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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영목사 (부천제일교회)
한 농부가 거위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거위 농장에 가보았더니 황금 알 하나가 놓여져 있었습니다. 놀라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 다시 농장에 가보았더니 똑같은 황금 알 하나가 있었습니다. 반복되는 황금 알 때문에 내가 기르는 거위가 황금 알을 낳는 거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제 곧 부자가 되겠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드디어는 농부의 마음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저 거위의 뱃속에는 얼마나 많은 황금이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서 거위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내장을 열어보았더니 아무 것도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모든 피조물을 관리하는 관리적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피조물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피조물의 종속이 될 수도 없습니다. 또한 피조물을 인간이 혼용해서 하나님의 영광 외에 다른 곳에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피조물을 사랑함에 피조물의 종노릇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또 하나님은 인간을 피조물을 관리하는 자로 세웠을 뿐이지 하나님 되기를 원치는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마음속에 신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과일을 따먹지 말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인간의 신 됨의 욕구를 아는 사단이 와서 하는 말이 ''동산 중앙에 과일을 따먹어라. 그리하면 네가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했습니다. 결국 그 과일을 따먹은 연고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던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거부하면 피조물을 관리하는 능력이 없어지고, 인간이 인간이기를 거부하면 하나님의 은총에서부터 하나님의 저주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과학 문명은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기적이다.'' 신의 경지에 가까울 정도로 수많은 편리한 이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상상했던 일들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인간의 능력의 큼을 놀라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발견되고 발명된 인간의 이기 도구가 만약 인간이 인간성을 잃어버리면 바로 이 도구들은 인간을 해하는 도구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신적 차원을 동경해서 종교를 통하여 인류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이는 결국 인간만 비인간화되어서 윤리와 도덕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 됩니다.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종교인들은 모두 비인간화되어서 윤리와 도덕이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자기를 파멸하고 타인도 파괴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자기가 자기를 호칭하실 때, ''인자''라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헬라어로 말하면, ''호 휘스투 안트로푸, 사람의 아들이라'' 히브리어로는 ''벤 아담, 아담의 아들이라.'' 아랍어로는 ''바로나샤, 사람의 아들이라'' 자기가 자기를 부르는데 인자라고 불렀습니다. 이러기를 82번씩이나 불렀습니다. 모두 주님 자신이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사람이기를 바란다.''하는 것입니다. 단, 사도행전 7장 56절에 스데반이 순교하면서 저 하늘의 보좌를 바라보면서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실 때, 단 한 번 타인의 입으로 인자라 말했을 뿐, 왜 자신이 그토록 자신을 인자라고 했을까? 그는 사람이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사람이었냐는 학설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정통한 것은 ''인류 역사의 끝자락에 오실 메시아의 계시로서의 인자라''는 학설이 정통적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중에 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전능성의 최고의 완성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성취가 인간인 것입니다. 신비 중의 최고의 신비가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사람되기를 바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무엇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까? 사람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예수님의 사람되기를 원치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예수님은 사랑이셨기 때문에 가난한 자에게는 먹을 것을, 눈먼 자에게는 보게 됨을, 또한 병든 자에게는 나음을, 죽은 자에게는 생명을, 그리고 풍랑을 잔잔케, 예수님은 사랑이시기에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을 접하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이 신이 되기를 바랬습니다. 전능자 이기를 바랬습니다. 