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호목사 (토랜스 한인 연합감리교회)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사위와 딸과 두 손주를 보러 올라온 자신의 장인 이드로를 공손하게 맞아 들였습니다 (출 18:7). 그리고 자신의 장막에 장인을 모셔 들여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하도록 배려해드린 이후 장인 곁에 앉아 입을 열었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와 애굽 사람에게 행하신 모든 일과 [광야] 길에서 그들의 당한 모든 고난과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일을 다 그 장인에게 고하”였습니다 (8절). 모세의 입을 통해 나오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이야기를 들은 이드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모든 은혜를 베푸사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심을 기뻐하”였고 (9절),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너희를 애굽 사람의 손에서와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백성을 애굽 사람의 손 밑에서 건지셨도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히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10, 11절). 이드로는 모세로부터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나님이야말로 모든 신들 중의 신임을 확신했고, 즐거운 마음으로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리고 이드로는 모세와 아론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떡을 나누었습니다.
머나먼 광야를 여행했기에 피곤한 몸이었지만, 이드로는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는 아침 식사를 재빨리 마치고 서둘러 사위가 일하고 있는 장막으로 걸어갔습니다. 그가 모세의 업무실이 있는 장막에 이르렀을 때 그 장막 밖에는 길다란 줄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세를 만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의 업무실로 쓰이고 있는 장막에 들어가 보니 그곳에도 사람들이 우글거렸습니다. 이드로가 보니 모세는 재판석에 앉아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백성들이 가지고 온 송사들을 듣고 판결해 주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 때 그 백성들의 수가 어느 정도 되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출애굽기 38:26에 의하면, 20세 이상의 남자의 수가 자그마치 603,550명이었다고 합니다. 20세 미만의 아이들과 여자들을 합친다면 적게 계산해도 3백만 명 정도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3백만 백성의 송사를 모세 혼자서 해결하고 있었으니 이드로가 보았던 긴 행렬은 그날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매일마다 있었던 현상이었습니다.
이드로가 그 현상을 보았을 때 분명히 무엇인가가 잘못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세에게 묻습니다. “그대가 이 백성에게 행하는 이 일이 어찜이뇨? 어찌하여 그대는 홀로 앉았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의 곁에 섰느뇨?” 장인에게 모세는 이렇게 그 이유를 대답해 줍니다. “백성이 하나님께 물으려고 내게로 옴이라. 그들이 일이 있으면 내게로 오나니 내가 그 양편을 판단하여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알게 하나이다” (15, 16절). 백성들이 문제가 생기면 모세를 찾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백성들이 문제를 가져오면 양쪽 사정을 들어본 이후 모세는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에 기초하여 그들에게 올바른 해답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물론 모세가 자신의 백성들의 문제들을 들어주고 재판을 해 준 것과 또한 백성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지도자 모세에게 가져온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넓은 안목에서 보면 고쳐져야 할 관행이었습니다. 비록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변해야 할 관행이었습니다.
