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고갱(Paul Gauguin)
활동년도 : 1848~1903
작가소개 : 그가 그림에 관심을 갖게된 계기는 1876년경으로 마네, 르느와르, 모네, 피사로, 세잔느의 작품을 사 모으면서 시작된 미술에 대한 관심은 곧 그림을 직접 그리는 것으로 발전되었다. 35세 때, 본격적으로 미술에 전념하겠다는 확신을 가지기에 이르러 실업가로서의 경력을 포기하고 가족과도 결별하게 된다.
산업혁명으로 탄생한 많은 모순들이 유럽의 문화속에서 인간의 가장 귀중한 능력, 즉 강렬하고 예리한 감성과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을 앗아가버렸다는 고갱의 확신은 '양식'이나 '단순한 기교'를 넘어선 인간의 열정처럼 힘차고 강렬한 그 어떤 것을 찾아 나선다.

처음에 고갱은 프랑스 서부 브리타뉴 지방의 농민들과 같이 생활하며 농민의 삶의 모습을 연구했으나 오래가지는 않았다.그는 신앙심에 관한 그림은 그릴 수 있었지만, 신앙에 의해 그릴 수 없는 한계를 넘기 위해 2년후, 그곳을 떠나 문명에 때묻지 않은 생활을 찾아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갔다. 이곳에서 그의 그림은 어떤 의미에선 단순화하고 넓은 색면에 강렬한 색채를 구사하며 토착민들의 순수함과 솔직함을 담아냈다.

20세기 미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고갱은 야성적인 색체와 이국적인 표현기법으로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원시적 감성을 찾아 타히티로 떠난 이래, 그곳에서 대표작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6년여 걸쳐 완성했으며, 최후까지 붓을 놓지 않으면서 고독과 우울속에서 만년을 보냈다.

고갱의 맹렬한 독립성과 서구 미술의 수백 년 동안 내려온 원칙의 거부는 무명 젊은 시절에 미술 수업을 전혀 받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폴 고갱은 프랑스인과 페루인의 혼열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가계는 폭력, 간, 급사, 급진주의 지식인 등의 기며한 혈통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는 유년기를 페루와 프랑스에서 보낸 후, 6년간은 배를 타고 다니며 장사를 했고, 1871년에서 1882년까지는 증권 브로커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인상주의 그림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시험삼아 그림을 그려봤으며 1879년에는 그가 만든 조그마한 조각상이 인상주의전에서 받아들여지는 좋은 결과를 가져왔고, 그 다음 해에는 7점의 그림들을 전시했다. 1883년에 이르러, 그는 직장을 버리고 전적으로 미술에 전념하게 되는데, 이미 그때 인상주의의 원칙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다. 1886년서 1891년 사이에, 그는 브로타뉴의 퐁타벤에 모인 미술가 그룹의 중심 인물이 되었고, 1888년에는 아를르에서 반 고흐와 두 달간을 함께 지내기도 한다.
이 시기는 고갱이 끊임없이 그 자신과 자신의 미술에 의문을 제기했던 시기였고, 여러가지 어려움이 증폭되었던 시기였다. 부유하게 지내다 갑자기 지독한 가난에 빠지고 아내와 아이들과 헤어지게 된 것은 그에게 있어서 커다란 슬픔이었다.

