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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희목사 (지구촌교회-서울)
베드로에 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12 제자들 중에 베드로만큼은 자기 부인하고 함께 선교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못 알아들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라』고 말씀하셨는데, 베드로는 “자기를”에서 “를” 자를 빼먹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자기 부인하고 나를 따라라」고 알아들어서 제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자기 부인과 함께 선교를 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 다니는 신자의 종류를 이렇게 재미있게 구분합니다.
첫째는 인력거 교인입니다. 누군가가 앞에서 끌어주어야만 교회를 나옵니다.
둘째는 나룻배 교인입니다. 노를 뒤에서 젓듯이 누군가가 뒤에서 밀어주어야 교회를 다닙니다.
셋째는 연과 같은 교인입니다. 줄로 매달아 두지 않으면 멀리 날아가 버릴 위험성이 항상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항상 긴장하고, 수시로 전화하고 챙겨주어야 합니다.
넷째는 고무 풍선 같은 교인입니다. 감정의 바람으로 가득 차서 언제 터지고 폭삭 주저앉을지 모르는 불안정한 교인입니다.
다섯째는 럭비공을 닮은 교인입니다. 언제 어느 방향으로 튕겨 나갈지를 종잡을 수 없는 교인입니다.
1980년대 Billy Graham 목사님이 영국을 방문하여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지므로 영국 교회에 새로운 부흥의 기폭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 듯이 유럽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Billy Graham은 그들에게 아주 진지한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What kind of christian you are?" 당신은 어떤 종류의 그리스도인인가요?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당신은 어떤 종류의 신자입니까?
영국 사람들은 신자를 네 종류로 분류합니다.
첫째는 paper christian입니다. 해가 쨍쨍 쪼이면 터져서 못나오고, 비가 오면 젖어서 못나옵니다.
둘째는 season christian입니다. 1년 중 절기 때만 교회를 찾아 나옵니다.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때만 교회를 찾아 나옵니다. 그래서 네 바퀴 교인이라는 별명도 있습니다. 유아세례 받으러 유모차 타고 나오고, 결혼식 하러 웨딩 마차 타고 나오며, 장례식 때 영구차 타고 교회를 들릅니다.
셋째는 between christian입니다. 소위 회색 신앙입니다. 주일날은 크리스천이고, 평일은 주님과 관계없이 살아갑니다. 그야말로 두 주인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주일에는 교회 나와 임금 주자, 주님을 섬기고, 평일에는 세상에 나가 술 주자, 백세주를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넷째는 everyday christian입니다. 구약시대 에녹처럼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자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인들 중에는 between christian, 소위 회색 신자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주일 신앙과 평일 신앙이 다릅니다. 중립적 신앙, 이것이 문제입니다.
베드로의 실패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일찍이 자기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결코 배반하지 않겠노라고 호언장담했었습니다(33절). 그런데 그처럼 패기만만했던 베드로는 너무나 처절하고 측은한 실패자가 되고 맙니다. 그처럼 남성적이었던 베드로가 법원에서 일하는 하녀 아이 하나한테 맥없이 넘어지고 맙니다.
언제나 늠름했던 수제자 베드로가 왜 이렇게 모래성 무너지듯이 무기력해졌을까요?
1) 예수님을 “멀찍이” 따랐기 때문입니다(54절).
지금 예수님께서 핍박자들한테 체포되어 법정으로 끌려가고 계신데, 베드로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멀찍이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물론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갔지만, 그래도 베드로만큼은 의리가 있어서 도망가지 않은 점은 참 훌륭합니다. 만약 이 때 베드로가 자기가 말한 대로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주님을 바짝 따라 갔더라면 그는 인생의 오점을 남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멀찍이 따라가다 보니 점점 용기를 잃고 신앙의 입지가 약해졌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멀찍이 따르는 신앙은 언제나 계산적입니다. 불분명합니다. 상황과 추이를 보아서 결단을 내리려는 회색신앙입니다. 그야말로 Between Christian입니다.
