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407
분류 |
---|
김영봉 목사 (와싱톤 한인교회)
1.
오늘은 음악을 한 곡 들려 드리려 합니다. '자유하라'(Born Free)라는 음악입니다. 1966년에 개봉된 Born Free라는 제목의 영화의 주제곡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야성의 엘자'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책을 읽은 분도 계실 것이고, 영화를 보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먼저, 이 음악의 배경 이야기를 잠시 살펴 보고, 음악을 듣겠습니다.
조지 아담슨과 조이 아담슨 (George and Joy Adamson) 부부는 케냐 북부 지역에 있는 야생 동물 보호 지역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남편 조지가 인간 주거 지역에 침입하여 사람을 물어 죽이는 식인 사자를 추적하여 사살합니다. 죽은 암사자는 세 마리의 새끼 사자와 함께 있었는데, 그 새끼 사자들은 어미가 죽자 그 곁을 떠나지 못하고 주위를 맴돕니다. 그들을 불쌍하게 여긴 조지는 집으로 데려와 아내 조이와 함께 돌봅니다. 머지 않아 세 마리의 새끼 사자는 주변 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새끼들이 자라가면서 맹수의 모습을 갖추게 되자, 사람들은 서서히 위협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할 수 없이, 이 부부는 두 마리 사자를 네델란드에 있는 동물원에 보내고, 길들이기 쉬워 보이는 나머지 한 마리만 데리고 키웁니다. '엘자'(Elsa)라는 이름도 붙여줍니다. 엘자는 두 사람의 손에 의해 잘 길들여져서 아무런 위험이 없는 양순한 '애완 사자'가 됩니다. 두 사람은 엘자와 함께 사는 재미에 푹 빠져 버립니다.
하지만 아담슨 부부는 엘자가 살아야 할 곳은 인간 사회가 아니며, 사자로서 그렇게 길들여져 사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엘자를 다시 밀림으로 돌려보낼 계획을 세웁니다. 두 사람은 엘자에게 밀림에서의 삶에 적응시키기 위해 고된 훈련을 시킵니다. 그것은 엘자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었고, 훈련시키는 부부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 밖에 길이 없어 보였습니다. 얼마 동안의 훈련을 마치고 그 부부는 엘자를 정글로 풀어 보냅니다. 하지만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엘자는 생명을 잃을 위기를 겨우 모면하고 아담슨 부부에게 돌아옵니다. 그러나 아담슨 부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엘자가 건강을 회복하는 즉시로 다시 적응 훈련을 시킵니다. 얼마 후, 다시 엘자를 밀림으로 내어 보냅니다.
밀림으로 들어간 엘자가 오랫 동안 돌아오지 않자, 아담슨 부부는 혼란스러운 감정에 빠집니다.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밀림 생활에 적응했다는 뜻도 되고, 사고를 당해 죽었다는 뜻도 되기 때문입니다. 안심 반, 걱정 반의 시간을 보내는 중, 아담슨 부부는 새끼와 수컷을 데리고 자기 집을 배회하는 엘자를 보게 됩니다. 이 광경을 보고, 두 사람은 눈물 겨운 감격을 경험합니다. 드디어 야성을 잃었던 엘자가 야성을 되찾았고, 참된 자유를 회복한 것입니다. 자유의 대가는 혹독했으나, 본성을 되찾은 엘자의 모습은 아름다웠습니다.
이제 들으실 음악은 이 영화의 주제곡으로서 단 블랙(Don Black)이라는 사람이 작사하고, 존 배리(John Barry)라는 분이 곡을 썼습니다. 앤디 윌리엄스(Andy Williams)가 처음 불렀는데, 가사도 아름답고 음악도 좋아, 1966년에 오스카 음악상을 수상했습니다.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2.
Born free, as free as the wind blows 자유하라, 부는 바람처럼
As free as the grass grows 풀이 자라듯
Born free to follow your heart 자유하여 네 마음을 따라 행하라
Live free and beauty surrounds you 자유롭게 살라 그러면 아름다움이 너를 두르리라.
