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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다시 읽는 달란트 비유
오늘 설교 제목이 ‘또 다시 읽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왜 ‘또 다시’인가 하면 우리는 이미 달란트 비유를 전에 ‘다시’ 읽은 바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본문으로 해서 ‘장사도 이자놀이도 못한 종’이란 제목으로 1999년 5월 30일에 처음 설교를 했고 2003년 7월 6일에 같은 설교를 다시 한 번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 책 ‘하느님도 아프다’에 실었습니다. 그만 하면 재탕에 삼탕까지 했으니 그만 할 때도 됐다 싶은데 오늘 또 같은 말씀을 읽은 이유는 달란트 비유에 대해서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긴 주인은 하나님이고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은 종들은 각자 능력에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라고 여겨 왔습니다. 이 중 이윤을 남긴 종들은 착하고 충성스런 종이라고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받았고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어 이윤을 남기지 못한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받았으니 우리도 칭찬받은 종들처럼 어떻게 하든지 열심히 일을 해서 이윤을 남겨야 한다는 것이 비유의 메시지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무척 간단해 보입니다. 이해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를 달리 읽었습니다. 반대로 읽었습니다. 우선 비유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주인’ 또는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지만 모두 그렇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마태복음에는 없는 이야기를 붙인 누가복음의 달란트 비유에 참고해서 읽어봐도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은 절대로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주인은 그저 큰 부자일 따름입니다.
주인으로부터 각기 다른 액수의 달란트를 받은 세 명의 종은 모두 주인의 신뢰를 받는 종들이었습니다.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준 종도 다른 종들처럼 주인의 신뢰를 받았습니다. ‘달란트’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돈입니다. 그 큰돈을 신뢰하지도 않는 종에게 주었다면 그 주인은 바보입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종도 주인의 큰 신뢰를 받고 있기 때문에, 곧 그 전까지는 줄곧 주인의 신뢰를 받게끔 행동해왔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처럼 주인에게 막대한 이윤을 남겨주었으므로 그런 큰돈을 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이전에 해왔던 것과 달리 달란트를 땅에 묻었다면 이는 그가 게을렀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할 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가 그렇게 했던 이유는 종이 주인에게 한 말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께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신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저는 주인님의 돈을 가지고 가서 땅에 묻었습니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이란 일하지 않고 남의 것을 착취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나쁜 사람이지요. 주인이 하나님일 리가 없다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습니다. 더욱이 이 말에 대해서 주인이 적극적으로 반박하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내 돈을 쓸 사람에게 꾸어주었다가 내가 돌아왔을 때 그 돈에 이자라도 붙여서 돌려주었어야 할 것 아니냐?” 이 말은 돈을 갖고 적극적으로 장사를 해서 이윤을 남기지 않을 바에는 이자놀이라고 했어야 했다는 뜻입니다. 이자놀이는 크게 부지런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종이 그것도 하지 않았다면 이는 그가 게을러서라기보다는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더 이상 주인의 착취의 도구가 되지 않으려고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땅에 묻을 수밖에 없었을까?
이상이 ‘다시 읽은’ 달란트 비유의 내용입니다. 다시 읽어봐도 제 해석이 옳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저는 여기에다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이 과거에 자신의 삶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깨달은 후에, 종교적 용어로 표현하면 ‘회심’한 후에 보여준 행동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그는 과연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둘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을까요?