우리가 거리를 두고 사귀는 사람과는 인격적으로 가까워지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기차놀이 게임을 할 때도 서로서로 바짝 붙어서 꼭 잡고 있어야 놓치지 않습니다. 그래요.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려면 완전히 따라야 합니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이 부족한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열두 제자들 중에 요한과 베드로만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멀찍이 따라갔던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언제나 계산적인 신앙이 문제입니다. 거리를 두고 믿는 신앙은 자라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꽉 붙잡는 신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야고보서 4:8)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친히 내 곁에서 도와주십니다.
2) 세상 사람들과 “함께 어울렸기” 때문입니다(55-56절).
예수님께서 온갖 모욕과 수난을 당하고 계시는데 베드로는 지금 하인들과 함께 모닥불을 쬐며 어울려 앉아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베드로가 ‘하속들 사이에 끼여 앉아 있었음’을 자세히 보도합니다(막 14:54). 여기 하속들이란 거친 사람들, 무절제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사람은 누구와 함께 어울려 지내느냐에 따라 인생의 갈림길이 결정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있다면 세상의 거칠고 무절제한 사람들과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술자리나 향락의 자리에 함께 어울리다 보면 신앙의 색깔이 흐려지게 되고, 결국 타협 하거나 신앙을 포기하게 됩니다. 세속적 모임에 함께 어울리니까 신앙이 자라지 못합니다.
베드로는 여전히 도망가지는 않으면서도, 거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다보니 점점 약해진 것입니다. 죄는 해결하지 않으면 점점 더 무뎌져 가고, 더 깊은 단계로 빠져 가는 것입니다(56, 58, 59절).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히려 신앙의 자리에 함께 어울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이점을 최우선으로 강조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시편 1:1)
여기 악인은 신앙적으로 건실하지 못한 자요, 죄인은 도덕적으로 기준이 없는 자요, 오만한 자는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사람과 함께 어울리기를 바랍니다. 경건한 사람과 함께 지내야 합니다.
3) “자기의 신분”을 감추었기 때문입니다(57-60절).
예수님은 지금 가야바의 법정에서 곤욕을 치르고 계신데 베드로는 자기 신분을 감추고 하인들 속에 숨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69절을 보면, 베드로는 안쪽 바깥뜰에서 자기를 숨기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16절에서는 그가 대문 밖에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고 보도합니다. 그러다가 대문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마당 안으로 들어가서 한참 불을 쪼이고 있는데 누군가가 장작을 지폈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언젠가 밝히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람이 자기 신분을 속이면 그만큼 초라해지고 약해집니다. 떳떳하게 행동하지 못하고 위축됩니다. 특히 사람을 두려워할수록 믿음이 약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앙고백이 분명해야 하겠습니다. 어디 가서든지 그리스도인임을 의연하게 밝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숨기니까 닭까지도 슬퍼서 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61절).
우리가 신앙인의 긍지를 품고, 어떤 위치에서든지 그리스도인임을 밝히고 살아야 하나님께서도 공개적으로 도우십니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담대하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분을 천명할 때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도우심을 역력히 체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놀라운 축복을 약속해주십니다(마 10: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하리라.”
이것이 복음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어떤 영적 침체에 빠지더라고 여전히 희망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베드로의 인생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한 여전히 희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1. 주님의 자비의 눈을 바라보자
베드로가 힘없이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을 때, 말 못하는 닭마저도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목놓아 울었습니다(60절). 아직 닭이 울을 시간이 아니었는데도 닭이 울은 것은 기적입니다.
그래서 닭 우는 소리를 듣자 베드로는 곧바로 주님의 말씀이 기억나서 정신을 가다듬고 주님 계신 법정을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연약하게 흔들리고 있는 시몬 베드로를 애틋한 눈망울로 바라보고 계셨습니다(61절). 그 눈은 비둘기 같은 자비의 눈이었습니다. 사랑의 눈이요, 긍휼의 눈이었습니다.
