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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영목사 (부천제일교회)
여러분들은 신앙생활 하시면서 무엇이 큰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능력 없음이 문제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만나뵙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까? 기도의 응답이 안돼서 문제입니까? 혹은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까? 신앙자의 가장 근본 문제는 신앙의 주체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3년 간 따라 다니면서 말씀을 받기도 하고, 먹기도 하고, 함께 자기도 하면서 잘 양육된 제자들에게 주님은 두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즉, 타자(他者)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하는 질문과 또 하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알고 있느냐?''하는 물음입니다. 이 질문을 받은 제자들은 타인(他人)들이 말하는 말은 아주 용의하게 그 견해를 밝혔습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예수님을 엘리야가 죽었다가 살아왔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는 큰 능력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막상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는 물음을 받고는 묵묵부답입니다. 한 마디도 말을 못합니다. 참 이상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주님에 대한 이해가 있을 텐데 분명히 있을 텐데 남의 말은 하고 왜 자기 말은 못하느냐 말이에요. 침묵이 흐르던 중에 마침 베드로가 벌떡 일어납니다. 그야말로 휘파람을 불 듯이 한번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과 주님을 아는 지식의 답변을 들은 주님, 주님도 어떤 면에서는 잔인한 면이 계세요. 그 수제자 체면도 보고, 자존심도 살리기 위해서 ''그래, 역시 수제자는 수제자다.''했으면 좋을 텐데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네가 그렇게 고백하게 되었고, 그 지식을 갖게 된 것은 네가 아니고 하늘 아버지께서 너로 하여금 그러한 지식과 신앙의 고백을 하게 하셨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주님 앞에 나와 주님의 신앙의 고백을 합니다. 여러분이 주님 앞에 찬미를 올립니다. 여러분이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립니다. 여러분이 지금 예배를 드리고, 여러분이 지금 찬미를 하고, 여러분이 지금 신앙의 고백을 하는 것입니까? 천국 문이 닫혔습니다. 그 때, 여러 사람들이 몰려와서 아주 당돌하고도 용감하게 천국 문을 두드립니다. ''문열어 주시오. 문열어 주시오. 우리가 왔습니다.'' 그러나 쉽사리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몰려온 사람들이 외칩니다. ''예수님, 예수님 우리가 왔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많은 병자를 낫게 하고, 예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예수 이름으로 능력을 베푼 저희들이 왔습니다. 문을 여십시오.'' 이 때, 틈새로 들리는 아주 세미한 음성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모른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예수님이 거짓말을 하시는 것인지, 지금 여기 찾아와 문 열라고 두드리고, 지금 난동 비슷하게 자기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거짓말하는 것인지, 둘 중에 한 쪽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주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병을 고쳤다고? 그러면 내가 한 거야. 너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다고? 그러면 내가 한 거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능력을 베풀었다고? 그러면 내가 한 거야. 너희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어.'' 여러분, 이제 다시 한번 우리의 신앙을 생각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자기들이 한 줄 알고, 자기들이 능력자인 줄 알고, 자기들이 큰 하나님 앞에 공로를 세운 줄 알고, 세상에 있으면서 많은 사람의 종용도 한 몸에 받고, 부(富)도 누렸을 것이며, 명성도 높았을 것입니다. 그랬으니 천국에서 받을 것도 없고, 천국 문일 열릴 것도 없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참 크게 쓰임 받은 종이었습니다. 그의 사적 중에 우리의 기억에 가장 많이 남고 있는 것이 갈멜산의 사건입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이방 사제 850명과 그리고 엘리야 한 사람, 이제 영적 쟁투가 벌어진 것입니다. 제사하는 방식이나 기도하는 방식이 바알과 아세라의 사제들은 그들이 아주 극단적인 제사 기도 방법을 사용합니다. 자기의 온 몸을 쳐서 학대해서 피의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열광적이지요. 