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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봉목사 (와싱턴한인교회)
오늘로서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끝마칩니다. 요한복음 6장은 특별히 길게 느껴집니다. 갈릴리 호수 동편에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수많은 무리를 먹이신 다음, 그날 밤에 주님께서는 폭풍 가운데 어려움을 당하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나다!”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을 목적지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런 다음, 그분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참된 생명의 빵과 음료에 대해 설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갈릴리 호수 동편으로, 다시 서편으로, 그리고 가버나움 회당으로 옮겨 다니시는 동안, 무리들은 민첩하게 그분을 따라 다닙니다. 그만큼 예수님에게 깊이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그분이 일으키시는 기적들은 만사를 제쳐놓고 따라다니고 싶을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1.
예수님을 따라 가버나움 회당에까지 와서 운집한 무리들은 예수님이 더 이상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시고 말씀에 전념하시자, 마음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이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되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기적에 붙잡혀 있었는데, 예수님은 기적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배불리 먹고 편히 살 수 있게 되기를 원했는데, 예수님은 배고프고 불편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기를 원했으나, 예수님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참되고 의롭고 신실하게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자면 그들이 그 동안 즐겼던 것들을 포기해야 될지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사는 것이 왠지 불편하고 어렵고 손해 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것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만의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자처했던 사람들 중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60절을 한 번 보십시다.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서 여럿이 이 말씀을 듣고 말하기를 “이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
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예수의 제자들’은 열 두 제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수는 꽤 많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열 두 제자는 그들 중에서 특별히 선택된 그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예수의 제자들’은 호기심에 끌려 모여들었던 무리들과는 다른 사람들, 즉 진지한 태도로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논쟁을 주고받으면서 설교 하실 때 가만히 있었는데, 이제 막판에 입을 엽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어려워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들었을까요? 아닐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심오하고 어려운 진리를 아주 쉽게 전하는 비법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야기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셨고, 여러 가지 비유를 사용하기도 하셨습니다. 쉬운 이야기도 어렵게 말하려는 학자들의 심술이 예수님에게는 없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어렵게 들리는 것은 번역으로 인해 원래의 의미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의 뜻을 우리보다 더 잘 파악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2.
저는 정신분석학을 가르치는 친구로부터 “못 알아듣는 것은, 대개의 경우, 안 받아들이려는 의지가 만들어내는 결과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실제로는 알아들었는데, 알아들은 그 내용을 받아들이면 어려움과 손해가 있을 것을 알기 때문에, 못 알아들은 척 가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 심각해지면, 스스로 못 들은 척 가장하고 있다는 의식조차 사라진다고 합니다. 진짜 모르겠다는 느낌이 든다는 겁니다.
이 정신분석학의 이론에 의하면, 제자들이 한 말 즉 “이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라는 말은 정말 어려워서 한 말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불편한 심기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1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이 자기의 말을 두고 수군거리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
다. “이 말이 너희의 마음에 걸리느냐?”
예수님은 인간의 심층심리를 꿰뚫어 보셨던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하는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이 말이 너희에게 이해하기 어려우냐?”고 묻지 않으시고, “이 말이 너희의 마음에 걸리느냐?”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문제가 이해력이 부족한 데 있지 않고, 알아들은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데 있음을 아셨습니다.
허를 찔린 제자들은 두 가지의 선택의 기로에 마주서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선택은 진리를 외면하려 했던 자아의 죄를 인정하고 겸허하게 진리를 대면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하나의 선택은 진리의 도전을 회피하기 위해 예수님을 떠나 다른 선생을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종교 지도자들로 넘쳐났습니다. 그들 중에는 진리를 당의정처럼 만들어서 축복의 복음, 번영의 복음, 기적의 복음을 전하는 지도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웬만하면 눈을 감아주고 하나님의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처럼 그렇게 철저한 헌신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적지 않은 제자들은 이 선택의 기로에서 진리를 외면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66절에 보니, “이 때문에 제자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떠나갔고, 더 이상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에게 계속 반문을 제기했던 유대인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 둘씩 무리들은 떠나갔고, 가까이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귀기우리고 있던 제자들 가운데에서도 적지 않은 수가 그분을 떠났습니다. 이제 열 두 제자와 적은 수의 다른 제자들만 남았습니다. 그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물으십니다.“너희까지도 떠나가려 하느냐?”
