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데오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1884-1920)

 

 

35세란 젊은 나이에 폐병으로 비극적인 인생을 마감한  모딜리아니를 따라 오층에서 몸을 던져 자살한 만삭의 임신부 잔느 에뷰테른 (Jeanne Hebuterne)의 순애보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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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파에 앉은 누드(Nu assis sur un divan) 1917

2010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6천900만달러(한화 약 765억원)에 팔림

 

모딜리아니가 죽기 삼년 전인 1917년, 파리에서 닭 한마리도 10 프랑에 팔렸다는데 모딜리아니의 드로잉은 5프랑에 팔렸다. 밥값 대신 그림을 받은 어느 음식점 주인이 화가 나서 모딜리아니의 그림에 국수가락을 내던졌다고 할 만큼 그의 그림은 과소평가 되고 있었다.

 

가난에 쪼들린 그의 말로는 죽기 전에 애인 잔느가 병원에 데리고 갈 수도 없을 만큼 비참했던 것도 사실이었다.그러나 그가 죽은 지 이틀 후 그의 그림값은 갑자기 뛰어올라 15년만에 오십만 프랑이 되었고, 오늘날에 이르러 그의 그림은 몇 천만 불을 주어도 구하기 힘들게 되었다.

 

비극적인 35년간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그는 개성이 확실한 작품을 비교적 많이 남겼다. 항간에서는 누드 화가로 구설수에 오를 만큼 유명했지만, 그보다는 참신한 멋의 초상화가로 보는 것이 올바른 평가이다. 그의 누드가 애호를 받는 것은 탄력있는 여성의 육체 때문이라기 보다는 개성이 확실한 얼굴 표정 때문이다.

 

외롭고 고단한 파리의 보헤미안, 모딜리아니는 몽마르트에서의 삶은 보헤미안 그 자체였다. 돈이 없는 데다 그림마저 팔리지 않아 호텔에서나 하숙집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그림을 전당잡히다 번번히 쫓겨났으며, 때로는 몰래 빠져나가 집을 옮기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 때의 그의 그림은 희귀하다. 파리에서의 삶은 외로움과 고단함의 연속이었다.

 

첫번째 연인 베아트리체와 헤어진 1916년과 부인 잔느 에뷰테른을 만나게 되는 1917년 사이에 모디는 그의 걸작 누드화에 나오는 많은 모델들을 만난다. 그의 모델들은 가수와 댄서, 젖짜는 시골 처녀들 같은 건강한 여인들이었다. 이미 건강을 잃고 죽음에 다가가던 그는 건강과 생기가 넘치는 젊은 육체의 윤기와 탄력성과 매력을 흠모하면서 누드를 그렸음에 틀림없다. 여하튼 이 때에 그린 그의 누드는 미술사상 걸작들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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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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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tzender Akt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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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 Hebuterne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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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nding nude- elvira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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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 of Mario Varvogli  19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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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Portrait  1919

 

모딜리아니의 장례식은 비참한 그의 생애에 비해 무척이나 화려했다. 온통 꽃에 파묻힌 그의 관이 실린 영구차의 뒤에는 파리의 유명한 모든 화가들이 뒤를 따랐다. 피카소, 데리앵, 우틸로, 작크 립시츠, 키슬링, 올티즈, 자라데, 부랑빙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화가들이 페르 라쉐즈 묘지로 가는 슬픈 행렬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