그러나 엘리야는 조용히 홀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제물로 본 다면, 그야말로 풍성하고, 희귀한 제물을 가득 쌓아놓고, 하나님 앞에 이방 사제들은 제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초라한 제물을 놓고, 하나님 앞에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그 열광적인 이방 사제들의 그 열기는 가히 하늘을 찌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엘리야는 그 제물 그 가로 물을 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불로 인해서 엘리야의 제물을 태워 받게 됩니다. 이 일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사제들은 쫓김을 당하거나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 일 뒤에 더 중시 여기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그 일 이후에 갑자기 영적 탈진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광야를 지나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열왕기상 19장 4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 능력에 한계가 왔습니다. 나는 더 주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저 이세벨이 자기의 사자를 보내서 나의 생명을 노리고 있습니다.'' 이세벨은 아합 왕의 부인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여자입니다. ''이제는 나는 더 생명을 유지할 이유가 없습니다.'' 죽기를 청했습니다. 여러분, 자기 능력 없음을 아는 엘리야, 여기에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네가 너를 위해 일해왔느냐? 네가 너의 능력으로 일해왔느냐? 내가 너를 썼으매 너는 쓰임을 받았을 뿐인데 왜 너의 능력을 놓고 한다. 못한다. 말이 많으냐?''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일을 망각한 엘리야, 결국은 이 일로 그의 사역은 종료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엘리야의 종료로서 이 사건을 매듭짓지 않습니다. 엘리야에게 마지막 사역을 명령하시는데 열왕기상 19장 15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다메섹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내가 왕을 세우는 것이다. 아합 왕이 뭐가 두렵느냐? 내가 세운 사람인데, 내가 그를 폐하기도 하는데, 그 부인이 너에게 조금 공포스러운 말을 했다고 해서 네가 나의 종됨을 포기하느냐?''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이것만은 잊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 이 엘리야가 진술한 내용을 보면, 열왕기상 19장 18절 말씀 이하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를 죽였음이며 이제 오직 나만 남았나이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다시 답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신앙 생활에 가장 큰 위기는 고독할 때고, 고독보다 더 무서운 위기는 독선일 때입니다. ''나 혼자 성결하구나. 세상은 다 부패했구나. 이젠 진정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자는 나밖에 없구나.'' 생각할 때, 그는 이미 성결치 않는 자입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나만이 온전하구나. 자만하고 자부하는 것, 이것은 이미 하나님께 버림받은 존재예요.'' 생각해 보십시오. 칠천이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결한 사람들은 잘 보존하시고, 보호하시고, 하나님이 쓰실 사람을 유념하시고 계세요. 그런데 왜 이렇게 엘리야는 지금 자기 독선에 빠져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외로울 때가 있습니까? 이 때는 벌써 여러분께서 시험에 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요령껏 잘 사는데 나는 왜 고지식하게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가? 이 때가 나 홀로 라고 생각될 때가 신앙적 위기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곳에 그렇게 사람에게 띄지 않는 자리에서 성실하고, 신실하고,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기에 심판은 연기되고, 그러기에 오늘도 태양은 하늘 위에 비치고 있습니다. 성결한 종들이여 깨어나십시오. 내가 성결하게 산다고 생각할 때, 이미 나는 넘어진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를 성결케 하셨다고 고백할 때, 그는 튼튼한 강건의 믿음이, 내가 주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무언가 한다고 생각되시면 넘어진 거예요. 주님이 나를 쓰시매 감사할 때, 강건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를 위하여 헌신했다고 생각되면, 보상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 생깁니다. 하나님께 보상받고 싶고, 그리고 또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요. 이것이 빈 쭉정이 되는 영성의 사람이 되어 가는 길이에요. 교회, 많은 문제가 보입니까? 그것은 내가 교회를 책임지려고 할 때에 많은 문제가 보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요, 주께서 교회를 사역하신다고 믿어지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대체로 ''우리 교회에 문제 있다. 이것 걱정이다. 우리 기도하자.'' 들어보면 꽤나 교회를 사랑하는 것 같은 말이죠? 믿음 없는 소리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주님의 장중에 잡힌 종은 어떤 문제도 문제로 보이지 않아요. 왜? 주님께서 책임지시니까.
