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활동년도 : 1475~1564
작가소개 : 이탈리아 조각가·화가·건축가·시인. 천재란 신이부여한 영감, 즉 극소수의 개인에게 부여되어 이사람을 통하여 작용하는 초인간적인힘이라는개념이 미캘란젤로 의 생에나 그의 제작활동만큼적용되는경우는 드물다. 회화란 눈에보이는 모든세게의 모두를 포착할수있는까닭에 예술가운데서 가장고귀한 것이라고 여겼던 다빈치와는달리, 미켈란젤로는 철저한 조각가였으며,예술은 과학이 아니라 인간의 창조활동이요, 신적인창조와 유사한 것이었다. 인간이야말로 최고의 매체라고 믿는 그는 누구보다도 고전에 관심이 많았다. 1475년 아버지 로도비코와 어머니 프란체스카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어린시절 친구로 부터 입은 코의 상처가 그를 평생 독신으로 살게한 동기가 되었을 정도로 편협하고 외곬수적이었으나 자신의 생김새에 대한 열등감으로 오히려 아름다운 인체를 생명력이 넘치게 표출해 내는데 정열을 쏟아부었다. 피렌체의 경찰서장이었던 아버지는 다섯 명의 자식들이 실업계 학교에 들어가 은행가가 됐으면 하고 생각했었지만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는 미켈란젤로는 아버지의 회초리를 얻어맞으면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부친은 그들 가문에서 예술가가 나온다는 것을 가문의 수치라 여겼기 때문에 못마땅해 했다. 미켈란제로는 어머니가 병들었기 때문에 태어나자 곧 피렌체 교외에 있는 한 석공의 집으로 가서 양육되었다. 여기서 그는 유모의 젖과 함께 대리석 가루도 먹게 되었다. 어머니가 죽자 그는 피렌체 정부의 고관이었던 아버지한테 가게 되었다. 미켈란젤로는 말년에 이 때를 "작은 망치와 벼룩에 대해서 흥미를 가졌던 시기였다."라고 회상하고있다. 그곳에서도 닥치는 대로 그림을 그렸는데 심지어 그 석공의 집 벽 전체에 스케치를 해 엉망으로 만든 적도 있다고 한다

10세때 피렌체 시내 프란체스코 울비노 학교에 들어가나 학교 공부보다 지옷토나 마사치오 그림을 모방해 스케치하는 것을 좋아했다. 13살때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의 도메니코 기를란다이오 문하에서 3년간 도제 수업을 받았다. 기를란디오는 그 당시의 부유한 피렌체 시민 계급의 생활을 명쾌하고도 매력적으로 표현해준 화가이다. 그의 화실에서 미켈란젤로는 화가로서 갖추어야할 일반적인 교양과 기법을 특히 프레스코벽화의 확고한 기초를 쌓았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도 손꼽히는 화가였던 기를란다요는 제작을 의뢰 받았던 교회 벽화의 밑그림 일부를 미켈란젤로에게 그리도록 시켰다. 얼마 후 완성된 그림은 원화(原畵)보다도 훨씬 훌륭한 그림이었다. 그것을 본 기를란다요는 아직 어린 미켈란젤로에게 질투를 느낄 정도였다고 한다.이듬해 1489년부터 당시 피렌체시의 권력자인 메디치가가 세운 조각학교에서 도나텔로 제자인 조각가 베르토르도 디 조반니(Bertoldo di Giovanni:1420?∼91)에게로 옮겨 도나텔로의 작품을 배우면서, 14세 때부터 메디치가문의 보호를 받으며 메디치가(家)의 고대 조각을 연구하였다. 그 이후로 조각에 전념, 조각가로서의 자각을 일생동안 계속 지니게 되었다. 피렌체의 조각가 도나텔로와 고대조각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 때 로렌초 일 마니피코(Lorenzo il Magnifico:1449∼92)에게 인정받아, 그의 집에서 체류하게 되어, 인문 학자들과도 접촉, 고전문학이나 신구약 성서를 탐독함과 동시에, 조각을 위한 인체의 근육 구조를 알기 위해서 생트 스피리트 성당에 있는 시체 보관소에 가서 인체 해부학도 배웠다. 블랑카치성당 마사초의 벽화 앞에서 토레지아니와 논쟁하다가 코뼈가 부러진 것도 그 때의 일이며, 이때의 작품으로는 피렌체의 카사 보나로티에 남아 있는 도나텔로풍의 《스칼라의 성모》와 고전적 격조를 보인 《켄타우로스족과 라피타이족의 싸움》의 부조(浮彫)가 있다.