헬라 말에는 질문하는 방법이 두 가지 있습니다. “예”라는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 방법도 있고, “아니오”라는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 방법도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너희까지도 떠나가려 하느냐?”는 질문은 “가지 않겠습니다.”라는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니까, “너희까지도 가려는 것은 아니겠지?” 혹은 “너희야 떠나가지 않겠지?”라는 식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어 성경 NIV는 이 뉘앙스를 살려서 “You don't want to leave too, do you?”라고 번역합니다. 이 질문으로써 예수님은, 그들만은 당신 곁에 남아 있어 주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러자 열 두 제자의 대변인 격으로 활동했던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알았습니다.
예수님께 이보다 더 행복한 고백이 또 어디 있을까요? 당신을 높여 주었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비록 힘들고 어렵고 부담스럽게 들리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라면, 그대로 한 번 살아보겠노라고 다짐하는 제자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그분을 행복하게 했을 것입니다.
3.
이 짧은 대화는 오늘의 교회의 문제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미국에서든 한국에서든, 교회가 사회적인 이슈로 부각되고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는 일이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그 문제의 핵심으로 지적되는 것이 ‘기독교 복음의 변질’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있는 그대로 선명하게 전하는 교회가 보기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들을 수 있는 복음은 ‘거치는 것’을 제거해 낸, 도전적인 요소를 제거한, 야성이 제거된 복음이라는 지적입니다. 헌신과 변화와 성숙과 갱신을 요청하는 살아있는 복음이 아니라, 웬만한 헌신을 조건으로 축복과 번영과 영생을 약속하는 복음이 선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뀌지 않는 한, 교회에 희망이 없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길들여지지 않은, 예수님의 예언적이고 야성적이고 도전적인 복음을 전할 때, 그것을 반기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평안과 행복을 얻기 위해 교회를 찾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이 선명하게 들려지는 교회를 부담스러워합니다. 한 편으로는 번영의 복음, 축복의 복음은 예수님의 복음이 아니라고 동의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그런 ‘무리 없는’ 복음, 쉬운 복음, 편안한 복음을 원합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한 목사는 참 고민스럽습니다. 마치, 목사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선명한 복음을 선포하여 교인들을 교회 밖으로 몰아내거나, 아니면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 축복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 두 가지 밖에 없는 듯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있는 그대로 선포해 가지고는 교회가 성장하는 일이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라는 책을 써낸 이후, 매우 야성적인 복음을 대변하는 사람으로 알려진 저 같은 사람은 더 심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상을 가지고 목회하면 실패할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제목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찾아온 어느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 즉“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 19:24)는 말씀에서 따온 것입니다. 책 제목이 특이해서 그런지 아니면 혼동스러워 그런지,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오래 전에 맨하탄에 있는 어느 서점에 가서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라는 책이 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그 주인께서 “보자, 낙타귀, 낙타귀가 어디 있더라?”라고 말하시면서 책을 찾으시는 겁니다. 한 참 후에, 그 책을 꺼내어 내미시면서 “자, 낙타귀, 여기 있습니다.”하십니다. 책의 제목을 뻔히 보고도 말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분은 보고 싶은 대로 보는구나!” 또 어떤 사람은 <낙타귀를 통과한 부자>라고도 합니다. 부자가 낙타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더 쉬울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은 <부자귀를 통과한 바늘>이라고 말합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얼마나 아플까 싶습니다.
이 책은 한국 교회에서 ‘청부론’ 즉 ‘깨끗한 부자론’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번영의 복음’이 왜 문제인지, 그것이 옳지 않다면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옳은지를 설명한 책입니다.‘기독교 청부론’의 핵심은 이런 것입니다. 정당하게 노동하여 깨끗하게 돈을 벌고, 그 수입에서 세금을 정직하게 내고, 십일조와 구제를 위해 정직하게 몫을 구별해 드리고 나면, 나머지 돈에 대해서는 누릴 권리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이렇게 ‘깨끗한 부자’가 되어 마음껏 누릴 꿈을 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심 찬 비전을 마음에 품고, 정직하고 깨끗하게 살아감으로써 성공을 일구고, 그 성공의 열매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나머지 열매들을 누리며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얼른 보면,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따져 보면, 한국 교인들의 일반적인 윤리 의식 수준을 감안해 볼 때, 이것만 해도 실로 높은 기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회에서 정직하고 깨끗하게 돈을 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자신의 수입에서 정직하게 세금을 내는 일이 자영업자들 즉 self-employed people에게 있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게다가, 십일조를 정직하게 드리고, 그에 더하여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일정 금액을 기부한다는 것도 보통 결심이 아니고는 하기 어렵습니다. 이 만큼만 해도 좋은 기독교인이라고 부를만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제가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에서 주장한 내용입니다. 자기 수입에서 그 모든 것을 떼고 나서도 마음껏 쓸 돈이 남는다면, 그 사람은 사회적 기준으로 ‘부자’에 속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웬만한 중산층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하고 나면 저축할 여유도 없이 한 달 생활비를 충당하기에 빠듯할 것입니다. 중산층 이하에 사는 사람들은 빚을 지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에서도 세금 감면 등의 사회 보장 제도를 만들어 그들을 돕고 있습니다. 자신이 빚에 쪼들리면서까지 남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그렇게 하고 나서도 마음껏 쓸만한 여유 돈이 남을 경우에 생깁니다.
