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활동년도 : 1748~1825
작가소개 : 뚜렷한 정치 성향을 지닌 작가로서 나폴레옹의 선전작가이자 신고전주의의 실제적인 구체적 실현을 이룬 예술가이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브루터스와 그의 죽은 아들' 등은 고대에서 빌어온 주제로서 정의 실현을 위한 애국심을 강조하고 있다. 그 표현된 공간은 고대의 확장된 공간미를 넘어선 오히려 압축된 공간의 사용으로 연극적이고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고전미와 더불어 현대적인 요소로의 전환이 드러나고 있다. 또 '마라의 죽음' 등에서 나타난 실제 사건의 주제화는 은유와 비유를 통한 고대 신화를 한층 더 대범하게 표현하고 있다. 단순한 배경은 그 죽음의 비장미를 더욱 강화시키면서 그 죽음을 영욱적이고 숙엄한 주제로 끌어 올리고 있다. 이러한 것은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비롯된 주제만큼은 엄격을 거부하고 '존재하는 모든 다양성의 수용'(로잘린 크 라 우스)을 보이는 예라 하겠다. '룩상부르 공원'은 그가 수감생활 중에 그린 유일한 풍경화로 정치가 내제한 그 이전의 회화세계와 다른 면모를 보인다. 즉 있는 실재의 공원의 모습은 안정적인 자연의 일면을 서정적으로 그린다. 고전적인 안정감과 덧붙임 없는 재현은 고전주의와 근대성의 새로운 이상적 만남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제국이 망하고 추방되어서도 신고전주의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고 제자들로 이어서 그 정신을 잇고 있다. 앙트완느 장그로 (1771~1835)는 <아르콜 전장의 나폴레옹>에서 낭만적인 모습에 신비감과 영웅의 모습을 동시에 그려 천재성을 인정받으나 그의 감정적인 낭만 기질은 끝내 두 사조간의 갈등을 자살로 마무리한다.



작품명 :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제작년도 : 1784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330×425cm
소장위치 : 파리 루브르 미술관
작품설명 : 이 그림은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나오는 애국심과 사랑의 갈등이 담긴 로마사 중의 한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고대 로마와 알바 군대는 서로 전쟁을 해야하는 처지에서 각각의 대표를 뽑아 승부를 결정하는 방법을 취했다. 로마에서는 호라티우스의 3형제가 뽑혀 알바 군대의 쿠라티어스 가의 세 아들과 대결을 하게 된다. 호라티우스 가의 여동생 카밀라는 쿠라티어스 가의 한 남자와 약혼을 한 상태였는데, 결국 호라티우스 가는 전쟁에서 알바의 쿠라티어스 가의 3형제를 죽이고 개선했다. 이에 약혼자를 잃게 된 카밀라가 오빠들에게 항의를 하자, 큰오빠는 카밀라를 죽여 버리고,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잘한 일이라며 아들을 칭찬하게 된다.

그림에서는 칼을 들고 있는 아버지 앞에서 호라티우스 3형제가 일렬로 서서 엄숙한 맹세를 하고 있다. 아버지 뒤에서는 검은 옷을 입은 며느리가 자식들을 감싸안고 있으며, 한 여자는 실신한 듯 기대어 누워 있고, 하얀 옷을 입은 카밀라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며 팔을 늘어뜨린 채 슬퍼하고 있다.

로마 양식의 건물에 반원의 아치형 기둥 앞의 세 형제와 아버지의 모습은 강한 색채와 근육, 시선이 집중되는 구도 때문에 역동적으로 보이는 반면, 여인들은 연하고 밝은 색감을 사용해서 축 늘어져 서로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전형적인 신고전주의 풍으로 그려진 이 작품은 사실감, 힘찬 형식의 단순성, 영웅적인 주제 강조 등으로 이후 미술사에 위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작품명 : 브루투스 앞으로 자식들의 유해를 옮겨오는 호위병들
제작년도 : 1789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323x422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던 1789년에 그려진 이 작품은 특별히 정치적인 선전을 계산하고 제작한 것은 아니지만, 혁명 정신에 입각한 도덕적인 의식을 계몽하려는 회화로 읽혀질 수 있는 작품이다.

타르퀸 왕의 부패를 뿌리뽑기 위해 로마에 공화정을 세웠던 브루투스는, 아들들이 자신이 세운 공화국에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를 들어 사형선고를 내렸다. 이 그림은 브루투스의 관리들이 처형된 브루투스의 아들들의 시체를 가져오고 그 가족들이 이에 슬픔에 빠져 있는 장면을 묘사했다. 자식들을 죽이라고 명한 브루투스는 화면 왼쪽에 그늘에 가려져 있다. 한 팔을 괸 채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모습은 죄의식에 대한 도덕적 의무감 때문에 괴로워하는 브루투스의 감정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특히, 브루투스가 머리 쪽으로 손을 가져간 포즈는 감정보다는 머리의 이성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 그림은 다비드가 1784년에 제작한 다른 작품인 <호라티우스의 맹세>와 매우 흡사한 구도를 지니고 있다. 고대 로마 풍의 건축양식, 그림의 주제가 펼쳐지는 왼쪽 면, 그리고 슬픔과 비탄에 잠긴 여인들을 오른쪽에 배치시킨 구도, 그리고 빛과 색채의 정확한 표현으로 입체감 있는 인물과 사물의 재현, 영웅주의의 찬양 등이 두 작품의 유사성을 말해준다.