오랫동안 정신없이 위만 바라보며 아무 문제도 느끼지 못하고 주인에게 충성한답시고 해온 일이 사실은 이웃의 피눈물을 쏟는 일이었다는 깨달음은 한 동안 그를 혼란에 빠뜨렸을 것입니다. 삶의 기반을 크게 흔들어버리는 충격적인 깨달음이었으므로 깨달은 후에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때까지 주인의 그늘 이래서 그가 누려왔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결단이었고 지금 갖고 있는 것까지 모두 빼앗길 수도 있는 결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돈을 땅에 묻어둔 행위는 이런 정신적인 혼란과 주저함을 반영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위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적극적인 행위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너무 소극적입니다. 돈을 땅에 묻어둔다고 무엇이 달라진단 말입니까? 그 돈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줄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부정직한 청지기의 비유가 나옵니다. 한 청지기가 있었는데 그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을 듣고 주인이 그에게서 청지기의 직책을 빼앗겠다고 통고했습니다. 그는 청지기 직에서 쫓겨나면 노후에 어떻게 살아야 하나 궁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궁리 끝에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자기 마음대로 빚을 줄여줬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놀랍게도(!) 이 청지기가 슬기롭게 행한 것을 보고 그를 칭찬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 말미에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러면 그 재물이 다할 때 너희를 영원한 장막으로 인도할 것이다.”(누가 16: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청지기가 한 행동은 윤리적으로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무척 적극적이었습니다.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이 보여준 태도는 적극성이란 면에서는 부정직한 청지기의 태도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한 달란트를 맡았던 종은 더 이상 남을 착취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더불어 살아갈 동료요 이웃으로 삼겠다는 올바른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심으로 그치면 사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종의 이후의 삶이 어땠을지 우리는 모르지만 돈을 땅에 묻어둔 행동으로 보아 올바른 결심이 삶의 변화로까지 이어졌을지는 심히 의문입니다. 깨달은 후의 그의 삶은 남을 착취하면서 살 때보다 더 열정적이고 더 부지런하고 더 헌신적이어야 했습니다. 돈을 땅에 묻어두는 태도로는 그런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는 무엇일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의 의’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더 나은 의를 추구할 것 아닙니까? 저는, 그것은 오늘날 보수적인 기독교인이 추구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을 영생과 구원을 얻는 수단쯤으로 여기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믿는 신앙, 성경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고 착각하고 실제로는 편리한 대로 마음대로 끌어다 붙이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신앙, 예수를 잘 믿으면 영혼이 구원받고 물질적으로도 복을 받고 육신의 건강도 누린다는 삼박자 구원을 믿는 신앙, 삼박자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지 말고 십일조헌금을 잘 내야 한다는 신앙, 성수주일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신앙, 무엇이든 열심히 구하고 기도하면 원하는 대로 응답을 받는다는 신앙, 세상이야 어떻게 돼든, 전쟁이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나만 잘 믿고 천국 가면 그만이라고 믿는 신앙,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사람의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전도나 열심히 해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해야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영원한 복과 영생을 주신다고 믿는 신앙, 이것이 오늘날 보수적 기독교인의 신앙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의 신앙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제가 좀 ‘현대적’으로 각색하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바리새인의 신앙과 오늘날 보수적 기독교인의 신앙은 매우 비슷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추구하는 것이 위에서 말한 보수적인 신앙이라면 제 얘기를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렇지 않다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이런 신앙이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보수적인 신앙이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분명 잘못됐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 제자들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그들의 의를 넘어서야 한다고 말씀하셨지, 그들이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라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주일성수를 예외 없는 철칙처럼 받들 필요가 없다는 말은 주일을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고 주일예배를 밥 먹듯 빼먹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인간의 영혼은 신령과 진실로 드리는 예배 없이는 결코 성장하지 않습니다. 예배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신앙이 깊어지지 않습니다. ‘삶의 현장이 곧 예배’라는 말은 주일예배를 등한히 해도 된다는 뜻일 수 없습니다. 그 때, 그 순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정말 중요한 일이 있다면 간혹 예배를 빠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순간이 얼마나 자주 올까요? 