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데...

한 아버지에게 고만고만한 연년생의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들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조금이라고 더 많이 가지려고 애쓰겠지요.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는 세 아들을 공평하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할지라도 아들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자식들을 공평하게 사랑하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설령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공평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 공평한 사랑을 과연 좋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형제라도 얼굴이 각각 다르듯이 성격과 기질 등 모든 것이 다른데 부모가 똑같은 방법으로 사랑하는 것이 정말 공평한 사랑이고 좋은 사랑일까요?

좋은 부모 되기가 그리 쉽지 않음을 점점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려는 의지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부모가 되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좋은 부모의 사랑일까요? 그냥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면 다음 두 가지 보기 중에서 하나를 택해 보십시오. 첫째는, 세 아들들이 모두 ‘아버지는 나보다 내 형/동생을 더 사랑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랑입니다. 둘째는 세 아들들이 모두 ‘아버지는 내 형/동생보다 나를 더 사랑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랑입니다. 이둘 중 어느 쪽이 더 좋은 사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둘 모두 '편애'이고 공평한 사랑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둘 모두에게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후자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아버지는 나보다 내 형/동생을 더 사랑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랑은 자식이 성인이 되어도 남을 상처를 줍니다. 반면 ‘아버지는 내 형/동생보다 나를 더 사랑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랑은 자식이 철들고 어른이 되면 ‘졸업’하게 될 순진한 착각입니다. 상처보다는 착각이 훨씬 더 고치기 쉬우므로 후자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아버지는 내 형/동생보다 나를 더 사랑해.’라고 여전히 굳게 믿는다면 뭔가 크게 잘못됐다고 봐야 합니다. 어렸을 때는 순진한 착각이지만 어른이 됐는데도 여전히 똑같이 생각한다면 그건 일종의 장애나 병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한 뿌리에서 나온 세 종교의 갈등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한 부모에게서 나온 형제들입니다. 셋 다 유일신을 믿는 종교이고 아버지가 같은 종교입니다. 셋 다 아브라함을 자기들 믿음의 조상으로 받들고 있습니다. 물론 형제라고 모든 면에서 다 같지는 않습니다. 형제도 모두 다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달라 보이는 형제들도 잘 보면 분명 닮은 점이 있습니다.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도 한 뿌리에서 나온 형제들이므로 다른 점과 공통점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세 종교의 다른 점과 같은 점을 지금 다 말씀할 시간은 없고 또 그것이 제가 말하려는 바도 아닙니다. 오늘 제가 말하고 싶은 점은, 세 종교가 모두 이제는 어른이 된 지 오래 됐다는 사실입니다. 세 종교의 나이를 낮춰 잡아도 맏형인 유대교는 모세를 기점으로 하면 3천 살이 넘었고 둘째인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점으로 잡으면 2천 살이 넘었으며 막내인 이슬람교도 마호멧을 기점으로 잡으면 1천 5백 살이 다 되어 가니 이제는 모두 어른이 되고도 남았을 나이입니다. 그런데도 이들 세 종교는 아직까지도 ‘아버지가 누굴 더 사랑하는가?’를 두고 경쟁하는 데 매달려 있습니다. 다 자란 자식들이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얼마나 한심할 것이며 아버지 입장에서는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게다가 이들 삼 형제들은 때로는 '아버지가 나를 더 사랑한다.'는 생각 정도가 아니라 이를 뛰어넘어 '아버지는 나만 사랑한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때로는 그게 유치한 줄 깨달았는지 이제는 ‘아버지가 누굴 더 사랑하는가?’가 아니라 ‘누가 아버지께 더 효자인가?’를 두고 경쟁합니다. 서로 '내가 아버지 마음을 더 잘 알아드리고 더 잘 모신다.'고 주장하며 경쟁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도 유치하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효도라는 것이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누구와 비교하지도 않고 그냥 할 때 그것을 제대로 된 효도라고 하지, 뭘 바라거나 남과 경쟁하면 그것은 이미 효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나이를 그렇게 많이 먹어 어른이 된 지 오래된 자식들이 유치하게 사랑 경쟁, 효도 경쟁이나 하며 싸우고 있으니 아버지 마음이 편할 리가 없습니다.

