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회복교회 부흥회 마지막 날 오전 집회를 마치고 숙소에서 쉬고 있는데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날, 장인의 위독소식을 듣고 아내와 함께 낮에 시간을 내어 병원에 도착해 보니 서서히 수명을 다 하시는 것 같아 가족과 함께 임종예배를 드린 후 저녁 집회를 위해 대전으로 올라와 전화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내는 울먹이며 내게 임종소식을 알렸다. “여보,당신부터 빨리 준비하고 내려가요. 그런데 나는 어떡하지? 내일 기드온 성경대학이 있는데.....” 하며 말끝을 흐리자 기가막힌지 아내는 ‘그럼 안 내려오겠다는 거냐’며 황당해 하였다.

순간 나는 나의 실수를 깨닫고 얼른 마무리를 하곤 저녁 마지막 집회를 마치고 장례식장인 김천의료원으로 향했다.

나의 장인어른은 1918년생으로 올해 우리나이로 93세이시다. 20代 초반에 부흥집회를 통해 지병을 치료받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곧바로 대구 성경고등학교와 조선신학교(現 한국신학대학교)를 마치고 목회자로서의 삶을 시작하여 70여년을 사시며 주의 일을 하셨다.

경북지역에 많은 교회를 세웠으며 부흥강사로서 많은 신유집회를 통해 영혼을 구원하였다.
6.25 동란후엔 김천역에 버려진 고아를 데려다가 보살펴 준게 계기가 되어 본격적으로 고아원을 차리게 되고 그 고아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중학교와 고등학교등을 설립하여 오늘날의 사학재단을 통해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며 믿음의 사람들을 길러 내었다.

거의 일세기를 사시며 주의 일을 통해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하신 장인어른께서는 가족과 자녀들에게 아픔도 주셨지만 대체적으로 지역사회의 발전 공로자로 인정받아 정말 많은 조문객들이 조화와 조문을 해 주셔서 장례기간동안 얼마나 감사하고 기뻤는지 모른다.

특히 내 주변의 많은 목사님들이 장인의 장례식에 조문을 와 주시고 사랑스런 수지산성가족들이 먼길 마다하지 않고 밤늦게까지 조문을 해 주어서 목회자로서 많은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하관예배를 마치고 선중전도사와 하산하면서 “나중에 아버지가 천국간 후에 이렇게 감사예배를 드려라“고 했더니‘아이, 아버지는 아직 멀으셨는데요, 뭘’.사람의 한 평생의 공과가 장례식때 드러난다고 한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난후 나의 후손들과 사랑스런 수지산성가족들에게 기쁨과 자랑이 될 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다시한번 새기게 하는 장인 어른의 장례식이었다.

오! 주여

끝까지 바르게 살게 하소서

오직 주의 뜻대로 ............ (주후 이천십년 유월 둘째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