작품명 : 마라의 죽음
제작년도 : 1793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165.1x128.3cm
소장위치 : Musees Royaux des Beaux-Arts de Belgique
작품설명 : 다비드의 작품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회화에서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희생과 명예로운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정치적 선전 도구로 발전하였고, 이 그림이 완성된 후 10년이 못되어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게 된다. 이 그림을 주문한 왕과 왕비가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다비드의 혁명 동지였던 장 폴 마라는 목욕탕에서 샤를로트 코르테라는 여인에게 암살을 당했다.

이 그림은 다비드가 마라를 추모하며 그렸던 작품이다. 무엇을 쓰고 있던 중에 살해당한 모습으로 한 손에는 펜이 그대로 들려 있고, 다른 한 손에는 코르테가 면회를 요청할 때 가지고 온 청원서가 피묻은 채 쥐여 있다. 가슴을 난자 당해 피가 흐르는 마라의 시체와 음울한 색채의 벽은 살인의 비극성을 폭로하며, 혁명을 완수하려다가 죽은 영웅적인 자세가 연상될 만큼 비장한 구도를 지니고 있다.

나무 궤짝에는 "마라에게 바친다(A Marat David)" 라는 글이 비문처럼 새겨져 있으며, 가슴과 손에 난 상처, 길게 늘어진 팔, 그리고 아무런 장식이 없는 마라의 방은 혁명가의 순수한 모습을 상징하는 도구처럼 사용되었다. 그것은 마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나 라파엘로의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에서 보여지는 순교자의 고통과 아픔, 희생을 연상하게 한다. 이 작품에서 다비드는 화려하고 사치스런 로코코풍을 벗어나 강하고 남성적인 영웅을 선택하면서, 마라를 통해 시민적인 헌신과 자기 희생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시키고 있다.



작품명 :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
제작년도 : 1800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75x244cm
소장위치 : 파리 루브르 미술관
작품설명 : 신고전주의의 위대한 초상화가였던 다비드의 뛰어난 재능을 유감 없이 보여주는 걸작이다. 초상화의 주문자는 파리 은행가의 아내였던 1800년 당시 23세였던 레카미에 부인으로, 미모와 지성으로 당시 파리 사교계에서 이름을 떨쳤다.

긴 의자에 앉아 있는 레카미에 부인은 마치 대리석 조각처럼 부동의 자세로 앉아 있다. 낮은 의자, 의자의 형태와 합치된 여인의 자세, 그리고 왼쪽으로 보이는 길고 가는 스탠드 등, 모델의 자세와 모든 소품들이 엄격하고 고요한 신고전주의 양식에 잘 부합되고 있다. 정면을 향해 시선을 향한 섬세하고도 부드러운 부인의 얼굴은 앵그르의 흐르는 듯 유려한 선을 연상시킨다. 보통 대작에서는 보기 드문 반짝거리는 붓터치, 섬세하고 정확한 기법 등이 다소 건조한 고전 양식에 도 불구하고 인물을 따뜻하게 그려내고 있다.

수직과 수평의 구도가 사물들에 의해서 연속적으로 반복되는 구조가 독특한 이 그림은, 그의 다른 작품들 <포토키 백작>, <라보아지에의 초상>과 더불어 다비드 회화의 주요한 특징과 화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정작 주문자였던 레카미에 부인은 이 작품에 불만을 느껴 2년 후 제라르에게 다시 초상화를 주문하였다고 한다.



작품명 : 나폴레옹 황제와 조세핀 황후의 대관식
제작년도 : 1806-07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621x979cm
소장위치 : 파리 루브르 미술관
작품설명 : 1804년 12월 황제의 공식 화가로 임명된 다비드는 네 점의 커다란 캔버스에 대관식의 의식을 기념하는 작품을 맡게 된다. 그 작품들 중 두 작품만이 실제로 그려졌는데, 다른 한 작품은 현재 베르사이유 궁전의 미술관에 있다. 대관식 의식은 파리의 노트르담(Notre-Dame) 성당에서 거행되었다.

다비드는 대관식을 상세하게 묘사하였다. 나폴레옹은 로마 교황에게 황제의 관을 받아 스스로 썼다고 하는데, 다비드는 이 장면 대신, 이미 황제의 관을 쓴 나폴레옹이 조세핀에게 왕비의 관을 씌어주는 장면을 그렸다. 거대한 집단 초상화로 구상된 이 작품은 100명 이상의 실재 인물들이 묘사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나폴레옹 황제와 사이가 나빴던 영국 대사는 그림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화면 정면 별실로 만들어진 장소에는 이 행사에 불참한 나폴레옹 어머니와 가족들이 보인다. 다비드가 나폴레옹 부탁으로 이 그림에 참석시킨 것이다.