도미니쿠스회의수도사 사나볼롤라의 열광적인 설교에 감동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496년, 21세에 로마에 가서 《디오니소스》 《피에타》를 제작하였다. 이 《피에타》는 성모의 가슴에 걸친 어깨띠에 미켈란젤로의 서명을 남긴 유일한 작품이다.1492년 메디치가의 로렌초가 죽은 후, 프랑스군이 침입하자 볼로냐로 피난, 거기서 J.d.퀘르치아의 조각도 배웠다. 96년 로마로 나올 기회를 얻어 고전 예술에 접촉, 조상 《바쿠스》(피렌체 바르젤로미술관 소장)를 제작, 바티칸의 산 피에트로대성당에 있는 《피에타:Pieta》를 프랑스 추기경의 의뢰로 완성한 것은 99년경이다. 1501년 피렌체로 돌아와서 26세의 젊은 나이로 시당국의 위촉을 받고 《다비드》 제작에 착수, 3년반 정도 걸려서 완성하였다. 이 《다비드》 상은 팔라초 베키오 앞에 놓여져 당시의 자치도시 피렌체의 상징이 되었다. 톤도라고 불리는 2개의 원형부조(圓形浮彫) 《피티의 성모자(聖母子)》 《타디의 성모자》도 거의 같은 시기에 제작한 겻이다.

미켈란젤로가 교황으로부터 율리우스 2세의 묘당 제작을 의뢰받은 것은 1505년 30세 때이다. 당초의 계획에 의하면 묘당(廟堂)은 7.6m視11.3m의 직사각형 대좌(臺座) 위에 설치하고 거기에 등신대(等身大) 이상의 조상(彫像) 40체를 놓아 성베드로대성당 안에 안치시키려는 웅대한 구상이었다. 《빈사(瀕死)의 노예》 《반항하는 노예》 《승리》 《젊은 노예》 《수염을 기른 노예》 《아틀라스의 노예》 《잠을 깬 노예》 등은 묘당을 장식하기 위해서 제작된 것이다. 묘당 하단의 중앙에 《모세》, 왼쪽에 《라헬》, 오른쪽에 《레아》를 두었는데 모두 그의 손으로 제작된 조상이다

20년 45세 때에는 메디치가의 선조의 위패를 모신 산 로렌초성당의 새 성기실(聖器室)에 메디치가의 묘당 제작을 의뢰받게 되었다. 메디치의 묘는 새 성기실의 제단으로 향하여 왼쪽에 로렌초(우르비노공작), 오른쪽에 줄리아노(누므레공작)의 조상 및 석관이 놓여 있고 각 석관 위에 각기 2체의 우의상(寓意像)이 놓여 있다. 즉 로렌초의 석관에는 《새벽》과 《저녁》, 줄리아노에는 《낮》과 《밤》의 몸길이 2m의 조상이 놓여 있다.

또 제단 맞은편에는 《성모자》가 세워져 있다. 미켈란젤로는 젊은 시절부터 피에타상 제작에 집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앞서 말한 성베드로대성당의 《피에타》 외에 피렌체대성당의 《피에타》, 밀라노 스포르차성 미술관의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남겼다. 피렌체의 《피에타》는 75세 무렵 제작한 것인데 중도에서 포기했기 때문에 후에 제자의 손에 의해 오늘날의 상태로 완성되었다. 따라서 좌단의 막달라 마리아는 비례를 잃고 있다. 뒤쪽 중앙의 니고데모의 얼굴은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이라고 한다.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죽음을 앞둔 6일 전까지 끌을 휘둘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미완의 조상으로서 손질이 되어 있는 예수의 두 다리와 왼쪽 허리, 떨어진 위치에 남겨져 있는 오른쪽 팔은 당초 계획에 의한 제작일 것이다. 이 피에타의 조상은 이례적인 것으로 죽은 예수가 살아 있는 마리아를 업고 서 있는 포즈인데 거장의 만년의 신앙·예술·철학이 결정(結晶)된 지고한 경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1504년 피렌체 시청에《카시나의 싸움:Battle of Cascina》의 벽화를 의뢰받아, 건너편 벽면에 안기리의 기마전》을 그리게되어 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경쟁하였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이듬해 율리우스 2세에게 불려 로마로 가서, 그 기념 묘비를 만들게 되었다. 그런데 브라만테가 산 피에트로대성당의 개축에 착수한 이래, 율리우스 2세가 냉담해지자, 이에 성이 난 그는 피렌체로 돌아와 다시《카시나의 싸움》제작에 전념하였다.

