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세잔느(Paul Cezanne)
활동년도 : 1839~1906
작가소개 : 프랑스의 화가. 남프랑스의 엑스`앙`프로방스 (Aix-en Provence)에서 태어 났다. 모자제품업에서 은행가가 된 사람을 아버지로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어린시절 친구 E.졸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엑스의 법과대학에서 법률을 배웠으나 화가를 집념 하고 1861년 파리로 나와서 아카데미`스위스 (Academi Suisse)에서 그림 공부를 하였다. 여기에서 기요맹, 피사로와 만난다. 후에 인상파화가들과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1861년과 1862년의 에콜`데`보자르(Ecole des Beaux-Arts)입학에 실패하며 그 사이 고향과 파리 사이를 오가면 서도 그림의 길을 걷는다. 이어 보불전쟁을 거친 다음 1872년 부터 1874년에 걸쳐 파리에 가까운 폰트아스에 가서 피사로 를 방문하고 그 감화를 받아 갑갑한 작풍을 일변하여 색채는 밝게 하고 구성도 강한 질서를 잡고 있다. 제1회 인상파전 에는 '목매다는 집', '오란피아', '오베르 풍경'등을 출품했다. 세잔의 작풍은 이 무렵을 고비로 전기와 후기 로 나눌 수가 있다. 드디어 파리생활로부터 떠나 후기는 주로 액스`앙`프로방스로 돌아가 그 부근의 자연을 묘사하게 된다.

학풍에서는 C.모네나 피사로에서 볼 수 있는 순수한 외광파(外光派)에 속하지는 않았다. 1874년 제1회 인상파전에 출품한 작품에서 보여준 빛과 색의 배합은 한층 인상파작가로 접근해 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으나 제3회 인상파전을 고비로 차차 인상파를 벗어나는 경향을 보이고, 구도와 형상을 단순화한 거친 터치로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 때의 작품이 더욱 발전하여 후에 야수파와 입체파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근대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동기가 되었다. 1896년 인상파그룹과 결별하고 고향인 엑상프로방스에 돌아와서는 작품에만 몰두하였으며 4년 후인 1900년경부터는 재능과 독특한 작풍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후기는 인상파풍의 밝은 빛과 색으로부터 떠나 무거운 겨울하늘과 같은 색감을 즐겨 그리게 된다. 변하기 쉬운 빛에 따른 자연의 표정은 세잔에게 관심밖의 것이었으며 그 보다는 더욱 깊은 곳을 통하고 있는 부동의 실재감을 파악하는데 그의 창작의 보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연은 구형·원통형·원추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라고 견해를 밝힐 만큼, 자연을 단순화된 기본적인 형체로 집약하여 화면에 새로 구축해 나가는 자세로 일관했다. 즉 빛에 따른 것이 아니라 물체의 형체의 세계에 깊이 파고들어 그러한 형체의 짜임새로 화면위에 고르고 비밀스럽게 질서를 주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능한 불필요한 잡물을 제거하고 주요한 요소로 압축하여 가게 된다. 즉 구도를 단순화하여 가게 된다.

1895년 세잔은 화상 보라르(Vollard, Ambroise)의 점방에서 그 생애에 단 한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그것은 일반에게 냉담한 것이었으나 일부의 유식층으로부터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한다. 1904년 살롱`도톤느에 작품의 특별진열실이 설치 되게 되고 명성도 높아지자 인상파에 만족하지 못했던 젊은 세대의 작가들이 세잔의 새로운 예술에 눈뜨기 시작했다. 다음해에는 살롱`도톤느와 앙데팡당의 두 전시장에 작품을 출품하는 한편 7년동안 감각의 주체성을 추구한 '욕녀'를 완 성하는등 그 정진을 계속하던중 1906년 10월 풍경을 그리다가 소나기를 만나 넘어진 후 수일이 지나서 세상을 떠났다.

자연을 아낌없이 통찰한 세잔은 '모든 자연은 그 깊이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단순히 밝게 빛나는 광선을 멀리했다. 이점은 한 때 인상파화가였던 세잔과 그 밖에 다른 인상파화가들과 다른 점이다. 때문에 만년의 그는 겨울철의 구름낀 날을 도리어 사랑했고 서있는 나무도 말라죽은 나무의 모습이 형체로서 확연하게 파악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그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산과 집을 그린다 해도 화면의 구조로서 가장 중요한 형체의 부분만을 집약하고 필요없는 형상은 버렸다. 이와 같은 단순화의 방향은 추상화에 기울게 된다.

