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노년은 절망과 좌절의 시기인가?

몇 년 전에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읽었습니다. 금슬 좋은 노인 부부 중 할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홀로 남은 할아버지가 식음을 전폐하고 할머니 묘소에 머물러 있다가 할머니를 따라 갔다는 기사였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이 할아버지에게는 아들과 딸도 있었으니 온 천지에 가족도 없이 홀로 남은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가셔야 했을까요?

할아버지의 사랑을 아름답다고 해야 할까요? 부부 간의 금슬이 얼마나 좋았으면, 얼마나 서로 사랑했으면 그렇게 했겠는가 하고 부러워해야 할까요? 너무도 쉬 만났다가 너무도 쉬 헤어지는 것이 요즘 ‘사랑’이라는 데 비춰보면 노부부의 사랑이 아름답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할아버지는 꼭 그렇게 했어야 했을까? 과연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당신 뒤를 따르는 것을 원했을까 하는 의문도 듭니다. 한 아버지는 열두 아들을 기를 수 있지만 열두 아들은 한 아버지를 모시지 못한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할아버지에게는 자식들도 있었는데 아버지가 그렇게 가버리면 자식들은 어떻게 됩니까? 할아버지에게는 자식들도 필요 없고 오로지 할머니가 전부였으므로 할머니 없는 세상에 살아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을까요?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니 ‘나’ 는 간데없고 초라한 노인 하나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동안 내가 이끌고 온 삶은 어디에 있는가? 젊은 날 푸른 꿈들은 다 어디로 흘러갔는가? 사람은 서서히 늙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늙습니다. 자식 뒷바라지도 다 끝났고 모셔야 할 부모도 없습니다. 삶의 현장에서는 치열하게 경쟁할 때는 거기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이제는 아무도 나를 경쟁상대로 여기지 않습니다. 기억은 흐려지고 힘은 빠져나갑니다. 몸은 망가지고 아픈 데는 자꾸 생깁니다. 내가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납니다. 인생을 관조하기에는 이루어놓은 일이 너무 없고 새 삶을 시작하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나를 보호할 바람막이가 없습니다. 때로는 쓸모없는 존재가 될 때까지 너무 오래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 살아 있는 것에 대해 무슨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표현이 극단적이기는 해도 노인들은 어느 정도는 이런 생각을 한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언제나 늙어 있었습니다. 어머니나 아버지를 떠올리면 젊고 예쁘고 기운 넘치는 모습이 아니라 늙고 초라하고 힘이 없이 구부정한 모습이 떠오릅니다.

노인들에게 물질적인 삶의 조건을 마련해드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은, 노인들을 낙담과 절망으로부터 어떻게 건져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늙는다는 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며 늙는 것을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노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당사자나 가족의 힘만으로는 부족하고 사회 전체두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특별히 물질적인 생활의 조건을 마련하는 데는 정부의 역할이 지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4년마다 돌아오는 선거에서 제대로 투표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을 비롯해서 국민의 대표자들을 한 번 잘못 뽑으면 그 불편을 적어도 4년, 길면 8년 동안 감수해야 합니다. 한 번 자리에 오른 사람들에게는 ‘프리미엄’이 있어서 웬만해서는 4년 후에 낙선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사회문제들, 유가인상은 물론이고 복지 및 교육 예산 삭감 같은 일들은 이미 지지난 대통령 선거 때 예상할 수 있었던 문제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 대통령을 뽑아 이런 일들을 겪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오늘 노인들에 대해 사회가 잘 배려하고 도와야 한다는 얘기를 하려 하지 않습니다. 저는 늙는 것에 대한 노인들 자신의 태도에 대해 얘기하려 합니다. 사람은 모두 죽습니다. 이에 못지않게 확실한 사실은 사람은 모두 늙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도 노인 어르신이 여러 분 계십니다. 나머지는 얼마 되지 않아 노인이 될 사람들입니다. 그때까지의 기간은 각자 다르지만 결국 우리는 모두 노인이 됩니다. 노인 문제는 심각하게 겪지 않으려면 미리 듣고 생각해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노인 문제는 노년을 준비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들은 ‘왜 준비를 안 해? 노년을 궁핍하지 않게 보내려고 저축도 하고 보험도 들고 연금에도 가입했는데...’라고 말씀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많은 노인들이 노년에 초라한 삶을 살지 않으려고 저축도 하고 적금도 들고 연금에도 가입합니다. 이 나라에서는 노인들에게 최소한의 생계를 위해 보조금도 줍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노년의 준비는 거기 그치지 않습니다. 저축을 하고 보험을 들고 연금에 가입하는 것은 모두 ‘어떻게 살아남을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입니다. 그것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되지 못합니다. 늙어 노인이 되면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제가 말하는 노년의 준비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노인들이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로 생각합니다. 남은 시간, 곧 여생(餘生)을 얻는 것은 없고 갖고 있는 것을 소비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비할 것이 없다고 느껴지면 삶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여 좌절하고 심하면 스스로 세상을 등지게 되는 것입니다.




