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봉 목사 (와싱톤한인교회)

1.


우리는 아직도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의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뜬 이후에 그 사람에게 일어난 이야기를 오늘 읽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 바리새파 사람들이 등장하여 맹인되었던 사람을 지방 법정(district court)에 세우고는 일종의 재판을 진행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먼저, 예수님이 안식일에 그를 치료했다는 점을 문제 삼았습니다. 당시 종교적 열심이 강했던 유대인들의 관례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특별히 허락된 일 외에는 아무 일도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안식일이 끝났다는 것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날 때까지 그냥 두면 생명을 잃을 것이 분명한 경우에만 치료를 허락했습니다.

이 사람은 지난 수 십년 동안을 맹인으로 살아왔습니다. 하루 더 맹인으로 산다고 해서 죽지 않습니다. 그러니 굳이 안식일에 치료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는 열심이 예수님께 정말로 있었다면,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몇 시간 더 기다린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결론은 분명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그는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16절).

이 때,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렇게 추측했을 것입니다. 일종의 삼단 논법(syllogism)이 여기에 적용됩니다. 첫째,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을 보니, 예수는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다. 둘째, 예수가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라면, 나면서부터 맹인되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셋째, 그렇다면 누군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얼마나 깔끔한 논리(logic)입니까?

누군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확신한 그들은 진상(truth)을 밝혀내어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들을 징벌(punish)하겠다는 열심으로 뜨거워졌습니다. 궁리 끝에 그들은 예수님께 치료 받았다고 주장하는 그 사람의 부모를 불러 법정에 세웠습니다. 그 사람의 증언이 사실인지를 확인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부모는, 그 사람이 자기들의 자식이며 날 때부터 맹인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화가 나서 되묻습니다. "그러면 너희 자식이 어떻게 지금은 보게 되었는가?" 그 부모는 이 때 심각한 신변의 위협(threat)을 느꼈습니다. 잘 못 대답했다가는 자신들에게도 화(trouble)가 미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는 그가 지금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또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다 큰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 보십시오. 그가 자기 일을 이야기할 것입니다"(21절). 비겁해지면 인간이 이렇게 초라해집니다.

부모를 심문해도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 사람을 다시 불러 법정에 세웠습니다. 그들이 말합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우리가 알기로, 그 사람은 죄인이다"(24절). 구약성경과 유대인들의 어법에서 "영광을 하나님 께 돌려라"는 말은 "진실을 인정해라" 혹은 "거짓말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고백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지금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전제(assume)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25절). 맹인되었던 그 사람은 배운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바리새파 사람들과 성경에 대해 혹은 신학에 대해 논쟁할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할만한 능력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체험한 한 가지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칼이 목에 들어와도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 즉 수 십년 동안 보이지 않던 눈이 이제는 보인다는 사실 말씀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딜렘마(dilemma)에 빠졌습니다. 그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났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었고,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고는 그런 기적을 행할 수 없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 두 가지 사실을 인정한다면,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면, 그 동안 자신들이 붙들고 있는 모든 전통과 관습과 권력을 놓아야 했습니다. 그 무식하고 보잘 것 없는 맹인 앞에서 그 대단한 바리새파 사람들이 위기에 봉착(faced with crisis)합니다.

이 위기에서 그들은 최악의 선택(the worst choice) 을 합니다. 그 사람을 추방(excommunicate)시켜 버린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매장 (ostracize)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진실을 외면하는 편을 선택합니다. 마치 진리를 부르짖는 성직자들을 무참하게 살해한 독재권력자(despot)와 같은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한, 그들은 진리의 외침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영원히 추방시켜 버렸습니다.

2.

여기서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십시다. 여기 등장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은 우리에게 '반면교사'(反面敎師, the one who teaches through negative actions)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교리와 신학과 전통을 고수 (cling)하면서 그 기준에서 모든 것을 판단했습니다. 제 아무리 대단한 일이 일어난다 해도, 그것이 그들이 믿어온 바와 다르면 진실이 아니라고 판정했습니다. 자신의 신념을 분명히 하고, 믿는 바를 뚜렷이 하고, 그것을 든든히 지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기준(absolute standard)이 되어 버리면 문제가 됩니다.