제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하나님은 내가 돈을 버는 과정에도, 그 수입에서 세금을 내고 헌금을 드리고 이웃을 돕는 과정에도 관심을 두시지만, 내 손에 남겨진 돈이 어떻게 쓰여지느냐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고 계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수입의 십분의 일만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우리 수입 전체, 우리 소유 전체, 우리 존재 전체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 소유, 우리 수입, 우리 시간, 우리 생명 전체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되도록 그분의 뜻을 묻고 그 뜻을 따르도록 힘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우리는 우리 자신과 가족을 위해 과도한 소비를 줄이게 될 것이고, 살림살이를 좀 더 단순화시키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웃을 위해 나눌 수 있는 몫이 점점 더 커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억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 책을 읽고 어떤 분은 “그러면 나보고 지금 다 털어 나누어주고 거지가 되라는 말이냐?”라고 반문하십니다. 저는 이 책에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반문하는 것은, 어찌 보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떠나간 제자들’과 같이, 저의 책이 주는 도전을 회피하려는 의도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경우에 따라서 당장 모든 것을 팔아치우고 당신을 따르라고 요청하신 적도 있습니다만, 대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각자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스스로 깨닫고 결심하고 실행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억지로 해서는 될 일이 아닙니다. 제가 이 책에서 개진한 것도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통해 영적으로 회복된 사람이 결국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의 높은 기준을,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제시했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해 가면서 우리에게 점진적으로 일어나야 할 변화를 말한 것입니다.
4.
저는 지금 제 책을 선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본질적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그 기쁜 소식은 우리를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모습 이대로” 우리를 받으시지만, “내 모습 이대로” 머물러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과의 사귐 안에서 변화되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의 모습대로 닮아가고, 그분의 관심을 우리의 관심으로 끌어안고, 그분의 꿈을 우리의 꿈으로 품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품은 그분의 관심과 그분의 꿈을 이루어가도록 우리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어느 정도에서 “이만하면 되었다”고 멈추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속속들이, 철두철미, 남김없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복음의 부름이요, 그렇게 변화시키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이렇게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렇게 되었다가는 모든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고행의 수도승처럼’ 되어 버릴 거라고 겁을 냅니다. 그런 것은 부름 받은 소수의 헌신자들에게나 기대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적당한 정도에서 멈추려 합니다. 적당한 정도 헌신을 하고, 그 상태에서 평안과 축복을 약속 받으려 합니다. 신앙생활을 대하는 태도가 마치 보험을 사는 듯한 태도와 흡사합니다. 가장 적게 투자하여 가장 많은 것을 보장 받으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 물질적으로든 시간적으로 헌신을 호소하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런 태도에 도전하기보다는 그런 태도를 이용하려 합니다. 그들의 구미에 맞게 복음을 재단하고 길들입니다. 이렇게 하여 결국 복음에서 모든 거치는 것이 제거되고, ‘편한 복음’, ‘듣기 좋은 복음’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렇듯, 길들여진 예수님의 복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만, 야성적인 예수님의 복음에는 사람들이 접근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늘날이나 예수님 시대나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이런 고민이 따라다닙니다. 저에게도 이것이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와싱톤한인교회에 파송 받아 오면서 “과연, 지금껏 해 오던 소리를 계속할 수 있을까? 혹시나 녹슨 칼처럼 무뎌지는 것은 아닐까? 교회를 온전한 신앙공동체로 성숙시켜가면서도 예수님의 야성적인 복음을 지속적으로 전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했습니다.