여기「본다」는 헬라어, emblepo는 “의미 깊게(significantly) 찬찬히 본다”는 자비의 눈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도 나를 애틋하게 내려다보시는 주님의 자비의 눈길을 바라보십시다. 긍휼이란 그 사람의 처지가 불쌍하고 딱해서 애가 끓고, 애가 타는 사랑의 심정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애끓는 연정, 이것이 곧 긍휼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순정적인 사랑을 느끼게 하려고, 영어성경에서는 Compassion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동병상련의 사랑을 쏟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우리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긍휼을 베푸신다는 복된 사실입니다.
1)긍휼이 큽니다(great)
이스라엘 민족의 죄나, 우리의 비참한 불행보다 그분의 긍휼이 훨씬 큽니다. 그래요. 그 큰 긍휼 덕분에 우리가 살아남는 것입니다(출 34:6. 삼하 24:14).
2)긍휼이 풍성합니다(abundant, plenteous)
그 넘치는 긍휼과, 그 많으신 자비로 다시 태어나게 하셨음을 감격스럽게 간증합니다(벧전 1:3).
3)긍휼이 영원무궁합니다(enduring, everlasting)
하나님의 긍휼은 그 분의 본성 자체이어서 다함이 없고, 끝남이 없습니다(대상 16:34. 시 106:1). 주님의 무한한 자비가 있는 한 내 인생은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애가 2:22-23). 특별히 예수님은 오늘도 나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친히 기도하고 계십니다(눅 22:32).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도 나를 그 자비의 눈으로 내려다보시는 주님의 눈길을 바라보십시다.
2. 진정한 가슴으로 회개하자
중국 속담에 "똑바로 걸어가려면, 한쪽으로 넘어졌다가 그 다음에는 반대쪽으로 넘어져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대표적인 케이스가 베드로의 삶입니다.
베드로의 눈길이 예수님의 자비의 눈과 마주치자마자 그는 대문 밖으로 뛰어나가 비통한 가슴으로 통곡하며 회개하였습니다(went & wept). 닭은 입술로 울었으나, 베드로는 가슴으로 울었습니다. 닭은 잠깐 울었으나, 베드로는 온종일 울었습니다. 닭도 울고, 예수님도 울고, 베드로도 울었습니다. 베드로의 눈물은 거룩한 눈물이었고, 아름다운 눈물이었습니다.
이 날 아침에 베드로는 통절한 회개의 눈물을 흘리므로 인생의 완전한 분기점을 이룹니다.
그야말로 인생의 BC와 AD가 확연하게 결정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는 오늘 아침에 진정한 가슴의 회개 두 가지를 호소하고 싶습니다.
첫째, 오늘 우리에게도 회개의 눈물이 있기를 원합니다.
억울한 눈물, 분한 눈물, 서러운 눈물, 동정의 눈물도 필요하지만, 회개의 눈물이 필요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사랑 받았던 원동력은 회개의 눈물 때문이었습니다. 눈물로 침상을 띄었고, 요를 적셨습니다. 눈물이 주야로 음식이 되었고 시냇물처럼 흘러내렸고,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 샘물이 솟아나게 하셨습니다(시편 6:6. 30:5. 84:6).
“뼈아픈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마음으로 탄식할 때, 그 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하시네”
둘째, 단호한 결단이 있기를 원합니다.
베드로는 이 날 새벽에 인생의 새로운 분기점을 이루었습니다. 회개와 함께 단호한 결단을 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쇠렌 키엘케골은 강조합니다.
“인생은 결단을 통해서만 도약이 가능합니다.” Development by decision.