1506년 레오나르도도 화고(畵稿)를 완성, 벽화를 착수하였으나, 쌍방모두 진전이 없던 중에 중단되고 말았다. 지금은 화고도 없어지고, 모사화(模寫畵)가 남아 있을 뿐이다. 1506년 말 미켈란젤로는 다시 율리우스 2세에게 불려가, 볼로냐에서 화해하고, 1508년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화(天障畵)를 위촉받았다. 프레스코 기법에 익숙하지 않았고 또한 고개를 젖히고 천장에 다 그리는 힘든 작업이므로 그는 육친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벽화를 그리는> 고충을 호소하였다. 벽화에는 경험이 없다고 사퇴하였으나, 허용되지 않아 적대자 브라만테의 간계를 물리치면서 제작을 시작하였다. 교황청 건축가이며 화가인 브라만테가 미켈란젤로를 시기하여 그를 실각시키기 위해서 꾸며낸 연극이었던 것이다. 브라만테는 예배당에 높은 발판을 만들어 놓고 조수 몇 사람까지 대기시켜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그림에 전혀 자신이 없지도 않았다. 그러나 벽에 수성 안료를 써서 재빨리 그려야 하는 프레스코 화법을 아직 경험하지 못하고 있었다. 원래 조각가인 그는 그림이나 건축에 손을 대지 않아도 되었으나, 그는 무엇이든지 스스로 해 보겠다는 의지가 있었던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산 시대는 그러한 경향이 짙게 나타난 시대였다.

그 천장화에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이 343명이나 그려져 있었다. 더구나 그 크기는 실제 인간보다 세 배는 컸다. 그림을 끝냈을 때 그의 얼굴은 천장에서 떨어진 물감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또 위만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고개가 저절로 치켜지고, 땅을 걷기가 힘들었으며 책을 읽을 때는 책을 머리 위로 가져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은 진척되지 않고, 보수도 지불되지 않고, 형제들로부터는 금전을 강요당하고, 교황과도 충돌하는 악조건하에서 12년에 마침내 완성하였다. 천장화의 천지창조로 시작되는 9장면(나비 13m, 길이 40m)은 33세인 1508년부터 약 3년, 또 정면의 《최후의 심판》 장면(약 14.5m視13m)은 약 30년 후 바오로 3세의 위촉으로 36년부터 41년까지 5년 반의 세월이 걸려 그려진 것이다. 거인과 같은 <노한 그리스도>가 중앙에 군림하는 최종심판도에서는 여러 성자 외에 구원받은 영혼, 벌받은 영혼이 전부 400명 가까이 그려져 있다. 왼쪽의 천국에 오르는 영혼과 오른쪽의 지옥에 떨어지는 영혼의, 크게 회전하는 군상의 동적 구도와 동적 표현은 르네상스의 고전양식의 해체와 격정적인 바로크양식에의 추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 밖의 벽화에는 바티칸의 파올리나성당의 《바울의 개종(1545?)》과 《성 베드로의 책형》이 있다.

