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407
분류 |
---|
이병각목사 (예담교회)
주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을 칭찬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제 로마로부터 독립해서 잘 살 수 있는 것으로 기대를 했는데, 예수님이 이 모든 일을 이루실 것으로 생각했는데, 예수님이 고난 당하고 죽으시다니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말씀입니다.
다혈질이고 성질 급한 베드로가 즉시 예수님의 말씀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서 안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베드로를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조금 전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칭찬하시면서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고 하시던 주님이 베드로를 엄하게 책망하십니다.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는 타협할 수 없는 긴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 받고 죽어야 한다고 하시고, 베드로는 절대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십자가 사건을 두고 세상 사람과 신자들 사이에는 이해할 수 없는 간격이 있습니다. 신자들 사이에도 십자가를 아는 신자와 그렇지 않은 신자는 너무 멀리 있습니다. 십자가를 이해하고 주님의 편이 되든지, 아니면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끝내 세상으로 돌아가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1. 십자가를 모르는 자들
베드로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으신다는 말씀을 하실 때 펄쩍 뛰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 여기서 붙잡고는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이 있는 것처럼 강압적으로 붙잡고 강권하는 모습입니다. 간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방금 하신 말씀을 가로막고 그 말씀을 돌이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말과 행동에는 예수님을 위한 인간적인 열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제자로서 스승의 안위에 대해 이 정도 열정을 갖는다면 칭찬도 할만한데,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베드로는 왜 십자가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합니까? 유대인의 메시야관을 버리지 못한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바라고 기대하는 메시야는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정치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독립된 유대인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이 나라의 백성은 유대인입니다. 그 나라의 법은 율법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자기중심적이고 현세적이고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만왕의 왕으로 모든 민족와 열방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혈통적 유대인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고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방 족속들 가운데 교회를 세우기 위해 오셨습니다. 율법으로 다스리고 율법으로 의를 얻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은혜로 다스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통치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물질적이지 않고 영적입니다. 현세적이지 않고 현세와 함께 내세를 포함합니다. 이기적이지 않고 이타적입니다. 이런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 담당하시고 고난 받고 죽으셔야 합니다. 모든 이들이 죄사함을 받고 모든 이방인이 구원을 받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나라 백성으로 세움 받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십자가 없는 복음은 가짜입니다. 예수 믿고 잘 사는 것은 근본 구원이 아니라 하나의 열매입니다. 예수 믿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은 근본 구원이 아니라 하나의 열매입니다. 예수 없이도 잘 살 수 있고 더욱 윤리적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 복락을 얻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저주에 직면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얼마나 무섭습니까? 천둥번개를 무서워하고 간밤의 악몽을 무서워한다면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무엇으로 감당할 것입니까?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은 마귀의 자녀이고 지옥 백성입니다. 이것을 무엇으로 고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의 노력으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해결해야 합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진노를 해결하고 우리에게 영생을 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 받고 죽으심으로 우리는 값없이 의 없이 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붙잡읍시다. 이것이 수준 높은 신자입니다. 참 신자입니다. 신령한 신자입니다. 세상에는 돈이나 지식이나 교양이나 여러 가지로 서로를 알아보고 구분합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구분은 십자가 오른편에 있는가, 십자가 왼편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진실한 신자가 됩시다.