여러분,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유다야, 네 할 일을 하라. 가룟 유다야, 네가 생각하고, 계획하고, 네가 진행하던 일을 계속하라. 네가 이상적 사회가 이루어지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야겠다고 생각했으니 그대로 하라.'' 내 뜻대로 교회를 이끌어가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당신들 마음대로 할 수 없을 테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있을 때, 그의 영력이 우리 안에 역사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와 비진리 사이의 차이는 바로 신앙의 주체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에 ''내가 시행하리라.''는 말이 있는데 ''내가 시행하리라''하는 말을 ''내가 내 일을 하고, 내가 내 뜻대로 하고, 내가 내 생각대로 하고, 내 맘대로 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진리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사용하셔서 주님의 뜻을 이룰 것이다.'' 이렇게 믿고 따르면, 이것이 바른 신앙생활입니다. 제자들이 주님께 나와서 ''주님, 기도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습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이렇게 하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여러 가지 장애가 있습니다만 죄가 큰 장애입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것은 사랑인데 사랑을 이루자면 은사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게 하옵소서.''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하나님의 그 크신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이루어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의 정의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간구가 기도이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타종교의 기도는 다릅니다. 타종교는 기도를 통해서 자기를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나는 허무한 존재다.''라고 생각해서 모든 것을 다 버리는 일탈의 경지에 가는 것이 기도일 수도 있고요, 또 하나는 상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내가 어떤 신으로부터 능력을 위임받아 그 상황을 해결해 가려고 하는 수단으로서의 기도가 있습니다. 또 인간에게는 종교 본능이 있습니다. 종교 본능은 의식 없는 의식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의 상황, 삶의 형편이 극단적으로 어려워질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에 있는 종교 본능이 피어올라서 종교적 존재로 행위 하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처음 왕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을 받았지요. 그러나 그가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사울이 엔돌에 있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때입니다. 내 기가 막힌 상황을 어떻게 타계할 수 있을까? 그래서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던 것이지요. 사울은 하나님의 종에서 종교적 존재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중에 가장 비극적이고, 수치스러운 역사라면 아마 엘리 제사장 시절일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에게는 홉니와 비느하스라는 두 자녀가 있는 데 이 두 자녀는 이미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 때, 블레셋이 침공해 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나가면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법궤를 메고 앞서 나가는데 자기들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줄 모르고, 법궤만 메고 가면 승리할 것이라는 우상숭배를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의 목은 부러집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처참하게 죽임을 맞게 되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는 다곤 신전에 가서 안치되어야 하는 비극이 찾아오게 됩니다. 종교인은 되었으나 하나님과는 멀었던 것입니다. 바벨론 군사들이 예루살렘 성을 완전히 둘러쌓았습니다. 선지자 중 몇 명이 예루살렘 거리를 다니면서 외칩니다.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선택된 백성입니다. 여기 성전이 있고, 성전에는 하나님이 계시므로 결코 바벨론 군사는 우리를 헤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소위 마약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전에 돌 위에 돌 하나 남김없이 다 훼파했습니다. 유다 백성들, 오랏줄에 묶이어 저 먼 타국 바벨론으로 포로로 1차, 2차, 3차 끌려갔습니다. 성전을 우상으로 생각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성전을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종교적 존재로 전락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비단 실패의 역사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 사도 바울도 이러한 경험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16절 이하의 말씀에 보면, 바울이 아덴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 아덴은 많은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철학자들에게 자기가 어려서부터 배워온 자기의 장기인 철학적 논리를 펼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변론했다.''