The world still astounds you 네가 별을 바라볼 때마다
Each time you look at a star 세상은 여전히 네게 경이로우리라
Stay free, where no walls divide you 자유하게 있으라, 가르는 장벽이 없는 곳에서
You're free as the roaring tide 노도처럼 너는 자유하다
So there's no need to hide 어디로든 숨을 필요가 없다
Born free, and life is worth living 자유하라, 삶은 살 가치가 있으니
But only worth living 하지만 네가 자유할 때에만
'cause you're born free 오직 그 때에만 살 가치가 있다
(Stay free, where no walls divide you) (자유하게 있으라, 가르는 장벽이 없는 곳에서)
You're free as the roaring tide 너는 노도처럼 자유하다
So there's no need to hide 어디로든 숨을 이유가 없다
Born free, and life is worth living 자유하라, 삶은 살 가치가 있으니
But only worth living 하지만 네가 자유할 때에만
'cause you're born free 오직 그 때에만 살 가치가 있다
어떻습니까? 자유에 대한 갈망같은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저 바깥으로 나가 마음껏 달리며 자유를 만끽해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바람처럼 자유한 그 느낌을 즐겨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 음악은 우리 속에 잠재해 있는 자유의 혼을 불러 일으키는 불후의 명곡이라고 생각합니다.
3.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즉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제가 즐겨 듣던 이 음악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인류의 정신사에 길이 남을 '자유 선언'을 하십니다. 앞에서 들은 Born Free라는 음악은 마치 예수님의 자유 선언을 노래로 표현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사실, Born Free라는 영화는 사자에 관한 이야기이기는 하나, 실제로는 자유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바로 우리 자신에 대한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전 어느 분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이 말씀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자신의 마음을 압도하는 무엇이 느껴지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답니다. 그분의 말씀이 저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이 말씀은 생각할수록 가슴을 울렁이게 합니다. '진리'니 '자유'니 하는 단어만 생각해도 마음에 흥분이 일어납니다. 아마도 우리 내면에는 진리와 자유를 향한 근원적인 열망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그 말만 들어도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이겠지요.
진리 혹은 자유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울렁거린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 진리와 자유를 인간의 삶의 근본 조건으로 만들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초적으로 인간을 진리의 존재로, 자유의 존재로 만들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알고 진리 안에서 살아갈 때, 인간은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행복해집니다. 자유롭게 살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할 수 있고 가장 자연스럽워집니다. 그것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입니다.
저는 설교하거나 강의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진리의 존재로 만드셨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특히, 오랫 동안 연구하고 기도하고 고민하여 깨달은 '새로운 말씀'을 드릴 때 그런 경험을 합니다. 저 자신은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말씀을 드리는데, 들으시는 분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십니다. 저는 그 어느 책에서도 읽은 일이 없는 새로운 말씀을 끌어 올려 말씀드리는데, 듣는 분들은 "그걸 이제 알았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반응하십니다. 어떤 때는 저만 모르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면 그분들이 그것을 실제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겁니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듣는 그 순간, 알고 있었다고 느끼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속에 있는 무엇인가가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겁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하나였다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는 진리에 대한 공명판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설교자의 과제는 회중의 마음에 있는 진리의 공명판을 울려 주어, 무의식 중에 알고 있던 것을 의식으로 알도록 끌어주는 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설교자로서의 연륜이 깊어지면 질수록,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 말이 진리라는 사실을 더욱 더 확인합니다. 우리 인간은 진리를 듣는 순간 본능적으로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진리의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4.
자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자유하여 자유하라!" ("Born free, live free, stay free!")는 선언이요 명령입니다. 자유하게 지어졌으니, 자유를 회복하여, 자유롭게 살라는 명령입니다.