2. 자기를 부인하라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당하심과 죽음을 예고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24).”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도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것을 내 것이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제 유아세례가 있었습니다. 부모에게 묻습니다. 이 아이는 하나님이 맡기신 선물로 알고 신앙으로 키우겠습니까? 예라도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 자녀가 우리 것이 아니라고 지금도 부인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마음이 변해서 나의 소유로 알지 않습니까? 우리의 생명도 우리 것이 아닙니다. 홍콩에 사스(최근에 유행하는 중증 호흡기 전염병)를 피해서 들어온 교민들이 많다고 합니다. 육신의 생명을 잘 간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소유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건강을 위해 노력하고 장수하기 위해 노력하는 분이 다 신자가 아닙니다.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분이 신자입니다. 욥을 아십니까? 그는 갑자기 찾아온 시험으로 자녀와 재산을 일시에 잃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0-21).” 욥은 분명 자기를 부인할 줄 아는 신자입니다.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지 말고, 다 주님이 잠시 맡긴 것으로 자기를 부인합시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옛 자아를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세에 고통 중에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큰 고통입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기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자기 좋으면 다 좋고, 자기 나쁘면 다 나쁩니다. 얼마나 자기중심적입니까? 남이 나를 알아주면 우쭐댑니다. 남이 조금이라도 몰라주면 섭섭해하고 적대적으로 대합니다. 사람의 몸무게는 100 킬로그램이 안 됩니다. 그런데 그 안에 들어있는 이기심과 자기애는 얼마나 무거운지 지구 덩어리 보다 더 할 겁니다. 모든 것이 자기만족이라는 도장이 찍혀야 통과합니다. 죽을 때까지 못 버리는 병을 앓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자기를 주장하다 보니까 남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불편한 것은 예민합니다. 그러나 남이 불편한 것은 둔합니다. 지하주차장에서 세차를 합니다. 혹 우리 중에 그런 분이 있어서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도 않았는데 밀고 들어옵니다. 옆에 사람이 지나가는데 침을 “퇘” 하고 뱉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핸드폰을 받고 큰 소리로 할 말 다 합니다. 이웃에 대한 이해나 사랑이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더욱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하루살이와 같고 지렁이 같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으면 얼마나 할 수 있으며, 우리가 알면 얼만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신 분입니다. 못할 것이 없고, 모르는 것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있느니 없으니, 하나님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판단합니다. 하나님을 호기심이나 논쟁거리로 삼아서 안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깊은 경외심을 가져야지 불평하거나 거역하면 안 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면 기도하라는 뜻으로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쁜 일을 주셨으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힘으로 어려워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형제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대로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으로 알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께 맡기며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선한 일을 하고, 교회 일을 봉사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나는 무익할 종일뿐입니다”는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움직입니다.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에게 없는 무엇을 내가 보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칭찬과 영광을 받을 것이 없습니다. 모든 영광과 존귀는 다 하나님이 받으셔야 합니다. 죽도록 충성하고도 “다만 무익한 종입니다” 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정말 충성과 겸손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도 내 맘대로 하지 않습니까?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이 잘못이라고 비난하지 않습니까?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롬 11:35-36).”
저는 요즘 큰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나를 부인하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십니다. 지금까지 우리 교회 목회 비전에 대해 공백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일산의 복음화, 21세기 한국 교회의 모범, 북한과 세계 선교라는 3대 비전은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목회비전이나 사명 선언문은 공백으로 남겨 두고 지내왔습니다. 그 세월이 8년을 넘었습니다. 모든 것을 확실하게 하려는 저의 성격으로는 너무 오래 빈칸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정말 이상하지만 구체화되지 않은 확신되지 않은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교회의 사명 선언문을 베끼기는 싫었습니다.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알려주실 때까지 기다려 왔는데, 이제 그 빈칸을 채우게 되었습니다. 성령 안에 권능과 은혜가 충만한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성령의 은사와 열매가 차고 넘치는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그리고 구역이나 소그룹이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모든 교인이 구역장이 되고, 구역이 또 다른 구역을 낳는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여기에는 기도와 성령 충만, 그리고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할 것입니다. 삶의 변화와 은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부인할 수 없는 은혜 체험을 주실 것입니다. 삶이 변할 것입니다. 그 힘이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전달되기 원합니다. 불신자들을 만나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세우기 원합니다. 놀라운 것은 저도 92년부터 약 3년간 대학부 전문 사역을 하였습니다. 수백명의 학생들과 소그룹에서 은혜를 체험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수년 동안 소그룹의 역동성과 비전을 완전히 잃고 살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앞으로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부인해야 할 것입니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도 부인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나 기도, 전도 같은 활동적인데 전심전력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역사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주목할 것입니다. 이전 것을 부인하지 않으면 새 것은 임하지 않습니다. 내가 부인하면 하나님의 비전이 보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리를 떠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재산도 친구도 친척도 지금까지 살아온 문화도 버리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할 때 가나안 복지가 그 앞에 주어졌습니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온전한 것이 없습니다. 이성도 감정도 의지도 엉망입니다. 중요한 순간마다 허물어집니다.
3.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자기를 부인하면 다음 단계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죄수들이 처형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피를 흘리며 고통 가운데 죽어가는 십자가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악몽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을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까? 즐겁지도 기쁘지도 않은 십자가를 왜 지라고 하십니까?