어느 신학자가 말했듯, "신학은 모두 틀렸습니다" (All theologies are wrong). 신학은 모두 인간의 언어와 논리와 체계로써 진리를 담아내기 위해 노력한 결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신학 안에는 인간의 한계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완전한 신학(perfect theology)이란 없습니다. 완전한 교리 (perfect dogma)도 없습니다. 만일 어떤 신학이나 교리를 절대화시켜 모든 것의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면, 오늘 보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큰 실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아, 그거야 목회자들이나 신학생들에게 할 말이지, 우리같은 평신도들에게는 무슨 상관이 있나?"라고 반문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상관이 있습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흔히 교회에서 통하는 속설(ungrounded maxim)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똑똑하면 신앙 생활 하기 어렵다"거나, "생각이 많으면 신앙 생활에 지장이 있다"거나, 혹은 "의문이 많으면 참된 신앙을 가지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생각하지도 말고, 질문하지도 말고, 무조건 믿어라"고 권고합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에서 전반적으로 통하는 속설입니다.

저는 그동안 신학대학이나 교회에서 가르칠 때, 감리교 전통에 굳게 서서, "이성(reason)은 신앙의 가장 좋은 동반자(partner)다" 라고 부르짖어 왔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문하고 생각하라"고 격려해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범한 지능(extraordinary intelligence)을 가진 분이 깊은 신앙에 이르고 좋은 열매를 맺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의문을 붙들고 주변을 유심히 관찰해 왔습니다. 제 결론은 위에서 말한 속설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똑똑한 것 혹은 지식이 많은 것이 '자동적으로'(necessarily) 신앙에 방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비상한 두뇌가 혹은 끝없는 생각이 참된 신앙을 방해하는 경우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신앙의 초보 단계(beginning stage)에서 망설이고 있는 분들이 실제로 적지 않습니다. 반면, 비상한 두뇌와 끝없는 생각과 많은 지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하고 견고한 신앙에 이른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또 물었습니다. "똑 같이 명석한 두뇌를 가진 사람들인데, 왜 어떤 사람은 회의주의자(skeptics)가 되고 다른 사람은 뿌리 깊은 신앙인이 되는가?"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습니다. 왜 그럴까? 무엇이 그런 차이를 만들어낼까?

며칠 전, 기도 중에 묵상(meditate)을 하는데, 이 문제가 풀렸습니다. 다 풀린 것은 아닙니다만, 그 원인 중 하나를 깨달았습니다. 이런 경험을 할 때는 희열(joy)에 젖습니다. 무슨 질문을 붙들고 오래도록 씨름하는데도 도대체 풀리지 않다가, 어느 순간에 마치 제 인식의 뒷면에서 누군가가 커튼을 활짝 열어주는 것처럼, 한 순간에 의문이 확 풀리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이번에도 그랬습니다.