이런 고민을 붙들고 씨름 하던 중에 하나님은 제게 해답을 주셨습니다. 약 한 달 전에 알링턴 지방에 새로 파송 받은 목회자들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모임에서 조영진 감리사님이 설교하시는 중에 다음과 같은 예화를 말씀하셨는데, 그것에 제게는 이 고민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처럼 들렸습니다.
어느 교회에 한 목사님이 파송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부임하는 주간부터 시작하여 매 주일 같은 내용의 설교를 했습니다. 그분의 설교 내용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여러분, 이렇게 살면 장차 지옥에 가게 됩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인들은 하나 둘씩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그 목사님은 메시지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거의 문 닫게 될 지경에 교회는 감독님에게 새로운 목사를 파송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교회를 딱하게 생각한 감독님은 다른 목사님을 파송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도 부임하는 주일부터 주일마다 똑 같은 내용의 설교를 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렇게 살면 장차 지옥에 가게 됩니다.”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흩어졌던 교인들이 다시 모여들고 믿지 않던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는 크게 성장했고 많은 선교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감독님이 그 교회를 방문하여 교인들에게 물었답니다. “아니, 두 목사님이 동일한 내용의 설교를 했는데, 왜 먼저 목사님 때는 교회가 문 닫을 지경이 되더니, 지금은 이렇게 성장하는 겁니까?”그랬더니 그 교회의 제직 회장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먼저 목사님은 미움으로 그 설교를 했고, 지금 목사님은 사랑으로 그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차이는 그것뿐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바로 그거다!”하고 마음속으로 감사드렸습니다. 저의 사상이나 신학이 지금보다 더 철저해지고 날카로워지더라도 제 마음 안에 사랑이 있다면, 성도들의 영혼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살아있기만 하다면, 성도들을 질책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 자신과 성도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으로 이끌기 위한 간절한 사랑으로 한다면, 어떤 말씀이든 두려움 없이 전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들었습니다.
5.
제 책에서 말한 표준에 근거하여 다른 누구를 판단할 자격이 제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저는 다른 누구를 판단하기 위해 이 책을 쓰지 않았습니다. 단지, 저 자신의 영적 탐구의 결과로 이 책을 썼습니다. 저는 그 책에서 말한 표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로써 부단히 가까이 가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언제까지나 저는 부족한 자로 판단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앞에 있는 경주에 전심을 다할 뿐입니다.
다만, 그 길이 참된 길임을 믿기에 겸허히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여러분에게 자주 청할 것입니다. 이 길을 함께 가자고 말입니다. 하나님께 힘을 구하면서, 더 낮추고, 더 비우고, 더 나누고, 더 섬기는 이 길을 같이 가자고, 아니, 좀 더 힘을 내어 걸음을 재촉하자고, 청할 것입니다. 저의 간절한 기도는 우리 교회에 들어오는 모든 성도들께서 “너희까지도 떠나 가려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대해 “주님, 진리의 말씀이 여기 있는데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라고 응답한 열 두 제자처럼 되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미국의 수도 와싱톤에 위치한 우리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명하게 들려지는 교회로 우뚝 세워지면 어떻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이 시대를 향해, 이 사회를 향해, 이 문화를 향해 날카로운 예언적 음성을 선포하고, 강력한 헌신을 통해 교회로서의 진정한 선교 사역을 온전히 이루어가는 교회로 성숙되어 간다면 어떻겠습니까? 저는 오늘의 본문을 두고 묵상하면서 이런 소망을 가져 보았습니다. 이런 일들이 저에게, 여러분에게 그리고 우리 교회에 일어난다면,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싶습니다. 2천년 전, 가버나움 회당에서 떠나가는 제자들의 뒷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하셨던 주님, 그 주님이 우리를 통해 그 안타까움을 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 주님,
저희를 도우소서.
주님의 그 안타까움을 저희가 풀어드리고 싶습니다.
저희 교회를 통해
주님의 그 거친 복음이 우렁차게 울려 퍼지게 하소서.
말씀의 전달자로 세움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함께 하시어
주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영감과
그 말씀을 울려낼 수 있는 담대함을 허락하소서.
모든 성도들에게 은총을 베푸시어
말씀의 도전 앞에 겸허히 그리고 담대히 서게 하시고
그 도전을 즐거이 받아들이게 하소서.
우리 교회가 진리의 용광로가 되게 하시어
모든 성도들이 정금같이 연단되는 은총을 허락하소서.
그렇게 되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며 얼마나 큰 영광인지
알게 하소서.
그런 거룩한 열망이
머리 숙인 저희 모두의 마음속에 타오르게 하소서.
