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자꾸 옛 고향과 어린 시절의 친구들이 생각나고 보고 싶어지는 것이 늙어가는(?) 표시중에 하나라고 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얼마 전 나의 동가식 서가숙 시절에 제일 신세를 많이 졌던 친구로부터 약 삼십 여년 만에 연락이 왔었다.

그러더니 또 주일학교때 부터 같이 교회 다니던 한 살 아래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미국 아틀란타에서 목회를 하다 교단 기관목사로 임지를 옮기면서 한국에 잠깐 들어 왔다가 연락을 한 것이었다.

갑자기 옛 어린시절의 추억이 물밀듯 몰려들면서 친구들이 보고 싶고 소식이 궁금해졌다. 육십 년대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에 서울 안암동에 아주 가난한 달동네가 있었다. 한 집당 대 여섯 평 쯤 되는 허름한 집들이 약 백여 가구 다닥다닥 붙어 모인 동네로서 공동수도와 공동변소를 사용하며 서울 속의 시골동네처럼 내집 네집 가림 없이 식구처럼 살던 시절에 큰 길 옆에 세워진 교회는 온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밀주를 만들어 팔던 제민이네 집, 점을 치는 할머니 집, 신들려 굿하던 무던이네 집 등도 있었지만 역시 동네 아이들의 주 무대는 교회로서 그 당시 동네 형, 친구, 동생 할 것 없이 거의 교회를 다녔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 끝까지 교회를 잘 다닌 그룹이 있었고 중간에 교회를 떠난 그룹이 있었는데 오십 여년의 세월 속에 두 그룹의 삶의 결과가 완전히 다르게 나타나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끝까지 교회를 다닌 그룹에선 여러 명의 목회자와 장로, 안수집사 등이 되어 모두 행복하고 안정된 삶을 살고 있었으며 중간에 교회를 떠난 그룹은 한결 같이 이혼으로 가정이 파괴되었고 전과자, 박수무당 등 실패한 삶으로 불행하게 살고 있었다.

후배 목사의 바쁜 일정으로 목회자가 된 친구들만 갑자기 우리 교회에서 만났는데 삼십 여년이 지났음에도 한 눈에 알아 볼 수가 있었다.

역시 나이는 숫자에 불과 한 것 같았다. 서로 포옹을 하고 등을 두드리며 해후의 기쁨을 만끽하니 우리는 영락없는 어린 시절의 주일학교 어린이였다. 이제 육십을 바라보거나 넘긴 초보 할아버지들은 금새 형, 아우가 되었으며 특히 나와 아내의 갑작스런 증발의 이유를 알려주자 배꼽을 쥐고 웃는 것이었다.

참으로 어렵고 힘들게 살던 친구들이었다. 그런데 동네에 세워진 교회를 통해 그 어려움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힘과 도움으로 오늘이 있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내 힘이 아니었다. 전적으로 붙들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나도 극심한 가난의 고통 때문에 교회를 떠난 친구들과 함께 한때 어울린 적도 있었지만 그러나 교회를 등지진 않았었다.

그때 만일 그 친구들과 함께 교회를 떠났으면 나도 영락없이 그들처럼 불행해 졌을텐데······ 생각만해도 아찔했다. 사랑하는 벗들을 아쉽게 보내며 시 73:28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하신 말씀이 더 나를 감사케 했다.

오! 주여

앞으로도 남은 평생을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게 하소서.

저는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따르겠나이다. 아- 멘

(주후 이천십일년 유월 둘째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