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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근목사 (영안교회)
25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저희의 가는 촌(村)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같이 하시니 29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31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35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한 신혼부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로 너무나 사랑하여 만난 지 6개월도 안 되어 결혼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둘 다 직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만의 사랑을 즐기기 위해 아이는 3년 후에 낳기로, 결혼하기 전에 이미 합의하였습니다. 그런데 신혼여행을 다녀온 지, 채 두 달도 안 되어 아내는 구역질을 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물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드러누워 버립니다. 아기를 가진 겁니다. 둘만의 시간을 가지겠다던 신혼의 꿈은 깨지고, 남편은 밥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고, 아내는 아내대로 입덧과 직장생활로 거의 초죽음이 되었습니다.
그 10개월 동안 이 부부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드디어 아이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아내의 몸조리도 끝나고 몸매도 이전처럼 되돌아 왔습니다. 그래서 그 열 달의 수고를 회상하며, 두 사람은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1년이 넘게 이 고생을 하며 아이를 낳고 키웠으니 여행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행계획을 다 세우고, 아기 옆에 우유통 몇 개를 두고, 아기에게 얘기합니다. "우유는 이렇게 가져다 먹는 것이란다" 하고 설명을 자세히 해주고, 아기가 먹을 모든 음식을 다 준비해 두었어요. 그리고 1박2일의 짧은 여행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짧은 기간 동안 잘 지낼 줄 알았던 아기가 거의 아사(餓死)상태, 죽기 직전인 겁니다. 급하게 병원으로 옮겼는데 의사가 하는 말이 위중하다는 겁니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면서 이 부부가 화를 냅니다. "아니, 열 달이나 길러서 낳아 주었는데 그까짓 하루도 못 사냐! 하루를 혼자 못살아?" 하면서 화를 냅니다. 이 세상에 이런 부모는 없지만 혹시 압니까? 신세대 가운데 이런 부모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실제로 있는 얘기는 아닙니다.
이것은 양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꾸며진 이야기입니다. 양육이 얼마나 중요한가! 아이를 낳는 것이 힘들지만, 기르는 것도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작년 11월의 통계를 보면, 아이를 낳아서 대학 졸업시키고 결혼시킬 때까지 비용이 6억 원이 든답니다. 아이 다섯을 키웠다면 30억이 투자된 것입니다. 제가 따져보니 이자까지 합쳐진 것 같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2살까지 사용되는 1회용 기저귀가 평균 3천 개입니다. 3천 개가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안 되시죠? 3천 개의 기저귀를 펴지 않고 구입할 때의 모양대로 쌓으면, 12층 높이의 건물이 됩니다. 엄청난 양이지요. 그것을 3천 번을 갈아 끼운다고 생각해 보세요.
저도 경험했지만, 신혼부부들은 다 아실 겁니다. 아기가 배변을 해서 아내가 도움을 청하면, 남편들은 딴청을 피웁니다. 3천 번을 닦아주어야 하고, 수많은 목욕을 시켜줘야 하고, 우유를 타야 합니다. 게다가 잠투정이 심한 아이는 밤을 새워 달래 주어야 합니다. 어디 가서 다칠까, 언제 열이 날까, 정말로 부부가 온 정성을 다해서 자라는 것이 아이입니다. 가히 아이를 키우는 일은 상상을 초월하는 겁니다. 그러나 부모들은 이 모든 것들을 능히 감당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갓 태어난 새신자에게도 이와 같은 수고가 필요함을 아십니까? 많은 교회에서 전도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날 교회의 성장은 멈추어 버렸습니다. 전도하는 교회가 이렇게 많은데, 왜 교인들은 늘어나지 않는 것일까요? 왜 성장이 없을까요? 그것은 전도 후에 계속되어야 할 양육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전도를 열심히 하는 교회를 보면, 전도할 때는 열을 올려서 합니다. 몇 달 동안 온갖 고생을 합니다.
저희 교회에서도 실제로 넉 달이나 ''새생명 축제''를 준비했습니다. 태신자를 품고, 접촉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관계를 형성하다가, 드디어 지난 주 주일과 월요일에 초청을 했습니다. 안 오면 어떻게 하나 해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더라고요. 제가 강사를 대접하기 위해서 지난 주일에 롯데호텔에 들렀더니, 롯데호텔 중국식당에 우리 교인이 많았습니다. 평상시에는 그 식당에 잘 안 가는 분들 같은데, 그 태신자를 교회에 초대하기 위해서 돈을 쓴 것입니다. 그런데, 몇 달 수고한 후 많은 성도들이 "내가 몇 달 동안 수고해서 당신이 교회에 나왔으니 이제는 당신이 알아서 하십시오" 하는 식입니다.
이 교회에는 목사님도 계시고 전도사님도 계십니다. 그분들은 양육전문가이며 보모들입니다. 박정근 원장부터 밑으로 수많은 보모들이 있으니까 그분들이 다 알아서 해 줄 겁니다. 내가 몇 달 동안 당신이 교회에 나오도록 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한 줄 압니까? 이제 저는 여행을 떠나려고 합니다. 넉 달 동안 고생했으니 이제는 신경을 안 쓸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여행을 떠나는 교인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여행을 다녀와서 "으악!" 하고 놀랍니다. 대부분의 새신자가 교회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보모 실력이 형편없구먼!" 하고 원망합니다. "아니, 내가 넉 달이나 공을 들였는데, 그 사이를 못 참고 교회를 안 나와? 하나님이 택하지 않은 것 같으니라고!" 그리고는 관계를 끊어 버립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모습도 아니며, 전도의 모습은 더 더욱 아닙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첫 1년이 중요하듯, 새신자의 첫 1년도 상당히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는 이들을 잘 돌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마치 소아과 의사처럼 우리는 그들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알아내며, 그들을 잘 인도하고 돌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새가족을 잘 돌볼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의 스승 되신 예수님의 모습 가운데서, 몇 가지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은 상당히 유명한 본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에 엠마오 도상에서 두 제자를 만난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에 새신자를 돌아보는 원리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고난 주일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제자들은 당혹함과 황당함을 감추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예수님이 분명히 메시아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믿던 메시아는 돌아가실 분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로마 정부를 쳐부수고 이스라엘을 독립시켜 줄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어요. 예수님이 바로 그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어요. 기도할 때 하나님이 보여주셨고, 예수님이 침례 받으실 때, 분명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셔서 요단강 가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이 사람이 바로 메시아다!" 하고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어요.
