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선희목사 (소망교회)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 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 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1964년 그러니까 꽤 오래 전 이야기가 됩니다. 제가 미국 유학시절에 YMCA에서 운영하는 청소년 여름캠프에 회목으로 잠시 참여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나는 나름대로 미국 젊은이들의 세계에 또 그들의 신앙 구도, 이런 것을 많이 보고, 깨닫고, 공부를 많이 할 기회가 되었습니다만은 특별히 그 일주일 동안에 캠프 생활 을 끝내고 마지막에 촌극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무슨 각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 나름대로 일주일동안 이렇게들 준비해 가지고 몇 팀으로 나누어서 맨 끝날 연극을 하는 것입니다. 그 연극 중에 한 장면은 제게 많은 교훈을 주고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런 이야기입니다. 무대 위에 많은 십자가가 놓여 있습니다. 수십 개의 십자가라! 큰 십자가, 작은 십자가, 또 보기 좋게 만든 십자가 어떤 것은 흉하게 아주 흉물스럽게 만든 십자가, 그리고 어떤 것은 아주 화려하게 장식물로 만든 것 뭐 이런 것들 저런 것들이 수십 가지가 널려 있습니다. 이제 그 학생들 하나 하나가 나름대로 여러 가지 색채의 옷을 입고 나와서 십자가 하나씩을 고릅니다. 큰 것을 찾아보다가 "아이고 이것은 너무 크다!" 좀 작은 것을 하였다가 "이것은 내 몸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는 들었다 놓고 들였다 놓고 하다가는 맨 마지막에 고르는 것이 뭐냐하면은 가장 작은 것, 화려한 것, 목걸이 십자가, 십자가 반지, 그리고 모자 위에다가 이렇게 장식으로 만들어 놓은 면류관 같은 그런 십자가 이런 것들만 하나씩 다 들고 나가더란 거예요. 아무도 그 크나큰 십자가는 진 사람이 없어요.

맨 마지막에 예수님으로 분장한 청년 하나가 나와서 돌아보고 가장 흉물스럽고, 가장 무거운 십자가를 예수님이 다시 지고 그리고 갑니다. 그것으로 연극은 끝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많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내가지고 있는 십자가가 못 마땅해 합니다. 너무 무겁다고 내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내 분수에 넘친다고, 때로는 이건 내가 져야할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져야될 건데, 이게 무슨 팔자가 잘못 되어 가지고 내게 왔다고 뭔가 운명적으로 잘못된 것인지 역사적으로 잘못된 것인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인지 내가 지고 있는 십자가는 분명 내 것이 아니라고, 내가져야 될 것이 아니었다는 거지요. 그래서 이건 벗고, 다른 것, 또 가벼운 것, 또 작은 것, 또 작은 것, 아니면 아무것도 안 지면 좋겠다. 그렇게 그렇게 부르짖으며 한 평생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라는 것은 죽음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서양사람들은 사람이 죽었으면, 땅에다 묻고 거기에다 비석 대신에 십자가를 거기에다 딱 박아 놓습니다. 나뭇가지로 십자가를 만들어서 여기 시체가 있다. 뭐 그런 뜻입니다. 또 때로는 자비에 상징으로 십자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적십자가 뭐 공산주의자들도 국경 없이 봉사하는 기관이다. 그래서 적십자사, 청십자, 뭐 이런 얘기가 또 역시 십자가는 자비에 표식으로 사용되는데 대한 인식이올시다. 그 다음에 십자가가 보이면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에 몸 된 교회가 거기 있다. 그래서 십자가가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본질은 아주 원초적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시는 십자가입니다. 놀라운 기적이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십자가 안에 있는 무궁무진한 뜻을 바로 깨닫기만 하면 그에 구원이 있고 영생이 있고 자유가 있는 것올시다. 예수의 십자가 그것은 속죄에 의미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예수의 죽으심은 바로 대제사장에 재물이라는 것이지요. 속죄의 재물이요. 자기 자신의 피를 가지고 나가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된 것이다. 속죄의 재물이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죄인을 영접하시기 위해서 지불하는 하나님 자기 자신의 희생에 대한 계시다. 그래서 하나님 자기 자신의 고통, 하나님 자기 자신의 완전한 사랑에 대한 계시가 이 십자가 안에 나타나 있다. 그리고 공의와 사랑이 완성을 이루는 바로 그 결정체가 십자가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주는 총 주제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고 또 그리고 우리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처럼 그 누구를 위해서 대신 지는 그런 십자가에 성격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가 지는 것처럼 착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십자가라는 것은 죄 인으로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 되기 위해서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고통과 손해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불행이라는 것은 언제나 다 가지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양자택일 쪽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어떤 사람이 술꾼에게 묻기를 "술을 먹겠느냐? 떡을 먹겠느냐? 밥을 먹겠느냐?"하고 물었더니 "술에 밥 말아 떡 안주해 먹겠다."고 그건 안 되는 것이에요. 어느 것 하나만 택해야 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도적인 결단을 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노예 상태에서 끌려가는 것이 아니고, 남하는 데로 따라가는 게 아니고, 타인 지향적인 그렇게 물거품처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진리도 생명도 없습니다.