알고 보니, 문제는 두뇌의 명석함 때문도 아니요, 지식이 많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을 어떻게 여기느냐, 그 태도에 의해 결과가 달라집니다. 자신이 판단하고 답하는 것을 절대적인 진리로 생각하는 분들은 그 명석함과 지식이 신앙 성장에 방해로 작용하게 되고, 부단히 의심하고 질문하고 판단하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분들은 그 높은 지능과 지식이 오히려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절대로 옳다고 믿는 것은 별로 똑똑하지 않은 사람들도 자주 빠지는 잘못입니다. 저같은 평범한 사람도 어릴 때 "내가 혹시 천재(prodigy)가 아닐까?"라는 의문을 여러번 가져 봤습니다. 금새 저보다 더 똑똑한 사람들을 만나, 가혹한 현실(bitter reality)을 깨닫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명석한 두뇌를 가진 사람들일수록 그렇게 믿을 가능성이 커집니다. 자신들보다 더 똑똑한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증권사(securities finance coporation) 사원으로 근무하면서 주식 투기(playing the market)를 하다가, 가족뿐 아니라 친척과 친구들까지 모두 함께 망하게 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지금은 목사가 되어 넝마주이(tat-picking)를 하며 헐벗은 분들과 함께 살며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저와 신학 공부를 같이 했는데, 그분이 제게 그런 말을 자주 했습니다. "내가 내 머리를 조금만 덜 믿었어도 그런 잘못을 범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분은 실제로 최고, 최상의 과정만을 밟은 수재였습니다. 다 망하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나서야 예수를 제대로 믿게 되었고 신학교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신학교에서도 그분은 예전의 습관을 자주 드러냈습니다. 한 번 자신이 옳다고 믿으면, 교수고 박사고 없습니다. 자신이 옳다는 것을 끝까지 증명하려고 모든 것을 투자합니다. 며칠 지나고 나면, 마치 바람빠진 풍선처럼 축 쳐져 앉아서, "이 못난 놈의 교만! 이 못난 놈의 교만!"하고 뉘우칩니다. 그분을 뵈면서, 저는 우월감(sense of superiority)과 열등감(sense of inferiority)을 오락 가락할 정도의 보통 지능을 타고 난 것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3.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고전 1:25)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똑똑해도 하나님의 어리석음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인간의 지식이 아무리 대단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판단이 하나님에 관해 최종적인 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신비를 알기 위해 따지고 캐묻고 의문해야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신비 앞에 겸허히 서서 그분께 자신을 맡기는 태도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성은 신앙 성장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제임스 에머리 화이트(James Emery White)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사랑하기' (Embracing the Mysterious God)이라는 책에서, 신앙에 있어 "많은 지적인 딜렘마가 생겨나는 것은 생각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적게 하기 때문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101쪽)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은 이성과 무관하신 분이 아니라 이성보다 크신 분이므로" 우리는 이성을 자원으로 이용하여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요청은 의심을 제거하라는 것이 아니라 의심의 역학(dynamic) 속에서 믿으라는 것이다"(112쪽)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역사상 가장 높은 지능을 가졌던 사람이라는 프랑스 사상가 블레즈 빠스칼(Blase Pascal)이 깊은 신앙에 이르러 '빵세' (Pensees)라는 명작(masterpiece)을 남긴 것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의 은총을 구하면서 이성을 통해 생각하고 질문하고 대답하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The Chronicles of Narnia라는 영화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 C. S. Lewis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요 탁월한 영문학자였던 그가 무신론(atheism)에서 불가지론(agnosticism)으로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 것도, 그리하여 현대판 고전으로 자리잡은 '순전한 기독교'같은 명작을 남긴 것도, 이성의 자원을 활용하여 하나님을 향해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의 명석함이나 많은 지식을 과신하면 참된 신앙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같은 바리새인으로서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 살았던 바울 사도는 명석한 두뇌와 많은 지식을 통해 예수의 종교를 세계 종교로 발전하도록 기초를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에서 통하고 있는 이 속설은 부정되어야 합니다. 똑똑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생각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의문이 많은 게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이성과 두뇌와 판단을 절대시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설 줄만 안다면, 모든 이성의 활동은 우리를 든든한 신앙으로 인도해주는 좋은 안내자가 될 것입니다.

4.

이번에는 맹인되었던 그 사람을 보십시다. 이 이야기를 보면, 재미있는 점이 하나 발견됩니다. 맹인되었던 그 사람이 바리새인들에게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예수님의 정체를 단계적(step by step)으로 알아간다는 사실입니다. 11절을 보면, 처음에는 예수님을 그냥 보통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두고 깊이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누굴까?"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성전 뜰에서 구걸할 때 들었던 예언자( prophet)들 이야기가 생각났을 것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같은 예언자들이 행한 기적들은 성전 설교의 단골 메뉴(favorite stories)였습니다. 17절을 보니, 이런 과정을 거친 그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그분은 예언자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의 깨달음의 과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35절부터 38절까지 보면, 그는 마침내 예수님을 '인자'(the Son of Man)로 그리고 '주님'(the Lord)로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임을 깨닫고, 자신을 구원해 줄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 육신의 눈을 떴지만, 이 지점에 이르러서는 영적인 눈까지 환히 보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눈만 떴다면 그는 몇 십년 편하게 살고 끝났을 것입니다. 영적인 눈을 떴기에 그는 진정으로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바리새파 사람들의 영적 눈은 그들의 교만 때문에 멀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41절). 그분은 그들의 영적인 무지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을 예언자로만 알던 그 사람이 어떻게 하여 그분을 인자로, 주님으로, 메시야로 알아보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어떻게 이렇게 영적인 도약(a leap in spiritual growth)을 하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그 사람이 그 사회에서 외톨이가 되어 고립(isolated)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그를 찾아오시어 당신 자신을 드러내 주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이 때에야 비로소 예수님을 제대로 보게 되었고, 제대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보통 사람도 아니었고, 예언자 중 하나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유대인들이 기다려 온,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였습니다. 그 메시야를 만났을 때, 그는, 참된 신앙인들이 모두 그렇게 했듯이, "주여, 내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온 인류의 구원자인 동시에 내 삶의 주인이 되신 그분의 정체를 바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알아가는 데 이성을 포기하지도 않았지만, 이성만을 의지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는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다 알 수 없는 차원(dimension)이 있습니다. 인간의 질문과 생각과 추론과 판단만으로는 다 미치지 못할 차원이 있습니다. 부활하여 우리 중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는 이성을 초월(transcend)하는 존재이므로, 이성의 작용만으로는 다 알 수 없습니다. 맹인되었던 그 사람이 예수님을 제대로 안 것은 이성을 활용한 모든 노력이 끝났을 때,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 자신을 드러내 줌으로 가능했습니다. 그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그가 이미 깨닫고 있던 차원을 일거(instantly)에 끌어 올려 주었습니다.