심지어는 십자가에 달리는 어느 한 강도가 말하기를 ''당신은 전능자가 아니요, 뛰어 내리고 나도 구원해 주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 되기를 바라셨기에 십자가에서 모든 피를 다 흘리시고, 죽음에로 내려가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그랬습니다. 자기 부인이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신 됨의 대한 욕망을 버리라. 신비주의는 인간의 책임을 도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피조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유하라.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준 말씀대로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장 말씀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계시가 육신이 된 것입니다.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완성은 사람됨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왜 인간에서부터 신이 되기를 바라는가? 그것은 자기들이 신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기에 예수를 신적 존재가 되어서 그 역사로 자기들도 그 차원으로 이끌어가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들은 왜 사람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까? 사람됨을 거부하는 인간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뜻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 됨이란, 즉 신앙함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어떤 신앙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서 그 인간은 결정되는 것입니다. 인도의 외교관으로 가 있던 한국의 한 집사님의 간증입니다. 어느 날 외교관 공관 앞에 차를 세워 두었다가 급한 일이 있어서 후진해서 빼서 출발하는 순간에 어린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차 뒤로 가 보았더니 아이가 치어서 죽었습니다. 황급히 놀란 외교관은 그 시체를 쓸어안고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실수를 해서 이 아이를 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아무런 표정이 없습니다. 아무 말이 없는 그 어머니 앞에 ''진실로 죄송합니다.'' 사과하면서 ''보상을 해드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어머니가 하는 말이 우리 집에 아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 정도 죽는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도 뭔가 보상을 하고 싶어서 되물었더니 하는 말이 ''상관이 없습니다. 그 애는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죽도록 운명지어져 있습니다.'' 여러분, 이 여인이 무슨 종교를 믿기에 이토록 비인간화가 되었습니다.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은 인간스러움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안 마당에 종종 다니던 닭이 자기의 죽은 할머니인지, 돼지우리에 꿀꿀대는 돼지가 자기 고조 할아버지인지, 온 벌판을 돌아다니는 개가 자기의 엊그제 죽은 삼촌인지,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동물과 더불어 살고 동물과 같이 사니까 결국은 비인간화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수많은 인간들이 신봉하는 종교, 그 종교에는 보편적으로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의욕이 다 있습니다. 기독교에도 신비주의가 깊이 들어왔습니다. 신비주의가 무엇입니까? 현실을 도피하고 사람됨을 포기하고 책임을 모두 다 하나님께 의탁하고, 신의 피안으로 가자고 하는 것이 신비주의입니다. 신비주의는 결국 인간됨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심리적인 최면술을 이용해서 사람에게 어떤 보편적인 일상생활이 아닌 행동을 하게 하고, 이것을 ''성령이 역사 했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까? 또 하나 있습니다. 컴퓨터입니다. 여러분, 요즘 하는 말이 ''어머니, 아버지는 없어도 컴퓨터는 있어야 한다.'' 지금 현대인들은 컴퓨터를 믿습니다. 의지합니다. 컴퓨터로부터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을 갖습니다. 그리고 가상의 세계와 현실을 혼돈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비인간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컴퓨터 중독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람스러움을 포기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선 19절 말씀에 보면, ''먹기를 탐한다. 포도주를 즐긴다.'' 예수님이 하시고 있는 일을 보고 이렇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을 비판합니까? 사실 예수님이 먹기를 탐하셨습니까? 예수님이 포도주를 즐기신 분입니까? 아닙니다. 사랑이기 때문에 나누기를 기뻐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혀 사실 무근의 비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비판을 합니까? 자기들이 신이 되고 싶은데 예수가 만약에 평범한 인간이 되어버리면, 자기들의 꿈이 사라지기 때문에 결국은 예수가 먹고 마시는 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여, 전능자가 되시옵소서. 예수여 신이 되시옵소서. 당신의 신적인 역사가 이루어지므로 나도 그 역사에 동참하여 신적 차원으로 나를 초청해 달라.''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거북스러울 때는 어떤 때인 줄 아십니까? 처음 예수를 믿는 사람의 집에 심방을 가보면, ''목사님이 기도하면 모든 병은 낫는다. 목사님이 우리 집에 들어왔으니까 악귀는 떠나가고 사단은 떠나가고 우리 집에는 성령님만 충만하다, 목사님이 기도해 주시니까 모든 사업이 형통하다. 목사님께 부탁하면 못할 일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극진히 대접할 때 입장이 난처합니다. 또 어떤 때인지 아십니까? 예수를 잘 믿습니다. 경건한 분입니다. 그리고 율법주의 중에 율법주의입니다. 이런 분들이 목사를 볼 때, 나보다 더 경건해 지기를 바랄 때, 완벽한 성인이기를 바랄 때, 참으로 거북스럽습니다. 목사도 죄성을 가진 인간입니다. 실수합니다. 잘못합니다. 죄도 짓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을 기점으로 놓고 목사는 그 이상이기를 바랄 때, 정말 예수 잘 믿는 사람이 목사에게 고통 줍니다.
