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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남부에 제레미(Jeremy)란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했지만 대학에 가서 열심히 공부해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는 꿈을 가졌습니다.
    어느 날, 그는 마침내 대학 합격 통지서를 받고 너무 기뻐서 평생 흘려도 모자랄 눈물을 쏟았습니다.

    곧 제레미는 대학 근처로 거처를 옮기고 학기 시작 전까지 근처 농장에서 일했습니다.
    그런데 점심시간마다 그에겐 말 못할 고민이 있었습니다.
    남들은 다 도시락을 싸 오는데 그는 도시락을 가지고 올 형편이 못된 것입니다.

    결국 점심시간마다 그는 헛간 뒤쪽에 가서 하늘을 보며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왜 점심을 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속이 좋지 않다고 변명한 후, 헛간 뒤쪽에서 수돗물만 실컷 마셨습니다.

    어느 날, 인부 조장이 큰 소리로 벌컥 화를 냈습니다.
    “이 놈의 마누라가 내가 돼진 줄 알아! 이렇게 많이 싸 주다니. 누구 내 도시락 좀 먹어줄 사람 없어!”

    제레미는 그 말에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없어서 얻어먹는 것이 아니고 남는 것을 먹어주는 것이니까 그는 부끄러움이 없이 조장 아저씨의 남은 음식을 먹어주었습니다.

    다음날도 조장 아저씨는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놈의 마누라가 도대체 정신이 없어! 또 이렇게 많이 싸줘! 누구 내 도시락 먹어줄 사람 없어!”
    그날도 제레미는 아무 부담 없이 그 도시락을 또 먹어주었습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제레미는 조장 아저씨의 남은 도시락을 먹어주었습니다.
    한 달 후, 새 학기 시작 무렵, 그는 농장을 그만두며 조장 아저씨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넓은 농장에서 조장 아저씨를 찾을 길이 없어 할 수 없이 경리에게 조장 아저씨 내외분에게 인사를 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때 경리가 말했습니다.
    “그 조장 아저씨는 부인이 안 계셔요. 그분은 몇 해 전에 돌아가셨어요.”

    영혼은 나눔을 통해 감동을 먹으며 채워집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감동을 먹을 수 있습니다
    없을 때 나누면 감동은 커집니다.
    고독은 나눌 대상이 없는 표시이고, 공허는 나눔이 없는 삶의 흔적입니다.

    세계적 작가 헤밍웨이는 네 번 결혼을 했고, 61살에는 심한 우울증으로 자살하면서 마지막 일기장에 “나는 필라멘트가 끊긴 텅 빈 전구처럼 공허하다.”라고 썼습니다.

    나눔은 끊긴 영혼의 필라멘트를 다시 이어주는 영혼의 납땜이고, 사랑과 행복을 저축하는 영혼의 댐입니다.

    오늘 나는 이 글을 올리고는 샌디에고의 어느 선교사 사모님의 초청으로 노인 몇 분과 함께 떡국 대접을 받으러 갑니다. 우리 민족의 명절에 이웃들에게 떡국 한 그릇이라도 나누어 먹는 이웃사랑이 정말 아름다워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