십자가가 없으면 순종하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조심하고 인내하지 않습니다. 온전치 못하고 속 썩이는 자녀가 있습니까? 십자가입니다. 그 자녀 때문에 하나님 앞에 신앙으로 살아갑니다. 물질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잘못도 없고 게으르지도 않는데 물질에 곤고할 수 있습니다. 물질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지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몸에 병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세 번이나 그 병이 떠나기를 기도해지만, 하나님은 네 은혜가 족하다고 하시면서 그 십자가를 지고 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질병으로 겸손과 함께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사도로서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혈기왕성하고 방종합니까? 십자가를 져야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물질, 질병, 명예의 손상, 중상모략, 그리고 우리가 지고 가야할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교회를 섬기도록 부탁받은 직분입니다. 저도 목사이기에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목사이기에 하지 못하고 참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의 십자가입니다. 토요일은 누가 뭐라고 해도 주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 바쁜 일이 생겨도 예외 없이 주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 주일에는 아파도 안 됩니다. 강단에 서야 합니다. 기도회나 예배 전에 더욱 긴장되는 것은 성령의 충만을 가로막는 일입니다. 마음이 상하면 말씀을 전하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마귀의 역사가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우리 장로님이나 찬양대원이나 교사나 구역장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돈 받고 고용된 일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대신 죽기까지 하신 주님이 부탁하신 일입니다. 십자가로 알고 잘 감당합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삶에 십자가입니다. 기도하고 능력을 얻고, 기도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영혼을 사랑하고, 기도하고 전도할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안 믿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은 주님의 품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교회 목사님 생각하고 선교사님 생각하고, 천국에서 하나님을 영광 중에 만날 생각을 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 세계선교의 사명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지고 가야할 십자가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분들이 과연 변하겠습니까? 전도하지 않는 분들이 과연 변하겠습니까? 구역으로 소그룹으로 모여서 하나님의 자녀로 삶을 나누는 것을 과연 할 수 있겠습니까? 선교하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뜻이고, 우리 교회와 이 시대에 주신 비전이라고 믿습니다.
요즘 인기 있는 신자는 자기 십자가 벗어 던진 신자라고 하고, 인기 있는 교회는 십자가 벗어 던진 교회라고 하는데, 그게 정말입니까? 아닙니다. 세상의 멍에는 벗어 던지십시오. 그러나 주님이 지라고 하신 십자가는 지십시다. 힘이 부족하면 힘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단회적인 것이었지만,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나를 좇을 것이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날마다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릅시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을 칭찬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제 로마로부터 독립해서 잘 살 수 있는 것으로 기대를 했는데, 예수님이 이 모든 일을 이루실 것으로 생각했는데, 예수님이 고난 당하고 죽으시다니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말씀입니다.
다혈질이고 성질 급한 베드로가 즉시 예수님의 말씀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서 안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베드로를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조금 전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칭찬하시면서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고 하시던 주님이 베드로를 엄하게 책망하십니다.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는 타협할 수 없는 긴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 받고 죽어야 한다고 하시고, 베드로는 절대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십자가 사건을 두고 세상 사람과 신자들 사이에는 이해할 수 없는 간격이 있습니다. 신자들 사이에도 십자가를 아는 신자와 그렇지 않은 신자는 너무 멀리 있습니다. 십자가를 이해하고 주님의 편이 되든지, 아니면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끝내 세상으로 돌아가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1. 십자가를 모르는 자들
베드로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으신다는 말씀을 하실 때 펄쩍 뛰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 여기서 붙잡고는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이 있는 것처럼 강압적으로 붙잡고 강권하는 모습입니다. 간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방금 하신 말씀을 가로막고 그 말씀을 돌이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말과 행동에는 예수님을 위한 인간적인 열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제자로서 스승의 안위에 대해 이 정도 열정을 갖는다면 칭찬도 할만한데,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베드로는 왜 십자가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합니까? 유대인의 메시야관을 버리지 못한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바라고 기대하는 메시야는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정치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독립된 유대인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이 나라의 백성은 유대인입니다. 그 나라의 법은 율법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자기중심적이고 현세적이고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만왕의 왕으로 모든 민족와 열방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혈통적 유대인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고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방 족속들 가운데 교회를 세우기 위해 오셨습니다. 율법으로 다스리고 율법으로 의를 얻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은혜로 다스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통치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물질적이지 않고 영적입니다. 현세적이지 않고 현세와 함께 내세를 포함합니다. 이기적이지 않고 이타적입니다. 이런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 담당하시고 고난 받고 죽으셔야 합니다. 모든 이들이 죄사함을 받고 모든 이방인이 구원을 받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나라 백성으로 세움 받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십자가 없는 복음은 가짜입니다. 예수 믿고 잘 사는 것은 근본 구원이 아니라 하나의 열매입니다. 예수 믿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은 근본 구원이 아니라 하나의 열매입니다. 예수 없이도 잘 살 수 있고 더욱 윤리적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 복락을 얻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저주에 직면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얼마나 무섭습니까? 천둥번개를 무서워하고 간밤의 악몽을 무서워한다면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무엇으로 감당할 것입니까?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은 마귀의 자녀이고 지옥 백성입니다. 이것을 무엇으로 고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의 노력으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해결해야 합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진노를 해결하고 우리에게 영생을 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 받고 죽으심으로 우리는 값없이 의 없이 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붙잡읍시다. 이것이 수준 높은 신자입니다. 참 신자입니다. 신령한 신자입니다. 세상에는 돈이나 지식이나 교양이나 여러 가지로 서로를 알아보고 구분합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구분은 십자가 오른편에 있는가, 십자가 왼편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진실한 신자가 됩시다.
