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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 높은뜻숭의교회)
저는 벌써 몇 주일 째 계속해서 같은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같은데 설교의 제목과 내용은 다릅니다. 때문에 제 설교를 들으시는 분들 중에는 제가 본문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절 이하의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제일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셨다는 것과 저들을 세상으로 내어 보내시며 세상의 병들고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쳐주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통하여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둘로 이해했습니다. 하나는 군중 같은 교인이 되라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세상을 고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내용으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설교를 끝낸 후에 다음 본문으로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설교가 너무 피상적이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제자가 되어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상을 고치는 삶을 살려고 할 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정직함에 대하여 깨끗함에 대하여 그리고 오늘 성실함에 대하여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직함과 깨끗함 그리고 성실함에 대한 말씀을 따로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요즈음 정직함과 깨끗함 그리고 성실함의 이유와 목적은 제자로 세상을 고치 것에 있기 때문에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마태복음 10장의 말씀을 계속 본문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하여 오늘 우리와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살아 계신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느껴 보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합니다. 양궁 선수들이 표적에 집중하면 표적이 크게 보이듯 설교를 준비하는 목사가 말씀에 집중하면 그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느껴집니다. 계속 집중하다보면 그 느낌과 소리가 점점 커집니다. 어떤 때는 그 느낌과 소리가 북소리처럼 느껴집니다.
그와 같은 깨달음과 느낌이 오면 감동하게 되고 말씀에 흥분하게 됩니다. 그와 같은 흥분과 감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각이 드디어 나의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마치 나의 생각인 것과 같이 느껴질 때 드디어 설교는 완성됩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과 생각에 대한 소개나 설명을 설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설교자가 설교를 하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전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생각에 대한 정확한 이해 위에 설교자의 감동이 더해져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자와 같습니다.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자는 먼저 그 곡을 작곡한 작곡자의 의도를 이해하고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을 위하여서는 무엇보다도 그 음악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훌륭한 연주를 할 수는 없습니다. 음악과 작곡자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해석한 후 그 위에 연주자의 감동이 더해져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훌륭한 연주가 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똑같은 곡을 연주해도 연주자에 따라 음악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음악에 대한 연주자의 이해와 감동은 연주자마다 다릅니다. 만일 연주자의 감동과 이해가 배제된다면 모든 음악은 누가 연주하든 똑같은 연주가 되고 말 것입니다. 연주자의 감동과 생각이 더하여지지 않은 연주는 아무리 곡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정확하다고 하여도 훌륭한 연주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설교는 본문에 대한 정확한 주석에서부터 시작하지만 그것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설교가 되지 않습니다. 설교자의 감동과 생각이 더하여지지 않는다면 그것을 우리는 설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설교자의 감동과 생각이 지나쳐서 본래 본문의 말씀이 왜곡되는 것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본문의 말씀을 주석적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역시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의 본문을 주석적으로 설명하는 설교를 좋은 설교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저는 그에 대해서 생각이 좀 다릅습니다.
저는 미술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지만 미술가에 따라 사실과 감동을 표현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설교를 그림에 비유하자면 제 설교는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깝습니다.
제 설교는 본문에 대한 사실적인 설명이 많지 않습니다. 제 설교는 대개 분문 과는 전혀 동떨어진 엉뚱한 내용의 이야기로 구성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문과 전혀 동떨어진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엉뚱해 보이는 이야기를 잘 듣고 나중에 성경을 보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를 듣기 전 보다 분명해지게 되고 그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조금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제가 설교에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 설교의 의도와 패턴은 그렇습니다. 잘못하면 설교를 듣는 분들이 저의 설교를 본문과 전혀 상관없는 설교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김동호 목사는 어떤 본문을 가지고도 자기 생각을 설교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럴 위험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은 저의 설교 의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은 서론이 너무 길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주로 저의 설교를 많이 들으시면서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이고 또 하셔야 하는 분들입니다. 때문에 한번은 제 설교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이해하고 느끼시는데 그리고 그 깨달음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결단하고 실천하는데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이제 좀 늦었지만 본론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요즘 설교의 핵심은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제자 같은 교인이 되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병들고 귀신들린 것과 같은 세상을 치료하고 축복하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삶을 구체적으로 살기 위하여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말씀드리고 있는데, 그 동안 우리는 정직과 깨끗함에 대하여 함께 말씀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우리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정직하고 깨끗함으로 세상을 치유하고 축복하는 삶을 살자는 내용의 말씀을 함께 생각했었습니다. 오늘은 성실함으로 세상을 축복하고 치유하는 삶을 살자는 내용의 말씀을 여러분들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선진국과 후진국을 비교해 보면 선진국이 후진국보다 더 정직하고 투명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정직함과 투명함이 선진국의 능력인데 선진국들을 살펴보면 선진국들이 그와 같은 능력을 갖게 된 것이 기독교의 영향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보면 기독교의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따라 오래 살게 되면 기독교의 문화가 형성됩니다. 기독교 문화를 형성하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일단 한번 그와 같은 문화가 형성되게 되면 그 문화가 개인과 국가의 능력이 되어 그 개인과 나라를 축복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도 이제는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 온지 100년이 퍽 넘었고 예수를 믿는 사람도 전 국민의 25%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충분히 이 땅에 기독교의 문화가 정착되기 시작해야만 합니다. 예배당을 짓는 것도 중요하고 다른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기독교의 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기독교 문화의 정착이 그 무엇보다도 효과적인 선교라고 생각합니다.
