. 너희들 또한 서로 사랑하라 그랬어요. 서로 사랑하라. 아가파테 알렐루스 내가 아가페의 사랑을 하니까 너희들도 아가페의 사랑을 하라. 내가 너희들의 친구 되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친구가 되었다. 너희도 좋은 친구가 되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조선일보 8월28일자에 나온 말입니다. 아름다운 우정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경민이라고 하는 18세 소녀 가장이 있었습니다. 이 소녀 가장이 아주 애써서 고학을 해 가지고 혼자 공부를 해 가지고 학원을 다녀서 대입검 정고시에 합격을 합니다. 합격하자마자 합격증을 가지고 자기 친구 지현이를 찾아가서 자랑을 합니다. 둘이가 그렇게 기뻐하게 됩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이 경민이는 6년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는 또 아주 당뇨병으로 심한 고생을 합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을 못합니다. 상업학교에 들어갔다가 중도에 그만 두고 편의점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많은 고생을 하면서 어머니를 병 수발을 하고 또 어린 동생들을 가르치고 그렇습니다.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럴 때에 그 친구 지현이라고 하는 친구가 찾아와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봉투 하나를 던져주고 갔습니다. 봉투를 뜯어보니까 거기에 편지를 이렇게 썼습니다. 항상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지칠 줄 모르던 네가 요즘 구름에 쌓여 빛을 보지 못하는구나. 힘들어도 이겨낼 줄로 믿는다. 이 작은 이것은 학원비로 보태 써라. 나는 이것을 마련하기 위해서 몇 달 동안 저금을 했단다.
여기서 용기를 그 어려운 가운데서 또 저녁마다 공부를 합니다. 그래서 이 대학검정고시에 합격을 한 거예요. 그리고 나서 그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는 이렇습니다. 지현아! 고마워 모든 것은 네 덕택이야 나도 꼭 대학에 입학을 하고 앞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힘쓸께. 꼭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힘쓸께 이것이 편지 내용입니다. 진정한 친구를 가졌으면 다시 나도 남에게 또 좋은 친구가 되야 되는 게 아닙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하니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우리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것은 내가 너희를 종이라 말하지 않는다. 친구라고 말한다. 왜? 너희 같은 굴종, 너희 같은 독종을 원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율법적 관계에서 보상받기 위하여 혹은 저주가 무서워서 벌벌 떠는 그따위 순종 원치 않는다. 사랑하는 친구로서의 그 같은 충성, 그 같은 사랑, 그 같은 마음을 원한다. 그런고로 나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고 부르노라. 나는 너희를 친구로 대하고 죽는다. 너희는 이 같은 사랑을 서로 나누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좋은 친구가 되라. 이제 우리가 다시 생각해야겠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곧 나의 친구라. 깊이 생각해야겠습니다. 이런 친구를 가진 자는 절대 고독하지 않습니다.
어느 때에 런던 타임즈가 친구의 정의에 대해서 현상 모집을 한일이 있다고 합니다. 도대체 친구란 무엇이냐? 어떤 사람을 참 좋은 친구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이 현상모집에서 당선된 1, 2, 3등 세 대답만 소개하게 됩니다. 3등으로 당선된 대답은 이렇습니다. 친구란.. 기쁨을 더 해주고 슬픔을 나누는 자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쁠 때 만나면 기쁨이 더 커지고, 슬플 때 만나면 슬픔이 반으로 감해는 자다. 그러니까 기쁠 때에 만나면 내 기쁨을 함께 하고 기쁨을 극대화 해주는 사람 그게 친구예요. 기쁠 때 만나면 기쁘다고 뭐 얘기하면 그까짓 거 가지고 그러냐 초쳐버려 가지고 영 기분 잡쳐 버리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건 친구 아닙니다. 다시 만나지 마세요. 그건 안되구요. 기뻐서 만나면 너무 더 기쁘게 만들어 주고, 슬플 때 만나면 그 근심을 반으로 감해 주는 그런 친구가 진짜 친구다. 또 2등으로 당선된 것은 친구란... 한 보따리의 동전이다.