주도적으로 나 스스로 하나를 선택합니다. 선택하기 위해서 나머지는 버려야 합니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딸 하나를 앞에 놓고 아버지는 "동쪽 사람한테 결혼해라." "어머니는 서쪽 사람한테 결혼해라." 이 외동딸을 놓고 자꾸 괴롭히니까 딸이 마지막에 하는 말입니다. "동가식 서가숙하겠다." "동쪽 사람하고 먹고, 서쪽 사람하고 가서 자겠습니다." 그 되는 일입니까? 여러분, 연애 해보셨으면 알지요. 언젠가는 부득이 결단을 해야 됩니다. 한 사람 좋게 하면 나머지 사람 슬프게 만들어요. 어느 순간에는 끝맺는 결단이 없이는 참 사랑을 이룰 수 없는 겁니다. 그런 일이 진짜로 있습니다.

제주도 신혼여행 가서 옛날에 애인하고 전화 걸다가 들켜서 이혼 당한 사람이 있더라고요. 이런 여자는 사랑할 자격이 없는 거예요. 그 동안에 애인이 몇 이 되었던 간에 결혼식 날 ''땡'' 하고 다 잊어버려야지 거기에 대고 몰래 전화 걸다가 맞아 마땅하지요. 비행기장 앞에서 두들겨 맞고 있더래요. 얘기 듣고 아무도 안 말려요. "잘했다." 그래요. 제주도 가면 그런 얘기 많이 듣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십자가가 뭡니까? 진리를 찾기 위해서 거짓을 버리고 참 사랑을 위해서 나머지를 다 버려야 그게 바로 그 아픔의 십자가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 가운데는 밭에 감춰진 ''보화''란 비유가 있지 않습니까? 이 유명한 얘기지요.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하는 사람이 그것을 얻기 위하여 자기에 소유를 다 팔아서 샀다는 점을 생각해 보세 요. 다 팔 때 아까웠겠느냐 말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요. 크나 큰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저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이것 파는 것 어렵지 않아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절대적 가치에 것을 찾았다면 상대적으로 쉽게 잊어버릴 수 있는 거지요. 또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에요. 미래적 가치가 분명하다면 현대적 가치는 미련 없이 버릴 수 있는 것이에요. 신령한 세계를 바로 포착한 사람이라면 물질적인 것이란 초월할 수 있는 것이에요. 영원한 가치에 것을 찾았다면 사실로 현재적인 것이란 꾸벅꾸벅 지나가는 건데 그것 뭐 별 것 아니잖아요. 거기에 그렇게 마음을 많이 쓸 필요가 없다 그 말이요. 어차피 가는 길이요. 어차피 떠나야 할 세상이요. 결국은 참된 가치, 절대적 가치가 아직도 이해되지 않아 그걸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10장 전장에 걸쳐서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 열둘을 불려놓고 제자를 임명하고, 그에게 훈시하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되는 길, 그의 제자됨에 대하여 그 조건과, 비상한 각오와, 결단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에요. 아주 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적극적 자세를 요구합니다.