18절 말씀에 보면, ''요한이 와서 먹지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라.''했습니다. 또 요한은 예수님이 보는 이 관점과 반대 관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 요한은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요한은 절제하며 청빈한 사람입니다. 그는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습니다. 뿐만 아니라 집도 한 칸 없이 광야에서 삽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 당시의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자기들이 최상껏 있는 어떤 율법을 지키는 경지를 이 요한이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요한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의가 무너지는 것이 마음에 불평스러워서 ''요한, 너는 왜 먹지 않느냐? 요한, 너는 왜 마시지 않느냐? 요한, 너는 왜 사치하지 않느냐? 요한, 너는 인간이 되어라. 그런데 왜 귀신이 되려고 하느냐?''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요한을 보고 예수를 보고 비판하는 모든 사람들이 실제는 요한에게도 관심이 없고, 예수에게도 관심이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디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까?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사실 비판하고 있지만, 실제는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여러분도 스스로 자기를 돌아보십시오. 내가 남을 비판하고 내가 남을 평가하고 내가 남의 말을 하지만, 실제는 그들을 사랑하는가? 내가 나를 사랑함에 나에게 유익이 되는 대로, 내 기준대로, 내 눈으로, 내 안경으로, 내 표준으로 평가할 뿐이지 관심이 없습니다. 나보다 못하게 평가 절하합니다. 내가 이익을 얻고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에게는 더욱 큰 찬사를 보내서 그와 나와 어떤 관계 맺기를 바랄 뿐이지 실제 그를 위한 위함은 없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랑뿐이지,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라면, 예수와 전혀 다른 한 존재가 되어버리는데 이것이 바로 비인간화된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19절 말씀에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세리를 아십니까? 세리는 그 당시에 민족의 피를 뽑아서 제국주의자에게 바치는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눈물도 없고, 피도 없고, 윤리도 없고, 도덕도 없고, 그들은 공세를 뽑아서 자신이 취하고, 로마에 일부를 바치는 아주 몹쓸 사람입니다. 거지가 세리가 주는 돈을 받았다가 세리가 준 줄 안다면, 그대로 던져버릴 정도의 더러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에게 가서 그와 함께 먹고 마시고 교제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사람을 위하여 오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바다의 항해를 하다가 옆에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배가 뒤집어져서 사람들이 빠져서 도와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 사람들을 구하기는 구해야 하는데 어떤 순서로 구하겠습니까? 맨 처음 누구를 구하겠습니까? 맨 처음에 어린 아이, 두 번째 여성, 세 번째 노인, 네 번째 젊은 사람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인류는 모두 죄의 바다에 빠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먼저 구해주시겠습니까? 가장 ''help''하며 기진맥진하게 버려진 인간, 세리를 먼저 구해야 될 것입니다. 창녀를 먼저 구해야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정당한 순서로 찾아오셔서 세리를 주님은 교제하시는 것이 옳은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등걸이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세리와 동일하게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 8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세리가 얼마나 변화했습니까? 이 모습을 보면서 주님께서 9절 말씀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라'' 누가복음 19장 10절 말씀에 ''인자의 온 것을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임재의 자리에 죄인 중에 가장 밑바닥에서 구원받지 못할 자, 버려진 자들에게 오셔서 그 분을 사랑하신 연고로 우리 모두가 다 구원을 받고도 남음이 있는 은총을 얻게 되심을 여러분을 아십니까? 만약 세리가 소외되었다면 우리도 구원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거기에 주님이 보시는 기존 안에 들어갈는지, 못 들어갈는지 아마 믿음이 연약해 질 것입니다. 세리가 구원받는 것을 보고 우리는 당연히 구원이지요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마땅히 하셔야 할 사역이었습니다.