그저 이해해 주는 거다. 내 모든 사정을 다 이해하고 동정하는 바로 그가 친구다. 뭐 비판하고 설명하고 뭐 어쩌고 그건 아니요. 깊은 동정 그것 이 친구다. 1등으로 당선된 대답은 이렇습니다.
친구란 온 세상이 나에게서 떠날 때 다 나를 버릴 때 내게로 오는 자이다. 그것이 진정한 친구다. 미국의 유명한 설교 가인 웹 박사는 우정을 지속하기 위해서 이 친구의 정을 지속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다는 겁니다.
첫째는 내가 남의 친구가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좋은 친구가 되어 주기를 바라지말고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의 사정을 깊이 이해하면서 내 먼저 좋은 친구가 되려고 노력할 때만이 또 다른 사람도 내게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 있다. 하는 것이구요. 두번째는 진실이올시다.
사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비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비밀이 있다구요. 그러나 친구에게는 비밀이 없습니다. 또 비밀이 없어야만 친구입니다. 이 사이만은 완전한 진실이 있습니다. 친구에게 거짓말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실만이 친구의 정을 지속하는 아주 중요한 조건이 된다. 세번째는 평등 의식이올시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은 봉건주의적 행복관을 가진 사람은 영원히 친구가 없습니다. 친구가 없다면 여러분이 가지는 가치관과 행복관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평등의식을 가져야 됩니다. 너와 나는 똑같다. 지위가 높든 낮든, 학벌이 있든 없든, 나이가 많건 적건, 심지어는 남녀 어른 상관없어요.
문제는 나와 너는 똑같다. 그런 평등의식을 가진 사람만이 친구가 있습니다.
자기 아내를 소개할 때 옛날 사람들은 제 집사람입니다. 제 아내입니다. 제 처입니다. 그랬는데 요새는 유행어가 바꼈어요. 제 친구입니다. 그러더라구요. 마이 걸프랜드 아! 그게 사실이라면 참 좋은 일이예요. 친구죠. 그런데 평등의식 속에만 진정한 친구는 가능해요. 혹이라도 내가 더 잘났고, 더 똑똑하고, 더 높고 낮고.. 이래 가지고는 혹은 열등의식 이 있어도 친구 될 수 없습니다. 오직 겸허한 가운데에서 평등의식을 가져야 친구가 되고, 또 친구를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스티븐 존슨박사는 이렇게 친구에 대해서 질문을 합니다. 네가 곤경에 처했을 때 금방 부를 수 있는 친구가 있느냐? 당장 달려올 사람이 있는가? 없다면 당신은 친구가 없는 사람이요. 또 내가 함께 기뻐할 사람이 있는가?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내가 기쁜 일이 있을 때 찾아가서 붙들고 얘기하면 그래 그래 그거 참 좋겠다. 아무 시기 질투가 없이 내 기쁨에 동참해 줄 사람이 있는가? 그래 그건 친구요. 그러나 내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그거는 친구가 아니요. 또한 내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선뜻 내게 돈을 빌려 주고 만일에 저가 없으면 믿고 다른 사람에게 가서 돈을 꿔서라도 빚을 갚아 주고 내 어려운 사정을 도와줄 사람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긍정적 대답을 하지 못한다면 그는 친구가 없는 사람이요. 당신 자신이 좋은 친구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올시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랑하는 제자들을 앞에 놓고, 너희는 곧 나의 친구다. 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나의 친구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 제자들을 지금 최고로 최고의 지위로 우대하는 시간입니다.
높이 대하는 시간이올시다. 예수님 지금 십자가 지시기 전야밤에 말씀하시는 거요. 이제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일단 제자로 통합니다. 예수님은 스승이요 랍비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제잡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로부터 배우고, 예수를 따르고, 예수를 모방합니다. 제자와 스승입니다.
그래서 제자라고 합니다 만은 두 번째 말씀은 사도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사명을 지워서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보냄 받은 사람은 보낸 자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그가 그들에게 넘겨준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이게 사도입니다. 그런데 제자도 사도도 아니요. 오늘 이 시간에는 친구라고 말합니다. 십자가 지시기 전 날밤에 제자들을 앞에 놓고 너희는 나의 친구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제자들을 동등하게 높이 추대하는 시간입니다.