'욕녀'에서 그러하거니와 '생트`빅트와르산(Mt. Sainte Victoire)' 에서도 그러했다. 본래 이 산은 3각형으로 되어 있는 데서 구도는 화면의 중앙에 두고 그려가고 있는데 근경의 수목과 집들은 대담하게 처리하여 이 산을 노출시킬 수 있는 정도에 그치고 전체를 통일있는 구도로 정리하고 있다. 이와 간은 집약적인 구도를 반복하여 그려나가는 사이에 단순화의 빈도는 더욱 거듭하여 결국 3각형, 4각형등의 기하학적 원형으로 마무리된다는 것을 느낀 세잔은 '자연은 구, 원뿔, 원기둥으로 파악하는 것이 좋다'는 말로 표현하기에 이른다. 이 말은 후대에 크게 영향을 주어 입체파라는 새로운 회화운동이 일어날 계기를 마련한다. 그처럼 세잔이 파악한 순수한 자연의 형체는 단순히 눈에 비치는 형이 아니라 그 형을 중심으로 회화적인 구도가 만들어지는 세잔 자신의 감각적인 형이었다. 산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세잔이 느끼고 세잔이 만들어낸 주관적인 산이 거기에 포함되게 된다.

인상파의 회화, 가령 모네의 작품에 보였듯이 빛에 의한 색감속에 주관성이 강조되었듯이 세잔에 의한 자연의 형체는 화가의 주관성이 깊이 스며들게 되었다. 즉 회화가 객관적이 사생으로부터 주관적인 감각의 표현으로 나가가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세잔이 세상을 떠난 1906년은 근대회화가 최고의 정상에 도달하고 19세기와 결별함과 동시에 20세기의 막을 연 것을 뜻하게 된다. 그는 20세기 회화의 참다운 발견자로 칭송되고 있으며, 피카소를 중심으로 하는 큐비즘(cubisme)은 세잔 예술의 직접적인 전개라고 볼 수 있다.

작품을 구분하면 《목맨 사람의 집》(1872)이 그의 전기작품(인상파) 중에 손꼽히는 걸작이며, 《자화상》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등은 원숙기의 작품이며 《목욕》 《생트빅트와르산》 등이 대표적인 후기작품들이다. 그 밖에 정물에 관한 그림과 초상화에도 많은 걸작을 남겼다.



작품명 : 아쉴 엥프레르
제작년도 : 1868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200x120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이 인상적인 초상화는 세잔느와 함께 엑상프로방스의 쉬스 아틀리에서 그림을 그렸던 친구, 아쉴 엥프레르를 그린 것이다. 큰 두상과 빈약한 다리, 의자에 앉아 있는 모델의 모습은 왠지 어색한데 엥프레르가 본래 난장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나이프로 두텁게 발라 올린 물감, 화면 전반의 어두운 색조는 과거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기량을 쌓아가던 습작기의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세잔느는 이 그림에 마치 중세의 이콘화처럼, 모델의 이름을 작품 상단에 썼다. 1870년 살롱에 출품된 이 작품은 심사위원들에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작품명 : 목가
제작년도 : 1870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65x81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세잔느가 서른 한 살 되던 해 제작한 <목가>는 현실 너머의 남녀의 사랑을 환상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세잔느는 1860년대 후반과 1870년대 그는 에로틱한 주제들을 즐겨 그렸는데, 이 작품도 성적인 환상을 담은 작품들 중의 한 점이다.

마치 연극 무대와 같은 화폭에는 신비스러운 밤 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섬인지, 강인지 모를 물가와 낮은 언덕을 배경으로 몇몇 남성과 여성들이 자리하고 있다. 누드로 그려진 여인들은 각각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뒤편으로 머리를 감으려고 몸을 숙이고 있는 여인, 화면 왼쪽의 노골적으로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관능적인 포즈를 취한 여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경에 한 여인이 등을 보이고 돌아 누워있다. 이러한 여인들은 전형화된 포즈를 따른 전통적인 여성 누드의 도상들이다. 한편, 그림에 등장하는 남성들 역시 각기 다른 모습으로 그려졌는데 여성에 열중하기도 하고 무관심하기도 한 다양한 모습들이다. 특히 화면 중앙에 거만하게 턱을 괴고 누워있는 남자는 세잔느 자신의 모습으로 이 환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있다.



작품명 : 필립 솔라리의 석고 초상 정물화
제작년도 : 1872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60x81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이 작품은 원본 밑그림의 캔버스가 바뀌고 그림 상단이 잘리는 훼손을 겪기도 하였으며, 학자들간의 세잔느작품의 진위 논란으로 수모를 겪었다.

화가는 이 그림에서 조각가 친구, 필립 솔라리의 당시 부서졌던 석고초상을 표현하고 있다. 이 석고초상은 후에 가셰 박사에게 주어져 원상 복구되었다. 폴 가셰는 솔라리의 초상화라 생각되는 이 석고상의 1870년이라는 연도에 주목하였으며, 가셰 박사가 이 그림을 <세잔느의 악세서리들 >이라 부른 이후부터 이 그림의 제목이 되었다고 부연하였다. 자료의 부족으로, 1951년 폴 가셰가 기증한 이 석고 초상의 모델을 작가 자신인 필립 솔라리로 계속해서 볼 수밖에 없다. 솔라리는 세잔느의 고향 엑상 프로방스 출신으로 세잔느와 졸라의 죽마고우로 알려져 있다.