오늘로서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끝마칩니다. 요한복음 6장은 특별히 길게 느껴집니다. 갈릴리 호수 동편에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수많은 무리를 먹이신 다음, 그날 밤에 주님께서는 폭풍 가운데 어려움을 당하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나다!”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을 목적지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런 다음, 그분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참된 생명의 빵과 음료에 대해 설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갈릴리 호수 동편으로, 다시 서편으로, 그리고 가버나움 회당으로 옮겨 다니시는 동안, 무리들은 민첩하게 그분을 따라 다닙니다. 그만큼 예수님에게 깊이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그분이 일으키시는 기적들은 만사를 제쳐놓고 따라다니고 싶을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1.
예수님을 따라 가버나움 회당에까지 와서 운집한 무리들은 예수님이 더 이상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시고 말씀에 전념하시자, 마음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이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되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기적에 붙잡혀 있었는데, 예수님은 기적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배불리 먹고 편히 살 수 있게 되기를 원했는데, 예수님은 배고프고 불편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기를 원했으나, 예수님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참되고 의롭고 신실하게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자면 그들이 그 동안 즐겼던 것들을 포기해야 될지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사는 것이 왠지 불편하고 어렵고 손해 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것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만의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자처했던 사람들 중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60절을 한 번 보십시다.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서 여럿이 이 말씀을 듣고 말하기를 “이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
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예수의 제자들’은 열 두 제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수는 꽤 많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열 두 제자는 그들 중에서 특별히 선택된 그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예수의 제자들’은 호기심에 끌려 모여들었던 무리들과는 다른 사람들, 즉 진지한 태도로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논쟁을 주고받으면서 설교 하실 때 가만히 있었는데, 이제 막판에 입을 엽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어려워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들었을까요? 아닐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심오하고 어려운 진리를 아주 쉽게 전하는 비법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야기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셨고, 여러 가지 비유를 사용하기도 하셨습니다. 쉬운 이야기도 어렵게 말하려는 학자들의 심술이 예수님에게는 없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어렵게 들리는 것은 번역으로 인해 원래의 의미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의 뜻을 우리보다 더 잘 파악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2.
저는 정신분석학을 가르치는 친구로부터 “못 알아듣는 것은, 대개의 경우, 안 받아들이려는 의지가 만들어내는 결과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실제로는 알아들었는데, 알아들은 그 내용을 받아들이면 어려움과 손해가 있을 것을 알기 때문에, 못 알아들은 척 가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 심각해지면, 스스로 못 들은 척 가장하고 있다는 의식조차 사라진다고 합니다. 진짜 모르겠다는 느낌이 든다는 겁니다.
이 정신분석학의 이론에 의하면, 제자들이 한 말 즉 “이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라는 말은 정말 어려워서 한 말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불편한 심기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1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이 자기의 말을 두고 수군거리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
다. “이 말이 너희의 마음에 걸리느냐?”
예수님은 인간의 심층심리를 꿰뚫어 보셨던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하는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이 말이 너희에게 이해하기 어려우냐?”고 묻지 않으시고, “이 말이 너희의 마음에 걸리느냐?”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문제가 이해력이 부족한 데 있지 않고, 알아들은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데 있음을 아셨습니다.
허를 찔린 제자들은 두 가지의 선택의 기로에 마주서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선택은 진리를 외면하려 했던 자아의 죄를 인정하고 겸허하게 진리를 대면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하나의 선택은 진리의 도전을 회피하기 위해 예수님을 떠나 다른 선생을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종교 지도자들로 넘쳐났습니다. 그들 중에는 진리를 당의정처럼 만들어서 축복의 복음, 번영의 복음, 기적의 복음을 전하는 지도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웬만하면 눈을 감아주고 하나님의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처럼 그렇게 철저한 헌신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적지 않은 제자들은 이 선택의 기로에서 진리를 외면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66절에 보니, “이 때문에 제자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떠나갔고, 더 이상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에게 계속 반문을 제기했던 유대인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 둘씩 무리들은 떠나갔고, 가까이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귀기우리고 있던 제자들 가운데에서도 적지 않은 수가 그분을 떠났습니다. 이제 열 두 제자와 적은 수의 다른 제자들만 남았습니다. 그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물으십니다.“너희까지도 떠나가려 하느냐?”