2. 자기를 부인하라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당하심과 죽음을 예고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24).”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도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것을 내 것이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제 유아세례가 있었습니다. 부모에게 묻습니다. 이 아이는 하나님이 맡기신 선물로 알고 신앙으로 키우겠습니까? 예라도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 자녀가 우리 것이 아니라고 지금도 부인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마음이 변해서 나의 소유로 알지 않습니까? 우리의 생명도 우리 것이 아닙니다. 홍콩에 사스(최근에 유행하는 중증 호흡기 전염병)를 피해서 들어온 교민들이 많다고 합니다. 육신의 생명을 잘 간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소유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건강을 위해 노력하고 장수하기 위해 노력하는 분이 다 신자가 아닙니다.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분이 신자입니다. 욥을 아십니까? 그는 갑자기 찾아온 시험으로 자녀와 재산을 일시에 잃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0-21).” 욥은 분명 자기를 부인할 줄 아는 신자입니다.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지 말고, 다 주님이 잠시 맡긴 것으로 자기를 부인합시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옛 자아를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세에 고통 중에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큰 고통입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기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자기 좋으면 다 좋고, 자기 나쁘면 다 나쁩니다. 얼마나 자기중심적입니까? 남이 나를 알아주면 우쭐댑니다. 남이 조금이라도 몰라주면 섭섭해하고 적대적으로 대합니다. 사람의 몸무게는 100 킬로그램이 안 됩니다. 그런데 그 안에 들어있는 이기심과 자기애는 얼마나 무거운지 지구 덩어리 보다 더 할 겁니다. 모든 것이 자기만족이라는 도장이 찍혀야 통과합니다. 죽을 때까지 못 버리는 병을 앓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자기를 주장하다 보니까 남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불편한 것은 예민합니다. 그러나 남이 불편한 것은 둔합니다. 지하주차장에서 세차를 합니다. 혹 우리 중에 그런 분이 있어서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도 않았는데 밀고 들어옵니다. 옆에 사람이 지나가는데 침을 “퇘” 하고 뱉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핸드폰을 받고 큰 소리로 할 말 다 합니다. 이웃에 대한 이해나 사랑이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더욱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하루살이와 같고 지렁이 같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으면 얼마나 할 수 있으며, 우리가 알면 얼만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신 분입니다. 못할 것이 없고, 모르는 것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있느니 없으니, 하나님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판단합니다. 하나님을 호기심이나 논쟁거리로 삼아서 안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깊은 경외심을 가져야지 불평하거나 거역하면 안 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면 기도하라는 뜻으로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쁜 일을 주셨으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힘으로 어려워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형제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대로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으로 알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께 맡기며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선한 일을 하고, 교회 일을 봉사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나는 무익할 종일뿐입니다”는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움직입니다.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에게 없는 무엇을 내가 보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칭찬과 영광을 받을 것이 없습니다. 모든 영광과 존귀는 다 하나님이 받으셔야 합니다. 죽도록 충성하고도 “다만 무익한 종입니다” 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정말 충성과 겸손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도 내 맘대로 하지 않습니까?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이 잘못이라고 비난하지 않습니까?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롬 11:35-36).”