15절 말씀에 ''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자기는 다른 사람과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내가 의롭다하는 의로움의 틀 속에 들어가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 주님이 오셔도, 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쳐도 그들은 모두를 차단해 버리고, 하나도 수납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기 속에 자기가 빠져 있습니다. 16절, 17절 말씀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하시면서 저자 거리에 아이들이 하던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아이들이 장례 놀이를 하고, 결혼 놀이를 하는데 물론 놀이하기 때문에 그러하겠습니다만 신랑, 신부들은 방긋방긋 웃고 춤을 추겠습니다만 놀이하지 않고, 옆에서 보는 아이들은 하나도 즐겁지 않습니다. 또 장례 놀이하는데 자기가 상주를 맡은 아이는 ''아이고 아이고'' 그럴지 모르지만 옆에 아이들은 재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가만히 있습니다. 그것처럼 지금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고 예수님이 오셔서 너희들을 사람으로 만들어가려고 하는데, 너희들은 도리어 관심도 없고 아무런 마음을 열지 않고 있다. open mind하지 않는다. 인간됨을 포기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무관심의 시대, 자기의 노예가 되면, 모든 것에 대해 무관심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을 요한복음 2장에는 혼인잔치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인류의 잔치다. 예수님이 오셨는데도 기뻐하지 못함은 바로 보혈의 피인 포도즙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활은 성령이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잔치적 인간이 되게 하고 예수를 맞고 예수와 더불어 함께 즐기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요한복음 2장의 혼인 잔치 비유의 의미입니다. 요한이 외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왔다. 회개하라. 문을 열어라. 마음 문을 열어라. 이제 너희가 가지고 있는 어떤 의식이나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나름대로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나 모든 관념을 깨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들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됨을 나의 삶의 최고의 목표로 삼고 신앙생활을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절에는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가 빼앗느니라'' 그랬습니다. 이 성경은 조금 잘못 번역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의역하면 이렇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첩경을 말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자 마자 천국이 폭포수처럼 우리에게 밀려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마음 문만 열면 믿기만 하면, 천국이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그러니 너희들은 수납하라. 마음 문 열고, 너희들의 생각을 버리고, 천국의 질서를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시민, 즉 예수 닮은 사람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절 19절 끝 부분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 여기 ''행한 일'' 하면서 주어를 생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옳다함을 얻는다.'' 누가? ''하나님이 옳다함을 얻는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세리의 친구가 되고, 죄인의 친구가 된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렇게 해야 결국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하나님의 사랑을 온 인류가 알 수 있고, 그 사랑이 들어가서 그 사랑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보약을 먹는데 말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보약을 먹어봤자 먹은 둥, 마는 둥입니다. 그런데 바싹 말라서 다 죽어 가는 사람이 보약 한재 먹고 나면, 마치 시들은 꽃이 활짝 피듯이 소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리가 거룩해지면 하나님 나라의 왕성함이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죄인이 어른 되면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온 누리에 증거 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가장 약한 자, 가장 버려진 자에게 하나님이 먼저 가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천국을 모셔들인 사람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모셔들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끼리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추석을 맞아서 고향을 갈 것입니다. 친지가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벗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참 불행스러운 것은 한 집안 중에 예수 믿는 파, 비(非)예수파가 갈라집니다. 추석이 되면 제사파와 비(非)제사파가 갈라져서 갈등관계를 이룹니다. 제가 말씀 중에 이런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만 고스톱 패를 줘도 비(非) 제사파에게는 좋은 것 안 주고, 제사파에게는 좋은 것 주고 그런다고 합니다. 얼마나 심각한 문제입니까? 우리는 세상 사람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십자가를 높이 높인 것은 온 죄인을 구하기 위한 넓은 가슴을 표방한 것입니다. 