김유신은 용맹과 지략이 뛰어난 신라의 명장으로 김수로왕의 12대 손입니다. 그는 이미 15세 때 화랑이 되어 몸과 마음을 닦았습니다. 학문이 깊고 무예가 뛰어난 그는 신라의 오랜 꿈인 삼국 통일을 위해 의지를 키워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때 천관이라는 기녀에게 마음을 빼앗겨 술집을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어머니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듣고 깊이 반성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유신은 잔치 집에 초대를 받아 또 다시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말을 탔습니다.
"달은 밝고, 바람은 찬데……."
김유신은 말 위에서 흥얼거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말은 저 혼자서 뚜벅뚜벅 걷다가 어느 집 앞에서 멈추었습니다. 김유신은 퍼뜩 눈을 떴습니다.
"여기가 어디야?" 주위를 둘러 본 김유신은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그곳은 천관의 술집 앞이었습니다.
"도련님……." 천관이 버선발로 뛰어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김유신은 마음을 가다듬고 단호한 결단을 내려, 그 애마의 목을 베어 버렸습니다.
이와 같은 단호한 결단으로 훗날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장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아직까지 반복하고 있는 죄나 좋지 않은 습관이 무엇입니까?
낭떠러지로 떨어진 후의 대가는 너무 비쌉니다. 지금 곧 발길을 뒤로 돌려야 합니다.
요셉은 신앙과 도덕성의 탈선으로부터 발걸음을 뒤로 돌리는 결단력 있는 용기를 보여줍니다.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에서 뒤로 돌아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언젠가 변화 받으려고 하지 맙시다. someday는 마귀의 교묘한 전략입니다.
Now & here!!! 지금 여기서 결단합시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의 본질입니다. 돌아서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이 내 인생의 또 다른 코페르니쿠스적인 분기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진정한 가슴의 회개를 통해 인생의 분기점을 이루므로 오순절 날 성령을 받고 이렇게 간증합니다(사도행전 2:38).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repentence)하기만 하면, 나의 실수보다 더 나은 회복(recovery)의 은총을 주십니다.”
우리 새로운 성령 충만함을 힘입어 멋진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에 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12 제자들 중에 베드로만큼은 자기 부인하고 함께 선교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못 알아들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라』고 말씀하셨는데, 베드로는 “자기를”에서 “를” 자를 빼먹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자기 부인하고 나를 따라라」고 알아들어서 제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자기 부인과 함께 선교를 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 다니는 신자의 종류를 이렇게 재미있게 구분합니다.
첫째는 인력거 교인입니다. 누군가가 앞에서 끌어주어야만 교회를 나옵니다.
둘째는 나룻배 교인입니다. 노를 뒤에서 젓듯이 누군가가 뒤에서 밀어주어야 교회를 다닙니다.
셋째는 연과 같은 교인입니다. 줄로 매달아 두지 않으면 멀리 날아가 버릴 위험성이 항상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항상 긴장하고, 수시로 전화하고 챙겨주어야 합니다.
넷째는 고무 풍선 같은 교인입니다. 감정의 바람으로 가득 차서 언제 터지고 폭삭 주저앉을지 모르는 불안정한 교인입니다.
다섯째는 럭비공을 닮은 교인입니다. 언제 어느 방향으로 튕겨 나갈지를 종잡을 수 없는 교인입니다.
1980년대 Billy Graham 목사님이 영국을 방문하여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지므로 영국 교회에 새로운 부흥의 기폭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 듯이 유럽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Billy Graham은 그들에게 아주 진지한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What kind of christian you are?" 당신은 어떤 종류의 그리스도인인가요?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당신은 어떤 종류의 신자입니까?
영국 사람들은 신자를 네 종류로 분류합니다.
첫째는 paper christian입니다. 해가 쨍쨍 쪼이면 터져서 못나오고, 비가 오면 젖어서 못나옵니다.
