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봉목사 (와싱턴한인교회)

"국경의 밤", "북청 물장수"로 유명한 파인 김동환 시인의 "아무도 모르라고"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 시는 임원식씨의 손에 의해 아름다운 가곡으로 지어지고 바리톤 오현명씨가 애창함으로 더 널리 알려진 시입니다. 저도 오래 전에 이 노래를 처음 듣고는 매료되어 가끔 흥얼거리고는 합니다. 그런데 그 시를 가만히 살펴보면 얄궂은 면이 있습니다. 제가 시를 읽어 드릴터이니, 여러분은 마음으로 그 노래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떡갈 나무 숲속에졸졸졸 흐르는
아무도 모르는 샘물 이기에
아무도 모르라고
도로 덮고 내려 오지요.
나혼자 마시고는
아무도 모르라고
도로 덮고 내려오는
이 기쁨이여....

제가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때는 음악이 좋았습니다. 음악이 좋아 자주 듣고 노래했는데, 영 가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시인의 심보가 아주 좋지 않아 보였습니다. 좋은 샘을 발견했으면 다른 사람도 마실 수 있도록 열어놓고 와야지, 자기만 알고 자기 혼자만 즐기려고 다시 덮어놓고 내려 오다니! 그러고는, 부끄러움도 모르는지, 마지막에 "이 기쁨이여!"라고 노래하다니! 예술을 하는 시인의 심성으로는 뭔가 부족함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참 후에야, 저는 이 가사까지도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역시 문제는 저의 이해력의 부족에 있었고, 편향된 사고방식에 있었습니다. 좋은 것이 있으면 드러내고 알리고 나누어야 한다는 열심만 있었지, 좋은 것일수록 숨겨져 있을 필요도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숨어있음의 비밀'을 어려풋이 알고 나서야 비로소 이 시의 참맛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의 마지막에 나오는 "이 기쁨이여"가 단순히 이기적인 욕심의 표현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이 시를 어떻게 지었는지를 알 길이 없어 추측해 봅니다. 아마도 시인은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어느 산길을 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참으로 우연히, 그 시인은 떡갈나무 잎으로 가려져서 사람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샘물을 발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목이 말랐던 시인은 조심스럽게 떡갈나무잎을 걷어내고는 손으로 물을 떠서 한 모금 마십니다. 아, 그 시원하고 상쾌하고 신선하고 감미로운 생명수의 맛이여! 그 시인은 물의 맛을 음미하며 몇 번이고 샘물을 떠마십니다.

흡족할만큼 물을 마시고는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 "이 샘물을 어떻게 할까? 저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도록 이 떡갈나무잎을 다 치워버릴까? 그렇게 하면 나같은 산행자들이 이 감미로운 물맛으로 새힘을 얻고 더 즐거이 산행을 계속할 수 있겠지? 아니야, 그렇게 되면, 지나가는 사람마다 들러 물을 마실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물통을 들고 와서 퍼갈지 몰라. 샘 주위에 시멘트로 울타리를 만들고 약수 장사를 할지도 모르지. 그러다 보면 이 샘은 머지 않아 말라 버리거나 그 신선함이 고갈될지 몰라. 그래, 이런 샘 하나쯤은 숨겨져 있어야 해. 이 샘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들만을 위해 보호 받아야 해. 그래야 이 산 속에 사는 짐승들도 이 샘을 즐길 수 있을거야."

그래서 시인은 조심스럽게 떡갈나무 잎으로 샘을 도로 덮어 놓고 내려옵니다. 이 시인의 마음은 신비로운 기쁨으로 가득해집니다. "나만이 아는 비밀의 샘물이 있다"는 기쁨이 아니라, 생명수가 있는 신비의 샘을 발견했다는 기쁨이요, 그 비밀을 간직하여 그 샘의 생명력을 보전시킬 수 있다는 기쁨일 것입니다. 김동환 시인이 정말 이런 마음으로 이 시를 썼다면, 그는 무엇이 참되고 무엇이 진실한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었다고 느껴집니다. 그의 생각이 조금만 짧았더라면, 이 샘물은 곧 훼손되어 마른 웅덩이가 되거나 썩은 웅덩이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2.