또 1504∼1506년경의 템페라에 의한 원형화(圓形畵) 《성가족(聖家族)》은 면밀한 구도상의 배려와 정성들인 묘사에 특히 주목해야 할 작품이다.《천지 창조》 《인간의 타락》 《노아 이야기》의 3장 9화면을 구약 내용의 순서와는 반대로 그리기 시작, 그 화면 사이에 예언자나 천사(天使)나 역사(力士)를 배치하고, 복잡한 모습을 부여하여, 묘사된 대리석상 같은 인간군상을 부각하였다. 1520년 피렌체의 메디치가 묘묘(廟墓)의 제작을 의뢰받아, 24년에 착수, 10년간이나 걸렸으나 끝내 미완성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 묘묘를 구성하는 로렌초와 줄리아노의 조상과 그 각각의 아래의 관(棺)에 누워 있는 《아침》 《저녁》 《낮》 《밤》의 네 우의상(寓意像), 그 중 《저녁》과 《낮》의 두 남성상(미완성)과 《성모자상》(미완성)은 르네상스 조각의 걸작으로 꼽힌다. 그 사이 산 로렌초성당 부속의 라우렌치아나도서관의 건축에 종사하였고, 29년에는 독일의 칼 5세군(軍)의 피렌체 포위를 맞아, 방위위원으로서 축성에도 임하였다. 그 후 메디치가(家)의 전제군주 알렉산드로와 반목하여, 메디치가 묘묘를 미완성의 상태로 둔 채 34년에 피렌체와 영원히 결별하여 로마로 옮겼다. 그 해 새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시스티나성당의 안쪽 벽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고 다음 해부터 혼자 착수, 고생 끝에 6년 후인 41년에 《최후의 심판:Last Judgment》을 완성하였다. 그리스도가 ‘성난 그리스도’로서 거인처럼 군림하여, 천국에 오르는 자와 지옥으로 떨어지는 자가 좌우로 크게 회전하는 군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 구도(構圖)와 동적 표현은 르네상스의 고전 양식을 해체하여 격정적인 바로크 양식에의 추이(推移)를 보였다. 그 제작 중, 독신이었던 그가 교양 높은 페스카라공(公) 미망인 비토리아 코론나를 알게 되어 영혼의 위로를 받게 된 것은 유명한 에피소드인데, 이 부인도 타계하여, 그는 다시 고독해졌다. 42년에는 바티칸궁의 파올리나성당의 장식도 위촉받아 《바울로의 개종》과 《베드로의 책형(刑)》을 50년에 완성하였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캄피돌리오 광장을 설계하기도 하고, 파라초 파르네제의 건축에 종사하기도 하는 등 끊임없이 활동하여, 47년에는 산 피에트로대성당의 조영 주임이 되어 57년 대원개(大圓蓋)의 목제 모델을 완성하였다. 그 사이에도 《피에타:Pieta》의 군상을 3체(體)(피렌체 대성당, 팔레스토리나, 론다니니)나 만들었고, 어느 것이나 미완성으로 끝나기는 하였지만, 힘 없이 쓰러지는 그리스도를 성모들이 슬피 부축하는 군상의 생생한 끌 자국에는 끝없는 고뇌의 영혼이 영원의 휴식을 추구하는 것 같은 그의 만년의 심경이 엿보여 비장하기까지 하다. 메디치가(家)나 교황에의 봉사를 끝없이 요구당하면서도 언제나 자유와 정의를 추구하여 싸운 그의 괴로운 심경은 남겨진 편지와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조각작품 약 40점, 회화로는 4면의 대벽화 외에 약간의 타블로, 건축에서는 교회와 기념건축물 등의 설계와 장식을 남겼고 또 회화·조각·건축에 관한 습작·소묘·에스키스 등 약 800점이 세게 각지에 분산하여 전해지고 있다. 그의 예술은 모두 이와 같은 인생의 고뇌와 사회의 부정과 대결한 분개와 우울과 신앙의 미적 형상화이며, 더욱이 그것은 초인적인 억센 제작력에 의해 달성된 것이다. 그 무렵 로마에도 동란이 일어나, 고향 피렌체에의 향수에 젖으면서, 병을 얻어 르네상스로부터 초기 바로크에 이르는 89세의 오랜 예술적 1564년 2월18일 미켈란젤로는 뇌일혈로 생애를 마쳤다. 그는 죽기 이틀 전 플로렌스에 묻히기를 원하였기에, 로마의 성 아포스톨리 교회에서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른 후 플로렌스로 가서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에 안치되었다. 미켈란젤로가 노린 것은 조화라기보다는 오히려힘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르네상스의 대표 작가이면서 동시에 시대를 넘어 바로크로 통하는길을 제시한 선구자였던 미켈란젤로



작품명 : 최후의심판
제작년도 : 1537~41
작품재료 : 프레스코화
작품크기 : 137cm*122cm
소장위치 : 바티칸궁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 부분
작품설명 : 한 팔을 들고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군림한 심판자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천상(天上)과 지옥(地獄)의 세계가 함께하는 거대한 공간과 그 속의 군상이 전개되고 있다.

그 규모는 자그만치 2백 평방의 벽에 391인의 인물이 그려져 있는 그런 것이다. 이전의 어느 심판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규모와 구상이다.