그가 "우연성의 요구에 발목을 잡혔었다."고 회상하는 인상주의를 거부한 뒤. 그의 목표를 처음으로 충분히 실현시킨 작품은 1888년 [설교후의 환영]이다. 이 작품은 마치 교회에서처럼 침묵에 잠겨 기도하고 있는 브르통의 농촌 아낙네들이, 금빛과 찬란한 푸른색에 감싸인 날개 달린 천사와 야곱이 불타오르는 붉은 벌판에서 씨름하고 있는 것을 환영 속에서 바라보는 모습을 그린 것인데, 전통적인 원근법에 따라 구성되긴 하였지만, 도식적인 구성, 이어지면서 그림자 없는 색면, 실루엣의 사용등은 일본 판화의 영향이 분명하고 광범위함을 알 수 있다.
고갱의 미술은 분석적 관찰보다는 상상적 개념의 미술이다. "예술은 하나의 추상이다."라고 말한 그는 아를르에 있는 반 고흐를 위해 그린 자신의 [자화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 그림은 너무 추상적이기 때문에 절대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처음 얼핏 보면 그 것은 산적의 얼굴처럼 보이며.... 인정 받지 못한 인상주의 화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고갱은 이 초상화를 보내면서 빅토르 위고의 낭만주의 소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인 장발장과 자기를 동일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의 천재성은 놀라울 정도로 여러 방면에서 발휘되었다. 1889년경부터, 그는 초기의 관심사였던 조각에 눈을 돌렸다. 1889년에서 1890년 사에에 제작된 부조 [사랑하라, 그러면 행복할 것이다]는 매우 비자연주의적인 작품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가장 훌륭하고 가장 이상한 작품"이라고 여겼다. 거칠게 깎여진 형태들의 의미는 수수께끼처럼 모호하나 대단한 물리적 밀도와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고갱의 정신과 손은 쉴 틈이 없었다. 그는 지팡이를 깎기도 했으며, 도자기를 구워 보기도 했다. 그의 목판화와 아연 판화는 열정에 넘치며, 이런 판화에서 시도한 왜곡된 형태들은 재료의 가능성을 느끼면서 만들어낸 것으로 목판화의 생명을 되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고갱의 회화로는 타히티 시대 작품들이 가장 인기를 끌었는데, 이는 말할나위 없이 신비스럽고 꿈 같은 주제, 즉 무르익은 원시의 땅이라는 도피처를 제공한 때문이다. 그러나 태평양은 그에게 새로운 주제를 제공하기는 하였어도, 그 주제들을 표현해 낼 형태언어의 폭까지 넓혀 주지는 않았다. 1897년 후반 자살미수 전에 그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신없이"그린 유명하고 거대한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는 그가 정신적 유연장이라고 생각하고 그린 그림이었다. 그것은 사실 가장 야심적으로 모든 것을 종합해 넣은 작품으로, 수수께끼 우상뿐 아니라 그가 이미 그의 초기 구성들에서 사용했던 상징적인 형태들 대부분을 끌어모아 신비스러운 파노라마로 엮은 것이었다.



작품명 : 아를르의 늙은 여인들
제작년도 : 1888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73*91.5cm
소장위치 : 시카고 미술관
작품설명 : 1886년부터 90년에 걸친 5년간을 고갱은 브르타뉴 지방에서 보냈다. 처음에는 퐁 타벤에 살다가 르 풀루뒤로 옮겼다. 그 사이인 1888년 가을, 아주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고갱은 고호의 권유로 남프랑스의 아를르로 간 일이 있었다. 이 그림은 그때에 그려진 것이다.
화면에는 평탄한 길을 배경으로 이상한 모양의 농촌 부인들이 그려져 있다. 여기에 표현된 여러 형상간의 관계에는 어딘가 불안정한 데가 엿보인다.
어째서 앞길을 막는 것처럼 붉은 담이 가로막고 았는 것일까. 두 개의 짚더미 너머에 있는 것은 연못이고, 거기에 하늘이 비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것은 샘이고, 그 근처에 나뭇잎이 흩어져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무래도 좋고, 화가에게는 그 하나하나가 아름다운 색면으로 전체적인 조화만을 이루면서 그것으로 충분한 모양이다.



작품명 : 황색의 그리스도
제작년도 : 1889
작품재료: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93*73cm
소장위치 : 버팔로 올브라이트 화랑
작품설명 : 이 작품은 고갱이 타히티에 건너가기 이전의 최고 걸작으로 지목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그려진 그리스도 상은 퐁 다벵에 가까운 트레마로의 교회당에 있었던 것이다

. 원경에 보이는 것은 퐁 다벵 마을과 생트마르그리트의 언덕일 것이다. 세 사람의 부르타뉴 여인도, 십자가도, 붉은 색 나무들도, 모두 하나의 상징적 풍경의 요소로 화하고 있다. 야성이 가득하고 자만에 부푼 그가 이 작품에 임하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견고하게 화면을 구축한 느낌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비친 어떤 화재 (畵材)도 그가 나타내려는 의도대로 변형되고 추상화 (抽象化)되어 버린다. 옥타브 미르보는 여기에 그려진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 그리스도의 우울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 얼굴에는 무서운 슬픔이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 무렵의 그의 심정이 바로 그랬으리라고 짐작된다.