헬라 말에는 질문하는 방법이 두 가지 있습니다. “예”라는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 방법도 있고, “아니오”라는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 방법도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너희까지도 떠나가려 하느냐?”는 질문은 “가지 않겠습니다.”라는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니까, “너희까지도 가려는 것은 아니겠지?” 혹은 “너희야 떠나가지 않겠지?”라는 식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어 성경 NIV는 이 뉘앙스를 살려서 “You don't want to leave too, do you?”라고 번역합니다. 이 질문으로써 예수님은, 그들만은 당신 곁에 남아 있어 주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러자 열 두 제자의 대변인 격으로 활동했던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알았습니다.
예수님께 이보다 더 행복한 고백이 또 어디 있을까요? 당신을 높여 주었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비록 힘들고 어렵고 부담스럽게 들리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라면, 그대로 한 번 살아보겠노라고 다짐하는 제자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그분을 행복하게 했을 것입니다.
3.
이 짧은 대화는 오늘의 교회의 문제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미국에서든 한국에서든, 교회가 사회적인 이슈로 부각되고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는 일이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그 문제의 핵심으로 지적되는 것이 ‘기독교 복음의 변질’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있는 그대로 선명하게 전하는 교회가 보기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들을 수 있는 복음은 ‘거치는 것’을 제거해 낸, 도전적인 요소를 제거한, 야성이 제거된 복음이라는 지적입니다. 헌신과 변화와 성숙과 갱신을 요청하는 살아있는 복음이 아니라, 웬만한 헌신을 조건으로 축복과 번영과 영생을 약속하는 복음이 선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뀌지 않는 한, 교회에 희망이 없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길들여지지 않은, 예수님의 예언적이고 야성적이고 도전적인 복음을 전할 때, 그것을 반기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평안과 행복을 얻기 위해 교회를 찾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이 선명하게 들려지는 교회를 부담스러워합니다. 한 편으로는 번영의 복음, 축복의 복음은 예수님의 복음이 아니라고 동의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그런 ‘무리 없는’ 복음, 쉬운 복음, 편안한 복음을 원합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한 목사는 참 고민스럽습니다. 마치, 목사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선명한 복음을 선포하여 교인들을 교회 밖으로 몰아내거나, 아니면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 축복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 두 가지 밖에 없는 듯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있는 그대로 선포해 가지고는 교회가 성장하는 일이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라는 책을 써낸 이후, 매우 야성적인 복음을 대변하는 사람으로 알려진 저 같은 사람은 더 심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상을 가지고 목회하면 실패할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제목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찾아온 어느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 즉“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 19:24)는 말씀에서 따온 것입니다. 책 제목이 특이해서 그런지 아니면 혼동스러워 그런지,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오래 전에 맨하탄에 있는 어느 서점에 가서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라는 책이 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그 주인께서 “보자, 낙타귀, 낙타귀가 어디 있더라?”라고 말하시면서 책을 찾으시는 겁니다. 한 참 후에, 그 책을 꺼내어 내미시면서 “자, 낙타귀, 여기 있습니다.”하십니다. 책의 제목을 뻔히 보고도 말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분은 보고 싶은 대로 보는구나!” 또 어떤 사람은 <낙타귀를 통과한 부자>라고도 합니다. 부자가 낙타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더 쉬울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은 <부자귀를 통과한 바늘>이라고 말합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얼마나 아플까 싶습니다.
이 책은 한국 교회에서 ‘청부론’ 즉 ‘깨끗한 부자론’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번영의 복음’이 왜 문제인지, 그것이 옳지 않다면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옳은지를 설명한 책입니다.‘기독교 청부론’의 핵심은 이런 것입니다. 정당하게 노동하여 깨끗하게 돈을 벌고, 그 수입에서 세금을 정직하게 내고, 십일조와 구제를 위해 정직하게 몫을 구별해 드리고 나면, 나머지 돈에 대해서는 누릴 권리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이렇게 ‘깨끗한 부자’가 되어 마음껏 누릴 꿈을 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심 찬 비전을 마음에 품고, 정직하고 깨끗하게 살아감으로써 성공을 일구고, 그 성공의 열매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나머지 열매들을 누리며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얼른 보면,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따져 보면, 한국 교인들의 일반적인 윤리 의식 수준을 감안해 볼 때, 이것만 해도 실로 높은 기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회에서 정직하고 깨끗하게 돈을 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자신의 수입에서 정직하게 세금을 내는 일이 자영업자들 즉 self-employed people에게 있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게다가, 십일조를 정직하게 드리고, 그에 더하여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일정 금액을 기부한다는 것도 보통 결심이 아니고는 하기 어렵습니다. 이 만큼만 해도 좋은 기독교인이라고 부를만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제가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에서 주장한 내용입니다. 자기 수입에서 그 모든 것을 떼고 나서도 마음껏 쓸 돈이 남는다면, 그 사람은 사회적 기준으로 ‘부자’에 속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웬만한 중산층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하고 나면 저축할 여유도 없이 한 달 생활비를 충당하기에 빠듯할 것입니다. 중산층 이하에 사는 사람들은 빚을 지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에서도 세금 감면 등의 사회 보장 제도를 만들어 그들을 돕고 있습니다. 자신이 빚에 쪼들리면서까지 남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그렇게 하고 나서도 마음껏 쓸만한 여유 돈이 남을 경우에 생깁니다.
