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과달루베 - 이달고 평화조약

<과달루베 - 이달고 평화조약>에 의하여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국경이 정해졌는데 현재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국경선인 리오그란데 강(Rio Grande)은 바로 그 때에 정해졌던 국경선이다. 국토의 2/3를 미국에게 빼앗긴 산따 안나 대통령은 멕시코의 민중봉기에 의하여 추방되어 1855년에 미국으로 망명하고 말았다.

산따 안나 대통령을 추방한 후에 멕시코의 보수파와 자유파는 서로 정권을 잡기위하여 물고 뜯으며 3년 동안 내전을 벌였다. 그 결과 3년 동안의 내전의 승리자는 자유파로 결판났다.

자유파 베니또 후아레스(Benito Juarez)는 1861년에 대통령에 취임하여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다. 후아레스 대통령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광활한 토지와 성직자와 군인이 소유하고 있는 부당한 특권들을 몰수하고 박탈했다.

후아레스 대통령은 교회와 신부들과 그리고 지주들과 결탁한 군인들이 멕시코의 개혁과 근대화 운동에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고 판단했다.

후아레스 대통령이 추진하는 개혁정책으로 인하여 큰 타격을 입게 된 보수 세력과 천주교(catholic church)교회는 강하게 반발하였다. 교회에서 몰수한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해 주었지만 농민들은 감당할 재력이 없기 때문에 다시 자본가들의 손으로 넘어가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었다.

후아레스 대통령의 강력한 개혁운동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교회와 지주들과 군인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0여년 후에 막을 내렸다.

1876년에 새로 집권한 뽀르피리오 디아스(Jose de la Cruz Porfirio Diaz Mori) 대통령은 극우보수주의자이며 전형적인 독재자였다. 그는 외국자본을 무분별하게 끌어 들여와 멕시코의 토지 1/5를 외국인의 소유로 만들어 버렸다.

그는 빠른 경제성장을 역설하며 선전했지만 대부분의 상업과 공업이 외국인의 손으로 운영되었으며 멕시코의 경제는 순전히 미국의 ‘당근과 채찍’에 의하여 좌우되는 종속적 체제로 전락하고 말았다.

멕시코의 철도와 석유와 광산은 95%가 외국인의 소유가 되었다. ‘멕시코는 외국인에게는 어머니이고 멕시코인 에게는 계모이다’는 비웃음이 나올 정도로 친미주의적 대통령이었다.

디아스 대통령은 8회에 걸쳐 대통령에 재선되면서 35년 동안 무서운 독재를 하다가 1911년에 권좌에서 쫓겨나 미국으로 망명했다. 디아스 대통령의 35년간에 걸친 장기집권은 교회와 미국을 비롯한 외국자본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디아스 대통령의 정치는 미국문화 숭배와 민족문화를 멸시하는 입장과 자세였다.

그래서 멕시코 민중들은 “재선 반대 재선 반대”를 유일한 구호로 외치며 친미사대주의에 빠진 디아스를 규탄했다. 바로 이 구호를 외치면 투쟁한 민중들 때문에 멕시코의 다음 세대에 전개된 “멕시코 혁명”이 가능했던 것으로 분석 된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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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시티 소깔로(Zocalo) 광장

'기반석'이라는 뜻의 소깔로는 사방 240m의 넓은 광장으로 1520년에 꼬르떼스가 만들었다. 광장 주변의 파괴된 아스떼까 건물에서 가져온 돌로 포장을 하였고, 원래 이름은 Plaza Real였으나 1843년 Santa Anna대통령이 독립기념탑의 기반석을 놓으면서 이름을 소깔로로 바꾸었다. 소깔로 광장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넓은 광장(사실 세계에서 가장 큰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보다 조금 작을 뿐이다)으로, 중앙에는 멕시코 국기가 휘날리고, Cathedral Metropolitana(성당)와, Palacio Nacioal(궁전)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광장 주위에는 역사적인 건축물 외에도 공공건물, 레스토랑, 호텔들이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