고 했습니다. 그랬는데 변론한 뒤에가 문제가 됩니다. 결국은 바울은 영적 탈진상태가 되어서 고린도로 가는데 고린도에 간 이유는 복음을 전파하려고 간 것이 아닙니다. 그저 생존하려고 간 것입니다. 엘리야가 경험했던 그 영적 탈진, 그것이 바울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본인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필요하면 복음도 사용했다가 철학도 사용했다가 그래서 어쨌든 간에 이 땅에 복음이 전파하게 하자고 생각했던 잘못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2장 2절 말씀에 보면, ''내가 너희 중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느니'' 십자가가 나를 사용하고, 부활이 나를 사용하고, 복음이 나를 사용하고, 오실 예수가 나를 사용할 때, 쓰임 받는 자가 하나님의 종이지, 자기의 어떤 목적을 세우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수단으로 자기의 뜻대로 복음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문제는 내가 믿느냐, 안 믿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주께서 나를 믿게 하느냐, 안 믿게 하느냐가 문제고, 신앙의 문제는 내가 사랑하느냐, 아니하느냐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나를 사랑케 하시느냐, 안 하게 하시느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있은 다음에 성령이 각 사람의 심령 위에 역사한 두 가지 표본적인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도행전 2장 말미에 있는 사건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위해서 살던 사람이 다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자기의 재산을 다 팔아 사도의 발 앞에 두고, 그리고 또한 각자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는 공급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윤리적인 변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3장 서두 부분에 보면, 이런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과 베드로가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미문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이 사람은 아예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입니다. 다 압니다. 아마 유대인들은 거의 다 알고 있습니다. 거기서 구걸하고 있는데 이 때, 베드로가 이를 만나자마자 이렇게 외칩니다. ''네가 나에게 바라는 것은 은과 금이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없다. 하지만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발과 발목에 힘이 나서 벌떡 일어나서 성전에 들어가 여호와 하나님께 찬미를 올리고,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요한과 베드로를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대단한 능력자다. 저런 사람이 어디 있는가? 굉장한 하나님의 종이구나.'' 하면서 그를 높이 보고 있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러분, 미문에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이 가장 큰 사건으로 보십니까? 그것은 수단이에요. 베드로가 어떻게 변했는가를 전하고 싶어서 그 사건을 경륜으로 주신 거예요. 주를 안다는 말, 신앙의 주체를 찾았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믿게 하셨으매 나는 지금 교회에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역사 하시므로 내가 신앙의 고백을 합니다. 성삼위가 나를 주관하시므로 내가 예배자가 되었습니다. 안 믿어집니까?
빌립이 예수님께 이렇게 다가와 부탁합니다. ''주님, 나 하나님 좀 보게 해주십시오.'', ''빌립아, 내가 보이지 않느냐? 바로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느냐?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내 안에 있지 않느냐? 그런데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느냐? 너는 나를 보라.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냐? 그러면 내 안에 하나님이 있는 것을 믿어야지. 못 믿겠냐? 그러면 내가 한 일을 생각해 보고 보아라. 내가 한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냐?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지 않느냐? 그래도 하나님의 내주하심을 믿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12장 3절 말씀에 보면, ''성령을 받지 않고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할 수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여러분이 믿어야 합니다. 말씀에 보면, ''너희들은 앞으로 내가 한 일들을 할 것이고 그리고 또한 내가 하던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면서 그 일을 하자면 ''무엇이든지 고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무엇이든지 고하라.'' 내 뜻, 내 욕망, 내 일상, 내 안위를 추구하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고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나도 할 수 있음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으면, 네가 아버지 뜻을 구하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기도하지 않습니다. 왜 응답되지 않습니까? 내 유익을 위하여 기도하니까 응답되지 않습니다. 왜 충만하게 받지 못합니까? 그릇이 적어서 충만하게 받지 못합니다. 왜 그릇이 적습니까? 자기를 위한 그릇만 가지고 나오니까 충만하게 응답 받지 못합니다.