그런데, 그들이 믿었던 메시아가 십자가에 달려 쓸쓸히 돌아가신 겁니다. 그들의 황당함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너무 낙심했어요. 집과 가정, 친척들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아 나섰건만, 예수님이 돌아가신 이상 무슨 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낙심해서 자기 고향 엠마오로 돌아가고 있었어요.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25리 떨어진 곳이었어요.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그들은 혼란에 빠져 있었어요. "그분이 메시아가 아니란 말인가! 분명 메시아인 줄 알았는데 왜 십자가에 돌아가셨지?" 더구나 빈 무덤 얘기는 무엇이란 말인가? 여인 둘이 예수님의 무덤에 향유를 붓기 위해 갔는데 무덤이 열려 있었다고 했다. 천사가 하는 말이 "살아났다!" 고 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난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어쨌든 무덤은 비어 있었다. 베드로가 달려가 확인했는데 사실이었다.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정말 혼란 가운데 빠져서 걸어가고 있었어요.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들은 낙심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어요.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그들과 동행하십니다. 그들의 실망과 당혹감이 얼마나 컸던지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을 감히 상상하지 못했어요. 17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서더라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 이 구절을 원어로 보면, ''아주 열띤 토론''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 분이 메시아야" "말도 안 돼. 그러면 왜 돌아가셨어?" "살아나신다니까" "말도 안 돼.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아나?" "그러면 무덤이 왜 열려 있었냐?" "훔쳐 갔겠지 뭐!" 이렇게 서로 이야기를 하니까 예수님께 다 들렸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길가면서 그렇게 격론을 벌이는 내용이 무엇이냐?" 하고 물었더니, 이 사람들이 너무나 기가 막혀 묻는 겁니다. "당신, 예루살렘 사람 아니요?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이 일을 모르는구먼! 이 일을 모르는 사람은 당신뿐일 거요!" 예수님이 한술 더 떠서 "무슨 일인데 그럽니까?" 라고 물으시자, 19절부터 제자들이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그들에게 계시하심으로 그들의 혼란을 단번에 깨끗이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얘들아, 나다! 뭘 그렇게 고민하느냐?" 하면서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들에게 질문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혼란을 부채질하는 것 같습니다. 왜요? 예수님은 자신이 밥숟가락으로 계속 떠 먹여 주면, 그들의 믿음에 근육이 자라나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때로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짐을 지고 씨름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성숙시키기 위해, 신분을 감추고 오히려 문제를 상기시키는 질문을 하신 겁니다. "당신들이 토론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 때 그들이 얘기합니다. "아, 이런 내용 아니요. 당신 그것을 모릅니까?" "무슨 일이요?" 했더니, 그들 스스로가 설명합니다. 정신병을 고치는 분들이나 상담학자들이, 심각한 문제를 가진 사람에게 종종 사용하는 방법 중에 이런 방법을 씁니다. 담당하는 사람이 그 모든 문제를 다 압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답을 얘기해 주기 전에 스스로 답을 찾도록 도와주는 겁니다. 자기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겁니다.
우리가 새신자를 도울 때 종종 느끼는 유혹 가운데 하나가, 우리가 모든 말을 다 해 버리는 겁니다. ''십 수년 간 교회에 와서 배운 성경 지식이 얼마나 많은데...'' 생각하며, 막 가르치고 싶어 미치는 겁니다. 그래서 새신자가 오면 그가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당신은 입 닫고 있으시오! 내가 설명해주지!" 하면서, 차트를 그려가며 열심히 설명을 합니다. 그동안 새신자는 한 마디도 못합니다. 만일 당신이 그렇게 한다면, 그 새신자가 당신을 우러러 보는데는 도움이 될 지는 몰라도, 그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종종 저지르는 실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처음에 누가 많이 얘기했습니까? 제자들이 훨씬 더 많은 얘기를 합니다. 예수님은 몇 마디 질문을 던져서 그들에게 말하도록 도와주신 겁니다. 그들 마음속에 있는 문제와 고민을 털어놓도록 내버려두셨어요. 그러자 제자들은 신이 나서 열띤 토론으로 문제를 스스로 얘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양육의 첫 번째 원리는 스스로 깨닫도록 지혜롭게 도우라는 것입니다.
1. 스스로 깨닫도록 지혜롭게 도와라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타인의 문제를 너무나 잘 파악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몇 시간 만나보면 그 사람의 문제가 무엇인줄 압니다. 그래서 문제를 꼭 집어 얘기해 줍니다. "여보시오. 당신의 문제는 너무 미신적인 거야! 당신은 미신에 잘 빠지는 습성이 있어" 라고 진단을 내려줍니다. "당신은 돈을 너무 좋아해!" "당신은 의지박약형이야!" "당신은 너무 계획성이 없어!" 하고 진단합니다.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보는, 객관적인 사실이긴 하지만, 그 사람의 단점을 딱 집어서 얘기해 주면, 상대방이 그것을 좋게 받아들이기보다는 먼저 상처를 받아요.
부부간에도 그렇습니다. "당신은 너무 후해! 돈을 계획성 있게 써야지!" 아주 외향적 남편과 우울성 기질의 아내가 만나면, "당신의 단점이 뭔 줄 알아? 너무 소가지가 좁아터진 거야!"라고 대꾸합니다. 누가 자신의 단점을 모릅니까? 자기의 기질을 자기만큼 잘 아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그런데 자기의 문제를 제 3자가 지적해주면 마음 문을 딱 닫아 버려요. 상처를 받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녀를 키울 때도 그렇게 합니다. 부모는 자녀의 문제를 너무 잘 압니다. "야, 너는 의지박약형이야!" 부모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자녀는 그 말을 듣고 "내가 고쳐야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 나는 쓸모 없는 놈이야. 나는 의지박약형이야!" 하고 낙심합니다. 이것은 좋은 양육 방법이 아닙니다.
좋은 양육 방법은 자녀의 문제와 단점을 알더라도, 여러분이 직접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간접적인 질문을 함으로, 스스로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요즘 왜 시험에 빠졌나?" "뭐가 시험에 빠져? 돈을 좋아하니까 그렇지!" 하면 상처가 됩니다. 그럴 때 질문을 하는 겁니다. "그래, 왜 시험에 빠졌어? 언제부터 그랬어? 그러면 당신 사업이 부도로 흔들릴 때네" 이런 식으로 문제에 접근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문제를 깨닫게 되면, 자녀나 여러분이 돕는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그래, 이것이 내 문제였구나! 내가 고쳐야지!"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방법이었어요.
"너희의 격론하는 것이 무엇이냐?" "아니, 당신은 모릅니까?" "무슨 일로 그러는데?" 그 다음 스스로 얘기를 하도록 하는 겁니다. 이것이 상담학자들이 쓰는 방법입니다.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자기가 머리로 아는 문제지만, 입으로 자기의 문제를 정리해서 얘기하고 나면, 문제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해결책도 보이고, 많은 경우 그 문제 자체가 사라져 버립니다. 너무 고민이 되어서 내 마음에 있는 것들을 다 얘기하고 돌아오면, 그 문제가 풀린 것도 아닌데 내 마음이 시원해지는 것 아시지요? 이것이 우리가 도와야 할 새신자의 문제입니다. 새신자에게 질문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지혜롭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성경의 모든 답을 다 얘기해줄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3개월 된 새신자가 찾아와서 오래된 집사님께 묻습니다. "저는 요즘 굉장한 고민이 있습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창세기가 저에게는 문제입니다" 했더니, 이 집사님이 두 시간 동안 앉혀놓고,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부터 시작해서 인류의 범죄를 신학적으로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다 듣고 나서 그 분이 얘기합니다. "저는 그게 문제가 아니라, 창세기가 성경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요"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수준에서 생각하지 마시고, 여러분이 답을 다 주려고 하지 마시고, 새가족 스스로 설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지고, 그들의 문제를 스스로 내어놓고 마음 문을 열도록 도우시기 바랍니다.