이 일을 위촉한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사망했지만 누구보다 미켈란젤로의 특성을 잘 이해하는 파울러스(Paulus 3세)가교황이 되고 나서 새로 의뢰하여(1534년), 그는 더 없는 제작에의 의욕을 불어넣을 수가 있었다. 이때는 또 개혁적 정신주의자 비토리아(Vittoria Colona)를 사귀게 된 시절이라 행복하던 때이기도 하다. 당초의 계획은 제단 벽의 이 최후의 심판과 아울러 입구 벽에 장식할 <루치퍼(Luzifer)의 추락>이 들어 있었으나, 다음 제작할 파올리나 예배당 일로 그를 데려가 버려서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작품명 : 아담의창조
제작년도 : 1508∼12
작품재료 : 프레스코
작품크기 : 280x570cm
소장위치 : 바티칸궁 시스티나 예배당
작품설명 : 시스틴 성당 천장화는 모두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주제들로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작품들이다. 자연의 실제 세계가 아닌, 미켈란젤로가 만들어낸 이상적인 세계가 재현된 벽화들 중에서 <아담의 창조>는 가장 뛰어난 상상력이 발휘되어졌다.

하늘로부터 강렬하게 돌진하는 하나님은 아기 천사들에 둘러싸인 이브를 옆에 끼고, 아담을 향해 검지손가락을 뻗고 있다. 대지에 밀착된 아담은 하나님을 향해 몸을 내밀고 있지만, 아직 태어나지 않아 신의 보호를 받고 있는 이브를 보며 묘한 슬픈 표정을 짓는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설정은 아담의 표정과 육체와 영혼을 부여하는 신의 강렬한 눈빛으로 가늠할 수 있게 된다. 몸이 반쯤 세워진 아담이 하나님에게 생명의 힘을 전해 받으며 짓는 표정에는, 앞으로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어 고통스런 현실 공간으로 떨어지게 됨이 어렴풋이 암시되어 있다. 하나님이 취하고 있는 역동성과 신비함은 아담과의 절묘한 대비로,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절대적 존재로 표현되어 있다.

<아담의 창조>는 성당 입구에서 출발하여 구약 이야기가 전개되는 중간 지점에 그려져 있다. 이는 인간과 신이 함께 표현되는 양식을 과감하게 창조적으로 표현하면서,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든 하나님의 창조적 힘과 인간이 만들어지는 감동적인 순간을 뛰어나게 형상화시킨 작품이다



작품명 : 천지창조
제작년도 : 1508∼12
작품재료 : 프레스코
작품크기 : 280x570cm
소장위치 : 바티칸궁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벽화
작품설명 : 시스틴 천장 벽화를 구성하는 창세기 이야기들은 성당 제단 쪽에서 시작해 입구 쪽으로 주제별로 전개되고 있다. 이 작품은 벽화들 중 가운데 부분에 해당하는 그림에 속하며, 나체상을 뜻하는 4명의 이그누디(Ignudo)를 작은 형태와 큰 형태 교대로 배열하면서 펼쳐진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19절에 해당되는 이야기, 즉 해와 달, 별, 식물을 창조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 이는 내용상으로 두 번째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밝은 빛을 품고 해와 달, 별을 창조하는 역동적이며 힘있는 하나님의 비상하는 모습과 더불어, 식물을 창조하는 하나님이 저 멀리 등을 보이며 사라지는 모습이 한 벽화 안에 그려져 있다.

구약에 등장하는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두려우면서도 경이로운 존경심을 함께 불러일으키는 절대적 존재이다. 이 그림 뒤에 나오는 <아담의 창조>에서도 하나님은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거리를 두면서 강력한 추진력으로 이 세계를 창조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미켈란젤로의 이 천장 벽화에는 여느 화가들이 감히 시도하지 못했던 "하나님"이라는 신의 존재를 뛰어난 상상력과 필치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여기서는 입구 쪽의 벽화 <술 취한 노아> 장면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실내 장면이 천지창조가 이루어지는 외부 공간으로 바뀌고, 장엄하게 이루어지는 천지창조의 순간들이 성스러운 예배당이라는 공간에 역동적으로 넘치고 있다.



작품명 : 에리트레아의 무녀
제작년도 : 1509
작품재료 : 프레스코화
작품크기 : 360*380cm
소장위치 : 바티칸궁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
작품설명 : 노아의 이야기를 둘러싼 선지자 그룹, 즉 입구에 가까운 위치에 있는 이 <에리트레아의 巫女>는 이사야와 마주하는 비교적 정적인 표현 세계에 속하고 있다.

미켈란젤로에게서는 육체와 영혼의 표현상의 균열이나, 도상(圖像)내용과 표현 형태 사이의 일치의 초극이라 는 문제가 그의 중요한 한 특징을 이루고 있다. 그런 면의 한 경우를 이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최후의 심판을 말한 에리트레아의 무녀가 비록 책장을 넘기면 서 무시하는 모습에 그의 그 놀랍고도 엄숙한 예언의 기미를 담고 있다고도 하겠으나, 역시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인체의 움직임이 그다지 크지 않은 조용 함이라 하겠다.