예수의 죄인의 친구된 것이 지혜로운 일이면, 우리도 죄인의 친구 되셔서 그리스도의 빛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마음껏 펼쳐 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 농부가 거위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거위 농장에 가보았더니 황금 알 하나가 놓여져 있었습니다. 놀라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 다시 농장에 가보았더니 똑같은 황금 알 하나가 있었습니다. 반복되는 황금 알 때문에 내가 기르는 거위가 황금 알을 낳는 거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제 곧 부자가 되겠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드디어는 농부의 마음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저 거위의 뱃속에는 얼마나 많은 황금이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서 거위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내장을 열어보았더니 아무 것도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모든 피조물을 관리하는 관리적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피조물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피조물의 종속이 될 수도 없습니다. 또한 피조물을 인간이 혼용해서 하나님의 영광 외에 다른 곳에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피조물을 사랑함에 피조물의 종노릇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또 하나님은 인간을 피조물을 관리하는 자로 세웠을 뿐이지 하나님 되기를 원치는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마음속에 신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과일을 따먹지 말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인간의 신 됨의 욕구를 아는 사단이 와서 하는 말이 ''동산 중앙에 과일을 따먹어라. 그리하면 네가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했습니다. 결국 그 과일을 따먹은 연고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던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거부하면 피조물을 관리하는 능력이 없어지고, 인간이 인간이기를 거부하면 하나님의 은총에서부터 하나님의 저주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과학 문명은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기적이다.'' 신의 경지에 가까울 정도로 수많은 편리한 이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상상했던 일들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인간의 능력의 큼을 놀라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발견되고 발명된 인간의 이기 도구가 만약 인간이 인간성을 잃어버리면 바로 이 도구들은 인간을 해하는 도구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신적 차원을 동경해서 종교를 통하여 인류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이는 결국 인간만 비인간화되어서 윤리와 도덕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 됩니다.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종교인들은 모두 비인간화되어서 윤리와 도덕이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자기를 파멸하고 타인도 파괴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자기가 자기를 호칭하실 때, ''인자''라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헬라어로 말하면, ''호 휘스투 안트로푸, 사람의 아들이라'' 히브리어로는 ''벤 아담, 아담의 아들이라.'' 아랍어로는 ''바로나샤, 사람의 아들이라'' 자기가 자기를 부르는데 인자라고 불렀습니다. 이러기를 82번씩이나 불렀습니다. 모두 주님 자신이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사람이기를 바란다.''하는 것입니다. 단, 사도행전 7장 56절에 스데반이 순교하면서 저 하늘의 보좌를 바라보면서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실 때, 단 한 번 타인의 입으로 인자라 말했을 뿐, 왜 자신이 그토록 자신을 인자라고 했을까? 그는 사람이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사람이었냐는 학설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정통한 것은 ''인류 역사의 끝자락에 오실 메시아의 계시로서의 인자라''는 학설이 정통적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중에 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전능성의 최고의 완성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성취가 인간인 것입니다. 신비 중의 최고의 신비가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사람되기를 바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무엇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까? 사람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예수님의 사람되기를 원치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예수님은 사랑이셨기 때문에 가난한 자에게는 먹을 것을, 눈먼 자에게는 보게 됨을, 또한 병든 자에게는 나음을, 죽은 자에게는 생명을, 그리고 풍랑을 잔잔케, 예수님은 사랑이시기에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을 접하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이 신이 되기를 바랬습니다. 전능자 이기를 바랬습니다. 심지어는 십자가에 달리는 어느 한 강도가 말하기를 ''당신은 전능자가 아니요, 뛰어 내리고 나도 구원해 주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 되기를 바라셨기에 십자가에서 모든 피를 다 흘리시고, 죽음에로 내려가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그랬습니다. 