2. 스스로 설 수 있도록 기다리며 도와라
예수님께서 질문하십니다. 그러자 19절에서 24절까지 제자들이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 아주 재미있는 대답을 합니다.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예수님의 일을 얘기하는 겁니다. 이 두 제자의 답을 들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예수님 자신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으면 "치워라, 그건 내 얘기다. 내 얘기! 결론이 이거다!"라고 할 수도 있는데, 전혀 들을 필요가 없는 얘기를 예수님은 계속 들으십니다. 오늘 본문에 25리를 걸어가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텐데, 대부분의 시간을 이 제자들이 얘기하도록 예수님은 내버려두십니다. 아마 10리 정도는 예수님이 제자들에 관한 문제, 예수님에 관한 얘기, 빈 무덤의 얘기,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던 얘기를 그냥 듣고 계신 겁니다. 심지어 그들이 얘기하도록 주도권을 다 내어주고 방해하지 않으셨습니다. 특히 21절을 보세요.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 말은, 우리는 그가 메시아이고 구속할 자라고 믿었는데 실상은 아니더라는 얘기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얼마나 고쳐주고 싶었겠습니까? "얘들아, 맞다. 예수가 바로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다. 그것이 사실이니 그대로 믿고 의심하지 말라!" 고 얼마나 고쳐주고 싶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참으십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여기서 ''허탄하다''는 말은, 예수님이 살아났다는 소식을 여인들이 전하자, 사도들이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믿지 않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셨는데, 이 두 제자는 예수님의 부활을 허탄한 듯이 듣고 믿지 않는 겁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으며, 자기를 보여주고 싶었겠습니까? "얘들아, 나다!" 하고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의심하고, 부정적인 얘기를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끝까지 그들의 얘기를 참아주고 기다리며 다 귀기울여 들어주십니다. 그들의 의심을 받아주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이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제 막 눈을 뜨기 시작한 새신자들의 습관과 생각이 때로 우리에게 충격을 줄 수 있습니다.
부산에서 목회를 잘 하시고 계신 선배 가운데 한 분이 유성에서 교회 개척을 했습니다. 그는 이전에 충청남도 대표 권투 선수였습니다. 성함은 못 밝히지만, 어느 날 남자 세 명을 전도해서 왔는데, 심방을 갔다 왔더니 이 세 명이 교회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어요. "목사님, 어떻게 했습니까?" "어떡하긴, 그냥 구석에 가서 갈겼지!" 권투 솜씨로 그렇게 했더니 그 다음부터 교회에 안 나오더랍니다. 그래서 유성에서 개척에 실패하셨는데, 부산에 와서는 목회를 잘 하고 계십니다.
그 목사님의 경우는 극단적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우리들 마음속에 이런 태도가 많습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전도해 놓았는데, 새신자들이 나쁜 습관을 끊지 않습니다. 3개월을 성경공부 시켰는데, 여전히 술 먹고, 고도리 치고 들어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충격을 받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전도사 시절, 어느 새가족이 여름 남방셔츠 윗주머니에 꼭 담배를 끼워 서 교회에 나왔어요. 그것이 얼마나 보기 싫던지 그 사람을 미워했어요. 그래서 밉다고 얘기는 못하고 눈에다 힘을 주고 몇 번 쳐다보았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눈치가 얼마나 빠릅니까?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 교회에 안 나왔습니다. 그 때는 마음이 시원했어요. "그래, 담배 끼고 나오느니보다 차라리 안 나오는 것이 낫지!" 그러나 나중에 제가 신학을 공부하며 얼마나 회개했는지 아십니까? 때로 새가족들의 잘못된 행동이나 말이 여러분에게 충격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그것을 받아주어야 합니다.
석 달, 6개월을 공부시켰는데 때로 새가족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잘 믿는 것 같더니 "목사님,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실까요?" 이런 질문 들으면, 환장합니다. 그러나 그런 의심의 말도 받아주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 제자들을 보세요. 예수님이 3년 동안 동고동락하며 가르쳤어요. 1주일에 한번씩 3년이 아니라, 생활을 같이 하며 3년을 지냈는데, 이들은 예수님의 생전에 부활의 말씀을 전혀 믿지 못했던 겁니다. 허탄한 말로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다 받아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그들은 의심의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성숙하기까지 충분한 시간을 주어야 한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삶을 고치시고 그들의 믿음을 자라나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요, 우리의 할 일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 3:6-8)" 자라나게 하는 이는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할 일은 물을 주는 것이라고요. 물만 주면 되는 겁니다. 사랑해 주면 되는 겁니다. 돌보아 주면 되는 겁니다. 그들이 변하기까지 충분한 여유와 시간을 주시기 바랍니다.
담배 피우는 것 괜찮습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에 흡연실 만들자고 했어요. 아주 많은 분들이 펄쩍 뛰어서 못 만들었어요. 흡연실 만든다고 누가 교회에 와서 담배 피우겠어요? 그런데 "야! 그 교회에 흡연실 있다더라!" 는 소문이 나면, 골초들이 모여서 구원받을 줄 믿습니다. 저는 그것을 노린 겁니다. 우리 교회가 문을 좀 열자는 겁니다. 보수적이라고 평가받는 교회들이 마음을 넓히자는 겁니다. 그들을 이해해 주자는 겁니다. 상처받아 갈 곳 없는 그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품어서 안식을 누리도록, 편안함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의심의 말과 예수님에 대한 모욕과 수많은 말들을, 진지한 표정으로 끝까지 들어 주셨습니다. 어떻게 새가족을 도울까요? 지혜롭게, 기다림으로 도와야 합니다.
3. 스스로 확신하도록 말씀으로 도와라
이들의 의심에 대해 예수님이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25절을 보세요.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실수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새신자를 도울 때 말씀으로 돕지 않고, 자신의 경험이나 느낌을 얘기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경험을 신학화해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많이 가르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게 하면 예수님의 제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제자를 만드는 겁니다. 이런 실수를 많이 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 부류가 제자 훈련을 하는 사람입니다. 제자 삼는 사람입니다. 제자 삼는 것이 굉장히 좋지만, 잘못하면 붕어빵을 찍어내기가 쉽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다양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다양하게 창조하셨습니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에게 가르치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은사대로 봉사하도록 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그도 싫어하게 만듭니다. 내가 큰소리로 통성기도하는 것을 싫어하면, 그 제자는 통성기도에 은사가 있는데도 그것을 못하도록 잘라버립니다. "그건 나쁜 거야!" 또 뜨겁게 기도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성대가 약해서 3분 기도하고 나면 못하는 사람에게, 기어코 산기도 데려가서 성대 파열될 때까지 기도시키는 사람들이 또 있어요. 못 따라오면 "너는 내 제자가 아니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잘못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그들을 도울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도와야 할 줄 믿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느낌이나 경험을 가르칠 수 있는 분 아닙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모세와 및 모든 성경을 가지고'' 두 제자를 가르쳤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침례 요한의 자세였습니다. 제자인 빌립과 안드레가 침례 요한과 서 있는데 예수님이 지나갑니다. 침례 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메시아다!" 라고 했어요. 그러자 이 두 제자가 예수님을 좇아가고 싶어하는 눈치입니다. 침례 요한은 빌립과 안드레를 자기에게서 떼어 예수님께 보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해 오고, 안드레가 베드로를 데려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그렇게 늘어났습니다.