동시에 예수님 자신은 아주 낮추고, 낮추어서 그들과 수평관계에서 만나는 시간입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사건입니까?
여러분 가끔 그런 경우가 있어요. 이 친구라는 말도 조심해야 됩니다. 같은 동창 대학교 고등학교 동창들 보면은 동창들끼리라는 게 그저 이렇게 출발할 때는 같이 출발했지만 한 20년 지나고 나면 한사람은 출세하고 한 사람은 못하고 한 사람은 잘되고 한 사람은 못되고 다 그렇지요. 그게 다 똑같이 잘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친구가 되는데 이런 때 문제예요.
친구는 친군데 가령 아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아주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은 여러 사람에서 소개하면서 이 사람 내 친구요. 아주 죽마고우요 좋은 친구라고 이렇게 말하면은 이거는 자기는 낮추고 친구는 높이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아주 형편없이 인격적으로나 무엇으로도 형편없는 사람이 아 거 높이 추대 받는 존경받는 사람을 텔레비전에서 보고 저 친구 내 친구야 웃기지 마세요. 언제 친구요. 그게. 이런 이야기는 잘못된 거요. 이건 다른 사람은 격하시키는 거요. 그러니까 나보다 못한 사람을 대할 때는 내 친구요. 할 것이고 나 보다 높은 사람을 향해서 거기다 대고 저 사람 지금 거드름 피우는데 옛날에 형편없는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정말 형편없는 친굽니다 이거는요. 말조심해야 됩니다.
친구라는 말도 함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요. 그래 저는 그래서 죄송합니다만은 찬송 부를 때 예수 내 친구 하는 거 조금 거북스러워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더러 친구하는 건 고맙지만 내가 예수님더러 당신 내 친구. 이거 말 돼요. 좀 말이 안 돼요. 이 사람들 버릇없는 찬송이예요. 그렇지 안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이 친구라는 말도 친구라는 말 하 는 순간에 자기는 낮추고 내 친구는 높이는 그런 결과가 되는 것이예요. 그런데 오늘 깊이 생각하면은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친구로 그렇게 표명하고, 친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느니라.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그러한 좋은 친구로 자기 자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대로 예수님의 자기 표명하는 말씀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만은 그 중에 하나 또 설명하면 목자라는 겁니다. 조금 전에 찬송가, 성가대에서 부를 때 어린양 목자 의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만은 어린양을 사랑하는 목자, 또는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좋은 말씀이예요. 그렇습니다. 정말로 양을 사랑해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그러나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거 하고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거 하고 얘기가 다릅니다 이거는요. 양을 아무리 사랑해서 해도 그건 동물이요 미물입니다. 친구라는 것은 인격입니다. 그리고 친구는 선택적 사랑이요. 자발적 사랑이요.
특별히 중요한 것은 라이벌의식을 넘어서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친구가 왜 어렵습니까? 친구 사랑이 힘든 거예요. 동물사랑은 쉬워요. 그러나 또 불쌍한 사람 사랑하는 것도 쉬워요. 정말로 어려운 것이 친구사랑 하는 거. 왜 그것은 라이벌이기 때문에 시기, 질투하기 때문이요. 그래서 유명한 한 학설이 있지 않습니까?
가까운 사람하고 멀고 먼 사람하고 가까워요. 먼 사람은 나하고 이해관계가 없거든요. 그러나 친구란 나하고 가깝고 이해관계가 있어요. 그래서 저가 올라가는 동안 나는 내려가고, 저가 내려가면 내가 올라가고... 요거 아주 어렵단 말이예요. 시소 게임을 하거든요.
보세요. 여러분 친구, 또 아내도 아내 나름이겠지만은 자 친구가 출세하면 곧 좋지 못한 마누라는 꼭 거기서 말을 하거든요. 당신 친구는 이렇게 출세를 하는데 당신은 친구라면서 이게 뭐요. 이런 여자하고 살려면 힘들죠. 이것이 문제가 된다구요. 그러나 목자가 양을 사랑한다고 해서 누가 질투를 합니까? 시기를 합니까? 친구사랑은 이래서 어려운 거예요.