토요일에 너무 늦게까지 놀다가 일어나지 못해서 예배에 빠졌다는 말이 우리 교회에서는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십일조헌금을 비롯해서 모든 헌금을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내는 수단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헌금을 드리지 않아도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헌금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총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요 신앙인으로서 나눔의 삶을 실천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헌금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은 복을 받아내려는 태도는 비판하면서 스스로는 드리고 나누는 삶에 인색하다면 그것은 그가 비판하는 삶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헌금 내라는 얘기 하지 않아서 좋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헌금 내라는 얘기 거의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누고 섬기는 삶에 대한 강조에 다 들어 있는 내용이기에 특별히 헌금 얘기를 하지 않는 것뿐이지 드리고 나누는 데 인색해도 좋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기복적인 기도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도 자체가 무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해방된 기독교인은 기복적인 기도를 하는 사람보다 오히려 더 열심히, 더 깊이, 더 넓게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지 말라는 말은 성경 읽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더 세심하게 더 깊이 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복음이 말하는 구원이 내세에 받을 구원만이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까지 포함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복음의 삶을 사는 데 더 부지런해야 하고 더 열정적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잘못된 신앙을 비판하면서 신앙의 소중한 가치까지 함께 내다 버리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이는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기까지 함께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더 높은 단계에 올라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도덕적, 윤리적 우위라는 것이 삶이 따라주지 않고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라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 되고 맙니다. ‘내가 너보다 낫다’는 생각은 우리 삶을 고양시키지 않고 저급한 수준으로 전락시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평생을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 향상을 위해 헌신하신 분이 하신 말씀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사신 분이고 크고 작은 모임을 주도하신 분이며 그로 인해 감옥살이도 몇 번 하셨던 분입니다. 그분은 한 작은 모임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일 내가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서 자수성가하여 큰 기업을 일으킨 ooo 만큼만 부지런했고 그 사람이 돈 버는 데 열정적이었던 것만큼만 열정적으로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뛰어다녔고 그 만큼만 헌신적이었더라면 지금 이렇게 아쉽고 후회스럽지는 않을 텐데...”
올바른 결단이 반드시 올바른 삶으로 이끌어주지는 않습니다. 마음으로만 수없이 많이 결단하고 그 결단을 삶으로 옮기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내가 결단한 대로 살아야 하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도덕적 우위에 자족하고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주인의 잘못을 깨닫고 불의한 삶을 계속하지 않기로 결단했지만 달란트를 땅에 묻어뒀던 종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지 맙시다. 해방된 기독교인으로서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부지런하게, 열정적이고 헌신적으로 최선을 다해 삽시다. 잘못된 기독교인을 비판하는 데 정력을 낭비하지 말고 올바른 신앙과 삶을 뜨겁게 삶으로써 이웃을 바른 길로 인도합시다. 하나님에게서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는 게으른 종이 되지 맙시다. ♣
다시 읽는 달란트 비유
오늘 설교 제목이 ‘또 다시 읽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왜 ‘또 다시’인가 하면 우리는 이미 달란트 비유를 전에 ‘다시’ 읽은 바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본문으로 해서 ‘장사도 이자놀이도 못한 종’이란 제목으로 1999년 5월 30일에 처음 설교를 했고 2003년 7월 6일에 같은 설교를 다시 한 번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 책 ‘하느님도 아프다’에 실었습니다. 그만 하면 재탕에 삼탕까지 했으니 그만 할 때도 됐다 싶은데 오늘 또 같은 말씀을 읽은 이유는 달란트 비유에 대해서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긴 주인은 하나님이고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은 종들은 각자 능력에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라고 여겨 왔습니다. 이 중 이윤을 남긴 종들은 착하고 충성스런 종이라고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받았고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어 이윤을 남기지 못한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받았으니 우리도 칭찬받은 종들처럼 어떻게 하든지 열심히 일을 해서 이윤을 남겨야 한다는 것이 비유의 메시지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무척 간단해 보입니다. 이해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를 달리 읽었습니다. 반대로 읽었습니다. 우선 비유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주인’ 또는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지만 모두 그렇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마태복음에는 없는 이야기를 붙인 누가복음의 달란트 비유에 참고해서 읽어봐도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은 절대로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주인은 그저 큰 부자일 따름입니다.