뒤의 기대의 박공을 떠메고 있는 장식 조각의 푸토(putto)들이 입구 위의 예언자 군에서 보는 바와 같은 정면성을 넘어서 사선으로 움 직이고, 그에 못지 않는 배경의 어린이의 움직이는 포즈도 이를 깨뜨리지는 않는다.



작품명 : 최후의 심판(부분1)
제작년도 : 1537~41
작품재료 : 프레스코
작품크기 : 137*122cm
소장위치 : 바티칸궁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
작품설명 : 한 팔을 들고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군림한 심판자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천상(天上)과 지옥(地獄)의 세계가 함께 하는 거대한 공간과 그 속의 군상이 전개되고 있다. 그 규모는 자그만치 2백 평방의 벽에 391인의 인물이 그려져 있는 그런 것이다. 이전의 어느 심판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규모와 구상이다. 이 일을 위촉한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사망했지만 누구보다 미켈란젤로의 특성을 잘 이해하는 파울러스(Paulus 3세)가 교황이 되고 나서 새로 의뢰하여(1534년), 그는 더 없는 제작에의 의욕을 불어넣을 수가 있었다. 이때는 또 개혁적 정신주의자 비토리아(Vittoria Colona)를 사귀게 된 시절이라 행복하던 때이기도 하다. 당초의 계획은 제단 벽의 이 최후의 심판과 아울러 입구 벽에 장식할 <루치퍼(Luzifer)의 추락>이 들어 있었으나, 다음 제작할 파올리나 예배당 일로 그를 데려가 버려서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작품명 : 노아의 만취
제작년도 : 1509
작품재료 : 프레스코
작품크기 : 170*260cm
소장위치 : 바티칸궁 시스티나 예배당
작품설명 : '방주에서 돌아온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 셈과 야벳에게 고하매 이들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 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 였더라-'는 창세기 9장의 이야기 내용이 하나의 화면에 동시에 묘사되었다.

커다란 포도주 통이 놓여 있는 막사 안에 취해 있는 노아와 그 앞에 세 아들이 서 있고, 밖에는 '씨를 뿌리고 거두어 들이는 일에, 덥고 춥거나, 여름이나 겨울이나, 낮과 밤을 끊이지 않는' 농사를 짓는 노아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림 네 귀퉁이에는 다름 아닌 4계절의 의인상(擬人像)이 그 의미의 내용에 일치시키고 있다. 봄(右下), 여름(右上), 가을(左下), 겨울(左上).



작품명 : 빛과 어둠의 창조
제작년도 : 1509
작품재료 : 프레스코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바티칸궁 시스티나 예배당
작품설명 : 천정화 중간축(中間軸)의 마지막에 해당되며, 구약성서 순서로는 첫째 장면이 되는 이 그림의 장면은 바로 창세기 1장 45절에 해당되는 하나님의 빛과 어둠의 창조 내용이다. '-하나님의 빛과 어둠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고 어둠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이 내용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담홍색의 옷에 싸인 신령이 두 팔을 들고 위를 쳐다보며 빛과 어둠을 만들고 있는 것이 그려져 있다. 이 가운데의 그림 내용에 일치하고 있는 듯이 사방 귀퉁이에 낮(右下), 아침(右上), 저녁(左上), 밤(左下)을 나타 내는 것으로 보이는 의인상(擬人像)이 있고, 그 각각 한 쌍씩이 끈으로 메다이용에 연결되어 있다. 미켈란젤로는, 한쪽 팔을 머리 뒤로 가져가서 몸을 옆으로 틀고 있는 <아침>의 상에서 잘 나타나 있는 것처럼 정신적인 상태를 육체적으로 표출할 때 많은 움직임도 보인다.



작품명 : 예레미야
제작년도 : ***
작품재료 : 프레스코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바티칸궁 시스티나 예배당
작품설명 :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미래에의 희망을 강조하면서 살던 선지자 예레미야가 무녀(巫女) 리비아 맞은 편에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앞선 무녀와는 대조적으로 조용히, 그리고 생각에 잠긴, 정적인 포즈를 하고 있는 노인상(老人像)이다. 미켈란젤로는 이 그림에서와 같이 시스티나 천정화에서 여러 가지의 독자적인 해석과 조형적인 표현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그 규모와 작업의 범위는 어마어마한 것으로, 범인(凡人)들의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은 그 하나하나의 그림의 내용과 도상(圖像)과 그들이 전하는 사상을, 특유한 인간과 인체의 표현으로 매개하면서, 한편 전체의 구성에 대한 그 나름의 리듬에 한 몫을 담당시키고 있다. 여기에는 물론 형태의 표현만이 아닌 특유의 미적 색채감을 남기고 있다.