모세는 3백만이라는 거대한 백성들의 지도자로서 모세는 거대한 민족을 위해 감당해야 일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사소한 일에 온종일 시간을 허비해야 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백성의 사소한 문제까지 일일이 신경 써주는 지도자가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도자가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쓰다 보면 더욱 큰 일을 계획하고 추진해 나가야 할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대한 실수는 한 명의 지도자가 사소한 문제들까지 모두 도맡아 버리면, 다른 사람들이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동참할 기회를 주지 못함으로써 인재 양성에 실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짧은 목회 기간이었지만, 지난 날의 목회를 통해 깨달은 바는, 목회자가 교회 내의 크고 작은 너무 깊게 간섭하다 보면 모세가 범했던 실수를 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름대로는 열심히 목회를 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목회를 크게 잘못합니다. 목회자가 사소한 문제들까지 일일이 간섭해서 해결하다 보면 교우들이 그러한 일들을 스스로 처리할 기회를 빼앗아 버리게 되고 스스로 해결할 자정 능력을 없애 버립니다. 그러다보니 교우들은 조그마한 문제만 발생해도 자연스럽게 그것을 목회자에게 가져오고, 목회자는 앞에 놓인 현안 문제를 해결하느라 더욱 중요한 일을 제쳐 두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교우들이 목회자에게 가져오시는 문제들의 80-90%는 교우와 교우 사이에 발생한 문제입니다. 곧 관계성의 문제이지요. 그런데 관계성의 문제는 시간이 약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서로에 대한 오해와 분노가 누그러지면서 자동적으로 해결될 문제들입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중재를 해야만 할 중대한 문제라고 할지라도 굳이 목회자가 끼어 들어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 보다는 교우들 중에 한두 분의 도움이나 아니면 마음이 맞는 그룹의 도움을 받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
예로 들어서, 어떤 분이 어느 한 분의 교우로부터 별로 좋지 않는 이야기를 들어서 소위 시험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들 사이의 문제가 그날 오후나 아니면 하루 이틀 이후에 그 문제를 알고 있는 다른 삼자로부터 목회자에게 전해집니다. 좋은 소식은 빨리 전해지지 않는데 나쁜 소식, 머리 아픈 소식은 어찌 그리도 빨리 전해지는지… 그러면 목회자는 양쪽이 동시에 이길 수 있도록 할 해법을 찾느라고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더욱 재미 있는 것은 그 문제를 전달해 준 교우는 이미 문제의 원인을 알고 있고 또한 그 원인은 사소한 감정의 문제이거나 오해에서 비롯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곧 그 문제를 목회자에게 전해준 그 교우가 문제 해결을 위해 중간에 나섰다면 그 문제는 빠른 시간 내에 해결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목회자가 끼어 들지 않고서도 풀 수 있는 문제라면 그것을 목회자에 전달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목회자가 그러한 문제로 골머리를 앓으며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현상이 계속 재연되는 것은 목회자에게 이유가 있습니다. 교우들이 어떠한 문제이든지 가져오면 “알겠습니다. 문제의 빠른 해결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면서 그것을 너무 쉽게 받아 들였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언급된 이스라엘 지도자 모세처럼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드로는 자신의 사위 모세에게 도움될 만한 권면을 줍니다 (19-22절). 이드로의 권면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모세는 이제 더 이상 사소한 일들로 백성과 백성 사이의 서 있지 말고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의 중재자가 되라. 둘째, 마땅히 순송해야 할 율례와 법도를 백성들에게 가르치라. 셋째, 백성들 가운데서 합당한 인재를 선별하여 지도자로 세우라. 넷째, 그 지도자들이 백성들의 작은 일들을 해결하도록 역할을 분배하라.
이드로의 권면을 받아 들인 모세는 “온 백성 가운데서 재덕이 겸전한 자 곧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진실무망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자들 빼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21절)을 선별하여 세웠습니다. 3백만 명을 위한 지도자들을 세웠다면, 600명의 천부장, 6,000명의 백부장, 12,000명의 오십부장, 그리고 60,000명의 십부장이 세워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3백만 명을 위한 지도자만해도 78,600명이나 되었습니다. 모세는 지도자들을 선별하여 그들에게 합당한 교육(곧 율례와 법도 교육)을 시켰고, 교육을 받은 그 지도자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백성들을 지도하도록 했습니다. 그랬더니 선별되어 훈련 받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소송들을 마치 모세가 처리했던 것처럼 훌륭하게 처리해 냈습니다. 전에는 자신들의 소송을 가지고 모세에게 찾아오던 그들이 지도자로 교육 받고 난 이후에는 타인들의 소송문제까지 해결해 주었고, 자신들의 지도자 모세의 힘든 사역을 돕는 사역자들이 되었습니다. 역할분담이 이루어졌습니다. 모두가 함께 서로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공동체로 변했습니다.