둘째는 season christian입니다. 1년 중 절기 때만 교회를 찾아 나옵니다.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때만 교회를 찾아 나옵니다. 그래서 네 바퀴 교인이라는 별명도 있습니다. 유아세례 받으러 유모차 타고 나오고, 결혼식 하러 웨딩 마차 타고 나오며, 장례식 때 영구차 타고 교회를 들릅니다.
셋째는 between christian입니다. 소위 회색 신앙입니다. 주일날은 크리스천이고, 평일은 주님과 관계없이 살아갑니다. 그야말로 두 주인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주일에는 교회 나와 임금 주자, 주님을 섬기고, 평일에는 세상에 나가 술 주자, 백세주를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넷째는 everyday christian입니다. 구약시대 에녹처럼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자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인들 중에는 between christian, 소위 회색 신자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주일 신앙과 평일 신앙이 다릅니다. 중립적 신앙, 이것이 문제입니다.
베드로의 실패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일찍이 자기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결코 배반하지 않겠노라고 호언장담했었습니다(33절). 그런데 그처럼 패기만만했던 베드로는 너무나 처절하고 측은한 실패자가 되고 맙니다. 그처럼 남성적이었던 베드로가 법원에서 일하는 하녀 아이 하나한테 맥없이 넘어지고 맙니다.
언제나 늠름했던 수제자 베드로가 왜 이렇게 모래성 무너지듯이 무기력해졌을까요?
1) 예수님을 “멀찍이” 따랐기 때문입니다(54절).
지금 예수님께서 핍박자들한테 체포되어 법정으로 끌려가고 계신데, 베드로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멀찍이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물론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갔지만, 그래도 베드로만큼은 의리가 있어서 도망가지 않은 점은 참 훌륭합니다. 만약 이 때 베드로가 자기가 말한 대로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주님을 바짝 따라 갔더라면 그는 인생의 오점을 남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멀찍이 따라가다 보니 점점 용기를 잃고 신앙의 입지가 약해졌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멀찍이 따르는 신앙은 언제나 계산적입니다. 불분명합니다. 상황과 추이를 보아서 결단을 내리려는 회색신앙입니다. 그야말로 Between Christian입니다.
우리가 거리를 두고 사귀는 사람과는 인격적으로 가까워지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기차놀이 게임을 할 때도 서로서로 바짝 붙어서 꼭 잡고 있어야 놓치지 않습니다. 그래요.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려면 완전히 따라야 합니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이 부족한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열두 제자들 중에 요한과 베드로만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멀찍이 따라갔던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언제나 계산적인 신앙이 문제입니다. 거리를 두고 믿는 신앙은 자라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꽉 붙잡는 신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야고보서 4:8)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친히 내 곁에서 도와주십니다.
2) 세상 사람들과 “함께 어울렸기” 때문입니다(55-56절).
예수님께서 온갖 모욕과 수난을 당하고 계시는데 베드로는 지금 하인들과 함께 모닥불을 쬐며 어울려 앉아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베드로가 ‘하속들 사이에 끼여 앉아 있었음’을 자세히 보도합니다(막 14:54). 여기 하속들이란 거친 사람들, 무절제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사람은 누구와 함께 어울려 지내느냐에 따라 인생의 갈림길이 결정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있다면 세상의 거칠고 무절제한 사람들과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술자리나 향락의 자리에 함께 어울리다 보면 신앙의 색깔이 흐려지게 되고, 결국 타협 하거나 신앙을 포기하게 됩니다. 세속적 모임에 함께 어울리니까 신앙이 자라지 못합니다.
베드로는 여전히 도망가지는 않으면서도, 거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다보니 점점 약해진 것입니다. 죄는 해결하지 않으면 점점 더 무뎌져 가고, 더 깊은 단계로 빠져 가는 것입니다(56, 58, 59절).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히려 신앙의 자리에 함께 어울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이점을 최우선으로 강조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시편 1:1)
여기 악인은 신앙적으로 건실하지 못한 자요, 죄인은 도덕적으로 기준이 없는 자요, 오만한 자는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사람과 함께 어울리기를 바랍니다. 경건한 사람과 함께 지내야 합니다.
