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4月 어느 날, 경남 김해에서 행복한 마을 교회라는 장애인 공동체를 세우고 사역하는 황봉화 목사님으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황 목사님, 우리교회에 불이 나서 홀랑타고 중증 장애인 두 명이 나오지 못하고 그만 불에 타 죽었소.’ 담담하게 말하는 것 같지만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고 있었다. 이어 TV와 신문에 보도되며 추측과 비난 섞인 말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KTX를 타고 밤중에 도착해보니 브로크 담만 조금 남긴 채 다 타버리고 시커먼 재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지난달에 전화를 걸어서 ‘황 목사님, 11월에 언제 시간이 납니까? 이제 복구공사가 거의 끝났으니 오셔서 입당 감사예배 설교를 좀 해주시오.’하는 것이었다.

그 동안 죽은 장애인들의 가족으로부터 배상 재판에 시달리며 또 구속과 기각으로 석방되는 등 우여 곡절이 많았고 또 어느 날은 복구 작업 中 지붕에서 떨어져서 허리가 부러져 한 달반이나 입원하고 있었는데 언제 공사를 다 마치고 입당예배를 드린단 말인가. 여러 가지 일이 많고 또 워낙 먼 곳이라 거절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으나 꼭 내가 설교를 해야 한다는 목사님의 강권 때문에 지난 목요일(18일)에 성도들의 운전 도움으로 행복한 마을 교회를 잘 다녀오게 되었다.

화재가 나기 전보다 더 튼튼하고 예쁘게 지어진 교회를 바라보며 내 마음이 아렸다. 이렇게 고생을 많이 한 목사님을 제대로 도와주지도 못하고 또 기도도 많이 해 주지도 못한 것이 너무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같은 것을 신뢰하여 주변의 훌륭하신 많은 분들이 있음에도 굳이 내게 설교를 부탁하는 목사님에게 너무 죄송하였다.

그 동안 행복한 마을 교회의 복구를 위해 물질로 기도로 동역한 많은 분들이 예배당 안을 가득 채웠다. 황목사님은 이 분들을 천사라고 불렀다.

사실 장애인 사역을 하다 이렇게 어려운 일을 당했으면 이 사역을 포기 할 만도 한데 목사님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이기 때문에 끝까지 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 간의 고난의 여정을 아는 나는 설교하면서 눈물이 쏟아질까봐 일부러 약간의 유머를 섞어가며 설교를 마치게 되었다.

나의 벗 황봉화 목사님, 당신의 딸다운이를 며느리로 주고 싶어서 본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내게 보내며 헌신하게 했던 그 마음도 내가 알고 있소.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오. 나 이제 두 번 미안하지 않게 하겠소.

오 주여!

행복한 마을 교회가 정말 행복하게 하소서.

우리 황봉화 목사님을 축복해 주옵소서.


(추후 이천십년 십일월 셋째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