자기에게 침례를 받은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침례를 준다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갑니다. 그 때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큰일났습니다. 우리에게 침례 받는 사람보다 예수님께 사람이 더 많이 갑니다" 그러자 침례 요한은 대답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것이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키우는 자를 내 적성대로 키우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맡겨야 합니다. 그 때 성령께서 그 안에 역사하시고, 나와 전혀 다른 기질로 나아가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받아,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더라도 "할렐루야! 너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고 뒷전에 물러앉을 수 있는 자세, 말씀으로 가르치는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한 줄 믿습니다.
지혜가 필요하고, 기다림이 필요하고, 말씀이 필요하고, 마지막 네 번째로 사랑이 필요합니다. 스스로 느끼도록 사랑으로 도와야 합니다.
4. 스스로 느끼도록 사랑으로 도와라
이 말은 자주 접촉해야 된다는 겁니다. 새가족을 성숙시키기 원한다면 자주 접촉해야 합니다. 29-30절을 보세요.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언제 그들의 눈이 떠졌습니까? 밥 먹을 때입니다. 그래서 자주 접촉해야 합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25리를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얘기합니다. "선생님, 우리와 조금 더 있으시죠" 부활하시고 이 세상에 40일밖에 못 계시지만,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집 안에 같이 들어가셔서 저녁식사를 같이 합니다. 식사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들을 축복해 주소서" 간절히 기도하시고 "음식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멘!" 하고 음식을 놓고 기도를 하자 제자들의 눈이 번쩍 떠졌어요.
새 가족을 돕기 위해서는 우리가 접촉해야 한다는 겁니다. 전화해야 합니다. 만나야 합니다. 편지를 보내야 합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함께 식사해야 합니다. 서두에 아이 하나 양육하는데 6억 원이 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6억 원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100분의 1인 6백만 원만 써보십시오. 제가 보장합니다. 그 새가족은 이 교회에 잘 정착할 줄 믿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맛있는 식사를 사 주시고, 집으로 한 달에 한 번 초대하시고, 6백만 원만 한 번 써보세요. 음식을 같이 먹을 때에 그들의 눈이 떠질 줄 믿습니다.
때로 우리가 아무리 잘 가르쳐도 자라는 데는 시간이 필요해요. 제 설교를 열심히 듣는 사람은 "목사님 설교 시간에도 조는 사람이 있습니까?" "예!" 1년 열 두 달 조는 사람이 한 분 있어요. 저도 고민입니다. 이 말을 하고 나면, 저는 한 명인 줄 알았는데 두세 사람이 나오더라고요. 그렇게 성경공부 시켜도 눈이 감기는 건 어쩔 수 없는 겁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마세요. 저의 경험으로 볼 때, 그렇게 졸던 사람이 훌륭한 주의 일꾼이 되는 걸 보았어요. 신기하게도 어느 날, 그의 눈에 광채가 나더라고요. 저는 그 한 사람에게 지금도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계속해서 접촉하고 만나십시오. 특별히 음식을 같이 나누세요.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음식 교제를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음식을 잡수셨어요. 제자들과 만나면 음식 잡수셨어요. 같이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을 뜻합니다. 한 번 식사 대접했다고 그가 성숙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6개월만, 일 주일에 한 번 식사를 해 보세요. 그 사람은 이 교회 교인이 안 되려고 해야 안 될 수가 없어요.
우리가 새생명 축제를 4개월 동안 준비해서 드디어 지난 주일에 이틀 간 모였습니다. 한 번도 교회에 나오지 않았던 사람 350명이 출석했어요. 그 가운데 약 200명이 등록했어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한데, 200명이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또 영접하고 싶다고 의사 표현을 했어요. 이들을 누가 도울 겁니까? 누군가가 양육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돌봐 주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접촉해 주어야 합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아기를 낳았다고 여행갈 수 있나요? 열 달을 고생했으니 너 혼자 좀 커봐라 하고 내버려두면 그 아이가 살아갈 수 있습니까? 누군가가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수고를 해야 합니다. 물질과 시간을 희생하고 여러분의 모든 것을 바쳐야 합니다. 누가 할 겁니까? 이 200명을!
그 일을 당신이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결단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하겠습니다! "목사님, 저는 출산을 못했는데요"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새가족 전도대회 때 한 명도 데려오지 못한 사람은 더 미안한 마음으로, 양자를 삼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네 명, 다섯 명 전도해서 애를 못 키워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사무실로 연락하시면 무료로 양자를 삼도록 해 드립니다. 홀트 아동복지회에 돈 내실 필요도 없어요. 다음 주일 저녁 6시에 만찬을 할 겁니다. 사실은 롯데호텔이나 파라다이스 호텔 같은 곳에서 거창하게 환영회를 하고 싶었는데, 예산이 6,7백만 원이 들어서 교회에 올리지를 못했어요. 우리 교회 식당에서 예쁘게 꾸며서 하기로 하겠습니다. 이 일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날 한 영혼을 맡아서 돌보겠다는 사람은 다 나오십시오. 자원하십시오. 어떻게 아이를 키우는가는 제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열심만 내시면 됩니다. 헌신하시면 됩니다.
지금부터 약 80여 년 전, 경상북도 작은 산촌 마을에 한 소년이 친구의 전도를 받고, 설레는 마음으로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교회에 와서 별 재미를 붙이지 못했어요. 이유는 그 때 당시 주일학교 교사가 그에게 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고, 전도 받아서 교회는 왔지만 아무도 그를 양육해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상처를 받은 그는 교회를 떠나게 되었고, 그 이후로 다시는 교회에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약 40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됩니다. 그분이 바로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어느 날 박 대통령은 목사들을 다 모아놓고, 지나가는 얘기 같지만 마음에 뼈있는 한마디를 했습니다. "내가 그 때 주일학교를 열심히 나갔는데, 그 때 누군가가 나를 잘 도와주었더라면 제가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겁니다" 그분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이 나라의 역사는 바뀌었을 겁니다. 누군가 도와주었다면. 누군가 그를 위해서 기도하며 자신을 희생해 주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겁니다.
여러분이 돕는 그 사람은 천하보다 귀한 영혼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쓰실 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그가 유명한 D. L 무디의 어머니가 될 지, 이 역사를 바꾸어 놓을 지, 이 영안교회 같은 아니 더 큰 교회를 이 땅 위에 세울 기둥 같은 안수집사가 될 지,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당신에게 맡겨진 그 영혼을 당신이 양육하십시오.
