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삶에만 철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영적 삶에도 철이 들어가는 것 같다.

얼마 전, 성경통신과 문제를 내기 위해 마태복음 제23장 23절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하시는 말씀을 읽다가 문득 나의 깊숙한 내면 속에 자리잡고 있는 영적 기준이 갑자기 떠올랐다.

나 자신도 사실 온전치 못하면서 온전한 것만이 옳은 것이고 그렇지 못한 것은 비판하고 정죄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발견된 것이었다.

예를 들어, 나는 성도들에게 십일조에 대해 가르칠 때에 “여러분, 십일조를 드릴 때 온전한 믿음을 다해 드려야지만 하나님께서 받으시니까 꼭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실런지도 모릅니다.”-라고 가르쳐 왔는데 오늘 이 말씀을 보니까 예수님께서도 의와 인과 신이 없이 십일조 드리는 이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시면서도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 니라」-하신 말씀이 십일조를 대하는 예수님과 나와의 다른 관점임을 깨닫게된 것이었다.

의와 인과 신이 없이 드려진 십일조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 위에 의와 인과 신을 더해 드리면 더욱 온전하고 금상첨화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부족하면서도 겉으로 온전한 체하는 나와 다른 점이었던 것이었다.

믿음이 없이 하는 기도, 찬송, 예배, 헌신, 전도, 충성, 구제, 선교 등이 소용없는 것이 아니니 어쨌든 해야 된다고 하시며 하지만 그 위에 하나님을 향한 의와 인과 신을 더해서 드리면 금상첨화라고 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이었던 것이었다.

마치 자녀로부터 정기적으로 용돈을 받는 부모 입장에서 용돈을 보내주는 그 행위를 기뻐하면서도 따뜻한 효도의 마음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보내드리면 더 좋아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는 교회와서 예배드릴 때 조는 성도가 있어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봐야겠다. 졸아도 교회와서 조는 모습을 어여삐 보며 그러면서도 이왕 나왔으니 말씀도 좀 잘 들었으면 얼마나 더 좋을까- 하는 마음 말이다.

어떤 목사님은 이럴 때 소리를 버럭 질러 깨우기도 한다는데, 이제 나는 사랑하는 맘으로 깨우고 더욱 말씀을 잘 듣도록 권면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

왜냐하면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되니까.

오! 주여

날마다 철이 더 들게 하소서

(주후 이천십이년 구월 셋째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