3) “자기의 신분”을 감추었기 때문입니다(57-60절).
예수님은 지금 가야바의 법정에서 곤욕을 치르고 계신데 베드로는 자기 신분을 감추고 하인들 속에 숨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69절을 보면, 베드로는 안쪽 바깥뜰에서 자기를 숨기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16절에서는 그가 대문 밖에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고 보도합니다. 그러다가 대문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마당 안으로 들어가서 한참 불을 쪼이고 있는데 누군가가 장작을 지폈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언젠가 밝히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람이 자기 신분을 속이면 그만큼 초라해지고 약해집니다. 떳떳하게 행동하지 못하고 위축됩니다. 특히 사람을 두려워할수록 믿음이 약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앙고백이 분명해야 하겠습니다. 어디 가서든지 그리스도인임을 의연하게 밝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숨기니까 닭까지도 슬퍼서 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61절).
우리가 신앙인의 긍지를 품고, 어떤 위치에서든지 그리스도인임을 밝히고 살아야 하나님께서도 공개적으로 도우십니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담대하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분을 천명할 때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도우심을 역력히 체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놀라운 축복을 약속해주십니다(마 10: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하리라.”
이것이 복음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어떤 영적 침체에 빠지더라고 여전히 희망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베드로의 인생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한 여전히 희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1. 주님의 자비의 눈을 바라보자
베드로가 힘없이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을 때, 말 못하는 닭마저도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목놓아 울었습니다(60절). 아직 닭이 울을 시간이 아니었는데도 닭이 울은 것은 기적입니다.
그래서 닭 우는 소리를 듣자 베드로는 곧바로 주님의 말씀이 기억나서 정신을 가다듬고 주님 계신 법정을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연약하게 흔들리고 있는 시몬 베드로를 애틋한 눈망울로 바라보고 계셨습니다(61절). 그 눈은 비둘기 같은 자비의 눈이었습니다. 사랑의 눈이요, 긍휼의 눈이었습니다.
여기「본다」는 헬라어, emblepo는 “의미 깊게(significantly) 찬찬히 본다”는 자비의 눈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도 나를 애틋하게 내려다보시는 주님의 자비의 눈길을 바라보십시다. 긍휼이란 그 사람의 처지가 불쌍하고 딱해서 애가 끓고, 애가 타는 사랑의 심정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애끓는 연정, 이것이 곧 긍휼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순정적인 사랑을 느끼게 하려고, 영어성경에서는 Compassion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동병상련의 사랑을 쏟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우리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긍휼을 베푸신다는 복된 사실입니다.
1)긍휼이 큽니다(great)
이스라엘 민족의 죄나, 우리의 비참한 불행보다 그분의 긍휼이 훨씬 큽니다. 그래요. 그 큰 긍휼 덕분에 우리가 살아남는 것입니다(출 34:6. 삼하 24:14).
2)긍휼이 풍성합니다(abundant, plenteous)
그 넘치는 긍휼과, 그 많으신 자비로 다시 태어나게 하셨음을 감격스럽게 간증합니다(벧전 1:3).
3)긍휼이 영원무궁합니다(enduring, everlasting)
하나님의 긍휼은 그 분의 본성 자체이어서 다함이 없고, 끝남이 없습니다(대상 16:34. 시 106:1). 주님의 무한한 자비가 있는 한 내 인생은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애가 2:22-23). 특별히 예수님은 오늘도 나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친히 기도하고 계십니다(눅 22:32).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도 나를 그 자비의 눈으로 내려다보시는 주님의 눈길을 바라보십시다.
2. 진정한 가슴으로 회개하자
중국 속담에 "똑바로 걸어가려면, 한쪽으로 넘어졌다가 그 다음에는 반대쪽으로 넘어져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대표적인 케이스가 베드로의 삶입니다.