자기 부인이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신 됨의 대한 욕망을 버리라. 신비주의는 인간의 책임을 도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피조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유하라.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준 말씀대로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장 말씀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계시가 육신이 된 것입니다.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완성은 사람됨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왜 인간에서부터 신이 되기를 바라는가? 그것은 자기들이 신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기에 예수를 신적 존재가 되어서 그 역사로 자기들도 그 차원으로 이끌어가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들은 왜 사람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까? 사람됨을 거부하는 인간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뜻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 됨이란, 즉 신앙함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어떤 신앙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서 그 인간은 결정되는 것입니다. 인도의 외교관으로 가 있던 한국의 한 집사님의 간증입니다. 어느 날 외교관 공관 앞에 차를 세워 두었다가 급한 일이 있어서 후진해서 빼서 출발하는 순간에 어린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차 뒤로 가 보았더니 아이가 치어서 죽었습니다. 황급히 놀란 외교관은 그 시체를 쓸어안고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실수를 해서 이 아이를 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아무런 표정이 없습니다. 아무 말이 없는 그 어머니 앞에 ''진실로 죄송합니다.'' 사과하면서 ''보상을 해드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어머니가 하는 말이 우리 집에 아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 정도 죽는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도 뭔가 보상을 하고 싶어서 되물었더니 하는 말이 ''상관이 없습니다. 그 애는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죽도록 운명지어져 있습니다.'' 여러분, 이 여인이 무슨 종교를 믿기에 이토록 비인간화가 되었습니다.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은 인간스러움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안 마당에 종종 다니던 닭이 자기의 죽은 할머니인지, 돼지우리에 꿀꿀대는 돼지가 자기 고조 할아버지인지, 온 벌판을 돌아다니는 개가 자기의 엊그제 죽은 삼촌인지,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동물과 더불어 살고 동물과 같이 사니까 결국은 비인간화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수많은 인간들이 신봉하는 종교, 그 종교에는 보편적으로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의욕이 다 있습니다. 기독교에도 신비주의가 깊이 들어왔습니다. 신비주의가 무엇입니까? 현실을 도피하고 사람됨을 포기하고 책임을 모두 다 하나님께 의탁하고, 신의 피안으로 가자고 하는 것이 신비주의입니다. 신비주의는 결국 인간됨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심리적인 최면술을 이용해서 사람에게 어떤 보편적인 일상생활이 아닌 행동을 하게 하고, 이것을 ''성령이 역사 했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까? 또 하나 있습니다. 컴퓨터입니다. 여러분, 요즘 하는 말이 ''어머니, 아버지는 없어도 컴퓨터는 있어야 한다.'' 지금 현대인들은 컴퓨터를 믿습니다. 의지합니다. 컴퓨터로부터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을 갖습니다. 그리고 가상의 세계와 현실을 혼돈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비인간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컴퓨터 중독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람스러움을 포기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선 19절 말씀에 보면, ''먹기를 탐한다. 포도주를 즐긴다.'' 예수님이 하시고 있는 일을 보고 이렇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을 비판합니까? 사실 예수님이 먹기를 탐하셨습니까? 예수님이 포도주를 즐기신 분입니까? 아닙니다. 사랑이기 때문에 나누기를 기뻐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혀 사실 무근의 비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비판을 합니까? 자기들이 신이 되고 싶은데 예수가 만약에 평범한 인간이 되어버리면, 자기들의 꿈이 사라지기 때문에 결국은 예수가 먹고 마시는 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여, 전능자가 되시옵소서. 예수여 신이 되시옵소서. 당신의 신적인 역사가 이루어지므로 나도 그 역사에 동참하여 신적 차원으로 나를 초청해 달라.''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거북스러울 때는 어떤 때인 줄 아십니까? 처음 예수를 믿는 사람의 집에 심방을 가보면, ''목사님이 기도하면 모든 병은 낫는다. 목사님이 우리 집에 들어왔으니까 악귀는 떠나가고 사단은 떠나가고 우리 집에는 성령님만 충만하다, 목사님이 기도해 주시니까 모든 사업이 형통하다. 목사님께 부탁하면 못할 일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극진히 대접할 때 입장이 난처합니다. 또 어떤 때인지 아십니까? 예수를 잘 믿습니다. 경건한 분입니다. 그리고 율법주의 중에 율법주의입니다. 이런 분들이 목사를 볼 때, 나보다 더 경건해 지기를 바랄 때, 완벽한 성인이기를 바랄 때, 참으로 거북스럽습니다. 목사도 죄성을 가진 인간입니다. 실수합니다. 잘못합니다. 죄도 짓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을 기점으로 놓고 목사는 그 이상이기를 바랄 때, 정말 예수 잘 믿는 사람이 목사에게 고통 줍니다.