주인으로부터 각기 다른 액수의 달란트를 받은 세 명의 종은 모두 주인의 신뢰를 받는 종들이었습니다.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준 종도 다른 종들처럼 주인의 신뢰를 받았습니다. ‘달란트’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돈입니다. 그 큰돈을 신뢰하지도 않는 종에게 주었다면 그 주인은 바보입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종도 주인의 큰 신뢰를 받고 있기 때문에, 곧 그 전까지는 줄곧 주인의 신뢰를 받게끔 행동해왔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처럼 주인에게 막대한 이윤을 남겨주었으므로 그런 큰돈을 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이전에 해왔던 것과 달리 달란트를 땅에 묻었다면 이는 그가 게을렀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할 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가 그렇게 했던 이유는 종이 주인에게 한 말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께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신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저는 주인님의 돈을 가지고 가서 땅에 묻었습니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이란 일하지 않고 남의 것을 착취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나쁜 사람이지요. 주인이 하나님일 리가 없다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습니다. 더욱이 이 말에 대해서 주인이 적극적으로 반박하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내 돈을 쓸 사람에게 꾸어주었다가 내가 돌아왔을 때 그 돈에 이자라도 붙여서 돌려주었어야 할 것 아니냐?” 이 말은 돈을 갖고 적극적으로 장사를 해서 이윤을 남기지 않을 바에는 이자놀이라고 했어야 했다는 뜻입니다. 이자놀이는 크게 부지런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종이 그것도 하지 않았다면 이는 그가 게을러서라기보다는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더 이상 주인의 착취의 도구가 되지 않으려고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땅에 묻을 수밖에 없었을까?
이상이 ‘다시 읽은’ 달란트 비유의 내용입니다. 다시 읽어봐도 제 해석이 옳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저는 여기에다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이 과거에 자신의 삶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깨달은 후에, 종교적 용어로 표현하면 ‘회심’한 후에 보여준 행동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그는 과연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둘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을까요?
오랫동안 정신없이 위만 바라보며 아무 문제도 느끼지 못하고 주인에게 충성한답시고 해온 일이 사실은 이웃의 피눈물을 쏟는 일이었다는 깨달음은 한 동안 그를 혼란에 빠뜨렸을 것입니다. 삶의 기반을 크게 흔들어버리는 충격적인 깨달음이었으므로 깨달은 후에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때까지 주인의 그늘 이래서 그가 누려왔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결단이었고 지금 갖고 있는 것까지 모두 빼앗길 수도 있는 결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돈을 땅에 묻어둔 행위는 이런 정신적인 혼란과 주저함을 반영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위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적극적인 행위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너무 소극적입니다. 돈을 땅에 묻어둔다고 무엇이 달라진단 말입니까? 그 돈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줄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부정직한 청지기의 비유가 나옵니다. 한 청지기가 있었는데 그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을 듣고 주인이 그에게서 청지기의 직책을 빼앗겠다고 통고했습니다. 그는 청지기 직에서 쫓겨나면 노후에 어떻게 살아야 하나 궁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궁리 끝에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자기 마음대로 빚을 줄여줬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놀랍게도(!) 이 청지기가 슬기롭게 행한 것을 보고 그를 칭찬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 말미에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러면 그 재물이 다할 때 너희를 영원한 장막으로 인도할 것이다.”(누가 16: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청지기가 한 행동은 윤리적으로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무척 적극적이었습니다.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이 보여준 태도는 적극성이란 면에서는 부정직한 청지기의 태도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한 달란트를 맡았던 종은 더 이상 남을 착취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더불어 살아갈 동료요 이웃으로 삼겠다는 올바른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심으로 그치면 사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종의 이후의 삶이 어땠을지 우리는 모르지만 돈을 땅에 묻어둔 행동으로 보아 올바른 결심이 삶의 변화로까지 이어졌을지는 심히 의문입니다. 깨달은 후의 그의 삶은 남을 착취하면서 살 때보다 더 열정적이고 더 부지런하고 더 헌신적이어야 했습니다. 돈을 땅에 묻어두는 태도로는 그런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는 무엇일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의 의’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더 나은 의를 추구할 것 아닙니까? 