정직과 투명은 하나님의 식입니다. 거짓과 불투명은 사탄의 식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식대로 살지 않고 사탄의 식대로 살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사람과 세상이 병들어 있습니다. 그 병 때문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너희들이 그와 같은 세상을 치유하고 고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기 위하여 너희들이 변화산에 초막만 치지 말고 세상으로 나아가 정직함과 투명함을 실천하며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그것이 이 때 저와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감동과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지금 이 말씀을 우리들에게 냉정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흥분이 되신 상태에서 아주 열정적으로 그리고 아주 큰 소리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느낍니다.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에서 마치 하나님의 북 소리가 나는 것 같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실함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선진국의 문화 바탕은 성실함입니다. 후진국의 문화 바탕은 나태와 게으름입니다. 후진국으로 갈수록 사람들이 게으르고 나태합니다. 삶의 진지함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자기 이익이 없으면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진국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저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 이익을 좇아 움직이지만 선진국 사람일수록 후진국 사람에게는 잘 나타나지 않는 소명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이익을 위하여 일을 하든 소명을 위하여 일을 하든 최선을 다하여 아주 성실하게 일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나라가 후진국의 티를 벗고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되려고 하면 선진국답게 성실한 삶을 사는 문화를 건설해야만 합니다. 꽤 부리지 아니하고 요령부리지 아니하고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성실함과 신실함은 병든 세상을 치유하고 축복하는 능력이 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비하여 이 성실성이 떨어집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남의 눈치를 보며 남이 볼 때는 열심히 성실한 척 하지만 아무도 보지 않으면 꾀를 부리고 요령을 부리는 면이 남아 있습니다. 이면만 고칠 수 있다면 우리나라는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나라가 될 것입니다. 세계를 축복하고 섬길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게으른 것은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종종 '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표현을 쓰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게으른 것을 곧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 중에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충성입니다. 그것을 또 다른 말로 하면 성실입니다.
능력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고 충성과 성실함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실하고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에게 능력을 더하시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서 능력을 빼앗으십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사실을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서 잘 배울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기독교인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가장 중요한 성품 중에 하나가 성실함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정직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깨끗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성실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의 이미지이어야 하고 그것이 우리 교회의 브랜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한국 교회와 교인들은 그와 같은 이미지와 브랜드를 갖는데 아직 성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지금 서서히 침몰하고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우리 한국 교회와 교인들이 좋은 의미에서 브랜드 이미지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동안 힘써서 세상에 알려 온 것은 '예수 믿는 사람도 정직하지 못하다' '예수 믿는 사람도 거짓말만 잘 하더라' '예수 믿는 사람도 깨끗하고 투명하지 못하더라' ' 믿는 사람이 더 하더라'고 하는 부정적인 이미지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부끄럽지만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와 교인들에게 그와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바꾸는 교회와 교인들이 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뜻과 목적 때문에 이곳에 높은 뜻 숭의교회를 세우셨다고 매 주일 우리들에게 외치고 계십니다. 이 말씀에 귀 기우리시고 감동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삶을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시고 세상으로 나아가 실천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주 큰 회사의 수석 전무로 계시던 장로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는 회사의 중역 몇 사람과 일대 일 제자 훈련을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IMF 때 그 회사도 구조조정을 해야만 했었는데 규정에 따라 그 대상자를 선정하다보니 자기와 일대 일 제자 훈련을 받고 있는 중역 하나가 그에 해당되게 되었습니다. 많은 갈등이 있었지만 원칙에 따라 그 분에게 그와 같은 사실을 통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회사는 그에게 석 달의 여유를 주고 퇴직을 준비하게 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통고를 받은 다음 날 그 중역은 자기의 상관인 수석 전무와 사장에게 그 동안 좋은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며 살아 올 수 있었던 것에 대하여 감사를 표하고 남은 석 달 동안 열심히 일 하다가 회사를 떠나겠다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회사가 그에게 석 달의 여유를 준 것은 퇴직하는 분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한 것이었는데 이 분은 석 달 후면 퇴직할 회사에 열심히 출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여 자신의 일을 정리하였습니다. 자기가 떠나도 회사에 지장이 없게끔 최선을 다하여 자신의 일을 정리해 주었습니다.