자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가장 귀한 선물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시고 자유를 주시되, 창조주이신 당신 자신을 거부할 수 있는 정도까지 '최대한의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을 신학적으로 '자유의지'라고 부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하나님이 이렇게 분에 넘치는 자유를 인간에게 주시어 인간이 죄를 범하게 놔 두셨느냐?"고 불평합니다. 자신들이 범한 죄의 책임을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 전가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자유도 동시에 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로보트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노예처럼 속박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자유는 실로 위험한 것이지만, 인간이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소였습니다.
제임스 에머리 화이트(James Emery White)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사랑하기'(Embracing the Mysterious God) 라는 책에서 덴마크의 철학자 키엘케골(Soren Kierkegaard)이 사용한 한 우화를 소개합니다. 한 나라의 왕이 비천하고 가난한 한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소녀의 마음을 살 방도를 궁리했습니다. 그 왕은 소녀에게 선물 공세를 해서 자신을 사랑하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혹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사용하여 그 소녀를 자신에게 굴복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진정한 사랑을 얻는 길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 소녀가 자유의지로 그 왕을 사랑하기를 선택할 때 가능한 것임을 그 왕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천한 한 청년으로 낮아져 그 소녀의 사랑을 얻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물론, 그 소녀가 자신을 끝내 거부할 수도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참다운 사랑을 얻는 길은 그것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에 대해 아주 좋은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고 그 인간으로부터 참다운 사랑을 기대하셨기에, 인간에게 이토록 분에 넘치는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인간을 이렇게 사랑하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유의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에, 자유는 인간의 삶의 근본 조건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주 생명을 바치고라도 자유를 얻으려고 힘썼습니다. 자유 없이는 살 가치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Born Free의 가사처럼, 우리 인간은 자유할 때에만 진정으로 살 가치가 있습니다.
5.
그런데,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와 자유를 우리가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32절의 말씀을 뒤짚어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라는 말씀을 뒤집으면 어떻게 됩니까? "너희는 지금 진리를 모르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까?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뒤집으면 어떻게 됩니까? "너희는 지금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 아닙니까? 이 말은 곧 "너희는 노예 상태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 뜻을 유대인들이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항의합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일이 없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이 죄의 노예이며, 악마의 노예라는 사실을 폭로하십니다.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모든 민족의 제사장 민족이라고 자부하고 있던 유대인들은 이 말씀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제거할 결심을 더욱 굳힙니다.
여러분은 어떠시겠습니까? 제가 "여러분은 죄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노예이며, 악마에게 속아 악마의 시종 역할을 하고 있는 악마의 종입니다"라고 말씀드린다면, 여러분은 제게 뭐라 하시겠습니까? 제가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드리니 다행이지, 아무 근거 없이 이 말씀을 드린다면, 제게 화를 내지 않을 분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는 노예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리와 자유를 잃어버린 채, 남이 시키는 대로 하고 살아가는 노예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야성을 잃고 인간에게 길들여져 재롱이나 떨고 던져주는 먹이나 받아먹던 '애완사자' 엘자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의 종으로 그리고 악마에게 속아 헛된 것을 위해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본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진리에 대한 열망도 사라지고, 진리를 깨닫는 마음도 무뎌지고, 진리를 행할 열심도 사라졌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자유를 잃었습니다.
진리를 잃고 자유를 잃었다는 말은 우리가 인간다움을 상실했다는 뜻입니다. 동물원 우리에 갇혀있는 사자는 혹은 서커스장에서 재주를 부리고 있는 사자는 사자다움을 상실한 것입니다. 아무리 편하게 살고, 아무리 좋은 것을 먹는다 해도, 사자 답지 않은 삶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살고 아무리 호의호식한다 해도, 인간다움을 상실한 상태에서는 참된 희망이 없습니다. 인간됨의 본질을 찾아야 합니다. 진리를 추구하고 그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 그것이 인간됨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인간성을 회복시키시어 진정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어주시는 '구원'은 죽고 나서 천당 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계획하셨던 바대로, 진리의 존재로 회복되고, 자유의 존재로 회복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받는다는 말은 참된 인간으로 회복된다는 말입니다.
6.