작품명 : 마리 드리앵
제작년도 : 1890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65.1*56.6cm
소장위치 : 시카고 미술관
작품설명 : 고갱은 1881년 여름, 친구인 피사로의 소개로 세잔을 알게 되었다. 그후 두사람 사이에 개인적 교제가 계속된 것은 아니지만, 고갱 쪽에서는 예술가로서의 세잔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자신도 세잔의 그림을 몇 점 사 가지고 있던 고갱은 말년에 빈곤으로 고생하면서도, 세잔의 정물화만은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그림의 모델은 고갱이 1889년 10월 부터 이듬해 말까지 그곳에 머무르고 있는 브르타뉴의 풀루뒤 하숙집 여주인 앙리라고 전해지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실은 고갱의 모델로 알려져 있는 여성중의 한 사람인 마리 드리앵이라고 한다.
표정이 없는 얼굴, 비스듬한 자세, 편안하게 벌린 양손 등 모두가 세잔의 초상화를 연상시킨다. 손이나 얼굴의 살이 붙은 모양도 세잔의 영향을 느끼게 해준다. 두 사람 다 색의 반점의 조합에 의해 대상을 잡고 있다. 그러나 고갱의 경우에는 윤곽선이 강하기 때문에 볼륨으로서 보다도 2차원의 면으로서 형태가 나타나 있다.



작품명 : 신의 날
제작년도 : 1894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69.9*89.9cm
소장위치 : 헬렌 버치 버틀레트 기념 컬렉션
작품설명 : 1890년 고갱은 브르타뉴에서의 생활에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문명에 때묻지 않은 생활을 찾아 더 먼곳으로 떠났다. 그는 1893~96년에 한 차례 귀국했을 뿐, 생애의 나머지를 남태평양에서 보냈다. 그가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은 브르타뉴에서 그린 것들만큼 대담하지는 못하지만, 거기에서는 남태평양의 토속 예숙이 준 영향을 느낄 수 있다.
이 <신의 날>은 고갱이 1894년 일시 파리로 돌아갔을 때 그린 작품이지만, 단순하고 명쾌한 형태이며 밝고 대담한 색채 구사에 그의 이러한 변천이 잘 나타나 있다. 브르타뉴에서부터 고갱이 추구하던 종교적 체험이라는 주제는 여기에서도 다루어지고 있으나 <설교 후의 환영-천사와 씨름하는 야곱><황색 그리스도><황색의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에서 추구되었던 성서적 주제는 이에 토속신의 이미지로 바뀌고 있다.



작품명 : 망고를 든 타히티의 두 여인
제작년도 : 1899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94*73cm
소장위치 :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작품설명 : 이 작품은 고갱의 타히티 작품 중 가장 자연스러운 것 중의 하나이다. 대부분의 작품이 의식적인 그의 원시주의적(原始主義的) 조형 의지를 담고 있다면, 이 작품은 그런 의식을 떠나서 간결한 구도로 인공적(人工的)인 단순화(單純化)나 양식화(樣式化)의 흔적도 없이, 두 여인의 포즈에도 고갱이 가끔 쓰는 자바나 이집트의 그 양식도 볼 수가 없다. 젊고, 그래서 아름다운 매력을 몸 속에 가득히 지니고 자연스럽게 서 있다.
그것은 유럽인이 꿈꾸어 오던 이브(Eve)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반대적 이브도 아니다. 그런 대립을 뛰어넘은, 싱싱한 한 현실로서의 여체(女體)인 것이다. 빨간꽃과 젖꼭지, 입술 등의 색에서, 오렌지빛,노랑, 그리고 청록의 밝은 치마에서 차츰 어두운 암록색 검정의 머리칼과 치마색까지 차분한 하모니를 이루고, 화면은 풍부하고 투명한 아름 다움으로 가득 찼다.