오늘 읽은 요한복음 7장1절부터 13절의 이야기는 '아무도 모르라고'라는 시와 연결하여 생각해 봄직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고향인 갈릴리가 무대가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유대인들의 증오심이 위험 수위에 이른 것을 아시고는 유대 지방 즉 예루살렘이 중심인 남쪽 지방으로 다니기를 피하셨습니다. 때는 유대인들이 순례 축제 중 하나로 지켰던 초막절(the Feast of Tabernacle)이 가까왔을 때입니다. 초막절은 우리 달력으로 대개 9월 경에 지켰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났던 때와 지금 이 본문에 대해 설교하는 시기가 공교롭게도 맞아 떨어진 셈입니다.

초막절이 되면 성인이 된 유대인들은 어디에 살든 상관 없이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여 8일 동안 나뭇가지로 만든 초막을 짓고 지내면서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했던 조상들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상기했습니다. 갈릴리에 살던 유대인들도 초막절 순례를 위해 예루살렘 행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에게 말씀드립니다. 여기서 말하는 '형제들'이란 예수님의 동생들을 가리킵니다. 3절과 4절에 그들의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님은 여기에서 떠나 유대로 가셔서, 거기에 있는 형님의 제자들도
형님이 하시는 일을 보게 하십시오.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숨어서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형님이 이런 일을 하는 바에는,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십시오.

예수님의 동생들은 유대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얼마나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제각기 능력을 뽑내며 사람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경쟁하고 있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들은 순례를 갈 때마다 그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 갈릴리에서도 저런 능력자가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한을 풀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형님의 기적의 능력과 권위있는 가르침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순례하며 보았던 그 어떤 사람도 비교되지 않을만큼 그들의 형님은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능력자가 갈릴리 촌에서 썩고 있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활동한다면 단시일내에 예루살렘 주민들의 마음을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형님을 만나 이 마음을 전합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당신은 이 시골에서 썩을 사람이 아니라고. 당신의 능력이면 예루살렘에서도 통한다고. 도대체 그렇게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그 엄청난 능력을 이용하면 돈도, 권력도, 명예도, 인기도 얻을 수 있는데, 왜 헛되이,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가난하고 무식하고 볼품없는 무지렁이들을 찾아다니느냐고.

그러자 예수님은 형제들의 칭찬 어린 권고를 일축하십니다. 그분의 대답은 매우 퉁명스럽습니다. "내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너희의 때는 언제나 마련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내 때'는 '예루살렘으로 갈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10절에서 볼 수 있듯, 예수님은 동생들이 예루살렘으로 떠난 후에 몰래 따라가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 때'는 '나 자신을 드러낼 때'라는 뜻으로 풀어야 합니다. "이런 일을 할 바에는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십시오"라는 동생들의 권고에 대해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아직 내 자신을 드러낼 때가 아니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왜 아직 '그 때'가 아닙니까? 모든 것에는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때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도모하는 사람은 이익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돈이나 명예나 인기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느냐에 모든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백년 동안이라도 숨어있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을 위해서라면 위험과 비난 앞에 자신을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당신 자신을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어 돈을 벌거나 명성을 얻거나 권력을 얻는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있을 뿐이었습니다. 결국 때가 되면 만민에게 자신을 드러내어 십자가에 달리는 일도 감수하겠지만, 그 때가 이르기 전까지는 숨어서 일하겠다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신 말씀이 기가 막힙니다. "그러나 너희의 때는 언제나 마련되어 있다." 무슨 뜻그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고 언제나 이익을 찾아 사는 사람에게는 때라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아무 때나 나서고 아무 때나 뒷걸음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이룰 수 없습니다. 요행히 상황이 맞아, 나서고 뒤서며 이익을 얻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익이라는 것이 정말 이익입니까? 내 손에 돈이 많이 남겨졌다고 해서 이익입니까? 사람들이 나를 더 알아 주었다고 해서 이익입니까? 지금 당장은 이익같지만, 결국은 손해로 결산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 때를 찾지 않고, 아무 때나 자기 때로 알고 경솔하게 행동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인생은 빈수레가 되고 맙니다.