저는 요즘 큰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나를 부인하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십니다. 지금까지 우리 교회 목회 비전에 대해 공백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일산의 복음화, 21세기 한국 교회의 모범, 북한과 세계 선교라는 3대 비전은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목회비전이나 사명 선언문은 공백으로 남겨 두고 지내왔습니다. 그 세월이 8년을 넘었습니다. 모든 것을 확실하게 하려는 저의 성격으로는 너무 오래 빈칸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정말 이상하지만 구체화되지 않은 확신되지 않은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교회의 사명 선언문을 베끼기는 싫었습니다.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알려주실 때까지 기다려 왔는데, 이제 그 빈칸을 채우게 되었습니다. 성령 안에 권능과 은혜가 충만한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성령의 은사와 열매가 차고 넘치는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그리고 구역이나 소그룹이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모든 교인이 구역장이 되고, 구역이 또 다른 구역을 낳는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여기에는 기도와 성령 충만, 그리고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할 것입니다. 삶의 변화와 은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부인할 수 없는 은혜 체험을 주실 것입니다. 삶이 변할 것입니다. 그 힘이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전달되기 원합니다. 불신자들을 만나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세우기 원합니다. 놀라운 것은 저도 92년부터 약 3년간 대학부 전문 사역을 하였습니다. 수백명의 학생들과 소그룹에서 은혜를 체험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수년 동안 소그룹의 역동성과 비전을 완전히 잃고 살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앞으로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부인해야 할 것입니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도 부인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나 기도, 전도 같은 활동적인데 전심전력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역사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주목할 것입니다. 이전 것을 부인하지 않으면 새 것은 임하지 않습니다. 내가 부인하면 하나님의 비전이 보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리를 떠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재산도 친구도 친척도 지금까지 살아온 문화도 버리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할 때 가나안 복지가 그 앞에 주어졌습니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온전한 것이 없습니다. 이성도 감정도 의지도 엉망입니다. 중요한 순간마다 허물어집니다.
3.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자기를 부인하면 다음 단계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죄수들이 처형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피를 흘리며 고통 가운데 죽어가는 십자가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악몽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을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까? 즐겁지도 기쁘지도 않은 십자가를 왜 지라고 하십니까?
십자가가 없으면 순종하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조심하고 인내하지 않습니다. 온전치 못하고 속 썩이는 자녀가 있습니까? 십자가입니다. 그 자녀 때문에 하나님 앞에 신앙으로 살아갑니다. 물질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잘못도 없고 게으르지도 않는데 물질에 곤고할 수 있습니다. 물질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지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몸에 병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세 번이나 그 병이 떠나기를 기도해지만, 하나님은 네 은혜가 족하다고 하시면서 그 십자가를 지고 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질병으로 겸손과 함께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사도로서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혈기왕성하고 방종합니까? 십자가를 져야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물질, 질병, 명예의 손상, 중상모략, 그리고 우리가 지고 가야할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교회를 섬기도록 부탁받은 직분입니다. 저도 목사이기에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목사이기에 하지 못하고 참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의 십자가입니다. 토요일은 누가 뭐라고 해도 주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 바쁜 일이 생겨도 예외 없이 주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 주일에는 아파도 안 됩니다. 강단에 서야 합니다. 기도회나 예배 전에 더욱 긴장되는 것은 성령의 충만을 가로막는 일입니다. 마음이 상하면 말씀을 전하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마귀의 역사가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우리 장로님이나 찬양대원이나 교사나 구역장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돈 받고 고용된 일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대신 죽기까지 하신 주님이 부탁하신 일입니다. 십자가로 알고 잘 감당합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삶에 십자가입니다. 기도하고 능력을 얻고, 기도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영혼을 사랑하고, 기도하고 전도할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안 믿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은 주님의 품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교회 목사님 생각하고 선교사님 생각하고, 천국에서 하나님을 영광 중에 만날 생각을 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 세계선교의 사명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지고 가야할 십자가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분들이 과연 변하겠습니까? 전도하지 않는 분들이 과연 변하겠습니까? 구역으로 소그룹으로 모여서 하나님의 자녀로 삶을 나누는 것을 과연 할 수 있겠습니까? 선교하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뜻이고, 우리 교회와 이 시대에 주신 비전이라고 믿습니다.
요즘 인기 있는 신자는 자기 십자가 벗어 던진 신자라고 하고, 인기 있는 교회는 십자가 벗어 던진 교회라고 하는데, 그게 정말입니까? 아닙니다. 세상의 멍에는 벗어 던지십시오. 그러나 주님이 지라고 하신 십자가는 지십시다. 힘이 부족하면 힘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단회적인 것이었지만,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나를 좇을 것이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날마다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