특히 오래 믿었는데, 믿음에 기쁨이 없는 분들 계십니까? 잘하고 싶은데 왜 매일 교회만 왔다갔다해야 되는가? 그것을 탈출할 단 하나의 방법은 새신자를 돕는 겁니다. 아기를 키우는 겁니다. 늙으면 인생이 재미없지만, 손자를 앉는 그 기쁨을 맛보셨나요? 젊어지고 싶다면, 신앙의 불이 타오르기를 원한다면, 한 영혼을 하나님 앞에 양자 삼으십시오. 태어나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 영혼을 부둥켜안고 키워보십시오. 여러분의 신앙이 뜨거워질 겁니다. 이 일에 모든 성도들이 동참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25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저희의 가는 촌(村)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같이 하시니 29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31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35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한 신혼부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로 너무나 사랑하여 만난 지 6개월도 안 되어 결혼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둘 다 직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만의 사랑을 즐기기 위해 아이는 3년 후에 낳기로, 결혼하기 전에 이미 합의하였습니다. 그런데 신혼여행을 다녀온 지, 채 두 달도 안 되어 아내는 구역질을 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물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드러누워 버립니다. 아기를 가진 겁니다. 둘만의 시간을 가지겠다던 신혼의 꿈은 깨지고, 남편은 밥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고, 아내는 아내대로 입덧과 직장생활로 거의 초죽음이 되었습니다.
그 10개월 동안 이 부부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드디어 아이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아내의 몸조리도 끝나고 몸매도 이전처럼 되돌아 왔습니다. 그래서 그 열 달의 수고를 회상하며, 두 사람은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1년이 넘게 이 고생을 하며 아이를 낳고 키웠으니 여행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행계획을 다 세우고, 아기 옆에 우유통 몇 개를 두고, 아기에게 얘기합니다. "우유는 이렇게 가져다 먹는 것이란다" 하고 설명을 자세히 해주고, 아기가 먹을 모든 음식을 다 준비해 두었어요. 그리고 1박2일의 짧은 여행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짧은 기간 동안 잘 지낼 줄 알았던 아기가 거의 아사(餓死)상태, 죽기 직전인 겁니다. 급하게 병원으로 옮겼는데 의사가 하는 말이 위중하다는 겁니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면서 이 부부가 화를 냅니다. "아니, 열 달이나 길러서 낳아 주었는데 그까짓 하루도 못 사냐! 하루를 혼자 못살아?" 하면서 화를 냅니다. 이 세상에 이런 부모는 없지만 혹시 압니까? 신세대 가운데 이런 부모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실제로 있는 얘기는 아닙니다.
이것은 양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꾸며진 이야기입니다. 양육이 얼마나 중요한가! 아이를 낳는 것이 힘들지만, 기르는 것도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작년 11월의 통계를 보면, 아이를 낳아서 대학 졸업시키고 결혼시킬 때까지 비용이 6억 원이 든답니다. 아이 다섯을 키웠다면 30억이 투자된 것입니다. 제가 따져보니 이자까지 합쳐진 것 같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2살까지 사용되는 1회용 기저귀가 평균 3천 개입니다. 3천 개가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안 되시죠? 3천 개의 기저귀를 펴지 않고 구입할 때의 모양대로 쌓으면, 12층 높이의 건물이 됩니다. 엄청난 양이지요. 그것을 3천 번을 갈아 끼운다고 생각해 보세요.
저도 경험했지만, 신혼부부들은 다 아실 겁니다. 아기가 배변을 해서 아내가 도움을 청하면, 남편들은 딴청을 피웁니다. 3천 번을 닦아주어야 하고, 수많은 목욕을 시켜줘야 하고, 우유를 타야 합니다. 게다가 잠투정이 심한 아이는 밤을 새워 달래 주어야 합니다. 어디 가서 다칠까, 언제 열이 날까, 정말로 부부가 온 정성을 다해서 자라는 것이 아이입니다. 가히 아이를 키우는 일은 상상을 초월하는 겁니다. 그러나 부모들은 이 모든 것들을 능히 감당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갓 태어난 새신자에게도 이와 같은 수고가 필요함을 아십니까? 많은 교회에서 전도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날 교회의 성장은 멈추어 버렸습니다. 전도하는 교회가 이렇게 많은데, 왜 교인들은 늘어나지 않는 것일까요? 왜 성장이 없을까요? 그것은 전도 후에 계속되어야 할 양육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전도를 열심히 하는 교회를 보면, 전도할 때는 열을 올려서 합니다. 몇 달 동안 온갖 고생을 합니다.
저희 교회에서도 실제로 넉 달이나 ''새생명 축제''를 준비했습니다. 태신자를 품고, 접촉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관계를 형성하다가, 드디어 지난 주 주일과 월요일에 초청을 했습니다. 안 오면 어떻게 하나 해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더라고요. 제가 강사를 대접하기 위해서 지난 주일에 롯데호텔에 들렀더니, 롯데호텔 중국식당에 우리 교인이 많았습니다. 평상시에는 그 식당에 잘 안 가는 분들 같은데, 그 태신자를 교회에 초대하기 위해서 돈을 쓴 것입니다. 그런데, 몇 달 수고한 후 많은 성도들이 "내가 몇 달 동안 수고해서 당신이 교회에 나왔으니 이제는 당신이 알아서 하십시오" 하는 식입니다.
이 교회에는 목사님도 계시고 전도사님도 계십니다. 그분들은 양육전문가이며 보모들입니다. 박정근 원장부터 밑으로 수많은 보모들이 있으니까 그분들이 다 알아서 해 줄 겁니다. 내가 몇 달 동안 당신이 교회에 나오도록 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한 줄 압니까? 이제 저는 여행을 떠나려고 합니다. 넉 달 동안 고생했으니 이제는 신경을 안 쓸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여행을 떠나는 교인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여행을 다녀와서 "으악!" 하고 놀랍니다. 대부분의 새신자가 교회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보모 실력이 형편없구먼!" 하고 원망합니다. "아니, 내가 넉 달이나 공을 들였는데, 그 사이를 못 참고 교회를 안 나와? 하나님이 택하지 않은 것 같으니라고!" 그리고는 관계를 끊어 버립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모습도 아니며, 전도의 모습은 더 더욱 아닙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첫 1년이 중요하듯, 새신자의 첫 1년도 상당히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는 이들을 잘 돌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마치 소아과 의사처럼 우리는 그들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알아내며, 그들을 잘 인도하고 돌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새가족을 잘 돌볼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의 스승 되신 예수님의 모습 가운데서, 몇 가지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은 상당히 유명한 본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에 엠마오 도상에서 두 제자를 만난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에 새신자를 돌아보는 원리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고난 주일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제자들은 당혹함과 황당함을 감추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예수님이 분명히 메시아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믿던 메시아는 돌아가실 분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로마 정부를 쳐부수고 이스라엘을 독립시켜 줄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어요. 예수님이 바로 그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어요. 기도할 때 하나님이 보여주셨고, 예수님이 침례 받으실 때, 분명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셔서 요단강 가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이 사람이 바로 메시아다!" 하고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어요.