3.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손익 계산의 결과에 따라 행동합니까? 아마도, 이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리고 이 천 년 후나, 인간의 본성이 변하지 않는 한, 이익에 끌리는 인간의 마음은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익을 위해 우리는 최대한 우리 자신을 드러내려 합니다. 이제는 '겸양의 미덕'이 쓰레기통에 버려진 지 오래입니다. 조금이라도 돈될만한 것이 있으면 드러내 보이려하고, 어떻게든 과장하려 하고, 그것으로 돈을 사려 합니다.

모든 것의 가치는 얼마만한 돈으로 환산될 수 있느냐에 걸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돈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돈의 값이 커지면 커지는 만큼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대로 많은 값을 받으려고 노력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더 잘 알아주면, 그것이 진실과 일치하는지와는 전혀 상관 없이, 무조건 좋아합니다. 자신의 노동에 대한 돈값이 올라가면, 무조건 좋아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인생의 가치가 높아진 것처럼 생각합니다.

반면,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인생을 비하하기 쉽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으면 초조해지고 불안해집니다. 자신의 노동에 대한 값이 떨어지면 자신의 생명의 값도 떨어진 것처럼 생각하고 실망합니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좋은 시장에 자신을 상품으로 내놓고 싶어합니다. 할 수 있으면 많은 값을 받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운동 선수 중 하나인 뉴욕 양키즈(New York Yankees)의 알렉스 로드리게스(Alex Rodriguez)가 2004년 받은 연봉이 이천백칠십이만육천팔백팔십일($ 21,726,881) 달러였다고 합니다. 계약금이나 다른 benefit을 모두 제외한, 연봉만을 말하는 겁니다. 이것을 365일로 나누어보니, 하루에 약 6만달러를 매일 번 셈입니다. 2005년 8월 31일자 '와싱톤포스트'(The Washington Post)에 보니, 2004년 미국민의 평균 가구 일년 소득이 44,389달러였다고 합니다. 스타급 운동 선수 한 사람의 하루 수입이 중산층 가족의 평균 1년 수입보다 많다는 이 사실을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습니까? 저는 스타급 운동 선수가 왜 이렇게 많이 받아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루에 6만 달러를 버는 그 선수가 하루에 60 달러를 버는 노동자보다 더 나은 인생이라고 누군가 생각한다면,저는 분노할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온 우주보다 귀하다고 하셨던 영혼의 값이야 하루 60달러 버는 사람이나 6만 달러 버는 인생이나 같겠지만, 누가 그 인생의 시간을 더 값있게 사용하고 있느냐는 따져 볼만한 질문입니다. 하루에 60달러를 버는 막노동자가 하루에 6만 달러를 받는 사람보다 더 값있는 인생을 살 수도 있습니다. 인생의 값은 자유시장경제가 메겨 주는 돈값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4.