베드로의 눈길이 예수님의 자비의 눈과 마주치자마자 그는 대문 밖으로 뛰어나가 비통한 가슴으로 통곡하며 회개하였습니다(went & wept). 닭은 입술로 울었으나, 베드로는 가슴으로 울었습니다. 닭은 잠깐 울었으나, 베드로는 온종일 울었습니다. 닭도 울고, 예수님도 울고, 베드로도 울었습니다. 베드로의 눈물은 거룩한 눈물이었고, 아름다운 눈물이었습니다.
이 날 아침에 베드로는 통절한 회개의 눈물을 흘리므로 인생의 완전한 분기점을 이룹니다.
그야말로 인생의 BC와 AD가 확연하게 결정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는 오늘 아침에 진정한 가슴의 회개 두 가지를 호소하고 싶습니다.
첫째, 오늘 우리에게도 회개의 눈물이 있기를 원합니다.
억울한 눈물, 분한 눈물, 서러운 눈물, 동정의 눈물도 필요하지만, 회개의 눈물이 필요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사랑 받았던 원동력은 회개의 눈물 때문이었습니다. 눈물로 침상을 띄었고, 요를 적셨습니다. 눈물이 주야로 음식이 되었고 시냇물처럼 흘러내렸고,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 샘물이 솟아나게 하셨습니다(시편 6:6. 30:5. 84:6).
“뼈아픈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마음으로 탄식할 때, 그 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하시네”
둘째, 단호한 결단이 있기를 원합니다.
베드로는 이 날 새벽에 인생의 새로운 분기점을 이루었습니다. 회개와 함께 단호한 결단을 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쇠렌 키엘케골은 강조합니다.
“인생은 결단을 통해서만 도약이 가능합니다.” Development by decision.
김유신은 용맹과 지략이 뛰어난 신라의 명장으로 김수로왕의 12대 손입니다. 그는 이미 15세 때 화랑이 되어 몸과 마음을 닦았습니다. 학문이 깊고 무예가 뛰어난 그는 신라의 오랜 꿈인 삼국 통일을 위해 의지를 키워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때 천관이라는 기녀에게 마음을 빼앗겨 술집을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어머니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듣고 깊이 반성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유신은 잔치 집에 초대를 받아 또 다시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말을 탔습니다.
"달은 밝고, 바람은 찬데……."
김유신은 말 위에서 흥얼거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말은 저 혼자서 뚜벅뚜벅 걷다가 어느 집 앞에서 멈추었습니다. 김유신은 퍼뜩 눈을 떴습니다.
"여기가 어디야?" 주위를 둘러 본 김유신은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그곳은 천관의 술집 앞이었습니다.
"도련님……." 천관이 버선발로 뛰어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김유신은 마음을 가다듬고 단호한 결단을 내려, 그 애마의 목을 베어 버렸습니다.
이와 같은 단호한 결단으로 훗날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장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아직까지 반복하고 있는 죄나 좋지 않은 습관이 무엇입니까?
낭떠러지로 떨어진 후의 대가는 너무 비쌉니다. 지금 곧 발길을 뒤로 돌려야 합니다.
요셉은 신앙과 도덕성의 탈선으로부터 발걸음을 뒤로 돌리는 결단력 있는 용기를 보여줍니다.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에서 뒤로 돌아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언젠가 변화 받으려고 하지 맙시다. someday는 마귀의 교묘한 전략입니다.
Now & here!!! 지금 여기서 결단합시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의 본질입니다. 돌아서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이 내 인생의 또 다른 코페르니쿠스적인 분기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진정한 가슴의 회개를 통해 인생의 분기점을 이루므로 오순절 날 성령을 받고 이렇게 간증합니다(사도행전 2:38).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repentence)하기만 하면, 나의 실수보다 더 나은 회복(recovery)의 은총을 주십니다.”
우리 새로운 성령 충만함을 힘입어 멋진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