작품명 : 델포이의무녀
제작년도 : ***
작품재료 : 프레스코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바티칸궁 시스티나 예배당
작품설명 : <빛과 어둠의 창조>에서 노아의 이야기들에 이르기까지 9구분으로 된 구약성서 내용의 천정 중심 화면 전 후 좌우에 12체의 선지자, 그리고 무녀가 그 아래 건축적인 틀에 억눌려 있는 그리스도의 선조 그림들보다 훨씬 위풍있게 그려졌다. 그런 예언자의 위치는 입구 바로 위에 있는 선지자 자카리아(Zaccaria)를 비롯하여 첫째 그림, <노아의 만취>를 두고 왼쪽에 <델포이 의 무녀>와 오른쪽에 <선지자 요엘(Gioele)>, 그 다음의 삼각 벽면을 건너서, <노아의 번제>를 두고 왼쪽에 선지자 이사야와 오른쪽의 에리트레아의 무녀와 <에바의 창조> 그림을 두고, 구마의 무녀와 선지자 에제키엘, <하늘과 물의 분리>를 두고, 선지자 다니엘과 페르시카의 무녀, <빛과 어둠의 분리>를 두고, 리비아의 무녀와 선지자 예레미야, 그리고 제단 바로 위에 선지자 요나가 위치하게 된다. <델포이의 무녀>는 후반 이후의 표현이 전체적으로 대담해지고 커지는데 반하여, 균형이 잘 잡힌, 전반의 그림 중에서도 돋보이는 것이다.



작품명 : 리비아의 무녀
제작년도 : ***
작품재료 : 프레스코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바티칸궁 시스티나 예배당
작품설명 : 고대의 여자 예언자격인 시빌라(Sibylla)라는 무녀(巫女)들은 열 명 정도가 세계 여러 곳에 살면서 앞으로 닥쳐올 일을 말하였던 것으로, 후에 와서 그리스도나 그의 가르침에 관한 예언으로도 가끔 인용되었다. 여기서는 남자 예언자와 함께 등장하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이 예언자 연작에서 다른 부분과는 구별되게, 대개가 책이나 종이 두루마리를 펴고 있거나 들고 있는 포즈를 취하게 함으로써 그 부분의 특성을 뚜렷이 보이고 있다. 여기서도 '그때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모든 일들을 기록한 책을 내놓을 것이다.' 커다란 책을 두 손으로 들고 뒤에서 옆으로의 움직임의 공간을 예상케 하는 이 리비아의 무녀의 그림에서 앞의 예언자 상에서는 볼 수 없는, 격렬한 움직임의 '요나'에 가까운 커다란 움직임의 자태를 찾아볼 수 있다. 그가 남긴 이 그림을 위한 습작에는 남성상(男性像)의 데생이 돋보인다.



작품명 : 천체의 창조
제작년도 : ***
작품재료 : 프레스코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바티칸궁 시스티나 예배당
작품설명 : 미켈란젤로는 이 천정화의 가운데 축에 해당하는 그림의 구분에 4체의 나체상<이뉴도(Ignudo)>이 있는 작은 형태의 것과 그것이 없는 큰 형태의 경우를 교대로 배열하면서 예배당 안쪽에서부터 내용의 순서가 시작되어 입구에서 끝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내용상으로 두 번째에 해당하는 이것이 달과 해를 창조하고 식물을 창조하는 창세기 1장 1절에서 19절까지의 이야기가 되겠다. 밝음을 안고 달과 해를 창조하는, 역동감에 넘친 성난 표정의 하나님의 비상하는 모습과, 식물을 창조하는 하나님이 등을 보이며 사라지는 모습이 한 장면 안에 동시적으로 그려져 있다. 여기서는 입구 쪽의 노아의 장면에서 보는 바와 같은 실내 장면이 외부 공간으로 바뀌고 그 표현은 여기에서 그 절정을 맞이하는 역동감(力動感)이 넘치는 공간감(空間感)에 가득 차 있다.