현재 인류가 겪고 있는 분쟁에는 이 세 종교가 직접, 간접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양식 있는 사람들은 '같은 신을 섬기는 세 종교가 서로 싸우고 있다.'며 비웃고 있습니다. 세 종교가 인류가 현재 겪고 있는 분쟁의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심지어 '유일신'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유일신'이라는 것이 모든 독선과 아집의 근본 원인이고 관용이 자랄 수 없게 만드는 온갖 악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문제는 유일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일신을 믿는다는 종교가 어른이 되지 않은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이가 그렇게 많이 먹은 종교들이 아직도 유치하게 사랑싸움이나 하고 효도 경쟁이나 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한 고등학생의 이유 있는 저항

종교의 미성숙한 모습은 비단 다른 종교와의 경쟁이나 갈등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일들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재작년에 한국에서 있었던 한 사건은 작다면 작지만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흔히 미션스쿨이라고 부르는 한 개신교 고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3학년 학생이 학교에서 강제로 참석하게 하는 예배와 성경 시간에 참석하지 않을 자유를 달라고 요구하며 일인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 경우는 종교의 자유를 주장했다고 하기보다는 종교 행사를 거부할 자유를 주장했다고 해야겠지요. 이 학생은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컴퓨터에 의해 미션스쿨에 배정되어 그 학교를 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예배에 참석해야 했고 교목이 가르치는 성경공부를 들어야 했습니다. 이 학생은 2년 동안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아무 문제도 느끼지 못하며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학생회장이 되기 위해서 다니지도 않던 교회에 출석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학교에서는 교회에 다니는 학생만(가톨릭 교인은 제외되고 개신교인만!) 학생회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학생회장이 되기 위해서는 교회에 다녀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에 출석했고 학생회장이 됐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자기가 한 일에 대해 회의를 느꼈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면서 학생회장이 되기 위해 기독교인이라고 속여야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고 그 일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목을 찾아갔습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교목은 "네 말이 옳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교목의 말에 힘을 얻었는지 이 학생은 2004년 6월의 어느 날 교내방송을 통해서 종교 선택의 자유를 주장하고 자신은 매 주 한 번씩 드리는 예배를 거부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을 속인 데 대해 사과하고 학생회장 직에서 사퇴하겠다고 했습니다. 학교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학교 측은 곧 징계위원회를 열고 이 학생을 전학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학생은 전학할 것을 거부했습니다. 전학을 가면 자기는 예배를 강요받지 않겠지만 남아 있는 학생들은 여전히 억지로 예배에 참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학교 측으로부터 전학을 거부하면 퇴학시키겠다는 협박을 받으면서 교육청 앞에서 '헌법이 보장한 종교의 자유, 그러나 학교는 예외?'라고 쓴 피켓을 들고 일인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옛날 히브리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40년 동안 광야를 헤맸듯이 한 학생이 강요된 종교행사로부터 자유를 얻으려고 시작한 기나긴 투쟁의 시작이었습니다.

그가 겪은 긴 과정을 여기서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사건이 신문과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고 논란거리가 됐습니다. 이로 인해 평준화 제도 등 전반적인 학교 교육제도의 문제까지 토론의 주제에 올랐습니다. 이 학생의 주장은 예배를 없애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예배 참석을 원치 않는 학생들에게 대체과목을 택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학교 측은 완강했습니다. 학교는 교육을 통해 선교한다는 건학 이념을 내세우며 학생의 주장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학생은 단식에 들어갔습니다. 이 때 부모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말할 수 없이 애간장이 탔겠지요. 그러나 이 학생의 부모도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들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결국 단식 46일 만에 학교 측은 학생의 주장을 수용했습니다. 그리고 올봄 서울시 교육청은 산하 사립학교에 특정 종교 교육을 강요하지 말라는 공문을 내려 보냈습니다. 한 학생의 목숨을 건 투쟁이 이런 변화를 이끌어낸 것입니다.