작품명 : 노 테 아하 오에 리리
제작년도 : 1896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95*129.6cm
소장위치 : 시카고 미술관
작품설명 : 고갱의 생애는 이국 풍토 및 미개의 원주민들의 생활과 굳게 결부되어 있었다. 화가가 된 후에도 그가 즐겨 작품 활동을 한 것은 프랑스 변경 지대에 속하는 브르타뉴나 프로방스였으며 후에, 프랑스를 떠나 마르티니크섬이나 타히티섬으로 가게 된다. 그곳의 전혀 때묻지 않은 자연 환경 속에서 비로소 고갱은 자신의 회화의 진실한 주제를 찾았던 것이다. 그곳 사람들의 소박한 생활 그 바닥에 흐르는 미지의 것에 대해 그들이 품고 있는 풀리지 않은 공포심에 그는 깊은 관심을 보였다.
후기 인상파 화가들 중 고갱의 모습이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대상의 심리적인 내면에까지 파고들려 했던 점이다.
이 작품에 그려져 있는 것은 아무런 변화도 없는 가정적인 정경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이 그림에는 어딘가 신비로운 것이 담겨 있다. 이 그림이 지니고 있는 불가사의한 정숙함이 이 또한 성직자처럼 당당한 인물의 자태에 의해서 한층 더 강화되고 있다.



작품명 : 화가의 어머니
제작년도 : 1889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Staatsgalerie, Stuttgart
작품설명 : 고갱은 어머니가 젊었을 때 찍은 사진을 토대로 이 초상화를 그렸다. 어머니가 페루 출신이었듯이 이국미를 강조했다. 고갱의 어머니는 페루 도기를 수집했는데 이는 고갱에게 두고두고 영향을 끼쳤다.



작품명 : M. Loulou
제작년도 : 1890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55x46.2cm
소장위치 : Barnes Foundation, Merion, PA
작품설명



작품명 : 타히티의 여인들, 해변에서
제작년도 : 1891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69x91cm
소장위치 : Musee d'Orsay, Paris
작품설명 : 이미 브르타뉴 지방에서 원시성과 야만성을 발견한 고갱은 마침내 1891년 그토록 동경하던 원시적인 삶을 찾아 타히티로 떠났다. 그에게 타히티는 원시적인 종교성, 그 끝없는 탐구에 대한 최후의 답안으로 여겨졌다.
고갱은 타히티에서 나른한 여인들의 자태, 우수에 찬 시선 등에 매료되었다. <타히티 여인들>, 혹은 <해변에서>로 알려진 이 작품은 해변가에 앉아 있는 두 여인의 모습을 아주 가깝게 묘사하였는데, 대담한 구도와 과감한 색채가 돋보인다.
화면은 전면의 여인들이 앉아 있는 공간과 뒷 배경을 구획 짓는 수평띠에 의하여 평면성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브르타뉴 시기 고갱이 즐겨 썼던 도식적인 구성으로서, <식사>에서도 이와 같이 화면을 가로지르는 수평선이 화면의 깊이감을 약화시켰다. 한편, 이러한 명확한 구도 속에서도 여인들의 자세는 시각적인 균형을 최대한 고려하여 그려졌다. 왼편에 앉아 있는 여인의 옆 얼굴과 앞으로 내민 오른팔, 그리고 오른편 여인의 뭉툭한 발바닥과 툭 불거져 나온 무릎의 선 등이 이루어내는 시각적인 조응은 작가의 치밀한 조형 의식이 뒷받침된 것이다