노인은 꿈꿀 수 없는가?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 어르신들에게 이렇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노인은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 사람입니까? 노인은 더 이상 변화할 여지도 없고 성장할 가능성도 없는 사람입니까? 노인은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꼼짝 하지 않고 있다가 죽고, 죽으면 남의 손을 빌어 옮겨져서 무덤에 묻히고 마는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노인에게도 변화의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고 성장의 여지가 많습니다. 노인에게도 지금 있는 자리에서 떨쳐 일어날 힘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성경의 아브라함과 베드로에게서 확인합니다.

창세기 12장 1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어느 날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그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 당시에 고향을 떠난다는 일은 과장하지 않고 말해서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모험이었습니다. 우리도 태평양 건너 이곳으로 이민 올 때 기도도 많이 하고 각오도 단단히 하고 오지 않았습니까.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났던 일은 지금부터 약 3,700년 전쯤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때는 이주의 어려움이 오늘날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어디로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하느님은 목적지도 가르쳐주시지 않고 ‘장차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땅이 어디 붙어 있는 땅인지, 얼마나 가야 도달할 수 있는 곳인지도 그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떠났습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철저한 불확실성 속에서 그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떠났던 것입니다. 이때 그의 나이가 75세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이미 ‘노인’이었습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손자 손녀들 무릎 위에 앉혀놓고 옛날 얘기나 해줄 나이에 그는 미지의 장소를 향해 가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나이에 모험의 길에 나섰던 아브라함도 놀랍지만 그 나이의 아브라함을 불러 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신 하느님 역시 놀라운 분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의 뭘 믿고 하느님은 그런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인간은 누군가로부터 무엇인가를 요구받으며 삽니다.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실은 나이를 먹는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노인이라고 해서 요구받지 않고 부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노인들은 흔히 “이제 늙어서 불러주는 데도 없다.”라고 말씀들 하시는데 사실은 불러주는 데가 없지 않고 부르는 음성을 못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브라함뿐 아니라 사도 베드로도 이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역설적인 방법으로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타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셨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도 아십니다.”라는 대답을 세 번 들으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제 손으로 띠를 띠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를 먹으면 그때는 팔을 벌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렇게 풀었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장차 어떻게 죽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인가를 암시하신 말씀이었다.” 베드로가 늙어서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게 됐을 때, 곧 세상의 눈으로 보면 아무 쓸모도 없어졌을 때 그는 남의 손에 의해 허리를 묶이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려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렵게 읽으려 하지 말고 말 그대로 읽으면 됩니다. 누구나 젊었을 때는 자기 발로 가고 싶은 곳으로 마음대로 다닙니다. 기운 있고 건강한 발이 있는데 못 돌아다닐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늙어 기운이 빠지고 발이 마음대로 말을 듣지 않으면 젊었을 때처럼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합니다. 그때는 남이 이끌어줘야 다닐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더라도 이끄는 사람이 가는 대로 따라다녀야 합니다. 베드로도 늙어서는 다른 노인들처럼 남에게 이끌려 다녔고 원하지 않는 데로 다녀야 했습니다. 게다가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로마 제국의 핍박을 피해 다녀야 했으니 이중으로 제약을 받았을 것입니다. 핍박을 받지 않는 사람도 늙으면 팔을 벌리고 남이 허리띠를 묶어주는 대로 묶여서 따라다녀야 하는데 하물며 제국의 핍박을 피해 다녀야 했던 베드로는 오죽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나이를 먹으면 그때는 팔을 벌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어 네가 원치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마음대로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없었던 노인 베드로를 마지막으로 부르셨습니다. 이 부르심은 그가 젊었을 때 경험했던 그 어떤 부르심 못지않은 결정적인 부르심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베드로를, 남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던 늙은 베드로를 마지막으로, 결정적으로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은 요한복음의 서술대로 죽음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부르심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습니다. 그렇게 죽는 것이 육체적으로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겠지만 그의 영혼은 매우 평안했을 것입니다. 이렇듯 하느님은 노인 베드로를 부르셔서 생의 마지막 순간에 중대한 사명을 맡겨주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헤셀은 “존재하는 것은 곧 요구받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요구받고 있음을 느끼는 한 나는 살아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요구하는 한 나는 늙은이가 아닙니다.