그런데, 그들이 믿었던 메시아가 십자가에 달려 쓸쓸히 돌아가신 겁니다. 그들의 황당함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너무 낙심했어요. 집과 가정, 친척들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아 나섰건만, 예수님이 돌아가신 이상 무슨 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낙심해서 자기 고향 엠마오로 돌아가고 있었어요.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25리 떨어진 곳이었어요.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그들은 혼란에 빠져 있었어요. "그분이 메시아가 아니란 말인가! 분명 메시아인 줄 알았는데 왜 십자가에 돌아가셨지?" 더구나 빈 무덤 얘기는 무엇이란 말인가? 여인 둘이 예수님의 무덤에 향유를 붓기 위해 갔는데 무덤이 열려 있었다고 했다. 천사가 하는 말이 "살아났다!" 고 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난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어쨌든 무덤은 비어 있었다. 베드로가 달려가 확인했는데 사실이었다.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정말 혼란 가운데 빠져서 걸어가고 있었어요.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들은 낙심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어요.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그들과 동행하십니다. 그들의 실망과 당혹감이 얼마나 컸던지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을 감히 상상하지 못했어요. 17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서더라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 이 구절을 원어로 보면, ''아주 열띤 토론''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 분이 메시아야" "말도 안 돼. 그러면 왜 돌아가셨어?" "살아나신다니까" "말도 안 돼.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아나?" "그러면 무덤이 왜 열려 있었냐?" "훔쳐 갔겠지 뭐!" 이렇게 서로 이야기를 하니까 예수님께 다 들렸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길가면서 그렇게 격론을 벌이는 내용이 무엇이냐?" 하고 물었더니, 이 사람들이 너무나 기가 막혀 묻는 겁니다. "당신, 예루살렘 사람 아니요?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이 일을 모르는구먼! 이 일을 모르는 사람은 당신뿐일 거요!" 예수님이 한술 더 떠서 "무슨 일인데 그럽니까?" 라고 물으시자, 19절부터 제자들이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그들에게 계시하심으로 그들의 혼란을 단번에 깨끗이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얘들아, 나다! 뭘 그렇게 고민하느냐?" 하면서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들에게 질문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혼란을 부채질하는 것 같습니다. 왜요? 예수님은 자신이 밥숟가락으로 계속 떠 먹여 주면, 그들의 믿음에 근육이 자라나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때로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짐을 지고 씨름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성숙시키기 위해, 신분을 감추고 오히려 문제를 상기시키는 질문을 하신 겁니다. "당신들이 토론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 때 그들이 얘기합니다. "아, 이런 내용 아니요. 당신 그것을 모릅니까?" "무슨 일이요?" 했더니, 그들 스스로가 설명합니다. 정신병을 고치는 분들이나 상담학자들이, 심각한 문제를 가진 사람에게 종종 사용하는 방법 중에 이런 방법을 씁니다. 담당하는 사람이 그 모든 문제를 다 압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답을 얘기해 주기 전에 스스로 답을 찾도록 도와주는 겁니다. 자기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겁니다.
우리가 새신자를 도울 때 종종 느끼는 유혹 가운데 하나가, 우리가 모든 말을 다 해 버리는 겁니다. ''십 수년 간 교회에 와서 배운 성경 지식이 얼마나 많은데...'' 생각하며, 막 가르치고 싶어 미치는 겁니다. 그래서 새신자가 오면 그가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당신은 입 닫고 있으시오! 내가 설명해주지!" 하면서, 차트를 그려가며 열심히 설명을 합니다. 그동안 새신자는 한 마디도 못합니다. 만일 당신이 그렇게 한다면, 그 새신자가 당신을 우러러 보는데는 도움이 될 지는 몰라도, 그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종종 저지르는 실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처음에 누가 많이 얘기했습니까? 제자들이 훨씬 더 많은 얘기를 합니다. 예수님은 몇 마디 질문을 던져서 그들에게 말하도록 도와주신 겁니다. 그들 마음속에 있는 문제와 고민을 털어놓도록 내버려두셨어요. 그러자 제자들은 신이 나서 열띤 토론으로 문제를 스스로 얘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양육의 첫 번째 원리는 스스로 깨닫도록 지혜롭게 도우라는 것입니다.
1. 스스로 깨닫도록 지혜롭게 도와라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타인의 문제를 너무나 잘 파악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몇 시간 만나보면 그 사람의 문제가 무엇인줄 압니다. 그래서 문제를 꼭 집어 얘기해 줍니다. "여보시오. 당신의 문제는 너무 미신적인 거야! 당신은 미신에 잘 빠지는 습성이 있어" 라고 진단을 내려줍니다. "당신은 돈을 너무 좋아해!" "당신은 의지박약형이야!" "당신은 너무 계획성이 없어!" 하고 진단합니다.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보는, 객관적인 사실이긴 하지만, 그 사람의 단점을 딱 집어서 얘기해 주면, 상대방이 그것을 좋게 받아들이기보다는 먼저 상처를 받아요.
부부간에도 그렇습니다. "당신은 너무 후해! 돈을 계획성 있게 써야지!" 아주 외향적 남편과 우울성 기질의 아내가 만나면, "당신의 단점이 뭔 줄 알아? 너무 소가지가 좁아터진 거야!"라고 대꾸합니다. 누가 자신의 단점을 모릅니까? 자기의 기질을 자기만큼 잘 아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그런데 자기의 문제를 제 3자가 지적해주면 마음 문을 딱 닫아 버려요. 상처를 받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녀를 키울 때도 그렇게 합니다. 부모는 자녀의 문제를 너무 잘 압니다. "야, 너는 의지박약형이야!" 부모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자녀는 그 말을 듣고 "내가 고쳐야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 나는 쓸모 없는 놈이야. 나는 의지박약형이야!" 하고 낙심합니다. 이것은 좋은 양육 방법이 아닙니다.
좋은 양육 방법은 자녀의 문제와 단점을 알더라도, 여러분이 직접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간접적인 질문을 함으로, 스스로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요즘 왜 시험에 빠졌나?" "뭐가 시험에 빠져? 돈을 좋아하니까 그렇지!" 하면 상처가 됩니다. 그럴 때 질문을 하는 겁니다. "그래, 왜 시험에 빠졌어? 언제부터 그랬어? 그러면 당신 사업이 부도로 흔들릴 때네" 이런 식으로 문제에 접근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문제를 깨닫게 되면, 자녀나 여러분이 돕는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그래, 이것이 내 문제였구나! 내가 고쳐야지!"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방법이었어요.
"너희의 격론하는 것이 무엇이냐?" "아니, 당신은 모릅니까?" "무슨 일로 그러는데?" 그 다음 스스로 얘기를 하도록 하는 겁니다. 이것이 상담학자들이 쓰는 방법입니다.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자기가 머리로 아는 문제지만, 입으로 자기의 문제를 정리해서 얘기하고 나면, 문제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해결책도 보이고, 많은 경우 그 문제 자체가 사라져 버립니다. 너무 고민이 되어서 내 마음에 있는 것들을 다 얘기하고 돌아오면, 그 문제가 풀린 것도 아닌데 내 마음이 시원해지는 것 아시지요? 이것이 우리가 도와야 할 새신자의 문제입니다. 새신자에게 질문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지혜롭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성경의 모든 답을 다 얘기해줄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3개월 된 새신자가 찾아와서 오래된 집사님께 묻습니다. "저는 요즘 굉장한 고민이 있습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창세기가 저에게는 문제입니다" 했더니, 이 집사님이 두 시간 동안 앉혀놓고,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부터 시작해서 인류의 범죄를 신학적으로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다 듣고 나서 그 분이 얘기합니다. "저는 그게 문제가 아니라, 창세기가 성경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요"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수준에서 생각하지 마시고, 여러분이 답을 다 주려고 하지 마시고, 새가족 스스로 설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지고, 그들의 문제를 스스로 내어놓고 마음 문을 열도록 도우시기 바랍니다.