작품명 : 영혼이 지켜본다
제작년도 : 1892
작품재료 : 천에 유채
작품크기 : 72.4x92.4cm
소장위치 : 올브라이트 녹스 아트갤러리
작품설명 : 여인이 등을 보이고 돌아누운 채 검은 두건을 쓴 인물과 같은 공간에 놓여있다. 그녀와 사신은 서로의 존재를 알고 바라보지만 시선을 맞추지는 않는다. 침구의 노란 색 프린트 문양과 보라색조의 공간은 색에 의한 표현이 갖는 매력을 한껏 보여준다. 이국적이며 동시에 몽환작인 이런 색채 감각은 타히티란 배경 속에서 더욱 강조된다. 이 그림에 대하여 고갱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난 새벽 1시쯤에 돌아왔다. Tehura는 침대에 누워 죽은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동공에는 공포의 감정이 가득했고 나는 잠시 이 낯설은 장면에 어리둥절했다....난 그렇게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그녀를 본 적이 없었다. 난 그 순간을 깰 수 없어서 움직이지 않았다...그녀는 마치 그곳에 전해 내려오는 마법사나 악귀처럼 나를 잡고 있었는지 모른다." (Eisenman, p. 330) 비 일상적인 감정과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작품명 : 부르타뉴의 여인들
제작년도 : 1894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66x92cm
소장위치 : Musee d'Orsay, Paris
작품설명 : 1886년 7월 고갱은 문명에 대한 회의를 품고 파리를 떠나 프랑스 서부 부르타뉴 지방의 퐁 타방(Pont-Aven)에 체류한다. 페루의 리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갱은 줄곧 문명에 대하여 회의하였다. 그는 자신의 예술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이상향, 자연의 순수함을 찾아 퐁 타방으로 향한 것이다.
이 그림은 1894년에 그려진 작품으로 경제적 궁핍과 악화된 건강 등으로 고갱의 일생 중 가장 힘든 때 그려진 작품이다. 1891년 원시의 야만성을 찾아 타히티로 떠났던 고갱이 다시 브르타뉴를 찾았을 때, 그는 퐁 타방 근처의 여인숙에 맡겨 두었던 그림들도 되찾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위축된 상태에 있었다.
전면에 우뚝 서 있는 두 여인들은 부르타뉴 지방의 민속 의상을 입고 있긴 하지만, 황토색의 투박한 얼굴 생김새, 크고 검은 발의 모습 등이 오히려 타히티 여인에 가깝다. 오른쪽의 숲 역시 타히티의 열대림을 연상시킨다. 프랑스에 돌아와서도 타히티의 순수한 자연을 그리워했던 고갱의 안타까움, 타히티의 강렬한 영향력이 묻어난다.



작품명 : Nave, Nave Moe
제작년도 : 1894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작품설명 :



작품명 : The Swineherd, Brittany
제작년도 : 1888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74x93cm
소장위치 :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작품설명 :



작품명 : 강아지 세마리가 있는 정물
제작년도 : 1888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88x62.5cm
소장위치 :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작품설명 : 일본화의 영향으로 원근법에 의한 화면 배치가 아니라 대상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조망 기법을 보여준다.



작품명 : Breton Girls Dancing, Pont-Aven
제작년도 : 1888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Collection of Mr. and Mrs. Paul Mellon
작품설명 :



작품명 : 과일을 쥐고있는 여인
제작년도 : 1893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The Hermitage, St. Petersburg
작품설명 : 한 여인이 망고를 들고 어디로 가고 있다. 순수한 타히티 여인과 망고는 고갱 그림에서 핵심을 이루는 소재다.



작품명 : 언제 결혼하세요?
제작년도 : 1892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Private collection, Basel
작품설명 : 타히티에서 그린 고갱의 작품에는 재미있는 제목이 많다.
<언제 결혼하니?>. <어마, 질투하고 있니?>, <왜, 골이 나 있니> 등, 그외에도 대화의 단편을 제목으로 하고 있는 것이 많다. 일체의 인공적(人工的)인 여벌문화가 없는 타히티의 생활에는 그 일상의 한 장면 장면이 상징적인 의미성(意味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892년 7월에 그는 부인 메트에게 '나는 많은 일을 하고 있소. 지금에 와서야 이 토지와 그 향기를 알게 되었소, 나는 타히티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수수께끼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긴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마오리족 (族), 바로 그것이오.. 이런 것을 알기 위하여 나는 일 년이 걸려 버렸소.'라고 쓰고 있다. 그러한 그의 이해가 이 그림 속에 확실히 나타나고 있다. 두여인의 동 (動)과 정(靜)의 자세의 대조(對照)에 하반신(下半身)이 겹쳐 있는 그 미묘한 뉘앙스가 인상적이다.