한 교육학 학자가 자기 아이들을 놓고 시험을 해봤답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벌벌 기어다닐 때 그 아이들 기어다니는 앞에다가 장애물을 놓아 봤대요. 어떤 아이는 장애물만 딱 앞에 있으면 기어가다가 멈추는 거예요. 그건 체념형이래요. 한 평생 그렇게 살더랍니다. 또 기어다니는 아이 앞에 장애물을 놓았더니 어떤 아이는 비껴 가더란 말입니다. 이건 도피형이요. 어떤 아이는 장애물을 놓으니까 딱 치워놓고 직행하는 거예요. 가고 싶은 데로 가요. 이것 이 진취형이요. 그거 하나가 쓸만한 아이가 되더란 말입니다. 여러분, 장애물이 있다고 거기 앉아서 팔자신세 타령하겠습니까? 비껴 가겠다고 비겁하게 이리저리 피하겠습니까? 정면대결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것이 제자에게 요구하는 말씀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 가운데 보면 우선 세계관을 바꿔라. 세계는 오늘 34절에 보면 난해한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고 검이로라. 세상을 너무 안일하게 보지 마라. 화평, 안일, 평안, 무사 이것만 기대하지 마라. 나는 그런 것을 위해 오지 않았다. 많은 독재자마다 평안과, 번영과 자유와 안일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만은 준 사람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검을 주러 왔노라. 전쟁 상황을 말씀하시고요. 또 가정에 대해서도 가정에 화목, 그래요 가정에 ''평화 가정이 잘되는 것, 아이들 잘 되는 것'' 이것만 열심히 위합니다 만은 그것도 아니에요. 오늘 본문에 보면 가정, 화평, 잊어버리라 이것이에요. 그보다도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한다.

"현세적인 출세, 또는 세속적인 것, 욕망 다 잊어버려라. 이런 포기가 있고서야 주님에 제자 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은 사랑에 문제입니다. 자, 사랑을 놓고 보세요. 이거 양자택일이요. 주님을 사랑하려면 버릴 것이 많아요. ''아가페''적인 절대적 사랑, 그건 단독적이고 독단적이에요. 그런고로 참 사랑을 위해서 끊어 버려야 되요. 자기 사랑, 자기 명예, 자기 지혜, 자기 판단, 인간적인 지식도 다 버려야 됩니다. 미련 없이 버려야 됩니다. 그리고야 예수에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요. 그래서 오늘 예수님 말씀은 지기 십자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건 내 몫에 대한 십자가요. 누구나 지게 되는 십자가입니다. 가끔 개혁을 한다는 분들이 뼈를 깎는 아픔. 뭐 그런 얘기합니다만은 깎는다고만 하지. 안 깎더라구요. 뼈를 깎는 아픔이 없어요. 그러니까 개혁이 없는 것이에요. 정말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이 없이 개혁은 있을 수가 없어요. 모두에게 좋게, 모두에게 이것은 잊을 수 없는 이야기예요. 내 포기를 요구합니다. 큰 희생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이제 오히려 미워해야 된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덜 사랑해야 된다는 거지요.

가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자! 순교해야 될 시간에 이 가족 때문에 순교 못하는 사람 있어요. 뭐 아내가 과부 된다고 슬퍼하고 아이들이 고아가 된다고 하니까 자식사랑 때문에 그만 순교해야할 결정적인 시간에 순교 못했어요. 그 다음에 보니까 본인은 부끄러운 삶을 살지요. 아이들도 잘될 수가 없지요. 오히려 그럴 때에 자식들을 놓아두고 순교했던 사람들이 그 자식들은 "우리 아버지는 순교자요." "내 남편은 순교자요."