2. 스스로 설 수 있도록 기다리며 도와라
예수님께서 질문하십니다. 그러자 19절에서 24절까지 제자들이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 아주 재미있는 대답을 합니다.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예수님의 일을 얘기하는 겁니다. 이 두 제자의 답을 들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예수님 자신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으면 "치워라, 그건 내 얘기다. 내 얘기! 결론이 이거다!"라고 할 수도 있는데, 전혀 들을 필요가 없는 얘기를 예수님은 계속 들으십니다. 오늘 본문에 25리를 걸어가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텐데, 대부분의 시간을 이 제자들이 얘기하도록 예수님은 내버려두십니다. 아마 10리 정도는 예수님이 제자들에 관한 문제, 예수님에 관한 얘기, 빈 무덤의 얘기,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던 얘기를 그냥 듣고 계신 겁니다. 심지어 그들이 얘기하도록 주도권을 다 내어주고 방해하지 않으셨습니다. 특히 21절을 보세요.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 말은, 우리는 그가 메시아이고 구속할 자라고 믿었는데 실상은 아니더라는 얘기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얼마나 고쳐주고 싶었겠습니까? "얘들아, 맞다. 예수가 바로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다. 그것이 사실이니 그대로 믿고 의심하지 말라!" 고 얼마나 고쳐주고 싶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참으십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여기서 ''허탄하다''는 말은, 예수님이 살아났다는 소식을 여인들이 전하자, 사도들이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믿지 않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셨는데, 이 두 제자는 예수님의 부활을 허탄한 듯이 듣고 믿지 않는 겁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으며, 자기를 보여주고 싶었겠습니까? "얘들아, 나다!" 하고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의심하고, 부정적인 얘기를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끝까지 그들의 얘기를 참아주고 기다리며 다 귀기울여 들어주십니다. 그들의 의심을 받아주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이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제 막 눈을 뜨기 시작한 새신자들의 습관과 생각이 때로 우리에게 충격을 줄 수 있습니다.
부산에서 목회를 잘 하시고 계신 선배 가운데 한 분이 유성에서 교회 개척을 했습니다. 그는 이전에 충청남도 대표 권투 선수였습니다. 성함은 못 밝히지만, 어느 날 남자 세 명을 전도해서 왔는데, 심방을 갔다 왔더니 이 세 명이 교회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어요. "목사님, 어떻게 했습니까?" "어떡하긴, 그냥 구석에 가서 갈겼지!" 권투 솜씨로 그렇게 했더니 그 다음부터 교회에 안 나오더랍니다. 그래서 유성에서 개척에 실패하셨는데, 부산에 와서는 목회를 잘 하고 계십니다.
그 목사님의 경우는 극단적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우리들 마음속에 이런 태도가 많습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전도해 놓았는데, 새신자들이 나쁜 습관을 끊지 않습니다. 3개월을 성경공부 시켰는데, 여전히 술 먹고, 고도리 치고 들어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충격을 받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전도사 시절, 어느 새가족이 여름 남방셔츠 윗주머니에 꼭 담배를 끼워 서 교회에 나왔어요. 그것이 얼마나 보기 싫던지 그 사람을 미워했어요. 그래서 밉다고 얘기는 못하고 눈에다 힘을 주고 몇 번 쳐다보았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눈치가 얼마나 빠릅니까?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 교회에 안 나왔습니다. 그 때는 마음이 시원했어요. "그래, 담배 끼고 나오느니보다 차라리 안 나오는 것이 낫지!" 그러나 나중에 제가 신학을 공부하며 얼마나 회개했는지 아십니까? 때로 새가족들의 잘못된 행동이나 말이 여러분에게 충격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그것을 받아주어야 합니다.
석 달, 6개월을 공부시켰는데 때로 새가족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잘 믿는 것 같더니 "목사님,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실까요?" 이런 질문 들으면, 환장합니다. 그러나 그런 의심의 말도 받아주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 제자들을 보세요. 예수님이 3년 동안 동고동락하며 가르쳤어요. 1주일에 한번씩 3년이 아니라, 생활을 같이 하며 3년을 지냈는데, 이들은 예수님의 생전에 부활의 말씀을 전혀 믿지 못했던 겁니다. 허탄한 말로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다 받아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그들은 의심의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성숙하기까지 충분한 시간을 주어야 한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삶을 고치시고 그들의 믿음을 자라나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요, 우리의 할 일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 3:6-8)" 자라나게 하는 이는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할 일은 물을 주는 것이라고요. 물만 주면 되는 겁니다. 사랑해 주면 되는 겁니다. 돌보아 주면 되는 겁니다. 그들이 변하기까지 충분한 여유와 시간을 주시기 바랍니다.
담배 피우는 것 괜찮습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에 흡연실 만들자고 했어요. 아주 많은 분들이 펄쩍 뛰어서 못 만들었어요. 흡연실 만든다고 누가 교회에 와서 담배 피우겠어요? 그런데 "야! 그 교회에 흡연실 있다더라!" 는 소문이 나면, 골초들이 모여서 구원받을 줄 믿습니다. 저는 그것을 노린 겁니다. 우리 교회가 문을 좀 열자는 겁니다. 보수적이라고 평가받는 교회들이 마음을 넓히자는 겁니다. 그들을 이해해 주자는 겁니다. 상처받아 갈 곳 없는 그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품어서 안식을 누리도록, 편안함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의심의 말과 예수님에 대한 모욕과 수많은 말들을, 진지한 표정으로 끝까지 들어 주셨습니다. 어떻게 새가족을 도울까요? 지혜롭게, 기다림으로 도와야 합니다.
3. 스스로 확신하도록 말씀으로 도와라
이들의 의심에 대해 예수님이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25절을 보세요.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실수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새신자를 도울 때 말씀으로 돕지 않고, 자신의 경험이나 느낌을 얘기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경험을 신학화해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많이 가르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게 하면 예수님의 제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제자를 만드는 겁니다. 이런 실수를 많이 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 부류가 제자 훈련을 하는 사람입니다. 제자 삼는 사람입니다. 제자 삼는 것이 굉장히 좋지만, 잘못하면 붕어빵을 찍어내기가 쉽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다양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다양하게 창조하셨습니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에게 가르치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은사대로 봉사하도록 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그도 싫어하게 만듭니다. 내가 큰소리로 통성기도하는 것을 싫어하면, 그 제자는 통성기도에 은사가 있는데도 그것을 못하도록 잘라버립니다. "그건 나쁜 거야!" 또 뜨겁게 기도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성대가 약해서 3분 기도하고 나면 못하는 사람에게, 기어코 산기도 데려가서 성대 파열될 때까지 기도시키는 사람들이 또 있어요. 못 따라오면 "너는 내 제자가 아니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잘못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그들을 도울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도와야 할 줄 믿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느낌이나 경험을 가르칠 수 있는 분 아닙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모세와 및 모든 성경을 가지고'' 두 제자를 가르쳤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침례 요한의 자세였습니다. 제자인 빌립과 안드레가 침례 요한과 서 있는데 예수님이 지나갑니다. 침례 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메시아다!" 라고 했어요. 그러자 이 두 제자가 예수님을 좇아가고 싶어하는 눈치입니다. 침례 요한은 빌립과 안드레를 자기에게서 떼어 예수님께 보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해 오고, 안드레가 베드로를 데려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그렇게 늘어났습니다.