다비드는 스케치 단계에서는 인물들을 일직선상으로 세웠으나, 완성작에서는 왼쪽에 있던 군인 두 명을 오른쪽에 배치, 인물들이 중심 사건을 둘러싸도록 구성하였다. 이러한 공간 구성은 깊이감을 돋보이게 하고, 관객이 실제로 그 의식 속에 참여하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다비드의 정교한 붓질, 뛰어난 색채 감각은 의식에 참여한 사람들이 두른 모피와 보석들을 화려하게 재현시켰다.

다비드는 1780년대 그의 대표 작품들이 보여주었던 신고전주의 양식에서 점차 벗어났다. 이 작품은 점차 드라마틱하고 화려한 실내 묘사에 치중하게 되는 그의 작품 세계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작품명 : Napoleon in His Study
제작년도 : 1812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203.9x125.1cm
소장위치 : 워싱턴 국립 미술관
작품설명 :



작품명 : 소크라테스의 죽음
제작년도 : 1787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129.5x196.2cm
소장위치 :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작품설명 : 소크라테스 죽음에서는 그리스의 철학자인 쏘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는 장면을 묘사하고있다.
화면은 우측으로 약간 치우쳐 프리즈처럼 나열된 인물들이 좁은 공간에서 이야기를 전달하고있다.
유사한 공간처리 방식이 이 작품에서도 드러나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무리들은 감옥의 뒷벽으로
막힌 전경에 늘어서 있고 왼편으로는 건물의 통로를 따라 멀리 사라지는 간수들의 모습이 원경에
묘사되었다.
그들은 이제 막 독배를 내리고 물러가는 모습이리라. 그들을 따라 우리의 시선도 자연스레 후경까지
인도되고 움직인다.
소크라테스는 무리 중, 가운데 앉아 독배를 막 받으려고 하면서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있다.
주위에는 슬퍼하는 제자들이 역시 상당히 과장된 포즈로 제각각 슬픔을 표현하고있다.



작품명 : 뤽상부르 정원의 풍경
제작년도 : 1794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파리 루브르 미술관 소장
작품설명 : 다비드는 혁명기,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3거두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자코뱅당에 속해 있었다.(그는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표를 던진 사람중의 한 사람이다.) 그 당의 영수인 로베스 피에르가 1794년에 실각하자 다비드 역시 투옥된다. 이듬해에 그는 대사령으로 해방되나, 이 그림은 투옥된 옥사의 창문으로부터 내다보이는 뤽상부르 정원의 정경을 그린, 다비드의 희소한 풍경화 중의 하나이다.

투옥된 혁명 투사로서의 화가 다비드의 면모는 찾아볼 수 없는 담담한 풍경화이다. 비록 억 제된 색조이기는 하나, 자연의 미묘한 변화와 그 변화에 따른 광선의 효과 포착은 뤽상부르의 한적함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작가 자신의 심정을 과장 없이 표출해 내고 있는 듯 싶다. 원래 가 강직하고 의지적인 다비드에게서는 극히 보기 드문 섬세한 감성의 표명이라고도 할 수 있 을 것이다. 하기는 구도상으로 볼 때, 이 작품은 다비드 특유의 구도에 있어서의 견고성은 잃지 않고 있는데, 그 구도는 나무판 울타리가 형성하는 수평, 수직을 기틀로 삼고 있다.

그러나 원경(遠景)으로 하늘과 나무들, 그리고 집 등을 화면 왼쪽으로부터 비쳐지는 광선으로 자 연스럽게 처리하고 있는 것은, 신고전주의 화가 다비드로서는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가 싶다. 굳이 말하자면, 이 풍경화를 통해 다비드는 그가 천성으로 타고난 자연주의적 성향을 자연 발생적으로 표출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작품명 :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제작년도 : 1799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386×520cm
소장위치 : 파리 루브르 미술관
작품설명 : 작품의 배경은 고대 로마의 건국에 얽힌 전설이다. 로마 건국의 왕 로물루스는 남자들을 모아 도시를 건설했으나, 여자가 적어 이웃 도시의 사비니의 처녀들을 납치하게 했다. 그런지 얼마 후, 이번에는 약탈당한 딸과 여동생들을 탈환하기 위해 사비니의 군대가 로마로 쳐들어오나, 양쪽 병사들 사이에 끼어든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어린아이들을 끌어안은 사비니의 여인들이었다. 여인들은 사비니의 군대에 있는 아버지와 오빠를 향해 부부의 연을 맺고 있는 로마의 병사들과 다투지 말 것을 애원한다. 이와 같은 비극적인 주제를 선택한 다비드의 의도에는 다비드가 프랑스 혁명을 통한 동족 상잔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어쨌든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이 작품과 함께 다비드의 고전주의에 하나의 커다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와 비교할 때 그 변화는 일목 요연 하다. 이에 대해 다비드 자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들려고 했다. 그리이스인이 의도하고 있던 원리를 향해 예술을 돌려보내려고 했다. 이제까지 나는 로마인의 영향 아래 있었다. 로마 미술의 원천은 그리이스 미술이었으며, 예술은 원천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