저는, 그것은 오늘날 보수적인 기독교인이 추구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을 영생과 구원을 얻는 수단쯤으로 여기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믿는 신앙, 성경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고 착각하고 실제로는 편리한 대로 마음대로 끌어다 붙이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신앙, 예수를 잘 믿으면 영혼이 구원받고 물질적으로도 복을 받고 육신의 건강도 누린다는 삼박자 구원을 믿는 신앙, 삼박자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지 말고 십일조헌금을 잘 내야 한다는 신앙, 성수주일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신앙, 무엇이든 열심히 구하고 기도하면 원하는 대로 응답을 받는다는 신앙, 세상이야 어떻게 돼든, 전쟁이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나만 잘 믿고 천국 가면 그만이라고 믿는 신앙,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사람의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전도나 열심히 해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해야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영원한 복과 영생을 주신다고 믿는 신앙, 이것이 오늘날 보수적 기독교인의 신앙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의 신앙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제가 좀 ‘현대적’으로 각색하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바리새인의 신앙과 오늘날 보수적 기독교인의 신앙은 매우 비슷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추구하는 것이 위에서 말한 보수적인 신앙이라면 제 얘기를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렇지 않다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이런 신앙이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보수적인 신앙이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분명 잘못됐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 제자들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그들의 의를 넘어서야 한다고 말씀하셨지, 그들이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라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주일성수를 예외 없는 철칙처럼 받들 필요가 없다는 말은 주일을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고 주일예배를 밥 먹듯 빼먹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인간의 영혼은 신령과 진실로 드리는 예배 없이는 결코 성장하지 않습니다. 예배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신앙이 깊어지지 않습니다. ‘삶의 현장이 곧 예배’라는 말은 주일예배를 등한히 해도 된다는 뜻일 수 없습니다. 그 때, 그 순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정말 중요한 일이 있다면 간혹 예배를 빠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순간이 얼마나 자주 올까요? 토요일에 너무 늦게까지 놀다가 일어나지 못해서 예배에 빠졌다는 말이 우리 교회에서는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십일조헌금을 비롯해서 모든 헌금을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내는 수단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헌금을 드리지 않아도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헌금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총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요 신앙인으로서 나눔의 삶을 실천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헌금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은 복을 받아내려는 태도는 비판하면서 스스로는 드리고 나누는 삶에 인색하다면 그것은 그가 비판하는 삶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헌금 내라는 얘기 하지 않아서 좋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헌금 내라는 얘기 거의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누고 섬기는 삶에 대한 강조에 다 들어 있는 내용이기에 특별히 헌금 얘기를 하지 않는 것뿐이지 드리고 나누는 데 인색해도 좋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기복적인 기도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도 자체가 무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해방된 기독교인은 기복적인 기도를 하는 사람보다 오히려 더 열심히, 더 깊이, 더 넓게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지 말라는 말은 성경 읽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더 세심하게 더 깊이 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복음이 말하는 구원이 내세에 받을 구원만이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까지 포함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복음의 삶을 사는 데 더 부지런해야 하고 더 열정적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잘못된 신앙을 비판하면서 신앙의 소중한 가치까지 함께 내다 버리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이는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기까지 함께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더 높은 단계에 올라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도덕적, 윤리적 우위라는 것이 삶이 따라주지 않고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라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 되고 맙니다. ‘내가 너보다 낫다’는 생각은 우리 삶을 고양시키지 않고 저급한 수준으로 전락시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평생을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 향상을 위해 헌신하신 분이 하신 말씀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사신 분이고 크고 작은 모임을 주도하신 분이며 그로 인해 감옥살이도 몇 번 하셨던 분입니다. 그분은 한 작은 모임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일 내가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서 자수성가하여 큰 기업을 일으킨 ooo 만큼만 부지런했고 그 사람이 돈 버는 데 열정적이었던 것만큼만 열정적으로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뛰어다녔고 그 만큼만 헌신적이었더라면 지금 이렇게 아쉽고 후회스럽지는 않을 텐데...”
올바른 결단이 반드시 올바른 삶으로 이끌어주지는 않습니다. 마음으로만 수없이 많이 결단하고 그 결단을 삶으로 옮기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내가 결단한 대로 살아야 하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도덕적 우위에 자족하고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주인의 잘못을 깨닫고 불의한 삶을 계속하지 않기로 결단했지만 달란트를 땅에 묻어뒀던 종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지 맙시다. 해방된 기독교인으로서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부지런하게, 열정적이고 헌신적으로 최선을 다해 삽시다. 잘못된 기독교인을 비판하는 데 정력을 낭비하지 말고 올바른 신앙과 삶을 뜨겁게 삶으로써 이웃을 바른 길로 인도합시다. 하나님에게서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는 게으른 종이 되지 맙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