여러분, 그릇이란 내가 가지고 있는 꿈이나 욕망이나, 소망, 희망이 그릇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관심을 두고, 많은 사람을 이웃으로 섬기려고 하느냐가 그릇입니다. 소위 ''자기 욕망을 크게 만들어서 큰 꿈을 가지고 하나님께 구하라.'' 성경에는 그런 말이 한 마디도 없습니다. ''시시하게 아파트 한 채 사려고 그러냐? 재벌 되려고 기도해라.'' 웃기는 얘기입니다. 그런 것은 성경에 기록하지 않았어요. 내가 많은 이웃을 섬기려고 할 때, 큰그릇입니다. 내가 인류를 섬기려고 하면 인류를 섬길 만한 하나님의 역사의 응답이 이루어집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 불교의 법당에도 지금 열심히 하고 있어요. 저 점치는 곳이나 무당 집에도 지금 시끄럽게 하고 있어요. 내가 나를 위해서 하는 일은 푸닥거리하는데 얼마든지 하고 있어요. 하필이면 부천제일교회 찾아올 것 없잖아요. 여러분,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 주님께 먼저 쓰임 받도록 간구하십시오. ''주여, 나를 쓰시옵소서. 주님, 쓰시기에 불편한 점이 있으면 나를 고치옵소서.'' 주님께 쓰임 받을 때, 주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려면 기도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 도움 받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 일 할 수가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시행하리라'' 약속해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신앙생활 하시면서 무엇이 큰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능력 없음이 문제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만나뵙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까? 기도의 응답이 안돼서 문제입니까? 혹은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까? 신앙자의 가장 근본 문제는 신앙의 주체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3년 간 따라 다니면서 말씀을 받기도 하고, 먹기도 하고, 함께 자기도 하면서 잘 양육된 제자들에게 주님은 두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즉, 타자(他者)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하는 질문과 또 하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알고 있느냐?''하는 물음입니다. 이 질문을 받은 제자들은 타인(他人)들이 말하는 말은 아주 용의하게 그 견해를 밝혔습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예수님을 엘리야가 죽었다가 살아왔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는 큰 능력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막상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는 물음을 받고는 묵묵부답입니다. 한 마디도 말을 못합니다. 참 이상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주님에 대한 이해가 있을 텐데 분명히 있을 텐데 남의 말은 하고 왜 자기 말은 못하느냐 말이에요. 침묵이 흐르던 중에 마침 베드로가 벌떡 일어납니다. 그야말로 휘파람을 불 듯이 한번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과 주님을 아는 지식의 답변을 들은 주님, 주님도 어떤 면에서는 잔인한 면이 계세요. 그 수제자 체면도 보고, 자존심도 살리기 위해서 ''그래, 역시 수제자는 수제자다.''했으면 좋을 텐데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네가 그렇게 고백하게 되었고, 그 지식을 갖게 된 것은 네가 아니고 하늘 아버지께서 너로 하여금 그러한 지식과 신앙의 고백을 하게 하셨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주님 앞에 나와 주님의 신앙의 고백을 합니다. 여러분이 주님 앞에 찬미를 올립니다. 여러분이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립니다. 여러분이 지금 예배를 드리고, 여러분이 지금 찬미를 하고, 여러분이 지금 신앙의 고백을 하는 것입니까? 천국 문이 닫혔습니다. 그 때, 여러 사람들이 몰려와서 아주 당돌하고도 용감하게 천국 문을 두드립니다. ''문열어 주시오. 문열어 주시오. 우리가 왔습니다.'' 그러나 쉽사리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몰려온 사람들이 외칩니다. ''예수님, 예수님 우리가 왔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많은 병자를 낫게 하고, 예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예수 이름으로 능력을 베푼 저희들이 왔습니다. 문을 여십시오.'' 이 때, 틈새로 들리는 아주 세미한 음성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모른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예수님이 거짓말을 하시는 것인지, 지금 여기 찾아와 문 열라고 두드리고, 지금 난동 비슷하게 자기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거짓말하는 것인지, 둘 중에 한 쪽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주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병을 고쳤다고? 그러면 내가 한 거야. 너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다고? 그러면 내가 한 거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능력을 베풀었다고? 그러면 내가 한 거야. 너희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어.'' 여러분, 이제 다시 한번 우리의 신앙을 생각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자기들이 한 줄 알고, 자기들이 능력자인 줄 알고, 자기들이 큰 하나님 앞에 공로를 세운 줄 알고, 세상에 있으면서 많은 사람의 종용도 한 몸에 받고, 부(富)도 누렸을 것이며, 명성도 높았을 것입니다. 그랬으니 천국에서 받을 것도 없고, 천국 문일 열릴 것도 없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참 크게 쓰임 받은 종이었습니다. 그의 사적 중에 우리의 기억에 가장 많이 남고 있는 것이 갈멜산의 사건입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이방 사제 850명과 그리고 엘리야 한 사람, 이제 영적 쟁투가 벌어진 것입니다. 