석 달 후 그는 그 회사를 떠나게 되었는데 그 회사 사장과 회장이 그에 감동하여 그 다음 날 그를 그 회사의 자회사인 어느 회사의 사장으로 발령하였습니다. 물론 그가 사장이라고 더 좋은 자리를 얻게 된 것도 기쁘고 자랑스럽지만 저는 예수 믿는 사람이 그와 같은 상황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남을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감당했다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자랑스러운 일을 한 사람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너무도 신나고 자랑스럽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사람들이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서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청년 때 들은 설교 중 기억이 나는 예화가 하나 생각이 납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 사모님이 너무 병약하고 꽤 오랜 동안 자리 펴고 누워 있었답니다. 때문에 할 수 없이 당시에는 식모라고 부르던 가정부를 두게 되었답니다. 스물 살이 채 되지 않았던 처녀 아이가 그 목사님 댁에 가정부로 오게 되었는데 그 아이는 자기의 처지에 대하여 늘 불평과 원망을 가지고 있었던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게 되었는데 그 부흥회에 목사님 댁 가정부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집회에서 이 아이가 참으로 많은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은혜를 받은 후 삶이 변하기 시작하였는데 가장 큰 변화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평과 원망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사모님이 방에 누워 있는데 부엌에서 일을 하는 가정부 아이가 중얼 중얼 거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무슨 불평이 있어서 아이가 저렇게 중얼거리나 생각하면 살며시 방문을 조금 열어 그 말을 듣게 되었는데, 그말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평과 원망이 아니었답니다. 그것은 밥을 푸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였답니다.
목사님 밥을 푸면서 '하나님 제가 열심히 그리고 정성껏 이 밥을 지었으니 우리 목사님 이 밥 드시고 목회 잘하시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사모님 밥을 푸면서 '하나님 제가 이 밥을 열심히 정성껏 지었으니 우리 사모님 이 밥 드시고 소화 잘되게 해 주시고 건강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아이들 도시락을 싸면서 아이들 이 밥 먹고 공부 잘 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더랍니다.
그와 같은 기도를 들은 목사님 사모님이 얼마나 감동을 했는지 모르고 결국 그 가정부는 그 목사님 댁에서 양딸이 되어 함께 살았답니다. 그리고 목사님 내외가 그 아이의 부모가 되어 혼수까지 준비하여 조그마한 공장을 운영하는 젊은 집사님에게 시집을 보냈는데 그 사업이 번성하여 지금은 아주 큰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약 30년 전 헌신 예배에 설교를 하러 오신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저는 그 날의 감동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명퇴를 당한 회사에서도 최선을 다하여 성실하게 자기 일을 감당했던 분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남의 집 가정부가 되어 고생을 하면서 자기 신세 타령이나 하지 않고, 세상을 원망이나 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밥을 푸는 마음으로 살아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저는 그와 같은 마음과 자세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마음과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마음과 자세는 지극히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세상을 치유하고 축복하는 구체적이고도 실제거인 능력이 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은 골로새서 3장 23절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동안 우리 한국 교회 교인들은 교회 봉사와 일에는 참으로 헌신적으로 일을 하였습니다. 충성스럽고 성실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일을 그렇게 잘 하지 못한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교회 일만 열심히 하지말고 무슨 일을 하든지 다 그와 같은 마음으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일만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라 말씀하십니다. 충성스럽게 성실하게 하라는 말씀이십니다.