시간과 친해져야

제가 어르신들께 도전하고 싶은 두 번째 점은 시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시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은 멀고먼 별에 우주선을 보냅니다. 숫자화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먼 거리에 있는 별에까지 우주선을 보내 사진을 찍게 하는 것이 현 인류의 과학입니다. 인간의 생활공간은 점점 넓어지고 있습니다. 우주선이 닿은 곳까지 일반인들이 가려면 오랜 시간이 흘러야 하겠지만 공간에 대한 인간의 생각은 점점 넓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공간적 지평을 넓혀놓은 인간이지만 시간은 단 1초도 되돌리지 못합니다. 타임머신은 아직은 영화 속의 현실일 뿐입니다. 시간은 인간이 어찌해 볼 수 없는 차원입니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고 미래로 미리 나아가고 싶어도 그렇게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공간에서 만회하려고 노력하는가 봅니다. 시간 흐름의 흔적을 없애려고 얼굴에 짙은 화장도 하고 주름도 펴봅니다. 시간의 흐름을 얼굴이라는 공간에서나마 되돌려보려는 노력입니다.

그러나 노년을 잘 살려면 시간으로부터 달아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을 되돌리려 하지도 말고 다가오는 시간을 막대기로 쳐 막아보려 하지도 말고 시간 안에서, 시간과 화해하며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이를 먹으면 사람들은 대체로 현재의 자신이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구박하고 부인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노인들은 스스로 ‘과거’에 속해 있는 존재라고 믿습니다. 마음 한 구석에는 분명히 그렇게 믿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지만 왠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은 자기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꾸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시간 안에서 시간과 화해하고 살 수 없습니다. 노인이 될수록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현재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어르신들은 스스로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구박하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르신들은 지난 세월을 너무도 훌륭하게 살아오셨습니다. 식민지 치하에서, 전쟁의 와중에서, 가난 속에서, 그리고 이민 초기의 역경 중에서 너무도 훌륭하게 살아오신 분들이 바로 여러 어르신들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세월을 사시다 보니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고 허리는 굽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이제 어르신들은 화장도 짙게 하시고 페이스 리프팅도 하시고 주름도 펴십시오. 단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렇게 하지 마시고 미래를 위해서 하십시오. 미래의 더 멋진 삶을 위해 단장하시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영화를 가리켜 ‘킬링 타임용’ 영화라고 말합니다. 이는 특별한 메시지가 들어 있는 영화가 아니라 ‘소일거리’로 볼만한 영화란 뜻입니다. 저는 이런 종류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내용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킬링 타임용’이란 말이 싫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왜 시간을 죽입니까(killing time)? 죽은 시간을 살려내도 시원치 않은데 왜 멀쩡히 살아 있는 시간을 죽이냐는 말입니다. “늙은이가 뭐 할 일이 있나, 그저 소일(消日)이나 하며 지내는 거지.” 이런 말을 하는 노인들이 있는데 저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늙을수록 소일거리를 찾으려 하지 말고 꿈을 가져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소일거리가 시간을 죽이는 일이라면 꿈을 이루려는 노력은 시간을 살리는 일입니다. 가뜩이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왜 죽이려 합니까? 죽어가는 시간도 살려서 알뜰하게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과거로 돌아가려 해서는 안 됩니다.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미래를 향해 자신을 활짝 열어놓는 개방성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늙을수록 추억으로 살려고 하지 말고 꿈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화려한 시절은 흘러간 과거가 아닙니다. 현재가 가장 화려한 시절이요 여러분의 전성기입니다. 과연 미래의 나는 어떻게 될 것인지, 미래라는 시간은 어떤 모습으로 내게 다가올 것인지 부푼 기대를 안고 기다리는 개방성이 어르신들을 ‘잘 늙은 노인’으로 만들어줄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이 곧 가장 큰 축복이고, 지금 이 순간이 여러분 생의 전성기이며 가장 거룩한 순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