세잔느의 이 작품이 보여주는 탁월한 기량에도 불구하고,서투른 기법은 종종 이 작품에 대한 진위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테오도르 레프는 화상 볼라르가 찍은 사진을 증거로 들면서 이러한 의문을 강력하게 부인한 바 있다.



작품명 : 오베르의 목을 맨 사람의 집
제작년도 : 1872-73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50x66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1872년 세잔느는 부인 오르탕스 피케와 갓난 아들과 함께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 sur Oise)에 정착했다. 당시 피사로는 오베르 근처의 퐁투아즈(Pontoise)에 살고 있었는데, 세잔은 2년 동안 오베르에 머물며 피사로와 함께 작업을 하곤 하였다. 그 무렵 그려진 이 작품은 피사로부터 받은 영향력으로 인상주의 화풍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초기 작품들의 특징인 화면 전체를 감도는 어두운 색조, 극단적인 대조, 에로틱한 주제들은 밝은 풍경화에 자리를 내어 주었다. 화폭에는 청명한 날씨, 밝은 햇살이 내리쬔다. 지붕에 흡수된 빛, 혹은 반사된 빛의 세밀한 감각들은 작은 붓질을 통해 전달된다. 이러한 빛의 떨림은 대상 자체의 밝은 색조를 고양시키고 있다. 그러나 인상주의자들이 추구하였던 일시적인 양상과 순간적인 장면에 대한 묘사는 찾아 볼 수 없다. 이미 화면에는 풍경의 기본적인 구조들이 조화와 리듬 속에 드러나고 있다. 탄탄한 구성, 지붕과 나무의 견고한 선과 면은 안정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세잔느는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피사로의 추천 덕분에 1874년 제 1회 인상주의전에 참여하였다. 이 작품은 <오베르의 풍경>, <모던 올랭피아>와 함께 인상주의전에 출품되었고 도리아 백작(le Compte Doria)은 비평가들의 악평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구입하였다. 이후 빅토르 쇼케(Chocquet)가 이 작품을 다시 구입하여 1889년 만국 박람회에 출품하였다.



작품명 : 오베르의 가세 박사의 집
제작년도 : 1872-73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46x38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이 작품은 1872년 세잔느가 가족과 함께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 sur Oise)에 체류하던 시기에 그려진 것이다. 이 시기 세잔느의 작품은 오베르 근처의 퐁투아즈(Pontoise)에 살고 있던 피사로와 교분을 갖게 되면서, 점차 인상주의 화풍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이 그림에서 세잔느는 후경에 왼쪽으로 살짝 치우쳐 위쪽에 위치해 있는 밝은 건축물, 즉 오베르의 그 유명한 가셰 박사의 집 서쪽 면을 그렸다. 구불구불하게 시작되는 길, 일정한 구성으로 연속적인 시점을 형성해주고는 있으나 그물망처럼 복잡하고 흐릿하게 얽힌 나뭇가지들, 특히 회색, 연한 갈색, 황토색, 갈색, 푸른색과 벽돌색 터치 등의 어두운 색조 등은 피사로의 영향에서 벗어나 세잔느 고유의 양식을 개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의 많은 작품들이 캔버스 표면에 상당히 주의를 기울여 세심히 그려진 반면, 이 작은 그림은 곳곳에 화폭의 우툴두툴함을 남겨둘 정도로 붓자국이 투박하다. 이러한 특징은 이 작품의 제작년도를 세잔느 화업의 초기인 1872년에서 1873년 후반쯤으로 추정하게 한다.



작품명 : 현대적 올랭피아
제작년도 : 1873-74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46x55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낭만적인 주제를 선택하여 어두운 물감을 두텁게 발랐던 세잔느 초기의 작품들은 들라크루아, 도미에, 쿠르베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초기의 화풍은 1872년경 오베르 쉬르 오아즈에서 피사로와 함께 작업하면서 점차 변화하였다.

1872∼1873년 그려진 이 작품은 세잔느 화풍의 변화를 보여준다. 세잔느는 이미 1866년 같은 주제로 그렸던 작품은 어둡고 무거운 작품이었던 데 반하여, 몇 년 뒤 다시 그려진 이 작품은 밝은 화면으로 바뀌었다. 밝은 화면, 선명한 색조, 형태를 생략한 재빠른 붓터치는 이미 세잔느의 화풍이 인상주의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작품의 내용은 1865년 마네가 살롱에 큰 논쟁을 일으켰던 <올랭피아>를 언급하면서, 에로틱한 화가 자신의 환상을 담고 있다. <올랭피아>의 검은 고양이는 이 작품에서 강아지의 모습으로 그려졌고, 본래 마네의 그림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신사가 호기심에 가득 찬 눈길로 올랭피아를 올려다보고 있다. 세잔느 자신의 모습으로 그려진 이 신사는 사창가를 찾은 손님으로서 올랭피아가 창녀임을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