예수 믿는 학생은 교회뿐만 아니라 학교에 충실해야 합니다. 교회 봉사뿐만 아니라 공부를 열심히 하여야 합니다. 교회 봉사는 하나님의 일이고 공부는 자기 일이 아닙니다. 공부도 자기를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학생은 공부도 주를 위하여 열심히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교인들은 교회 봉사뿐만 아니라 세상에서의 일을 성실하게 충성스럽게 하여야만 합니다. 세상에서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열심히 일을 하면 꼭 문제가 생깁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에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가 저는 바로 그와 같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할 일 없는 사람이 교회에서 열심을 내면 꼭 교회가 문제가 생깁니다.
교회의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려면 세상에 일이 있어야만 합니다. 꼭 사업을 하고 월급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일이 아닌 그 동안 우리가 세상일이라고 등한히 하였던 일을 성실히 열심히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교회 권찰만 하려고 하지말고 동네의 통장과 반장 일도 하려고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실히 열심히 감당할 때 세상도 좋아지고 교회도 좋아질 줄을 믿습니다.
저는 교회의 직분보다 여러분들의 직업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목사가 아닌 여러분들에게 교회 일은 봉사직입니다. 물론 교회 봉사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직장과 세상에서의 여러분들의 일입니다. 그 일을 교회 봉사보다 더 열심히 하여야 합니다. 더 성실히 하여야 합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를 향하여 주시는 분명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가 그냥 성전 뜰만 밟고 다니는 군중 같은 교인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들이 제자 같이 실력 있고 믿음이 있는 그런 교인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변화산에 초막이나 짓듯 교회에만 신경을 쓰고 충성을 하는 그런 교인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을 품고 저들을 치유하며 축복하는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하여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지 아니하고 경건의 능력을 가지고 세상에서 정직하고 깨끗하며 성실하게 살아 세상에 건전하고도 바른 기독교 문화를 건설하고 그것을 통하여 세상을 축복하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저는 설교를 하는 사람이지만 설교에 그다지 큰 관심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설교를 하고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설교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별거 아닙니다. 별로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실한 사람되기를 원하십니다. 무슨 일을 하든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않는 성실한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성실함의 능력으로 세상을 축복하고 치유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저는 벌써 몇 주일 째 계속해서 같은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같은데 설교의 제목과 내용은 다릅니다. 때문에 제 설교를 들으시는 분들 중에는 제가 본문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절 이하의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제일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셨다는 것과 저들을 세상으로 내어 보내시며 세상의 병들고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쳐주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통하여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둘로 이해했습니다. 하나는 군중 같은 교인이 되라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세상을 고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내용으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설교를 끝낸 후에 다음 본문으로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설교가 너무 피상적이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제자가 되어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상을 고치는 삶을 살려고 할 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정직함에 대하여 깨끗함에 대하여 그리고 오늘 성실함에 대하여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직함과 깨끗함 그리고 성실함에 대한 말씀을 따로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요즈음 정직함과 깨끗함 그리고 성실함의 이유와 목적은 제자로 세상을 고치 것에 있기 때문에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마태복음 10장의 말씀을 계속 본문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하여 오늘 우리와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살아 계신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느껴 보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합니다. 양궁 선수들이 표적에 집중하면 표적이 크게 보이듯 설교를 준비하는 목사가 말씀에 집중하면 그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느껴집니다. 계속 집중하다보면 그 느낌과 소리가 점점 커집니다. 어떤 때는 그 느낌과 소리가 북소리처럼 느껴집니다.
그와 같은 깨달음과 느낌이 오면 감동하게 되고 말씀에 흥분하게 됩니다. 그와 같은 흥분과 감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각이 드디어 나의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마치 나의 생각인 것과 같이 느껴질 때 드디어 설교는 완성됩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과 생각에 대한 소개나 설명을 설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설교자가 설교를 하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전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생각에 대한 정확한 이해 위에 설교자의 감동이 더해져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자와 같습니다.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자는 먼저 그 곡을 작곡한 작곡자의 의도를 이해하고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을 위하여서는 무엇보다도 그 음악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훌륭한 연주를 할 수는 없습니다. 음악과 작곡자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해석한 후 그 위에 연주자의 감동이 더해져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훌륭한 연주가 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똑같은 곡을 연주해도 연주자에 따라 음악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음악에 대한 연주자의 이해와 감동은 연주자마다 다릅니다. 만일 연주자의 감동과 이해가 배제된다면 모든 음악은 누가 연주하든 똑같은 연주가 되고 말 것입니다. 연주자의 감동과 생각이 더하여지지 않은 연주는 아무리 곡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정확하다고 하여도 훌륭한 연주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설교는 본문에 대한 정확한 주석에서부터 시작하지만 그것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설교가 되지 않습니다. 설교자의 감동과 생각이 더하여지지 않는다면 그것을 우리는 설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설교자의 감동과 생각이 지나쳐서 본래 본문의 말씀이 왜곡되는 것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본문의 말씀을 주석적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역시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의 본문을 주석적으로 설명하는 설교를 좋은 설교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저는 그에 대해서 생각이 좀 다릅습니다.