18절 말씀에 보면, ''요한이 와서 먹지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라.''했습니다. 또 요한은 예수님이 보는 이 관점과 반대 관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 요한은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요한은 절제하며 청빈한 사람입니다. 그는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습니다. 뿐만 아니라 집도 한 칸 없이 광야에서 삽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 당시의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자기들이 최상껏 있는 어떤 율법을 지키는 경지를 이 요한이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요한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의가 무너지는 것이 마음에 불평스러워서 ''요한, 너는 왜 먹지 않느냐? 요한, 너는 왜 마시지 않느냐? 요한, 너는 왜 사치하지 않느냐? 요한, 너는 인간이 되어라. 그런데 왜 귀신이 되려고 하느냐?''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요한을 보고 예수를 보고 비판하는 모든 사람들이 실제는 요한에게도 관심이 없고, 예수에게도 관심이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디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까?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사실 비판하고 있지만, 실제는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여러분도 스스로 자기를 돌아보십시오. 내가 남을 비판하고 내가 남을 평가하고 내가 남의 말을 하지만, 실제는 그들을 사랑하는가? 내가 나를 사랑함에 나에게 유익이 되는 대로, 내 기준대로, 내 눈으로, 내 안경으로, 내 표준으로 평가할 뿐이지 관심이 없습니다. 나보다 못하게 평가 절하합니다. 내가 이익을 얻고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에게는 더욱 큰 찬사를 보내서 그와 나와 어떤 관계 맺기를 바랄 뿐이지 실제 그를 위한 위함은 없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랑뿐이지,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라면, 예수와 전혀 다른 한 존재가 되어버리는데 이것이 바로 비인간화된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19절 말씀에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세리를 아십니까? 세리는 그 당시에 민족의 피를 뽑아서 제국주의자에게 바치는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눈물도 없고, 피도 없고, 윤리도 없고, 도덕도 없고, 그들은 공세를 뽑아서 자신이 취하고, 로마에 일부를 바치는 아주 몹쓸 사람입니다. 거지가 세리가 주는 돈을 받았다가 세리가 준 줄 안다면, 그대로 던져버릴 정도의 더러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에게 가서 그와 함께 먹고 마시고 교제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사람을 위하여 오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바다의 항해를 하다가 옆에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배가 뒤집어져서 사람들이 빠져서 도와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 사람들을 구하기는 구해야 하는데 어떤 순서로 구하겠습니까? 맨 처음 누구를 구하겠습니까? 맨 처음에 어린 아이, 두 번째 여성, 세 번째 노인, 네 번째 젊은 사람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인류는 모두 죄의 바다에 빠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먼저 구해주시겠습니까? 가장 ''help''하며 기진맥진하게 버려진 인간, 세리를 먼저 구해야 될 것입니다. 창녀를 먼저 구해야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정당한 순서로 찾아오셔서 세리를 주님은 교제하시는 것이 옳은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등걸이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세리와 동일하게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 8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세리가 얼마나 변화했습니까? 이 모습을 보면서 주님께서 9절 말씀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라'' 누가복음 19장 10절 말씀에 ''인자의 온 것을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임재의 자리에 죄인 중에 가장 밑바닥에서 구원받지 못할 자, 버려진 자들에게 오셔서 그 분을 사랑하신 연고로 우리 모두가 다 구원을 받고도 남음이 있는 은총을 얻게 되심을 여러분을 아십니까? 만약 세리가 소외되었다면 우리도 구원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거기에 주님이 보시는 기존 안에 들어갈는지, 못 들어갈는지 아마 믿음이 연약해 질 것입니다. 세리가 구원받는 것을 보고 우리는 당연히 구원이지요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마땅히 하셔야 할 사역이었습니다.