제사하는 방식이나 기도하는 방식이 바알과 아세라의 사제들은 그들이 아주 극단적인 제사 기도 방법을 사용합니다. 자기의 온 몸을 쳐서 학대해서 피의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열광적이지요. 그러나 엘리야는 조용히 홀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제물로 본 다면, 그야말로 풍성하고, 희귀한 제물을 가득 쌓아놓고, 하나님 앞에 이방 사제들은 제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초라한 제물을 놓고, 하나님 앞에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그 열광적인 이방 사제들의 그 열기는 가히 하늘을 찌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엘리야는 그 제물 그 가로 물을 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불로 인해서 엘리야의 제물을 태워 받게 됩니다. 이 일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사제들은 쫓김을 당하거나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 일 뒤에 더 중시 여기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그 일 이후에 갑자기 영적 탈진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광야를 지나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열왕기상 19장 4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 능력에 한계가 왔습니다. 나는 더 주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저 이세벨이 자기의 사자를 보내서 나의 생명을 노리고 있습니다.'' 이세벨은 아합 왕의 부인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여자입니다. ''이제는 나는 더 생명을 유지할 이유가 없습니다.'' 죽기를 청했습니다. 여러분, 자기 능력 없음을 아는 엘리야, 여기에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네가 너를 위해 일해왔느냐? 네가 너의 능력으로 일해왔느냐? 내가 너를 썼으매 너는 쓰임을 받았을 뿐인데 왜 너의 능력을 놓고 한다. 못한다. 말이 많으냐?''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일을 망각한 엘리야, 결국은 이 일로 그의 사역은 종료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엘리야의 종료로서 이 사건을 매듭짓지 않습니다. 엘리야에게 마지막 사역을 명령하시는데 열왕기상 19장 15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다메섹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내가 왕을 세우는 것이다. 아합 왕이 뭐가 두렵느냐? 내가 세운 사람인데, 내가 그를 폐하기도 하는데, 그 부인이 너에게 조금 공포스러운 말을 했다고 해서 네가 나의 종됨을 포기하느냐?''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이것만은 잊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 이 엘리야가 진술한 내용을 보면, 열왕기상 19장 18절 말씀 이하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를 죽였음이며 이제 오직 나만 남았나이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다시 답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신앙 생활에 가장 큰 위기는 고독할 때고, 고독보다 더 무서운 위기는 독선일 때입니다. ''나 혼자 성결하구나. 세상은 다 부패했구나. 이젠 진정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자는 나밖에 없구나.'' 생각할 때, 그는 이미 성결치 않는 자입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나만이 온전하구나. 자만하고 자부하는 것, 이것은 이미 하나님께 버림받은 존재예요.'' 생각해 보십시오. 칠천이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결한 사람들은 잘 보존하시고, 보호하시고, 하나님이 쓰실 사람을 유념하시고 계세요. 그런데 왜 이렇게 엘리야는 지금 자기 독선에 빠져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외로울 때가 있습니까? 이 때는 벌써 여러분께서 시험에 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요령껏 잘 사는데 나는 왜 고지식하게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가? 이 때가 나 홀로 라고 생각될 때가 신앙적 위기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곳에 그렇게 사람에게 띄지 않는 자리에서 성실하고, 신실하고,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기에 심판은 연기되고, 그러기에 오늘도 태양은 하늘 위에 비치고 있습니다. 성결한 종들이여 깨어나십시오. 내가 성결하게 산다고 생각할 때, 이미 나는 넘어진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를 성결케 하셨다고 고백할 때, 그는 튼튼한 강건의 믿음이, 내가 주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무언가 한다고 생각되시면 넘어진 거예요. 주님이 나를 쓰시매 감사할 때, 강건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를 위하여 헌신했다고 생각되면, 보상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 생깁니다. 하나님께 보상받고 싶고, 그리고 또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요. 이것이 빈 쭉정이 되는 영성의 사람이 되어 가는 길이에요. 교회, 많은 문제가 보입니까? 그것은 내가 교회를 책임지려고 할 때에 많은 문제가 보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요, 주께서 교회를 사역하신다고 믿어지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대체로 ''우리 교회에 문제 있다. 이것 걱정이다. 우리 기도하자.'' 들어보면 꽤나 교회를 사랑하는 것 같은 말이죠? 믿음 없는 소리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주님의 장중에 잡힌 종은 어떤 문제도 문제로 보이지 않아요. 왜? 주님께서 책임지시니까.