저는 미술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지만 미술가에 따라 사실과 감동을 표현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설교를 그림에 비유하자면 제 설교는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깝습니다.
제 설교는 본문에 대한 사실적인 설명이 많지 않습니다. 제 설교는 대개 분문 과는 전혀 동떨어진 엉뚱한 내용의 이야기로 구성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문과 전혀 동떨어진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엉뚱해 보이는 이야기를 잘 듣고 나중에 성경을 보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를 듣기 전 보다 분명해지게 되고 그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조금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제가 설교에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 설교의 의도와 패턴은 그렇습니다. 잘못하면 설교를 듣는 분들이 저의 설교를 본문과 전혀 상관없는 설교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김동호 목사는 어떤 본문을 가지고도 자기 생각을 설교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럴 위험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은 저의 설교 의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은 서론이 너무 길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주로 저의 설교를 많이 들으시면서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이고 또 하셔야 하는 분들입니다. 때문에 한번은 제 설교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이해하고 느끼시는데 그리고 그 깨달음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결단하고 실천하는데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이제 좀 늦었지만 본론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요즘 설교의 핵심은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제자 같은 교인이 되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병들고 귀신들린 것과 같은 세상을 치료하고 축복하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삶을 구체적으로 살기 위하여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말씀드리고 있는데, 그 동안 우리는 정직과 깨끗함에 대하여 함께 말씀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우리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정직하고 깨끗함으로 세상을 치유하고 축복하는 삶을 살자는 내용의 말씀을 함께 생각했었습니다. 오늘은 성실함으로 세상을 축복하고 치유하는 삶을 살자는 내용의 말씀을 여러분들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선진국과 후진국을 비교해 보면 선진국이 후진국보다 더 정직하고 투명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정직함과 투명함이 선진국의 능력인데 선진국들을 살펴보면 선진국들이 그와 같은 능력을 갖게 된 것이 기독교의 영향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보면 기독교의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따라 오래 살게 되면 기독교의 문화가 형성됩니다. 기독교 문화를 형성하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일단 한번 그와 같은 문화가 형성되게 되면 그 문화가 개인과 국가의 능력이 되어 그 개인과 나라를 축복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도 이제는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 온지 100년이 퍽 넘었고 예수를 믿는 사람도 전 국민의 25%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충분히 이 땅에 기독교의 문화가 정착되기 시작해야만 합니다. 예배당을 짓는 것도 중요하고 다른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기독교의 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기독교 문화의 정착이 그 무엇보다도 효과적인 선교라고 생각합니다.
정직과 투명은 하나님의 식입니다. 거짓과 불투명은 사탄의 식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식대로 살지 않고 사탄의 식대로 살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사람과 세상이 병들어 있습니다. 그 병 때문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너희들이 그와 같은 세상을 치유하고 고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기 위하여 너희들이 변화산에 초막만 치지 말고 세상으로 나아가 정직함과 투명함을 실천하며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그것이 이 때 저와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감동과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지금 이 말씀을 우리들에게 냉정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흥분이 되신 상태에서 아주 열정적으로 그리고 아주 큰 소리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느낍니다.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에서 마치 하나님의 북 소리가 나는 것 같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실함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선진국의 문화 바탕은 성실함입니다. 후진국의 문화 바탕은 나태와 게으름입니다. 후진국으로 갈수록 사람들이 게으르고 나태합니다. 삶의 진지함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자기 이익이 없으면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진국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저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 이익을 좇아 움직이지만 선진국 사람일수록 후진국 사람에게는 잘 나타나지 않는 소명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이익을 위하여 일을 하든 소명을 위하여 일을 하든 최선을 다하여 아주 성실하게 일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나라가 후진국의 티를 벗고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되려고 하면 선진국답게 성실한 삶을 사는 문화를 건설해야만 합니다. 꽤 부리지 아니하고 요령부리지 아니하고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성실함과 신실함은 병든 세상을 치유하고 축복하는 능력이 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비하여 이 성실성이 떨어집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남의 눈치를 보며 남이 볼 때는 열심히 성실한 척 하지만 아무도 보지 않으면 꾀를 부리고 요령을 부리는 면이 남아 있습니다. 이면만 고칠 수 있다면 우리나라는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나라가 될 것입니다. 세계를 축복하고 섬길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게으른 것은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종종 '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표현을 쓰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게으른 것을 곧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 중에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충성입니다. 그것을 또 다른 말로 하면 성실입니다.