15절 말씀에 ''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자기는 다른 사람과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내가 의롭다하는 의로움의 틀 속에 들어가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 주님이 오셔도, 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쳐도 그들은 모두를 차단해 버리고, 하나도 수납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기 속에 자기가 빠져 있습니다. 16절, 17절 말씀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하시면서 저자 거리에 아이들이 하던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아이들이 장례 놀이를 하고, 결혼 놀이를 하는데 물론 놀이하기 때문에 그러하겠습니다만 신랑, 신부들은 방긋방긋 웃고 춤을 추겠습니다만 놀이하지 않고, 옆에서 보는 아이들은 하나도 즐겁지 않습니다. 또 장례 놀이하는데 자기가 상주를 맡은 아이는 ''아이고 아이고'' 그럴지 모르지만 옆에 아이들은 재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가만히 있습니다. 그것처럼 지금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고 예수님이 오셔서 너희들을 사람으로 만들어가려고 하는데, 너희들은 도리어 관심도 없고 아무런 마음을 열지 않고 있다. open mind하지 않는다. 인간됨을 포기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무관심의 시대, 자기의 노예가 되면, 모든 것에 대해 무관심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을 요한복음 2장에는 혼인잔치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인류의 잔치다. 예수님이 오셨는데도 기뻐하지 못함은 바로 보혈의 피인 포도즙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활은 성령이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잔치적 인간이 되게 하고 예수를 맞고 예수와 더불어 함께 즐기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요한복음 2장의 혼인 잔치 비유의 의미입니다. 요한이 외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왔다. 회개하라. 문을 열어라. 마음 문을 열어라. 이제 너희가 가지고 있는 어떤 의식이나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나름대로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나 모든 관념을 깨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들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됨을 나의 삶의 최고의 목표로 삼고 신앙생활을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절에는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가 빼앗느니라'' 그랬습니다. 이 성경은 조금 잘못 번역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의역하면 이렇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첩경을 말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자 마자 천국이 폭포수처럼 우리에게 밀려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마음 문만 열면 믿기만 하면, 천국이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그러니 너희들은 수납하라. 마음 문 열고, 너희들의 생각을 버리고, 천국의 질서를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시민, 즉 예수 닮은 사람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절 19절 끝 부분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 여기 ''행한 일'' 하면서 주어를 생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옳다함을 얻는다.'' 누가? ''하나님이 옳다함을 얻는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세리의 친구가 되고, 죄인의 친구가 된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렇게 해야 결국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하나님의 사랑을 온 인류가 알 수 있고, 그 사랑이 들어가서 그 사랑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보약을 먹는데 말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보약을 먹어봤자 먹은 둥, 마는 둥입니다. 그런데 바싹 말라서 다 죽어 가는 사람이 보약 한재 먹고 나면, 마치 시들은 꽃이 활짝 피듯이 소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리가 거룩해지면 하나님 나라의 왕성함이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죄인이 어른 되면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온 누리에 증거 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가장 약한 자, 가장 버려진 자에게 하나님이 먼저 가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천국을 모셔들인 사람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모셔들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끼리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추석을 맞아서 고향을 갈 것입니다. 친지가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벗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참 불행스러운 것은 한 집안 중에 예수 믿는 파, 비(非)예수파가 갈라집니다. 추석이 되면 제사파와 비(非)제사파가 갈라져서 갈등관계를 이룹니다. 제가 말씀 중에 이런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만 고스톱 패를 줘도 비(非) 제사파에게는 좋은 것 안 주고, 제사파에게는 좋은 것 주고 그런다고 합니다. 얼마나 심각한 문제입니까? 우리는 세상 사람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십자가를 높이 높인 것은 온 죄인을 구하기 위한 넓은 가슴을 표방한 것입니다. 예수의 죄인의 친구된 것이 지혜로운 일이면, 우리도 죄인의 친구 되셔서 그리스도의 빛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마음껏 펼쳐 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