이것이 복음입니다. "자유하여, 자유하라"는 예수님의 자유 선언이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지으신 그 모습대로 회복하라는 선언이 복음입니다. 바람처럼, 노도처럼 자유하게 살아가라는 선언이 복음입니다.
다만, 기억할 것은 그 복음이 우리 삶에 실현되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와싱톤 시내에 있는 한국전쟁기념관(Korean War Memorial)에 새겨진 글,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글이 말하듯, 잃어버린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뤄야 합니다. 그 대가의 대부분을 예수님께서 이미 치루셨습니다. 마치 엘자의 자유를 위해 아담슨 부부가 대부분의 대가를 치뤘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각자가 치뤄야 할 대가가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 대가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우리의 관심의 초점이 된 32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필히 31절과 연결시켜 보아야 합니다. 31절은 우리가 잃어버린 진리를 회복하고 상실했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우리가 치뤄야 할 대가를 명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뭐라 합니까?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우리가 치뤄야 할 대가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머물러 있다'라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지속적으로 거하다'(continue to exist)라는 뜻입니다. 들락 날락 하는 것이 아니라, 가끔 다녀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곳에 머물러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항상 배우고 묵상하고 실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 진리를 깨닫게 되고, 그 진리 안에서 우리가 자유를 회복하게 되고,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 예수쟁이가 된다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독실한 신자가 된다는 것-그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대로의 본래의 인간성을 회복한다는 뜻입니다. 사자 다운 사자가 될 때 가장 행복하고 아름답듯, 인간다운 인간으로 회복되어 진정한 행복을 누리며 아름답게 살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자유롭게 살면, 아름다움이 너를 두르리라"는 Born Free의 가사말 그대로가 진실입니다.
누가 예수 믿기를 주저합니까? 누가 예수님을 의심합니까? 우리의 잃어버린 본성을 회복시켜 진정으로 살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인생으로 이끄시려는 예수님의 부름을 누가 외면합니까? 그 회복을 위해 그분이 값을 거의 다 치루셨는데, 나머지 작은 값을 치루기를 거부함으로, 그 아름다운 삶을 사양하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1.
오늘은 음악을 한 곡 들려 드리려 합니다. '자유하라'(Born Free)라는 음악입니다. 1966년에 개봉된 Born Free라는 제목의 영화의 주제곡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야성의 엘자'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책을 읽은 분도 계실 것이고, 영화를 보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먼저, 이 음악의 배경 이야기를 잠시 살펴 보고, 음악을 듣겠습니다.
조지 아담슨과 조이 아담슨 (George and Joy Adamson) 부부는 케냐 북부 지역에 있는 야생 동물 보호 지역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남편 조지가 인간 주거 지역에 침입하여 사람을 물어 죽이는 식인 사자를 추적하여 사살합니다. 죽은 암사자는 세 마리의 새끼 사자와 함께 있었는데, 그 새끼 사자들은 어미가 죽자 그 곁을 떠나지 못하고 주위를 맴돕니다. 그들을 불쌍하게 여긴 조지는 집으로 데려와 아내 조이와 함께 돌봅니다. 머지 않아 세 마리의 새끼 사자는 주변 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새끼들이 자라가면서 맹수의 모습을 갖추게 되자, 사람들은 서서히 위협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할 수 없이, 이 부부는 두 마리 사자를 네델란드에 있는 동물원에 보내고, 길들이기 쉬워 보이는 나머지 한 마리만 데리고 키웁니다. '엘자'(Elsa)라는 이름도 붙여줍니다. 엘자는 두 사람의 손에 의해 잘 길들여져서 아무런 위험이 없는 양순한 '애완 사자'가 됩니다. 두 사람은 엘자와 함께 사는 재미에 푹 빠져 버립니다.