능력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고 충성과 성실함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실하고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에게 능력을 더하시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서 능력을 빼앗으십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사실을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서 잘 배울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기독교인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가장 중요한 성품 중에 하나가 성실함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정직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깨끗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성실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의 이미지이어야 하고 그것이 우리 교회의 브랜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한국 교회와 교인들은 그와 같은 이미지와 브랜드를 갖는데 아직 성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지금 서서히 침몰하고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우리 한국 교회와 교인들이 좋은 의미에서 브랜드 이미지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동안 힘써서 세상에 알려 온 것은 '예수 믿는 사람도 정직하지 못하다' '예수 믿는 사람도 거짓말만 잘 하더라' '예수 믿는 사람도 깨끗하고 투명하지 못하더라' ' 믿는 사람이 더 하더라'고 하는 부정적인 이미지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부끄럽지만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와 교인들에게 그와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바꾸는 교회와 교인들이 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뜻과 목적 때문에 이곳에 높은 뜻 숭의교회를 세우셨다고 매 주일 우리들에게 외치고 계십니다. 이 말씀에 귀 기우리시고 감동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삶을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시고 세상으로 나아가 실천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주 큰 회사의 수석 전무로 계시던 장로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는 회사의 중역 몇 사람과 일대 일 제자 훈련을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IMF 때 그 회사도 구조조정을 해야만 했었는데 규정에 따라 그 대상자를 선정하다보니 자기와 일대 일 제자 훈련을 받고 있는 중역 하나가 그에 해당되게 되었습니다. 많은 갈등이 있었지만 원칙에 따라 그 분에게 그와 같은 사실을 통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회사는 그에게 석 달의 여유를 주고 퇴직을 준비하게 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통고를 받은 다음 날 그 중역은 자기의 상관인 수석 전무와 사장에게 그 동안 좋은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며 살아 올 수 있었던 것에 대하여 감사를 표하고 남은 석 달 동안 열심히 일 하다가 회사를 떠나겠다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회사가 그에게 석 달의 여유를 준 것은 퇴직하는 분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한 것이었는데 이 분은 석 달 후면 퇴직할 회사에 열심히 출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여 자신의 일을 정리하였습니다. 자기가 떠나도 회사에 지장이 없게끔 최선을 다하여 자신의 일을 정리해 주었습니다.
석 달 후 그는 그 회사를 떠나게 되었는데 그 회사 사장과 회장이 그에 감동하여 그 다음 날 그를 그 회사의 자회사인 어느 회사의 사장으로 발령하였습니다. 물론 그가 사장이라고 더 좋은 자리를 얻게 된 것도 기쁘고 자랑스럽지만 저는 예수 믿는 사람이 그와 같은 상황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남을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감당했다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자랑스러운 일을 한 사람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너무도 신나고 자랑스럽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사람들이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서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청년 때 들은 설교 중 기억이 나는 예화가 하나 생각이 납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 사모님이 너무 병약하고 꽤 오랜 동안 자리 펴고 누워 있었답니다. 때문에 할 수 없이 당시에는 식모라고 부르던 가정부를 두게 되었답니다. 스물 살이 채 되지 않았던 처녀 아이가 그 목사님 댁에 가정부로 오게 되었는데 그 아이는 자기의 처지에 대하여 늘 불평과 원망을 가지고 있었던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게 되었는데 그 부흥회에 목사님 댁 가정부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집회에서 이 아이가 참으로 많은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은혜를 받은 후 삶이 변하기 시작하였는데 가장 큰 변화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평과 원망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사모님이 방에 누워 있는데 부엌에서 일을 하는 가정부 아이가 중얼 중얼 거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무슨 불평이 있어서 아이가 저렇게 중얼거리나 생각하면 살며시 방문을 조금 열어 그 말을 듣게 되었는데, 그말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평과 원망이 아니었답니다. 그것은 밥을 푸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였답니다.