오히려 그들이 더 활발하게, 생명력 있게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정말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겠습니까?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전쟁 상황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젊은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 이 사람 그럴 수가 없었어요. "근심하면 돌아가리라." 성경은 이렇게 유감스럽게 설명합니다. 정말로 영생의 생을 얻는 것이란 그까짓 재산이 뭐 문제입니까? 어차피 버려야 될 건데 이걸 못하고 근심하며 돌아갔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못했다.'' 그것입니다. 전쟁 상황이에요.
여러분, 혹 일선에서 그런 고생을 해 봤습니까? 저는요. 전쟁 때 한 번 겪어봤는데요. 보세요. 총 소리가 "땅"하고 포 소리가 쿵쿵 날 때 그 일선에서도 잠이 잘 와요. 얼마든지 잘 수가 있는데 총 소리가 나면 아내가 정신이 아찔합니다. 그때는 군화가 어떻게 가벼운지 그 배낭이 총이 얼마나 가벼운지 몰라요. ''펄펄'' 납니다. 왜 사느냐? 죽느냐? 하기 때문이에요. 전쟁이란 "잘 산다. 못 산다." 뭐 "마누라 생각이 사느냐? 여보, 내 생각납디까?" 그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사느냐? 죽느냐? 하나밖에 없어요. 생명, 오로지 생명, 오로지 영생, 여기다가 초점을 맞추는 바로 전쟁 상황이에요. 이것 예수님의 말씀이요. 그런고로 여기에 가족 자기 생명, 이 세상에 평화, 번영, 쓸데없는 생각 말아요.

다 잊어 버려요. 그래야 참으로 얻을 것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순교 상황입니다. 순교자가 순교하려고 할 때 가족 생각하고 할 수 있습니까? ''아내 사랑'', ''아이들에 사랑'' 이것 다 효도해야 될 부모가 계시는데, 순교상황에서는 이런 것들이 다 원수요. ''원수'' 오늘 성경에 가족이 원수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원수예요. 가족이 내 출세에 길을 막는 다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주님께 사는 순교 상황에서는 가정이 원수요. 그런가 하면 이건 실제 상황입니다. 추상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현실적이고 실존적인 것이올시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는 모습을 한 번 보십시다. ''바야바''에 음모가 있지요. 빌라도에 정치적 그 만행이 있지요. 바리새인 교인, 사교도 교인들, 가롯유다의 배반, 많은 것들이 엉키고 엉켜서 예수의 십자가가 지금 다가오고 있는데 그러나 예수님은 이 복잡한 문제를 아주 간단하게 풀었어요.

요한복음 18장 11절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 기도하고 그가 얻은 응답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잔,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대하는 예수님의 기본 자세입니다. 우리 역시 비록 작은 십자가요. 내 목에는 작은 십자가로 되어지는 자세는 마찬가지요. 누구도 원망하지 마세요. 누구 때문도 아니요. 세상을 탓하지도 말고 오로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십자가 내게 주시는 잔 감사한 마음으로 받을 것이요. 여러분 갈라디아서 6장 2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그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느리라. 여러분 마음 속 깊이 뿌리박고 있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려요. 그리고 나서야 주님을 만날 수 있어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어요. 우리의 모든 근심은 ''십자가를 안 지겠다''는 거지요. 십자가가 내게서 비켜가기만을 바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가능하면 ''십자가 조그만 것, 목걸이 정도만...''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 여러분에게는 참 생명력 참된 구원에 능력을 체험 할 수가 없어요. 그걸 꼭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령은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내 몫에 대인 십자가, 오! 이것을 내게 주시는 것입니까? 이것이 주에 뜻입니까? 이것이 주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면 그 길로 가겠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찬송하면서 갈 것이에요. 그러면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주의 능력이 함께 하십니다.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그의 영혼은 무한히 자유할 것입니다. 신비로운 능력을 체험하며,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