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여년 전, 교회를 개척 후 일 년 되던 해에 교회라면 으례히 년중 행사처럼하는 심령부흥회를 당시 중진급 부흥사 목사님을 초청하여 갖게 되었었다.

그런데 그 분으로부터 많은 실망과 상처를 받고 내 평생에 다시는 부흥회를 안하겠다고 다짐했었다.

그 후로부터 십 수년간을 일 년에 세 번씩 내가 직접 말씀 세미나를 개최하여 성도들을 양육해오다가 오 년전 부턴가 수지 기독교 연합 대성회 장소가 우리교회로 결정되면서부터 본의 아니게 일 년에 한 번씩 초가을 부흥회를 하게 되었다.

그 동안 특A급 부흥사인 장모, 김모 목사님 등을 초청하여 집회를 했지만 솔직히 늘 마음 한 구석에 허전함과 씁쓸한 뒷맛이 남았었다.

‘괜히 했다·······’라는 후회가 되지만 연합 성회라 참여 안 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늘 아쉬웠는데 이번에 초청된 김 목사님의 간증과 말씀은 내게 많은 기쁨과 감사와 도전을 주는 뒷 마무리가 좋은 감동적인 설교이었다.

동병상련이라고 했던가? 그 분의 가슴아린 간증을 들으면서 정도차이가 있을 뿐 비슷하게 겪은 아픔에 눈시울을 적셨으며 그렇게 지독하게 어려운 과거의 삶 속에서 이겨낸 오늘의 모습이 너무 대견스럽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였다.

나도 남 못지않게 어려움 속에 성장했지만 내 고생은 명함도 내 놓을 수 없었다. 특히 교회를 섬기며 담임목사님의 사례비를 드리기 위해 몇 달 동안 숙직을 자원하며 자신의 봉급 전체와 함께 채워드린 그 믿음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부모도 안계시고 형제가 없어서인지 그는 나를 비롯한 선배 목사님들을 향하여 ‘형님!’ 하며 인사하였다. 홀홀 단신으로 목회하면서 천연기념물처럼 독특하고 유별난 몇몇 교우로부터 혹톡한 고통을 받으면서 얼마나 외로웠으 면 처음 만난 우리들에게 ‘형님!’ 하며 인사를 할까. 집회를 마치고 이틀 후, 그가 내게 전화를 걸어와 정말 어려운 부탁을 하길래 그것을 들어 주었더니 그가 내게 이런 문자를 보냈다.

‘가장 당혹스러울 때 큰 힘이 되어 주셔서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저를 믿어 주심이 너무 행복합니다. 형님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샬롬’__ 나도 막내 동생처럼 지내고 싶은데 형님으로 모시고 싶다는 말이 진심일까? 부랴부랴 짐을 챙겨서 행복한 마을 장애우들과의 캠프를 위해 평창수양관으로 달려가는 내 마음이 초가을 하늘에 뜬 뭉게구름처럼 포근하였다.

오! 주여

김 목사님의 건강을 붙들어 주셔서

오래 오-래 사역하게 하소서

(주후 이천십일년 구월 첫째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