기독교 복음은 이같은 사고를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참으로 불행한 것은 이같은 타락한 자본주의 사고의 정체를 드러내고 그것을 거부해야 할 교회들이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오히려 그 사고에 젖어 적극적인 신봉자가 되고 심지어는 선전자가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 복음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여 눈 먼 경쟁의 질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더 알려지고 더 팔려다니고 더 많은 값을 받으려는 욕망의 정체를 보게 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기독교 복음은 우리 사회에서의 무한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기독교인만의 비법을 가르치는 축복의 종교로 타락해 버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고자 하는 욕망에 얼마나 큰 위험이 숨어있는지 가르치지 않습니다. 자신을 상품화시키고 더 많은 값을 받으려는 노력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알려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도 자신의 인생의 값을 자신의 연봉의 크고 작음으로 판단하려 합니다. 심지어 교회의 사역을 판단하는 데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합니다. 얼마나 많이 모이고, 얼마나 헌금이 많고, 얼마나 유명하냐에 따라 목사의 값도 달라지고, 교인의 값도 달라지고, 교회의 값도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심각한 오류이며, 참으로 부끄러운 죄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형님의 능력을 보고 그것을 상품으로 만들어 인기를 얻고 돈을 벌고 권력을 얻을 생각에 잠겨 있던 예수님의 동생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괄호로 묶여있는 7장 5절을 보십시다. 이 구절을 괄호로 묶어놓은 이유는 이 문장이 요한복음 저자가 덧붙여 놓은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저자가 뭐라고 해석합니까? "예수의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이 예수님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그분의 모든 것을 상품화시키자고 제안한 것은 그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아마, 예수님의 동생들이 이 말을 들었으면 화를 냈을 것입니다. 그들은 형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믿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제안을 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저자가 보기에 그들은 믿은 게 아니었습니다. 진정으로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외적인 능력을 보고 불끈 달아 올라 흥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적으로 그분과 하나되어 그분이 지향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분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드리고 그것에 동의하고 그것을 따르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믿고 있다고요? 잘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믿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활동하고 계십니까? 믿음이 살아있다는 말은 주님이 살아 역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내 삶 속에서 활동하신다면 우리는 그분처럼 살아가도록 변화하게 됩니다. 보는 것도 달라지고, 생각하는 것도 달라지고, 판단하는 것도 달라지고, 결정하는 것도 달라집니다. 세속적인 기준을 사용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기준을 사용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숨어 일할 수 있습니다. 숨겨져 있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그것을 복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돈 되는 일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정열을 다해 일할 이유와 동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돈값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거나 우리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는 어리석음을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대가가 어떻든, 사람들이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우리의 능력을 다해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우리는 무한 경쟁으로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타는 갈증으로부터 해갈되고, 경쟁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부름을 위해 기쁘게 하루 하루 살아가는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5.


제 기억에 남아있는 '가장 아름다운 연주'가 있습니다. 제 책에서 한 번 이 이야기를 나눈 바 있습니다만, 몇 년 전에 제가 토론토(Toronto)를 방문했을 때 경험한 일입니다. 그 때, 이미 작고하신 헨리 나우엔(Henri Nouwen) 신부님이 말년에 살다 가신 장애인 공동체 '라르쉬'(L'Arche) 토론토 센터에 들러 돌아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헨리 나우엔 신부님은 노틀담대학교(The University of Notre Dame), 예일 대학교(Yale University) 그리고 마지막에 하버드 대학교(Harvard University)에서 신학을 가르쳤던 탁월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탁월한 신학자답게 성공의 계단을 하나 하나 올라 결국 세계 정상의 자리에 섰습니다. 그런데 학자로서의 인생의 절정에서 그분은 갑자기 모든 것을 버리고 토론토에 있는 장애인 공동체로 와서 장애인들을 섬기며 살다 갔습니다. 그 결심을 돌아보며 헨리 나우엔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날 아침, 나는 잠에서 깨어나면서 내가 매우 어두운 곳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과 '탈진'이라는 심리학적 용어로 미화했지만 실제로는
영적으로 죽어 있었던 사실을 깨달았다.(I woke up one day with the
realization that I was living in a very dark place and that the
term 'burnout' was a convenient psychological translation for a
spiritual death.)