작품명 : 이브의 창조
제작년도 : ***
작품재료 : 프레스코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바티칸궁 시스티나 예배당
작품설명 :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창세기 2-21, 23). 커다란 망토에 둘러싸인 하나님은 오른손을 들어 그야말로 나무 밑에 자고 있는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오는 듯한 이브를 바라보고 있다. 이 그림에서 그가 볼로냐(Bologna)에서 본, 그가 많은 영향을 받은 쿠엘치아(Gacopo della Querciar)의 힘찬 구약성서 부조와의 유사점을 지적받기도 한다. 주위의 나체상은 인체 속에 흐르는 네 가지의 액체 내지 네 가지의 인간의 기본 성격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혈액으로서의 다혈질(右下), 황담즙으로서의 담즙질(右上), 점액으로서의 점액질(左下), 흑 담즙으로서의 우울질(左上) 등으로 지적된다.



작품명 : 원죄
제작년도 : ***
작품재료 : 프레스코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바티칸궁 시스티나 예배당
작품설명 : 여기서는 두 가지의 장면이 동일화면에 나타나고 있다. 중앙의 지혜의 나무를 중심으로, 왼쪽은 나무를 감고 있는 뱀에 유혹되어 이브와 함께 나무 열매를 따려는 아담, 오른쪽에는 천사에 의하여 낙원에서 추방되는 두 남녀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그려져 있다. 거기에 열매를 따려는 아담의 뻗은 파로가 유혹하는 뱀의 팔, 그리고 천사의 검 (劍)을 피하려는 아담의 뻗은 팔에서 다시 양 면(面)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서 얻은 균 제감과 나무를 이중(二重)으로 감고 있는 여자 얼굴의 뱀과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는 천사로 두 부분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오른편의 추방당하는 아담과 이브는 브란카시(Brancasi) 예배당의, 울면서 쫓겨나는 마사치오(Masaccio)의 같은 주제의 상을 방불케 하는 바 없지 않다. 그러나, 젊은 시절 흠모하던 이 작가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깊은 감정이 흐르고 있다.



작품명 : 요나
제작년도 : ***
작품재료 : 프레스코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바티칸궁 시스티나 예배당
작품설명 : 천정화의 입구에 위치한 선지자 자카리아(Zaccaria)와 마주 보며, 안쪽 제단 위의 중요한 벽면에 차지하고 있는 것이 <요나>이다. 조용하고 균형이 잡힌 전자의 그림들이 보여주는 표현의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몸을 뒤로 젖히고 심한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다. 뒷배경의 유동성도 이에 호응하여 한층 더 고조되는 공간을 낳게 한다. 요나는 큰 물고기에게 먹혀 하나님에게 기도 한 결과 3일 만에 그것에서 토해 내어졌다. 그런 뜻에서 부활의 상징이 덧붙기도 한다. 커다란 입의 물고기가 요나 옆에 보인다. 이와 같이 12체의 선지자와 무녀(巫女)의 배치라는 구성이 타에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거소가 마찬가지로, 이들 선지자 내지 무녀를 그리는데서 보여주는 미켈란젤로의 해석이나 의미 부여도 독자적인 데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요나가 있는 천정에 붙은 벽에 바로 최후의 심판 그림이 위치한다.



작품명 : 에제치엘
제작년도 : 1510
작품재료 : 프레스코
작품크기 : 355X380Cm
소장위치 : 바티칸궁 시스티나 예배당 천정 부분
작품설명 :



작품명 : 이사야
제작년도 : ***
작품재료 : 프레스코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바티칸궁 시스티나 예배당 천정 부분
작품설명 : 메시아를 기다린 선지자 이사야가 정면을 향해 옆을 내려다보면서 앉아 있는 데서 드러난다. 직각에 가까운 팔과 다리의 포즈는 등뒤로 둥글게 윤곽을 주는 망토의 곡선과 함께 이 천정 벽황서 미켈란제로가 여러 번 시도하던 경향으로, 여기서도 반영시키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이 가만히 앉아 있는 좌상에서도 주로 그 포즈나 형태감의 흐름에서 정적인 고전주의를 초극하고 있다. 그런 예를 이 천정화에서는 수없이 헤아린다. 조각가인 그가 그림 세계에서 보여주는 조상적(彫像的)인 것 속에서 나타내고 있는 그와 같은 특수 경향은 그의 예술로 하여금 고전적 이상주의 속에 이미 싹트고 있는 매너리즘적인 특성을, 그것이 나아가서는 과장되는 공간감과 더불어 바로크적인 특성을 지닌 것의 근거로 지적 받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