자기에게 침례를 받은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침례를 준다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갑니다. 그 때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큰일났습니다. 우리에게 침례 받는 사람보다 예수님께 사람이 더 많이 갑니다" 그러자 침례 요한은 대답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것이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키우는 자를 내 적성대로 키우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맡겨야 합니다. 그 때 성령께서 그 안에 역사하시고, 나와 전혀 다른 기질로 나아가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받아,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더라도 "할렐루야! 너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고 뒷전에 물러앉을 수 있는 자세, 말씀으로 가르치는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한 줄 믿습니다.
지혜가 필요하고, 기다림이 필요하고, 말씀이 필요하고, 마지막 네 번째로 사랑이 필요합니다. 스스로 느끼도록 사랑으로 도와야 합니다.
4. 스스로 느끼도록 사랑으로 도와라
이 말은 자주 접촉해야 된다는 겁니다. 새가족을 성숙시키기 원한다면 자주 접촉해야 합니다. 29-30절을 보세요.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언제 그들의 눈이 떠졌습니까? 밥 먹을 때입니다. 그래서 자주 접촉해야 합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25리를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얘기합니다. "선생님, 우리와 조금 더 있으시죠" 부활하시고 이 세상에 40일밖에 못 계시지만,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집 안에 같이 들어가셔서 저녁식사를 같이 합니다. 식사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들을 축복해 주소서" 간절히 기도하시고 "음식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멘!" 하고 음식을 놓고 기도를 하자 제자들의 눈이 번쩍 떠졌어요.
새 가족을 돕기 위해서는 우리가 접촉해야 한다는 겁니다. 전화해야 합니다. 만나야 합니다. 편지를 보내야 합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함께 식사해야 합니다. 서두에 아이 하나 양육하는데 6억 원이 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6억 원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100분의 1인 6백만 원만 써보십시오. 제가 보장합니다. 그 새가족은 이 교회에 잘 정착할 줄 믿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맛있는 식사를 사 주시고, 집으로 한 달에 한 번 초대하시고, 6백만 원만 한 번 써보세요. 음식을 같이 먹을 때에 그들의 눈이 떠질 줄 믿습니다.
때로 우리가 아무리 잘 가르쳐도 자라는 데는 시간이 필요해요. 제 설교를 열심히 듣는 사람은 "목사님 설교 시간에도 조는 사람이 있습니까?" "예!" 1년 열 두 달 조는 사람이 한 분 있어요. 저도 고민입니다. 이 말을 하고 나면, 저는 한 명인 줄 알았는데 두세 사람이 나오더라고요. 그렇게 성경공부 시켜도 눈이 감기는 건 어쩔 수 없는 겁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마세요. 저의 경험으로 볼 때, 그렇게 졸던 사람이 훌륭한 주의 일꾼이 되는 걸 보았어요. 신기하게도 어느 날, 그의 눈에 광채가 나더라고요. 저는 그 한 사람에게 지금도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계속해서 접촉하고 만나십시오. 특별히 음식을 같이 나누세요.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음식 교제를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음식을 잡수셨어요. 제자들과 만나면 음식 잡수셨어요. 같이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을 뜻합니다. 한 번 식사 대접했다고 그가 성숙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6개월만, 일 주일에 한 번 식사를 해 보세요. 그 사람은 이 교회 교인이 안 되려고 해야 안 될 수가 없어요.
우리가 새생명 축제를 4개월 동안 준비해서 드디어 지난 주일에 이틀 간 모였습니다. 한 번도 교회에 나오지 않았던 사람 350명이 출석했어요. 그 가운데 약 200명이 등록했어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한데, 200명이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또 영접하고 싶다고 의사 표현을 했어요. 이들을 누가 도울 겁니까? 누군가가 양육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돌봐 주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접촉해 주어야 합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아기를 낳았다고 여행갈 수 있나요? 열 달을 고생했으니 너 혼자 좀 커봐라 하고 내버려두면 그 아이가 살아갈 수 있습니까? 누군가가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수고를 해야 합니다. 물질과 시간을 희생하고 여러분의 모든 것을 바쳐야 합니다. 누가 할 겁니까? 이 200명을!
그 일을 당신이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결단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하겠습니다! "목사님, 저는 출산을 못했는데요"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새가족 전도대회 때 한 명도 데려오지 못한 사람은 더 미안한 마음으로, 양자를 삼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네 명, 다섯 명 전도해서 애를 못 키워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사무실로 연락하시면 무료로 양자를 삼도록 해 드립니다. 홀트 아동복지회에 돈 내실 필요도 없어요. 다음 주일 저녁 6시에 만찬을 할 겁니다. 사실은 롯데호텔이나 파라다이스 호텔 같은 곳에서 거창하게 환영회를 하고 싶었는데, 예산이 6,7백만 원이 들어서 교회에 올리지를 못했어요. 우리 교회 식당에서 예쁘게 꾸며서 하기로 하겠습니다. 이 일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날 한 영혼을 맡아서 돌보겠다는 사람은 다 나오십시오. 자원하십시오. 어떻게 아이를 키우는가는 제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열심만 내시면 됩니다. 헌신하시면 됩니다.
지금부터 약 80여 년 전, 경상북도 작은 산촌 마을에 한 소년이 친구의 전도를 받고, 설레는 마음으로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교회에 와서 별 재미를 붙이지 못했어요. 이유는 그 때 당시 주일학교 교사가 그에게 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고, 전도 받아서 교회는 왔지만 아무도 그를 양육해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상처를 받은 그는 교회를 떠나게 되었고, 그 이후로 다시는 교회에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약 40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됩니다. 그분이 바로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어느 날 박 대통령은 목사들을 다 모아놓고, 지나가는 얘기 같지만 마음에 뼈있는 한마디를 했습니다. "내가 그 때 주일학교를 열심히 나갔는데, 그 때 누군가가 나를 잘 도와주었더라면 제가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겁니다" 그분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이 나라의 역사는 바뀌었을 겁니다. 누군가 도와주었다면. 누군가 그를 위해서 기도하며 자신을 희생해 주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겁니다.
여러분이 돕는 그 사람은 천하보다 귀한 영혼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쓰실 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그가 유명한 D. L 무디의 어머니가 될 지, 이 역사를 바꾸어 놓을 지, 이 영안교회 같은 아니 더 큰 교회를 이 땅 위에 세울 기둥 같은 안수집사가 될 지,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당신에게 맡겨진 그 영혼을 당신이 양육하십시오.
특히 오래 믿었는데, 믿음에 기쁨이 없는 분들 계십니까? 잘하고 싶은데 왜 매일 교회만 왔다갔다해야 되는가? 그것을 탈출할 단 하나의 방법은 새신자를 돕는 겁니다. 아기를 키우는 겁니다. 늙으면 인생이 재미없지만, 손자를 앉는 그 기쁨을 맛보셨나요? 젊어지고 싶다면, 신앙의 불이 타오르기를 원한다면, 한 영혼을 하나님 앞에 양자 삼으십시오. 태어나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 영혼을 부둥켜안고 키워보십시오. 여러분의 신앙이 뜨거워질 겁니다. 이 일에 모든 성도들이 동참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