결국, 똑똑하나 어리석으나, 지식이 많으나 무식하나, 생각이 많으나 별 생각이 없으나, 참된 신앙에 이르는 길은 동일합니다. 나에게 일어난 일을 두고 생각하며 질문하고 씨름하는 가운데 살아계신 주님이 오시어 우리의 마음에 역사를 하셔야 합니다. 그분을 이해하고 알기 위한 이성의 노력이 있어야 하며, 동시에 살아계신 주님의 계시(revelation)가 있어야 합니다. 살아계신 주님께서 깨우쳐 주시지 않는 한, 무엇도 온전하게 알 수 없다는 겸허한 자세 (humble attitude)를 가지고 질문하고 생각하고 대답해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주님의 영감을 구할 때, 예수님을 참되게 만날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섬길 수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믿음은 공평(fair)합니다. 똑똑한 사람이라 해서 더 믿기 쉬운 것도 아니고, 무식한 사람이라 해서 더 믿기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부자라고 해서 더 믿기 쉬운 것도 아니고, 가난하다 해서 더 믿기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참되게 믿는 것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인 동시에 어려운 일입니다. 누구에게나 같은 장애물(obstacle)이 있고, 누구에게나 같은 '도우미'(helper)가 있습니다. 문제는 주님 앞에 얼마나 겸손해지느냐에 있습니다.

5.

첫 번째 성탄절에 예수님을 찾았던 사람들은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동방박사들(magi)이요, 다른 하나는 오늘 읽은 누가복음 본문에 나오는 목자들입니다. 동방박사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학자들은 대부분 점성가들(astrologers)이라고 추측합니다. 당시로서는 점성가들은 가장 똑똑하고 배운 사람들에 속합니다. 목자들은 당시로서는 최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교육도 못 받고 가진 것도 없어, 떠돌아 다니며 다른 사람의 양떼를 치며 연명하는 희망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두 종류의, 전혀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그들의 사회적 신분과 상황은 전혀 달랐지만, 예수님 앞에서 그들은 동일한 자세로 낮아졌고 그분을 경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은 철저하게 다른 두 종류의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은총 앞에서는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똑똑한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도, 강한 사람도 약한 사람도,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모두 같아집니다.

맹인된 사람이 마침내 예수님을 만나 "주님, 내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니라 주님 앞에 선 그의 겸손한 마음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맹인된 사람을 추방하고 예수님을 만날 기회를 스스로 차단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들의 높아진 마음(haughty heart)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교리와 생각과 판단을 과신했기 때문입니다. 맹인되었던 사람에게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그래서 깊이 숙고(reflect)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30절). 교만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대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정체를 보지 못할 것이고, 그분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는 사람들은 그분의 정체를 보게 될 것입니다. 보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있지만,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동방 박사들처럼 혹은 목자들처럼, 마음에 빛나고 있는 별을 따라 오늘 이곳에 예배하러 모이신 여러분, 주님께서는 가장 작은 고을(town) 베들레헴에, 가장 누추한(filthy) 곳 마굿간에, 그리고 짐승의 먹이통에 집풀을 깔고 누우셨음을 기억하십시다. 베들레헴같은 마음, 마굿간 같은 마음, 짐승의 먹이통 같은 마음을 가져야만 그분이 제대로 보인다는 뜻입니다. 낮은 곳에 임하신 우리 주님은 자신을 낮추는 사람에게만 당신을 보이십니다. 아니, 그분이 이미 우리 곁에 서서 당신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높아진 마음 때문에 우리가 보지 못할 뿐입니다. 낮은 마음, 겸손한 마음에 깃드시는 성탄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히 임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