하지만 아담슨 부부는 엘자가 살아야 할 곳은 인간 사회가 아니며, 사자로서 그렇게 길들여져 사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엘자를 다시 밀림으로 돌려보낼 계획을 세웁니다. 두 사람은 엘자에게 밀림에서의 삶에 적응시키기 위해 고된 훈련을 시킵니다. 그것은 엘자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었고, 훈련시키는 부부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 밖에 길이 없어 보였습니다. 얼마 동안의 훈련을 마치고 그 부부는 엘자를 정글로 풀어 보냅니다. 하지만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엘자는 생명을 잃을 위기를 겨우 모면하고 아담슨 부부에게 돌아옵니다. 그러나 아담슨 부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엘자가 건강을 회복하는 즉시로 다시 적응 훈련을 시킵니다. 얼마 후, 다시 엘자를 밀림으로 내어 보냅니다.
밀림으로 들어간 엘자가 오랫 동안 돌아오지 않자, 아담슨 부부는 혼란스러운 감정에 빠집니다.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밀림 생활에 적응했다는 뜻도 되고, 사고를 당해 죽었다는 뜻도 되기 때문입니다. 안심 반, 걱정 반의 시간을 보내는 중, 아담슨 부부는 새끼와 수컷을 데리고 자기 집을 배회하는 엘자를 보게 됩니다. 이 광경을 보고, 두 사람은 눈물 겨운 감격을 경험합니다. 드디어 야성을 잃었던 엘자가 야성을 되찾았고, 참된 자유를 회복한 것입니다. 자유의 대가는 혹독했으나, 본성을 되찾은 엘자의 모습은 아름다웠습니다.
이제 들으실 음악은 이 영화의 주제곡으로서 단 블랙(Don Black)이라는 사람이 작사하고, 존 배리(John Barry)라는 분이 곡을 썼습니다. 앤디 윌리엄스(Andy Williams)가 처음 불렀는데, 가사도 아름답고 음악도 좋아, 1966년에 오스카 음악상을 수상했습니다.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2.
Born free, as free as the wind blows 자유하라, 부는 바람처럼
As free as the grass grows 풀이 자라듯
Born free to follow your heart 자유하여 네 마음을 따라 행하라
Live free and beauty surrounds you 자유롭게 살라 그러면 아름다움이 너를 두르리라.
The world still astounds you 네가 별을 바라볼 때마다
Each time you look at a star 세상은 여전히 네게 경이로우리라
Stay free, where no walls divide you 자유하게 있으라, 가르는 장벽이 없는 곳에서
You're free as the roaring tide 노도처럼 너는 자유하다
So there's no need to hide 어디로든 숨을 필요가 없다
Born free, and life is worth living 자유하라, 삶은 살 가치가 있으니
But only worth living 하지만 네가 자유할 때에만
'cause you're born free 오직 그 때에만 살 가치가 있다
(Stay free, where no walls divide you) (자유하게 있으라, 가르는 장벽이 없는 곳에서)
You're free as the roaring tide 너는 노도처럼 자유하다
So there's no need to hide 어디로든 숨을 이유가 없다
Born free, and life is worth living 자유하라, 삶은 살 가치가 있으니
But only worth living 하지만 네가 자유할 때에만
'cause you're born free 오직 그 때에만 살 가치가 있다
어떻습니까? 자유에 대한 갈망같은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저 바깥으로 나가 마음껏 달리며 자유를 만끽해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바람처럼 자유한 그 느낌을 즐겨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 음악은 우리 속에 잠재해 있는 자유의 혼을 불러 일으키는 불후의 명곡이라고 생각합니다.
3.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즉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제가 즐겨 듣던 이 음악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인류의 정신사에 길이 남을 '자유 선언'을 하십니다. 앞에서 들은 Born Free라는 음악은 마치 예수님의 자유 선언을 노래로 표현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사실, Born Free라는 영화는 사자에 관한 이야기이기는 하나, 실제로는 자유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바로 우리 자신에 대한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전 어느 분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이 말씀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자신의 마음을 압도하는 무엇이 느껴지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답니다. 그분의 말씀이 저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이 말씀은 생각할수록 가슴을 울렁이게 합니다. '진리'니 '자유'니 하는 단어만 생각해도 마음에 흥분이 일어납니다. 아마도 우리 내면에는 진리와 자유를 향한 근원적인 열망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그 말만 들어도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이겠지요.