그래 예수님 말씀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라는 말씀이 말인데 깊이 생각하면요. 그것은 아주 정신을 말하는 것이 예요. 이 몸뚱아리 목숨이 아니예요. 이 목숨이라는 말은 그래 그 푸쉬 케라는 말에서 사이컬리 지라는 말이 나왔어요. 사이코라는 말이 그러니 까 마음을 친구를 위하여 마음과 몸을 다 바치는 그거 최고의 사랑이라는 말이죠. 친구사랑이 가장 높은 사랑이요. 왜 인격적이니까 시기 질투라 하는 그것을 다 넘어서서 사랑하는 것이니까요. 나를 낮추고 그를 높이는 거니까요. 정신적인 엄청난 사랑이 거기 들어있는 거요. 그리고 또한 제자들을 친구로 대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니까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친구란 누군가가 먼저 주도적으로 출발을 해야 됩니다. 인씨에이티브가 중요한 거예요.
모든 사람이 내게 친구 되어 주기만을 바라고 기다리면 죽을 때까지 친구 못 만납니다. 내가 좋은 친구가 먼저 되어야 되죠. 내가 너희를 택하였다. 주도적으로 인씨에이티브를 가지고 내가 너를 사랑했다. 택했다. 먼저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스스로 자기를 크게 비하시킨 것이올시다. 그리고 제자를 높이는 시간이요. 그러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참 눈물이 겹도록 귀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친구가 소화가 안돼요. 이상하게 소화가 안되기 시작하면서 점점 입맛도 없고 괴로워요. 몸은 자꾸 마르고 자기 친구를 불러 가지고 내가 요새 소화도 잘 안 되고 위가 좀 아프다고 속이 아프다고 하니까 아 그럼 병원에 가서 진찰을 좀 해보지. 알았어. 병원에 안가요. 왜 안 가느 냐? 이 사람이 소심한 사람이라 갔다가 위암 꼭 그럴 것 같거든요. 꼭 위장병 이거 고장난 거 같거든요. 큰 병이 걸린 거 같아서 그 진찰이 나올까 봐 위암이라는 진찰이 나올까봐 겁이 나서 병원에 안 갑니다. 또 한 가지는 위장병 조사할 때는 내시경 하면서 뭘 이렇게 복잡하게 한다며 아유 그거 힘들다며 그러면서 이 사람이 병원에 못 가요. 그 친구가 몇 번 권면했지만 이 친구가 병원에 안가요. 얼마 후에 그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자 네가 소화가 안된다고 하더니 나도 소화가 안돼. 나도 위장이 안된 거 같애 나하고 병원에 같이 가세. 그래 둘이 같이 가서 진찰을 받는데 진찰 받아 보니까 뭐 견딜만 하더래요. 두 사람이 같이 진찰을 하고 난 다음에 의사가 말하기를 둘 다 병이 없습니다. 건강하다고 얘기해 줬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병원을 나오면서 그 먼저 위장병 걸렸던 사람은 생각했습니다. 아내 친구는 위장이 아프지 않은데 나를 위해서 아프다고 하고 나하고 함께 와서 진찰을 받았구나. 참으로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참 좋은 친구는 남을 비판하는 게 아니예요. 의지가 있느니 없느니 그런 설교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자기를 낮추어서 그와 나를 동격시 해 버리는 거예요. 그거서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오늘 성경에도 보니까 기쁨을 나누자고 합니다. 나의 기쁨을 너희에게 준다. 내 기쁨을 이 신비로운 기쁨을 함께 나누자. 이렇게 말씀하시구요. 또한 비밀이 없다고 말합니다. 너희와 나의 사이에는 비밀이 없다. 종은 주인의 뜻을 모르지만 나는 너희에게 모든 말을 다 했다. 절대 비밀 없이 모든 말을 다 했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너희가 이해해 줄 거다.