작품명 : 맛있는 물
제작년도 : 1898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Collection of Mr. and Mrs. Paul Mellon
작품설명 : 고갱의 타히티 작품 중 이처럼 시정에 넘치는 목가적인 작품은 일찌기 없었을 것이다. 평평하게 칠해진 색면(色面) 하나하나가 깊숙한 환상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색다른 작품이다. 짙은 프루샨 블루의 웅덩이, 거기에서 물을 마시는 하얀 말도, 또한 푸르게 칠해진 넘실넘실 뻗어나는 나무의 가지도, 늪가에 피어있는 하얀 꽃, 새빨간 말 잔등에 올라앉아 사라져 가는 섬의 여인도, 이상한 침묵 속에 잠겨 있다. 화면의 색을 대립적으로 배치하지는 않았지만, 빨강에서 노랑, 연두, 초록, 파랑, 보라로 해조의 변화를 주어 결코 단조로운 배색은 아니지만,전체가 통일된 조용한 목가적(牧歌的)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작품은 그가 자살을 시도했던 다음의 작품으로, 늪의 수면이나나무의 검푸른 가지는 어둡고 침잠된 죽음의 그림자가 스며있는 듯하다.



작품명 : 바나나
제작년도 : 1891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Musee d'Orsay, Paris
작품설명 :



작품명 : 테하마나의 선조
제작년도 : 1893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The Art nstitute of Chicago
작품설명 : 그림의 여인은 고갱이 꿈꾸던 야만의 이브라고 할 수 있다. 이 여인은 고갱의 정부로 <마나오 투파파우(그녀는 죽은 자의 영혼을 생각한다)><망고를 든 여인> 등에 등장한다.



작품명 : 화가의 자화상
제작년도 : 1897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40.5x32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작품명 : 네버 모어
제작년도 : 1894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나는 이것을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나는 단순한 나체화에 의하여 지금까지 미개인이가지고 있었던 일종의 호사함을 암시 하려고했던 거야. 전체는 일부러 어두운 색으로 가라앉혔지. 이러한 호사함을 만드는 것은비단으로도, 빌로도로도, 삼베로도, 금으로도 되는 게 아니고, 화가의 손에 의하여 풍부한 것으로 되는 마티에르, 오직 이것으로만 가능해. 잡다한 것은 필요없고, 단지 인간의 상상력만이 그 환상에 의하여 보금자리를 꾸미고 있는 것이지. 제목은 <네바모아>, 에드가 포의 큰 까마귀가 아니라 문지기가 딸린 악마의 새야. 그리는 것은 서툴지만- 지나치게 신경이 쓰여 발작적으로 일을 하고 있음-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 나로선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1897년 2월 14일 몽프레에게)



작품명 : 브르타뉴의 풍경-다비드 제분소
제작년도 : 1894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73x92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작품명 : 작약과 만돌린이 있는 정물
제작년도 : 1885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64x53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주식중개인을 그만 두고 화가로 들어선 고갱의 초기 작품 중 최고로 손꼽히는 이 그림은 화가의 훗날 모습을 예견하고 있다. 제 8회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되었다.