제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하나님은 내가 돈을 버는 과정에도, 그 수입에서 세금을 내고 헌금을 드리고 이웃을 돕는 과정에도 관심을 두시지만, 내 손에 남겨진 돈이 어떻게 쓰여지느냐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고 계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수입의 십분의 일만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우리 수입 전체, 우리 소유 전체, 우리 존재 전체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 소유, 우리 수입, 우리 시간, 우리 생명 전체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되도록 그분의 뜻을 묻고 그 뜻을 따르도록 힘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우리는 우리 자신과 가족을 위해 과도한 소비를 줄이게 될 것이고, 살림살이를 좀 더 단순화시키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웃을 위해 나눌 수 있는 몫이 점점 더 커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억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 책을 읽고 어떤 분은 “그러면 나보고 지금 다 털어 나누어주고 거지가 되라는 말이냐?”라고 반문하십니다. 저는 이 책에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반문하는 것은, 어찌 보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떠나간 제자들’과 같이, 저의 책이 주는 도전을 회피하려는 의도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경우에 따라서 당장 모든 것을 팔아치우고 당신을 따르라고 요청하신 적도 있습니다만, 대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각자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스스로 깨닫고 결심하고 실행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억지로 해서는 될 일이 아닙니다. 제가 이 책에서 개진한 것도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통해 영적으로 회복된 사람이 결국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의 높은 기준을,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제시했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해 가면서 우리에게 점진적으로 일어나야 할 변화를 말한 것입니다.
4.
저는 지금 제 책을 선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본질적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그 기쁜 소식은 우리를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모습 이대로” 우리를 받으시지만, “내 모습 이대로” 머물러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과의 사귐 안에서 변화되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의 모습대로 닮아가고, 그분의 관심을 우리의 관심으로 끌어안고, 그분의 꿈을 우리의 꿈으로 품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품은 그분의 관심과 그분의 꿈을 이루어가도록 우리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어느 정도에서 “이만하면 되었다”고 멈추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속속들이, 철두철미, 남김없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복음의 부름이요, 그렇게 변화시키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이렇게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렇게 되었다가는 모든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고행의 수도승처럼’ 되어 버릴 거라고 겁을 냅니다. 그런 것은 부름 받은 소수의 헌신자들에게나 기대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적당한 정도에서 멈추려 합니다. 적당한 정도 헌신을 하고, 그 상태에서 평안과 축복을 약속 받으려 합니다. 신앙생활을 대하는 태도가 마치 보험을 사는 듯한 태도와 흡사합니다. 가장 적게 투자하여 가장 많은 것을 보장 받으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 물질적으로든 시간적으로 헌신을 호소하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런 태도에 도전하기보다는 그런 태도를 이용하려 합니다. 그들의 구미에 맞게 복음을 재단하고 길들입니다. 이렇게 하여 결국 복음에서 모든 거치는 것이 제거되고, ‘편한 복음’, ‘듣기 좋은 복음’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렇듯, 길들여진 예수님의 복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만, 야성적인 예수님의 복음에는 사람들이 접근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늘날이나 예수님 시대나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이런 고민이 따라다닙니다. 저에게도 이것이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와싱톤한인교회에 파송 받아 오면서 “과연, 지금껏 해 오던 소리를 계속할 수 있을까? 혹시나 녹슨 칼처럼 무뎌지는 것은 아닐까? 교회를 온전한 신앙공동체로 성숙시켜가면서도 예수님의 야성적인 복음을 지속적으로 전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했습니다.