하버드대학교 교수로부터 장애인 공동체의 원목으로 내려앉고 나서야 나우엔 신부님은 평화와 안식과 만족을 찾았다고 고백합니다. 자본주의적인 사고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세계 최고의 석학들과 천재들의 공동체로부터 사회로부터 밀려난 장애인의 공동체로, 세계 학문의 중심지에서 별로 알려진 바 없는 토론토의 변두리로, 고액 연봉에서 최저 생계비로, 상아탑에서 허름한 캐빈 숙소로의 전환이 자본주의적인 기준으로는 좌천이요 추락이요 실패지만 신앙적인 기준으로는 진정한 삶의 회복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열매 중 하나의 예로서, 저는 '라르쉬'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보았던 한 피아니스트를 들곤 합니다. 아담하고 정갈하고 아름답게 지어진 예배당에 들어섰을 때, 피아노 앞에서 한 음악가가 정성을 다해 연주하고 있었고, 그 곁에는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이 듣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그 한 사람만을 위한 음악회였습니다. 제가 음악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대단한 수준의 음악가임에 틀림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는 필경 개런티 한 푼 기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한 사람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눈을 감고 감상하고 있던 그 장애인은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모습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생각할수록, 그 사람은 진정한 예술가요 진정한 프로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연주가, 한 회에 수만 달러의 개런티를 받고 카네기 홀같은 곳에서 전회 매진의 열기 속에서 연주하는 음악가의 연주보다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지 않나 하는 믿음이 제게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것은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마주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의사 결정에서도 이러한 깨어있는 의식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진실로 믿는 것입니다. 진실로 믿을 때, 우리에게는 이같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참된 믿음의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을 기대하십니다. 믿는다는 열심은 있으나 사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은, 아니 때로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잇속 밝은 사람을 기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직장에서, 돈값에 울고 웃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에게 있는 시간과 능력과 은사로써 이웃에게 진실한 도움을 주는 것, 그것이 우리 직업의 참된 의미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할 때, 어떤 대접을 받게 될까, 얼마나 알아줄까, 어떤 댓가를 줄까를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일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가정에서, 내 위치를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것으로써 모든 가족들을 섬기는 데 힘을 다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교회에서, 나를 알아줄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내가 얼마나 이익을 얻을 수 있는가를 따지지 않고, 내게 주어진 은사로써 성도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팔을 걷어 부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일을 다 하고 나서도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고 물러설 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궂은 일을 하면서 "내 노동력이 얼마짜린데뀉"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교회는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헌신으로 성숙합니다. 아,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참된 헌신자들이 우리 교회를 가득 채우게 되기를! 그리하여 교회의 사역을 든든히 세우고, 그 힘으로써 세상을 향해 강력한 사랑의 손길을 뻗을 수 있기를! 자신을 세우고 드러내기 위한 헌신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헌신에 인생을 던질 수 있는 참된 믿음의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가득 채우기를!

우리 모두가, 주님의 은혜로써, 떡갈나무 숲속에 묻혀있던 샘물을 발견하고 목을 축인 다음, "아무도 모르라고" 다시 고이 덮고 내려오는 그 시인의 기쁨을 우리 삶 속에서 발견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은혜의 떡갈나무 잎으로 "아무도 모르라고" 가려져 있어, 언제까지고 생명을 잃지 않는 샘물처럼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살아, 나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명수를 밖으로 흘려 보내어 온갖 수목과 짐승들을 살게하는 샘물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저희의 소원을 허락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주님,
주님을 알아갈수록
주님의 지혜에 놀랍니다.
주님을 알아갈수록
저희의 부족함과 빗나감에 놀랍니다.
저희가 얼마나 이 시대 풍조에 젖어 있는지를 알고 놀랍니다.
그것이 잘못된 줄도 모르고 따라가고 있던 저희 자신을 보고 놀랍니다.
믿는다고 생각했지만
참된 믿음의 열매가 부족했던 것을 알고 또 놀랍니다.
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참된 믿음을 주소서.
주님처럼 보고
주님처럼 생각하고
주님처럼 판단하고
주님처럼 행동하도록,
오 주님,
저희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하소서.
주님처럼 참된 인생을 살도록,
오 주님,
허락하소서.
역사하소서.
참된 것을 보고
참된 것을 위해 살도록
오 주님,
저희를 다스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