작품명 : 노란 낟가리
제작년도 : 1889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73x92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작품명 : 안녕하세요, 고갱씨
제작년도 : 1889
작품재료: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작품명 : 알리스캉 풍경
제작년도 : 1888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92x73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작품명 : 야곱과 천사와의 싸움
제작년도 : 1888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야곱과 천사와의 싸움'도 역시 브리타니 지방에서의 경험에서 제작된 것이다. 나무둥치로 나뉘어진 화면의 좌측에는 영적 경험에 빠진 이 지방 여인들이, 그리고 우측에는 야곱과 씨름하는 천사가 등장한다. 전경의 나무가 뒤의 여인들로 이어져 후 경과의 거리를 무효화시키는 평면성이 돋보인다. 황색의 그리스도에서처럼 상당히 원색적인 바탕과 평면적 공간 구성, 그리고 종교적 환영이 주제로 등장한 이 작품에서도 고갱의 정열적인 심성을 느낄 수 있다. 이들은 붉은 바탕 위에 놓여있고 역시 현실과 상상의 세계의 혼돈이 강한 색채와 몽상적 주제와 함께 표현되었다. 종교적인 심성과 비현실적인 주제가 실생활의 무미함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면서 고갱의 프랑스에서의 상징주의 시기를 반영해 준다.



작품명 : 모자를 쓴 자화상
제작년도 : 1893∼94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46 x 93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1895년 고갱이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타히티로 떠나기 1년여 전 그린 작품으로, 프랑스에서 그린 최후의 자화상으로 남아 있다.
이 작품 역시 고갱의 다른 자화상처럼 3/4 정면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앞서 그려진 세 점의 자화상 - <후광이 있는 자화상>(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소장),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오르세 미술관 소장), <팔레트를 든 자화상>(파시데나 미술관 소장) -보다 훨씬 어두운 색조로 그려진 이 작품에는 당시 고갱의 힘겨웠던 삶이 깔려 있다.
1893년 코펜하겐의 친정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기거하고 있던 고갱의 부인, 메테는 파리로 돌아와 다시 함께 생활하자는 고갱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외로워하던 고갱은 다시 안나라는 여인과 동거하였으나, 1894년 그녀마저 그의 집을 털어 달아났다. 게다가 다리의 부상으로 육체적인 고통까지 겪었던 고갱은 결국 파리 생활에 염증을 느껴 다시 타히티로 돌아가게 된다.
<황색의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자신의 그림을 배경 속에 집어넣었다. 자화상 뒤로 보이는 그림은 1892년에 그려진 <마나오 투파파우>로서,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그려졌다.



작품명 : 식사
제작년도 : 1891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장르화의 분위기와 정물화가 절묘하게 조화된 이 작품은 고갱이 타히티를 처음 방문하였던 1891년 그려진 것이다.
고갱은 이 작품에서 검소한 식탁 앞의 부동 자세의 아이들을 그렸다. 정밀하지만 단순한 구성으로 열대 원시림 속에서 찾고자 했던 원시적인 생활 방식에 경의를 표하고 있다. 고갱이 타히티의 첫 방문 때 접했던 원주민들의 조용하고 엄숙한 생활 자세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견고한 대상의 입체감, 테두리의 분명한 윤곽선, 하얀 식탁보 등은 세잔느의 정물화를 연상시킨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식탁은 정물이 놓여 있는 식탁 전면, 그리고 인물들이 앉아 있는 뒤편 공간으로 공간을 단순하게 이분화하고 있다. <타히티 여인들>에서처럼 화면을 가로지르는 수평선이 공간을 구획 짓는 이러한 구도는 브르타뉴 시기부터 고갱이 즐겨 썼던 도식적인 구성이다.