이런 고민을 붙들고 씨름 하던 중에 하나님은 제게 해답을 주셨습니다. 약 한 달 전에 알링턴 지방에 새로 파송 받은 목회자들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모임에서 조영진 감리사님이 설교하시는 중에 다음과 같은 예화를 말씀하셨는데, 그것에 제게는 이 고민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처럼 들렸습니다.
어느 교회에 한 목사님이 파송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부임하는 주간부터 시작하여 매 주일 같은 내용의 설교를 했습니다. 그분의 설교 내용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여러분, 이렇게 살면 장차 지옥에 가게 됩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인들은 하나 둘씩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그 목사님은 메시지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거의 문 닫게 될 지경에 교회는 감독님에게 새로운 목사를 파송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교회를 딱하게 생각한 감독님은 다른 목사님을 파송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도 부임하는 주일부터 주일마다 똑 같은 내용의 설교를 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렇게 살면 장차 지옥에 가게 됩니다.”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흩어졌던 교인들이 다시 모여들고 믿지 않던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는 크게 성장했고 많은 선교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감독님이 그 교회를 방문하여 교인들에게 물었답니다. “아니, 두 목사님이 동일한 내용의 설교를 했는데, 왜 먼저 목사님 때는 교회가 문 닫을 지경이 되더니, 지금은 이렇게 성장하는 겁니까?”그랬더니 그 교회의 제직 회장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먼저 목사님은 미움으로 그 설교를 했고, 지금 목사님은 사랑으로 그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차이는 그것뿐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바로 그거다!”하고 마음속으로 감사드렸습니다. 저의 사상이나 신학이 지금보다 더 철저해지고 날카로워지더라도 제 마음 안에 사랑이 있다면, 성도들의 영혼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살아있기만 하다면, 성도들을 질책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 자신과 성도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으로 이끌기 위한 간절한 사랑으로 한다면, 어떤 말씀이든 두려움 없이 전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들었습니다.
5.
제 책에서 말한 표준에 근거하여 다른 누구를 판단할 자격이 제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저는 다른 누구를 판단하기 위해 이 책을 쓰지 않았습니다. 단지, 저 자신의 영적 탐구의 결과로 이 책을 썼습니다. 저는 그 책에서 말한 표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로써 부단히 가까이 가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언제까지나 저는 부족한 자로 판단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앞에 있는 경주에 전심을 다할 뿐입니다.
다만, 그 길이 참된 길임을 믿기에 겸허히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여러분에게 자주 청할 것입니다. 이 길을 함께 가자고 말입니다. 하나님께 힘을 구하면서, 더 낮추고, 더 비우고, 더 나누고, 더 섬기는 이 길을 같이 가자고, 아니, 좀 더 힘을 내어 걸음을 재촉하자고, 청할 것입니다. 저의 간절한 기도는 우리 교회에 들어오는 모든 성도들께서 “너희까지도 떠나 가려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대해 “주님, 진리의 말씀이 여기 있는데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라고 응답한 열 두 제자처럼 되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미국의 수도 와싱톤에 위치한 우리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명하게 들려지는 교회로 우뚝 세워지면 어떻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이 시대를 향해, 이 사회를 향해, 이 문화를 향해 날카로운 예언적 음성을 선포하고, 강력한 헌신을 통해 교회로서의 진정한 선교 사역을 온전히 이루어가는 교회로 성숙되어 간다면 어떻겠습니까? 저는 오늘의 본문을 두고 묵상하면서 이런 소망을 가져 보았습니다. 이런 일들이 저에게, 여러분에게 그리고 우리 교회에 일어난다면,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싶습니다. 2천년 전, 가버나움 회당에서 떠나가는 제자들의 뒷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하셨던 주님, 그 주님이 우리를 통해 그 안타까움을 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 주님,
저희를 도우소서.
주님의 그 안타까움을 저희가 풀어드리고 싶습니다.
저희 교회를 통해
주님의 그 거친 복음이 우렁차게 울려 퍼지게 하소서.
말씀의 전달자로 세움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함께 하시어
주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영감과
그 말씀을 울려낼 수 있는 담대함을 허락하소서.
모든 성도들에게 은총을 베푸시어
말씀의 도전 앞에 겸허히 그리고 담대히 서게 하시고
그 도전을 즐거이 받아들이게 하소서.
우리 교회가 진리의 용광로가 되게 하시어
모든 성도들이 정금같이 연단되는 은총을 허락하소서.
그렇게 되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며 얼마나 큰 영광인지
알게 하소서.
그런 거룩한 열망이
머리 숙인 저희 모두의 마음속에 타오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