저는 이 과정을 신문과 인터넷을 통해 관심을 갖고 지켜봤습니다. 저는 이 학생의 주장을 학교 측이 받아들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미션스쿨이 선교 방식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기를 바랐습니다. 저도 미션스쿨 출신입니다. 저는 미션스쿨에 가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고 그 학교를 즐겁게 다녔습니다. 그때 참석했던 예배와 성경공부가 제게는 큰 도움이 됐습니다. 저는 이미 그때 기독학생이었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때는 학교 측의 방침이 다른 학생들에게는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권위에 습관적으로 복종해왔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종교 행사에 참석하지 않을 자유를 달라고 주장했던 이 학생의 세대는 우리 세대와 다릅니다. 마땅히 달라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 세대가 옳은 것이 아니라 그들 세대가 옳습니다. 지금 세대는 그만큼 자랐고 성숙해졌습니다. 그런데 종교는 이에 발맞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이 옳으면 그것을 인정하고 스스로 변화하려고 노력해야 할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옛날식으로 눌러 복종시키려 하니 말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방법은 자식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달라져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방법도 나이를 먹으면서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이고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도 역사가 쌓여가면서 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도 역사가 쌓여가면서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아이 때는 아버지의 관심을 끌고 더 많은 사랑을 차지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씁니다. 그러나 어른이 된 후에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두 계명 사이의 간격

오늘 우리는 출애굽기 20장 3절에 나오는 십계명 중 첫 번째 계명을 읽었습니다. "너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이 말씀은 누가 봐도 '독선적'입니다. 하나님은 한눈팔지 말고 당신만 믿고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마치 자기 애인을 수많은 멋진 사람들 속에 두고 한눈팔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곁눈질하지 말고 나만 바라보라니까!"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두 번째로 읽은 마태복음 6장 24절의 말씀은 이와는 느낌이 아주 다릅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너희는 하나님과 맘몬을 아울러 섬길 수는 없다." 이 말씀 역시 십계명의 첫 계명 못지않게 '독선적'입니다. 한 주인만을 섬겨야지,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섬길 수 없는 것은 '다른 신'이 아니라 '맘몬'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이를 '재물'이라고 번역했지만 원문은 '맘몬'입니다. '맘몬'은 단순히 재물이 아니라 '신격화된 재물'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에는 엄격한 가치판단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옳고 그름이 판단의 근거입니다.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에서는 다른 신을 두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켜준 신이기 때문에 그분만 섬겨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다른 족속들을 야훼 하나님을 섬길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을 노예로 부리다가 마지못해 풀어준 이집트인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만큼 이 말씀은 시야가 넓지 않습니다. 보편적이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보편성'이란 것이 자리 잡을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잘 해주는 사람이 최고이고 자기에게 잘 해주는 신이 최고의 신이라고 생각될 때였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보편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하나님이 보편적인 신이라 한들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깨닫고 이해할 능력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는 달랐습니다. 이미 사람들의 생각에는 '보편성'이란 개념이 자리 잡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자기만의 기준을 넘어서서 옳고 그름을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됐습니다. 곧 내게 잘 해주는 신이 반드시 좋은 신은 아닐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됐다는 말씀입니다. '맘몬'이 그런 신입니다. '맘몬'은 물질의 신입니다. 그를 섬기면 물질의 복을 받는다고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맘몬은 더불어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가시적인 복을 가져다주지 않을지라도 무엇이 옳은 길인지, 어떤 신을 섬기는 것이 옳은 길인지를 선택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마음에 들게 효도해서 더 많은 복을 받을까?'를 고민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한 마디로 말하면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유치함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학생들을 강제로 종교 행사에 참석하게 해서 한 번이라도 복음을 더 접하게 만들고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키겠고 말겠다는 미션스쿨의 건학 이념 같은 것을 주저하지 말고 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은 시간이 없어 어른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얘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이에 대해서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강압적이고 독선적인 유일신 신앙은 유대교 및 이슬람교와 경쟁하고 갈등할 때만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그와 같은 독선과 아집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든가 '내 방식이 아니면 안 된다'는 독선은 아직 어른이 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어른이 된 자식들이 효도 경쟁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