진리 혹은 자유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울렁거린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 진리와 자유를 인간의 삶의 근본 조건으로 만들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초적으로 인간을 진리의 존재로, 자유의 존재로 만들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알고 진리 안에서 살아갈 때, 인간은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행복해집니다. 자유롭게 살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할 수 있고 가장 자연스럽워집니다. 그것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입니다.
저는 설교하거나 강의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진리의 존재로 만드셨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특히, 오랫 동안 연구하고 기도하고 고민하여 깨달은 '새로운 말씀'을 드릴 때 그런 경험을 합니다. 저 자신은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말씀을 드리는데, 들으시는 분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십니다. 저는 그 어느 책에서도 읽은 일이 없는 새로운 말씀을 끌어 올려 말씀드리는데, 듣는 분들은 "그걸 이제 알았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반응하십니다. 어떤 때는 저만 모르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면 그분들이 그것을 실제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겁니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듣는 그 순간, 알고 있었다고 느끼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속에 있는 무엇인가가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겁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하나였다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는 진리에 대한 공명판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설교자의 과제는 회중의 마음에 있는 진리의 공명판을 울려 주어, 무의식 중에 알고 있던 것을 의식으로 알도록 끌어주는 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설교자로서의 연륜이 깊어지면 질수록,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 말이 진리라는 사실을 더욱 더 확인합니다. 우리 인간은 진리를 듣는 순간 본능적으로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진리의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4.
자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자유하여 자유하라!" ("Born free, live free, stay free!")는 선언이요 명령입니다. 자유하게 지어졌으니, 자유를 회복하여, 자유롭게 살라는 명령입니다.
자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가장 귀한 선물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시고 자유를 주시되, 창조주이신 당신 자신을 거부할 수 있는 정도까지 '최대한의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을 신학적으로 '자유의지'라고 부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하나님이 이렇게 분에 넘치는 자유를 인간에게 주시어 인간이 죄를 범하게 놔 두셨느냐?"고 불평합니다. 자신들이 범한 죄의 책임을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 전가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자유도 동시에 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로보트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노예처럼 속박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자유는 실로 위험한 것이지만, 인간이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소였습니다.
제임스 에머리 화이트(James Emery White)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사랑하기'(Embracing the Mysterious God) 라는 책에서 덴마크의 철학자 키엘케골(Soren Kierkegaard)이 사용한 한 우화를 소개합니다. 한 나라의 왕이 비천하고 가난한 한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소녀의 마음을 살 방도를 궁리했습니다. 그 왕은 소녀에게 선물 공세를 해서 자신을 사랑하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혹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사용하여 그 소녀를 자신에게 굴복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진정한 사랑을 얻는 길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 소녀가 자유의지로 그 왕을 사랑하기를 선택할 때 가능한 것임을 그 왕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천한 한 청년으로 낮아져 그 소녀의 사랑을 얻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물론, 그 소녀가 자신을 끝내 거부할 수도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참다운 사랑을 얻는 길은 그것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에 대해 아주 좋은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고 그 인간으로부터 참다운 사랑을 기대하셨기에, 인간에게 이토록 분에 넘치는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인간을 이렇게 사랑하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유의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에, 자유는 인간의 삶의 근본 조건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주 생명을 바치고라도 자유를 얻으려고 힘썼습니다. 자유 없이는 살 가치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Born Free의 가사처럼, 우리 인간은 자유할 때에만 진정으로 살 가치가 있습니다.
5.
그런데,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와 자유를 우리가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32절의 말씀을 뒤짚어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라는 말씀을 뒤집으면 어떻게 됩니까? "너희는 지금 진리를 모르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까?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뒤집으면 어떻게 됩니까? "너희는 지금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 아닙니까? 이 말은 곧 "너희는 노예 상태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 뜻을 유대인들이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항의합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일이 없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이 죄의 노예이며, 악마의 노예라는 사실을 폭로하십니다.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모든 민족의 제사장 민족이라고 자부하고 있던 유대인들은 이 말씀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제거할 결심을 더욱 굳힙니다.