여러분,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유다야, 네 할 일을 하라. 가룟 유다야, 네가 생각하고, 계획하고, 네가 진행하던 일을 계속하라. 네가 이상적 사회가 이루어지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야겠다고 생각했으니 그대로 하라.'' 내 뜻대로 교회를 이끌어가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당신들 마음대로 할 수 없을 테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있을 때, 그의 영력이 우리 안에 역사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와 비진리 사이의 차이는 바로 신앙의 주체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에 ''내가 시행하리라.''는 말이 있는데 ''내가 시행하리라''하는 말을 ''내가 내 일을 하고, 내가 내 뜻대로 하고, 내가 내 생각대로 하고, 내 맘대로 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진리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사용하셔서 주님의 뜻을 이룰 것이다.'' 이렇게 믿고 따르면, 이것이 바른 신앙생활입니다. 제자들이 주님께 나와서 ''주님, 기도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습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이렇게 하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여러 가지 장애가 있습니다만 죄가 큰 장애입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것은 사랑인데 사랑을 이루자면 은사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게 하옵소서.''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하나님의 그 크신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이루어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의 정의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간구가 기도이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타종교의 기도는 다릅니다. 타종교는 기도를 통해서 자기를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나는 허무한 존재다.''라고 생각해서 모든 것을 다 버리는 일탈의 경지에 가는 것이 기도일 수도 있고요, 또 하나는 상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내가 어떤 신으로부터 능력을 위임받아 그 상황을 해결해 가려고 하는 수단으로서의 기도가 있습니다. 또 인간에게는 종교 본능이 있습니다. 종교 본능은 의식 없는 의식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의 상황, 삶의 형편이 극단적으로 어려워질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에 있는 종교 본능이 피어올라서 종교적 존재로 행위 하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처음 왕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을 받았지요. 그러나 그가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사울이 엔돌에 있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때입니다. 내 기가 막힌 상황을 어떻게 타계할 수 있을까? 그래서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던 것이지요. 사울은 하나님의 종에서 종교적 존재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중에 가장 비극적이고, 수치스러운 역사라면 아마 엘리 제사장 시절일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에게는 홉니와 비느하스라는 두 자녀가 있는 데 이 두 자녀는 이미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 때, 블레셋이 침공해 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나가면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법궤를 메고 앞서 나가는데 자기들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줄 모르고, 법궤만 메고 가면 승리할 것이라는 우상숭배를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의 목은 부러집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처참하게 죽임을 맞게 되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는 다곤 신전에 가서 안치되어야 하는 비극이 찾아오게 됩니다. 종교인은 되었으나 하나님과는 멀었던 것입니다. 바벨론 군사들이 예루살렘 성을 완전히 둘러쌓았습니다. 선지자 중 몇 명이 예루살렘 거리를 다니면서 외칩니다.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선택된 백성입니다. 여기 성전이 있고, 성전에는 하나님이 계시므로 결코 바벨론 군사는 우리를 헤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소위 마약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전에 돌 위에 돌 하나 남김없이 다 훼파했습니다. 유다 백성들, 오랏줄에 묶이어 저 먼 타국 바벨론으로 포로로 1차, 2차, 3차 끌려갔습니다. 성전을 우상으로 생각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성전을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종교적 존재로 전락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비단 실패의 역사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 사도 바울도 이러한 경험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16절 이하의 말씀에 보면, 바울이 아덴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 아덴은 많은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철학자들에게 자기가 어려서부터 배워온 자기의 장기인 철학적 논리를 펼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변론했다.''고 했습니다. 그랬는데 변론한 뒤에가 문제가 됩니다. 결국은 바울은 영적 탈진상태가 되어서 고린도로 가는데 고린도에 간 이유는 복음을 전파하려고 간 것이 아닙니다. 그저 생존하려고 간 것입니다. 