목사님 밥을 푸면서 '하나님 제가 열심히 그리고 정성껏 이 밥을 지었으니 우리 목사님 이 밥 드시고 목회 잘하시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사모님 밥을 푸면서 '하나님 제가 이 밥을 열심히 정성껏 지었으니 우리 사모님 이 밥 드시고 소화 잘되게 해 주시고 건강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아이들 도시락을 싸면서 아이들 이 밥 먹고 공부 잘 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더랍니다.
그와 같은 기도를 들은 목사님 사모님이 얼마나 감동을 했는지 모르고 결국 그 가정부는 그 목사님 댁에서 양딸이 되어 함께 살았답니다. 그리고 목사님 내외가 그 아이의 부모가 되어 혼수까지 준비하여 조그마한 공장을 운영하는 젊은 집사님에게 시집을 보냈는데 그 사업이 번성하여 지금은 아주 큰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약 30년 전 헌신 예배에 설교를 하러 오신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저는 그 날의 감동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명퇴를 당한 회사에서도 최선을 다하여 성실하게 자기 일을 감당했던 분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남의 집 가정부가 되어 고생을 하면서 자기 신세 타령이나 하지 않고, 세상을 원망이나 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밥을 푸는 마음으로 살아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저는 그와 같은 마음과 자세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마음과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마음과 자세는 지극히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세상을 치유하고 축복하는 구체적이고도 실제거인 능력이 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은 골로새서 3장 23절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동안 우리 한국 교회 교인들은 교회 봉사와 일에는 참으로 헌신적으로 일을 하였습니다. 충성스럽고 성실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일을 그렇게 잘 하지 못한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교회 일만 열심히 하지말고 무슨 일을 하든지 다 그와 같은 마음으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일만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라 말씀하십니다. 충성스럽게 성실하게 하라는 말씀이십니다.
예수 믿는 학생은 교회뿐만 아니라 학교에 충실해야 합니다. 교회 봉사뿐만 아니라 공부를 열심히 하여야 합니다. 교회 봉사는 하나님의 일이고 공부는 자기 일이 아닙니다. 공부도 자기를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학생은 공부도 주를 위하여 열심히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교인들은 교회 봉사뿐만 아니라 세상에서의 일을 성실하게 충성스럽게 하여야만 합니다. 세상에서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열심히 일을 하면 꼭 문제가 생깁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에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가 저는 바로 그와 같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할 일 없는 사람이 교회에서 열심을 내면 꼭 교회가 문제가 생깁니다.
교회의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려면 세상에 일이 있어야만 합니다. 꼭 사업을 하고 월급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일이 아닌 그 동안 우리가 세상일이라고 등한히 하였던 일을 성실히 열심히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교회 권찰만 하려고 하지말고 동네의 통장과 반장 일도 하려고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실히 열심히 감당할 때 세상도 좋아지고 교회도 좋아질 줄을 믿습니다.
저는 교회의 직분보다 여러분들의 직업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목사가 아닌 여러분들에게 교회 일은 봉사직입니다. 물론 교회 봉사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직장과 세상에서의 여러분들의 일입니다. 그 일을 교회 봉사보다 더 열심히 하여야 합니다. 더 성실히 하여야 합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를 향하여 주시는 분명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가 그냥 성전 뜰만 밟고 다니는 군중 같은 교인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들이 제자 같이 실력 있고 믿음이 있는 그런 교인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변화산에 초막이나 짓듯 교회에만 신경을 쓰고 충성을 하는 그런 교인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을 품고 저들을 치유하며 축복하는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하여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지 아니하고 경건의 능력을 가지고 세상에서 정직하고 깨끗하며 성실하게 살아 세상에 건전하고도 바른 기독교 문화를 건설하고 그것을 통하여 세상을 축복하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저는 설교를 하는 사람이지만 설교에 그다지 큰 관심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설교를 하고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설교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별거 아닙니다. 별로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실한 사람되기를 원하십니다. 무슨 일을 하든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않는 성실한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성실함의 능력으로 세상을 축복하고 치유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