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더 장군
 General MacArth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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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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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6 25, 북한군은 탱크와 비행기를 앞세우고 물밀듯이 쳐들어 오고 있었다.

그 날 아침맥아더는 비행기와 배를 보내 미국시민과 유엔 직원 천여명을 먼저 구출했다.

구출작전은 한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성공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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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9, 맥아더는 한국 전쟁을 직접 보기위해 도쿄에서 비행기를 타고 수원에 도착한다.

그리고는, 맥아더 장군과 부관, 수행원등 4명이 탄 지프는 한강으로 향한다.

한강방어선에 이르는 동안 지프는 수없이 적의 공습을 받는다.

맥아더 일행이 간신히 한강에 이르러 보니 이미 한국정부는 대전으로 피난해 있고..

한국군은 한강 다리를 지키기 위해 최후의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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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의 한 진지에서 맥아더는 한 국군 일등병과 대화를 나누게 됐다.

병사! 다른 부대는 후퇴했는데, 자네는 여기를 지키고 있나?”

저는 군인입니다. 상관의 명령 없이는 절대 후퇴하지 않는 것이 군인입니다.

철수 명령이 있기 전까지 죽어도 여기서 죽고, 살아도 여기서 겁니다.”

군인에게 감동 받은 맥아더 장군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이렇게 말했다.

정말 훌륭한 군인이다. 내가 일본으로 건너가면 즉시 지원군을 보내주겠다.”

 

맥아더의 약속대로 한국전 참전은 즉시 실행에 옮겨졌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관계자는맥아더 장군이 당시 한국군 병사의 말에 감동을 받아

참전을 결심했다는 사실은 참전 장성 회고록 여러 문서에서 확인된다 말한다.

신동수(辛東秀) 국군일등병은 백골부대 18연대 1대대 3중대 소속이었다.

대화가 끝난 , 맥아더 장군은 그에게 연막탄 2개와 대공표지판을 선물로 줬다고 한다.

아직까지 살아 계시다면 신동수옹의 연세는 84세가 된다.

  
 
 
인천상륙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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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9 15일 
*

맥아더 장군은 한강방어선을 시찰한 후, 인천상륙작전의 기본 전략을 세운다.

공군 전투기와 해군 병력만으로 싸워야 했던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낸다.

미육군 병력을 전투에 투입하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트루만은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맥아더는 적의 공격을 늦추기 위해 미군을 파병하고 공군으로 하여금 적을 공격하게 했다.

유엔은 7 7일 통합사령부를 한국에 설치하고 맥아더장군을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맥아더는 트루만에게 미육군 병력을 추가 지원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그는 듣지않았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대전마저 빼았기고 부산 가까운 곳까지 밀리게 된다.

 

맥아더는 미국 국방성에 인천상륙작전을 요청한다.

그러나 해군 인천항의 간만의 차가 심해 상륙작전에는 최악의 지형이라며 완강히 반대한다.

해군의 일부 인사들은 작전성공률이 1/5,000 이라며 격심하게 반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이러한 난점이 오히려 적의 허점을 찌르는 기습이 있다며 끝까지 주장한다.

결국 8 28, 미합참본부로부터 인천상륙작전의 승인을 얻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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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륙작전은 동해에서는 미주리호 삼척상륙작전처럼 오인시키기 위한 공습을 시작했다.

서해에서는 군산으로 상륙작전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기만작전도 시작됐다.

9 10에는 인천을 고립시키기 위한 공습을 시작, 상륙 당일인 9 15까지 지속시켰다.

맥아더는 고의로 군산상륙작전이라는 거짓정보를 인민군에 흘렸다.

정보에 속은 북괴는 군산 방어를 강화했고, 결과 다른 지역의 방어력은 현저히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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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5일, 함정 261, 7만 5,000명의 병력은 영종도 근처에 집결하여 작전을 벌였다.

작전의 1단계는 월미도 점령으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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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에 시작된 공격준비사격에 이어 5해병연대의 3대대가 월미도 전면에 상륙했다.

월미도는 2시간만에 완전히 미군에 의해 장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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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은 부상 7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인민군 108명이 전사하고 106명이 포로로 잡혔다.

2단계는 국군 17연대, 미군 7사단, 미군 1해병사단의 주도로 인천반도 공격으로 이어졌다.

인민군 18사단과 인천의 경비병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미군 1해병사단과

국군 해병 1연대는 인민군 주력이 규합할 시간적 여유를 빼앗으며 인천 장악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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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개시 13일 후인 928일에는 서울을 탈환하고 중앙청에 태극기를 올린다.

서울을 탈환한 유엔군과 한국군은 북으로 북으로 진격했다.

그리하여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에는 압록강 기슭에 도착했다.

패잔병은 산 속으로 숨었고 인민군은 중국땅으로 모두 도망쳤다.

이제 대한민국은 통일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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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은 강을 건너와 공격하고 만주로 도망치고 또 강을 건너와 공격하고 도망치곤 했다.

그러나 유엔군은 강 건너 인민군에게 총 한 방 쏘지 못했다.

중국과 전쟁할 것을 두려워한 미국정부가 총을 쏘지 못하도록 맥아더에게 지시했기 때문이다.

맥아더는 압록강 건너 공산군을 쳐부술 것을 허락해 달라고 매번 트루먼에게 요청했다.

하지만, 트루먼은 맥아더의 요청을 거부했다.

미국 국민을 위해서는 어떤 전쟁이라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지만,

한국을 위해 소련이나 중국을 상대로 싸우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결국 1,4후퇴가 일어났고, 유엔군과 중공군은 38선을 앞에 놓고 대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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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4 11일,

트루먼 미국대통령은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미국 정부의 정책을 따르지 않는 맥아더 장군을 미극동군사령관 및 유엔군사령관 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후임으로 미8군 사령관이었던 리지웨이 장군을 임명한다고 발표한다.

맥아더 장군이 한국전선을 살피기 위해 막 떠나려고 하는 참이었다.

당시,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종심(從心)을 넘긴 71세의 나이였다.

  

맥아더 장군 의회 퇴임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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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4 19일 

*

전세계 국가들중 한국만이 지금까지 유일하게 공산주의에 대항해 싸운 나라입니다.

한국인이 보여준 용기와 불굴의 의지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노예 노릇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제게 했던, 마지막 말은 이렇습니다.

“태평양을 버리지 말라!

 

어떤 사람들은 저를 전쟁광이라 비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쟁의 목적은 승리이지 우유부단한 결정이 결코 아닙니다.

제가 육군에 입대한 것은 아직 20세기가 시작되기 전이었고,

당시 저는 청년 시절의 모든 꿈과 희망을 충족시킬 수 있었습니다.

제가 웨스트포인트의 광장에서 선서한 이래 세계에는 수많은 변동이 일어났고

저의 청년시절의 희망과 꿈도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그러나 저는 당시 군영에서 유행하던 노래의 후렴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후렴의 자랑스러운 구절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노병(老兵)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맥아더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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