엘리야가 경험했던 그 영적 탈진, 그것이 바울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본인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필요하면 복음도 사용했다가 철학도 사용했다가 그래서 어쨌든 간에 이 땅에 복음이 전파하게 하자고 생각했던 잘못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2장 2절 말씀에 보면, ''내가 너희 중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느니'' 십자가가 나를 사용하고, 부활이 나를 사용하고, 복음이 나를 사용하고, 오실 예수가 나를 사용할 때, 쓰임 받는 자가 하나님의 종이지, 자기의 어떤 목적을 세우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수단으로 자기의 뜻대로 복음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문제는 내가 믿느냐, 안 믿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주께서 나를 믿게 하느냐, 안 믿게 하느냐가 문제고, 신앙의 문제는 내가 사랑하느냐, 아니하느냐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나를 사랑케 하시느냐, 안 하게 하시느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있은 다음에 성령이 각 사람의 심령 위에 역사한 두 가지 표본적인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도행전 2장 말미에 있는 사건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위해서 살던 사람이 다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자기의 재산을 다 팔아 사도의 발 앞에 두고, 그리고 또한 각자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는 공급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윤리적인 변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3장 서두 부분에 보면, 이런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과 베드로가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미문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이 사람은 아예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입니다. 다 압니다. 아마 유대인들은 거의 다 알고 있습니다. 거기서 구걸하고 있는데 이 때, 베드로가 이를 만나자마자 이렇게 외칩니다. ''네가 나에게 바라는 것은 은과 금이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없다. 하지만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발과 발목에 힘이 나서 벌떡 일어나서 성전에 들어가 여호와 하나님께 찬미를 올리고,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요한과 베드로를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대단한 능력자다. 저런 사람이 어디 있는가? 굉장한 하나님의 종이구나.'' 하면서 그를 높이 보고 있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러분, 미문에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이 가장 큰 사건으로 보십니까? 그것은 수단이에요. 베드로가 어떻게 변했는가를 전하고 싶어서 그 사건을 경륜으로 주신 거예요. 주를 안다는 말, 신앙의 주체를 찾았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믿게 하셨으매 나는 지금 교회에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역사 하시므로 내가 신앙의 고백을 합니다. 성삼위가 나를 주관하시므로 내가 예배자가 되었습니다. 안 믿어집니까?
빌립이 예수님께 이렇게 다가와 부탁합니다. ''주님, 나 하나님 좀 보게 해주십시오.'', ''빌립아, 내가 보이지 않느냐? 바로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느냐?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내 안에 있지 않느냐? 그런데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느냐? 너는 나를 보라.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냐? 그러면 내 안에 하나님이 있는 것을 믿어야지. 못 믿겠냐? 그러면 내가 한 일을 생각해 보고 보아라. 내가 한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냐?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지 않느냐? 그래도 하나님의 내주하심을 믿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12장 3절 말씀에 보면, ''성령을 받지 않고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할 수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여러분이 믿어야 합니다. 말씀에 보면, ''너희들은 앞으로 내가 한 일들을 할 것이고 그리고 또한 내가 하던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면서 그 일을 하자면 ''무엇이든지 고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무엇이든지 고하라.'' 내 뜻, 내 욕망, 내 일상, 내 안위를 추구하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고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나도 할 수 있음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으면, 네가 아버지 뜻을 구하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기도하지 않습니다. 왜 응답되지 않습니까? 내 유익을 위하여 기도하니까 응답되지 않습니다. 왜 충만하게 받지 못합니까? 그릇이 적어서 충만하게 받지 못합니다. 왜 그릇이 적습니까? 자기를 위한 그릇만 가지고 나오니까 충만하게 응답 받지 못합니다.
여러분, 그릇이란 내가 가지고 있는 꿈이나 욕망이나, 소망, 희망이 그릇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관심을 두고, 많은 사람을 이웃으로 섬기려고 하느냐가 그릇입니다. 소위 ''자기 욕망을 크게 만들어서 큰 꿈을 가지고 하나님께 구하라.'' 성경에는 그런 말이 한 마디도 없습니다. ''시시하게 아파트 한 채 사려고 그러냐? 재벌 되려고 기도해라.'' 웃기는 얘기입니다. 그런 것은 성경에 기록하지 않았어요. 내가 많은 이웃을 섬기려고 할 때, 큰그릇입니다. 내가 인류를 섬기려고 하면 인류를 섬길 만한 하나님의 역사의 응답이 이루어집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 불교의 법당에도 지금 열심히 하고 있어요. 저 점치는 곳이나 무당 집에도 지금 시끄럽게 하고 있어요. 내가 나를 위해서 하는 일은 푸닥거리하는데 얼마든지 하고 있어요. 하필이면 부천제일교회 찾아올 것 없잖아요. 여러분,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 주님께 먼저 쓰임 받도록 간구하십시오. ''주여, 나를 쓰시옵소서. 주님, 쓰시기에 불편한 점이 있으면 나를 고치옵소서.'' 주님께 쓰임 받을 때, 주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려면 기도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 도움 받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 일 할 수가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시행하리라'' 약속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