여러분은 어떠시겠습니까? 제가 "여러분은 죄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노예이며, 악마에게 속아 악마의 시종 역할을 하고 있는 악마의 종입니다"라고 말씀드린다면, 여러분은 제게 뭐라 하시겠습니까? 제가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드리니 다행이지, 아무 근거 없이 이 말씀을 드린다면, 제게 화를 내지 않을 분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는 노예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리와 자유를 잃어버린 채, 남이 시키는 대로 하고 살아가는 노예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야성을 잃고 인간에게 길들여져 재롱이나 떨고 던져주는 먹이나 받아먹던 '애완사자' 엘자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의 종으로 그리고 악마에게 속아 헛된 것을 위해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본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진리에 대한 열망도 사라지고, 진리를 깨닫는 마음도 무뎌지고, 진리를 행할 열심도 사라졌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자유를 잃었습니다.
진리를 잃고 자유를 잃었다는 말은 우리가 인간다움을 상실했다는 뜻입니다. 동물원 우리에 갇혀있는 사자는 혹은 서커스장에서 재주를 부리고 있는 사자는 사자다움을 상실한 것입니다. 아무리 편하게 살고, 아무리 좋은 것을 먹는다 해도, 사자 답지 않은 삶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살고 아무리 호의호식한다 해도, 인간다움을 상실한 상태에서는 참된 희망이 없습니다. 인간됨의 본질을 찾아야 합니다. 진리를 추구하고 그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 그것이 인간됨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인간성을 회복시키시어 진정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어주시는 '구원'은 죽고 나서 천당 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계획하셨던 바대로, 진리의 존재로 회복되고, 자유의 존재로 회복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받는다는 말은 참된 인간으로 회복된다는 말입니다.
6.
이것이 복음입니다. "자유하여, 자유하라"는 예수님의 자유 선언이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지으신 그 모습대로 회복하라는 선언이 복음입니다. 바람처럼, 노도처럼 자유하게 살아가라는 선언이 복음입니다.
다만, 기억할 것은 그 복음이 우리 삶에 실현되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와싱톤 시내에 있는 한국전쟁기념관(Korean War Memorial)에 새겨진 글,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글이 말하듯, 잃어버린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뤄야 합니다. 그 대가의 대부분을 예수님께서 이미 치루셨습니다. 마치 엘자의 자유를 위해 아담슨 부부가 대부분의 대가를 치뤘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각자가 치뤄야 할 대가가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 대가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우리의 관심의 초점이 된 32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필히 31절과 연결시켜 보아야 합니다. 31절은 우리가 잃어버린 진리를 회복하고 상실했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우리가 치뤄야 할 대가를 명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뭐라 합니까?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우리가 치뤄야 할 대가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머물러 있다'라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지속적으로 거하다'(continue to exist)라는 뜻입니다. 들락 날락 하는 것이 아니라, 가끔 다녀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곳에 머물러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항상 배우고 묵상하고 실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 진리를 깨닫게 되고, 그 진리 안에서 우리가 자유를 회복하게 되고,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 예수쟁이가 된다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독실한 신자가 된다는 것-그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대로의 본래의 인간성을 회복한다는 뜻입니다. 사자 다운 사자가 될 때 가장 행복하고 아름답듯, 인간다운 인간으로 회복되어 진정한 행복을 누리며 아름답게 살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자유롭게 살면, 아름다움이 너를 두르리라"는 Born Free의 가사말 그대로가 진실입니다.
누가 예수 믿기를 주저합니까? 누가 예수님을 의심합니까? 우리의 잃어버린 본성을 회복시켜 진정으로 살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인생으로 이끄시려는 예수님의 부름을 누가 외면합니까? 그 회복을 위해 그분이 값을 거의 다 치루셨는데, 나머지 작은 값을 치루기를 거부함으로, 그 아름다운 삶을 사양하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