작품명 : 아름다운 앙젤
제작년도 : 1889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92 x73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이 작품은 1888년 고갱이 브르타뉴 지방의 퐁 타방에 체류할 때 교분을 가졌던 젊은 부인의 초상이다. 브르타뉴의 퐁 타뱅에 머물렀던 동안 사트르라는 부부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던 고갱은 감사의 뜻으로 부인 앙젤(Mme. Satre)의 초상을 선물하였다. 그러나 이 작품을 받은 사트르 부부는 탐탁해 하지 않았고 결국 그림은 고갱에게 돌아왔다. 후에 드가는 이 작품의 조형적 가치를 알아보고 이 그림을 450프랑에 구입하였다.
그림 속의 그림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독특한 이 그림은 고갱이 생애 마지막 3년 동안 이루어 놓았던 모든 조형적 특징들을 집약하여 보여준다. 꽃무늬가 그려진 배경을 뒤로 후광처럼 보이는 원 속에 마치 여인이 갇혀 있는 듯 보인다. 후광뿐만 아니라, 그녀의 이름 역시 중세의 이콘화에서처럼 화면 하단에 쓰여 있다. 후광처럼 보이는 원, 그리고 원시 조각을 중심으로 상, 하 수평으로 나뉘어진 화면, 공간은 이렇게 잘라지고 구획 지어졌다. 그러나 다른 한편, 원과 원시 조각 두 모티프는 화면을 분할하는 동시에 장식적인 배경 속에 자연스럽게 융화되고 있다. 구획 지어진 원과 캔버스의 사각형이 이루어 내는 시각적인 조응, 장식적인 배경과 모티프의 자연스러운 융합, 이 모든 요소들은 공간의 깊이감을 차단시키고 장식성과 평면성을 강조하고 있다.
초상화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적인 재현보다는 감정적이고 정신적인 가치를 중요시한 고갱의 회화 세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작품명 : 슈페네커의 아틀리에
제작년도 : 1889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73.5x92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슈페네커 가족>으로도 알려져 있는 이 작품에서 고갱은 친구이자 화가였던 에밀 슈페네커의 아틀리에와 가족을 그리고 있다. 슈페네커 역시 고갱과 마찬가지로 증권 거래소를 그만 두고 어화가명 : 고갱(Paul Gauguin)



작품명 :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제작년도 : 1890∼91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38x46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고갱은 1889년 <황색 그리스도>라는 작품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경건하게 그려야 할 그리스도가 마치 브르타뉴의 농부처럼 그려졌다는 이유였다.
이후 고갱은 자신의 자화상에 <황색 그리스도>를 배경으로 그려 넣었는데, 좌우가 바뀐 것으로 미루어보아 거울에 비친 <황색 그리스도>를 그린 것이다. 화면 오른쪽 위로 보이는 도기 항아리는 고갱이 직접 만든 것으로서, 그 또한 자신의 얼굴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다. 항아리의 괴기스러운 형상과 그리스도의 얼굴, 모두 다른 모습이지만 그 속에서 고갱의 자화상을 연상할 만큼 세 이미지는 미묘하게 얽혀 있다.



작품명 : 아레아레아, 기쁨
제작년도 : 1892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75x94cm
소장위치 : ***
작품설명 : 이 작품은 고갱이 처음으로 타히티에 체류하는 동안 그린 세 점의 걸작 가운데 하나이다. 타히티의 신화를 통해 고갱은 보는 사람의 상상력이 흡사 음악처럼 작용할 수 있는 장식적인 미술을 창조하고자 했다.
그림의 중앙에 그려진 땅은 공간을 따뜻한 색상으로 채우면서 서정적인 형태를 만들어 내고 있는데, 이는 실재하는 모양과 색이 아니라 상상력으로 그려진 것이다. 고갱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색이나 선으로 똑같이 표현하려 하지 않고, 그 선과 색의 배열 사이에 있는 신비한 친화력을 드러내고자 했다. 왼쪽 위에 부드럽고 연한 색을 발라 표현한 신상은 달의 여신 히나를 그린 것이고, 중앙에 위치한 인물이 연주하고 있는 피리는 타히티에 머물면서 고갱이 느꼈던 밤의 고요함을 표현한 것이다.
부자연스럽게 자리한 왼쪽의 붉은 개는 고갱이 의도적으로 묘사한 것이며, 다른 많은 작품에도 등장하고 있다. 의미가 불분명한 이 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반감을 표했고, 한 비평가는 이 개를 악의 요정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 고갱은 티치아노나 조르조네와 같은 거장들이 발전시켜 왔으며, 동시대의 화가들 역시 매달리고 있었던 유럽의 낭만적인 전원화 전통을 확대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