여러분 친구라고 말하면서 말 못 알아듣는다는 얘기하면은 그건 친구가 아니예요. 다 이해할 줄로 믿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줄로 믿어요. 그래 예수님 참 생각하면 얼마나 고마우신 분입니까? 그 답답한 제자들 몇 일 있다가 몇 일도 아니죠 몇 시간 후에 예수님을 모른 다고 다 도망갈 사람들이요. 그 사람들을 앞에 놓고 예수님 말씀하고 발을 씻기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이후에는 알리라. 너희들 다 들어둬라. 충분히 알꺼다. 내 속뜻을 다 알꺼다. 이걸 믿고 있어요. 이해 능력을 충분히 믿고 있구요. 그뿐입니까? 참 놀라운 것은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도망가서 물고기 잡을 때 찾아가서 말씀하실 때 말입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성경이 너무 너무 고마워요. 예수님 참 좋으신 분이예요. 아 그 자리에 가서 나 같으면 꼭 한마디가 있거든요. 그러기에 깨어 기도하라 하지 않더냐? 아 모른다고 한 마디 했으면 되지 뭘 세 번씩하고 맹세까지 했냐? 넌 어째서 이 모양이냐? 한 마디 꼭 할 것 같은데 아무 말이 없어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양을 먹이라. 거기다가 제 가 좀 사족을 달면은 과거는 묻지 않으마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나를 위하여 네가 십자가를 져야 되겠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믿어요. 전적으로 믿어요. 예수님의 그 모든 말씀하신 거 충분히 이해하고 그 말씀 안에 사는 것으로 믿어요. 믿어 주었어요. 이게 친구라구요. 의심하는 건 친구가 아니요. 완전히 믿었어요. 그리고 나아가서는 제자들이 좋은 친구가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친구라고 하는 것은 평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지거든요. 절대로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적인 것이예요.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좋은 친구다. 너희들 또한 서로 사랑하라 그랬어요. 서로 사랑하라. 아가파테 알렐루스 내가 아가페의 사랑을 하니까 너희들도 아가페의 사랑을 하라. 내가 너희들의 친구 되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친구가 되었다. 너희도 좋은 친구가 되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조선일보 8월28일자에 나온 말입니다. 아름다운 우정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경민이라고 하는 18세 소녀 가장이 있었습니다. 이 소녀 가장이 아주 애써서 고학을 해 가지고 혼자 공부를 해 가지고 학원을 다녀서 대입검 정고시에 합격을 합니다. 합격하자마자 합격증을 가지고 자기 친구 지현이를 찾아가서 자랑을 합니다. 둘이가 그렇게 기뻐하게 됩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이 경민이는 6년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는 또 아주 당뇨병으로 심한 고생을 합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을 못합니다. 상업학교에 들어갔다가 중도에 그만 두고 편의점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많은 고생을 하면서 어머니를 병 수발을 하고 또 어린 동생들을 가르치고 그렇습니다.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럴 때에 그 친구 지현이라고 하는 친구가 찾아와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봉투 하나를 던져주고 갔습니다. 봉투를 뜯어보니까 거기에 편지를 이렇게 썼습니다. 항상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지칠 줄 모르던 네가 요즘 구름에 쌓여 빛을 보지 못하는구나. 힘들어도 이겨낼 줄로 믿는다. 이 작은 이것은 학원비로 보태 써라. 나는 이것을 마련하기 위해서 몇 달 동안 저금을 했단다.
여기서 용기를 그 어려운 가운데서 또 저녁마다 공부를 합니다. 그래서 이 대학검정고시에 합격을 한 거예요. 그리고 나서 그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는 이렇습니다. 지현아! 고마워 모든 것은 네 덕택이야 나도 꼭 대학에 입학을 하고 앞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힘쓸께. 꼭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힘쓸께 이것이 편지 내용입니다. 진정한 친구를 가졌으면 다시 나도 남에게 또 좋은 친구가 되야 되는 게 아닙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하니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우리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것은 내가 너희를 종이라 말하지 않는다. 친구라고 말한다. 왜? 너희 같은 굴종, 너희 같은 독종을 원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율법적 관계에서 보상받기 위하여 혹은 저주가 무서워서 벌벌 떠는 그따위 순종 원치 않는다. 사랑하는 친구로서의 그 같은 충성, 그 같은 사랑, 그 같은 마음을 원한다. 그런고로 나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고 부르노라. 나는 너희를 친구로 대하고 죽는다. 너희는 이 같은 사랑을 서로 나누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좋은 친구가 되라. 이제 우리가 다시 생각해야겠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곧 나의 친구라. 깊이 생각해야겠습니다. 이런 친구를 가진 자는 절대 고독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