지도자의 가장 큰 역할은 백성들 가운데 지도자감을 찾아 지도자로 키우는 것입니다. 곧 인재양성이 지도자가 감당할 가장 큰 역할입니다. 이것은 교회 목회자의 가장 큰 역할은 성도들 가운데 인재를 찾아 키우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에베소서 4:11-12). “그가 [그리스도께서]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사도, 선지자, 복음 전도자, 목사, 교사는 교회 내에서 성도를 온전케 하고, 봉사의 일을 하며, 그런 사역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더욱 든든히 세워나가도록 세움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목회자 홀로 사역하는 시대는 끝나야 합니다. 이제는 교회 사역이 목회자 중심에서 교우들 중심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목회자가 교우들을 돌보아주는 것이 아니라 교우들 스스로가 서로를 돌보아 주는 책임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나는 우리 교회에도 광야교회처럼 성도들이 서로의 신앙과 삶에 책임을 져주는 책임 공동체가 되기 원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은 “저 목회자 이상주의적인 감상에 젖어 있구먼! 꿈 이야기야!”라고 혀를 찰런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헛된 꿈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꿈은 광야교회에서 현실화 되었던 이야기입니다. 이 꿈은 초대교회에서 현실화 되었던 이야기입니다. 이 꿈은 요한 웨슬리 목사님과 초대 감리교우들에 의해 실현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꿈은 오늘날에도 복음 전파 사역을 성공적으로 감당하고 있는 교회들이 실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꿈은 살아 있고, 기필코 이루어져야 할 이야기입니다. 그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와 우리 모두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꿈입니다.
M. Scott Peck이라는 분은 자신의 저서 “다른 북소리 (The Different Drum)”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공동체라는 단어를 의미 있게 사용하고자 한다면, 서로 간에 솔직한 대화를 나누는 법을 배운 개인들로 구성된 집단에 한하여만 적용해야 한다. 이들은 평온을 가장한 허물을 벗어 버리고 보다 깊은 관계를 형성하며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며, 서로 즐거워 하며, 남의 일을 자기 일처럼 여기는 의미심장한 헌신적인 삶을 발전시켜 나간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교회라고 불리우기 한다면 ‘나와 너가 만나 서로 세워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육신과 영혼에만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신앙생활하는 다른 형제자매의 육신과 영혼에 책임을 지는 서로 의존적이고 협조적인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어야만 합니다.
“밴드목회”로 성공적인 목회를 감당하고 계시는 신당제일교회의 담임 목사이신 장학일 목사께서 “밴드 공동체 만들기: 교회의 체질을 바꿔라” (p.90) 라는 저서에서 보리밥과 찰밥의 비유를 들어서 교회를 설명했습니다. “공기에 가득 쌓인 보리밥에 수저를 갖다 대니 순간 잘 삶기지 않았던지 낱알들이 밥상 위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교회도 이런 교회가 많다. 서로 전혀 융화되지 못하고 그저 교회라는 밥그릇에 각자 상관 없이 모여 있다가 누가 숟가락이라도 갖다 대면 와르르 쏟아지는 곳, 사랑의 나눔이 전혀 없이 따로따로인 교회가 너무 많다. 그곳에는 자신을 죽이는 사랑의 나눔이 없다. 그저 밥공기에 모여 주님이 자신을 먹여 주기만을 원한다. 같이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야 어찌되건 상관이 없다. 솥에서 삶겨도 여전히 자신만 있을 뿐 주위는 없다. 그러다가 주님이 잡수시려고 숟가락을 대시면 와르르 무너진다.”
과연 우리 교회는 보리밥 교회인가요? 아니면 아니면 찰밥 교회인가요? 따로따로 노는 나 홀로 공동체인가요? 아니면 서로에게 책임져주고 서로를 세워주는 공동체인가요? 나는 우리 교회가 찰밥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곧 한 솥 안에서, 우리가 다함께 푹푹 삶아졌으면 합니다. 말씀과 기도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들이 함께 푹 삶아졌으면 합니다. 삶아진다는 것은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성질을 죽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존심, 교만, 독선을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포기하는 것입니다. 푹 삶아지다보면 삶아지는 과정 동안 각자의 독특한 진액이 빠져 나와 서로 섞임으로써 공동체는 더욱 강한 결속력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사용하시기에 합당한 책임지는 공동체인 찰밥 교회를 세우기 위해 우리 교회는 셀사역을 실시하려 합니다. 셀사역을 통해 교회의 일꾼을 키우고, 셀 안에서 성도들의 신앙이 나누어지고, 개인의 필요가 나누어지고, 개인의 꿈이 나누어지고, 격려되고, 위로 받고, 서로 세워주며, 함께 자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 모임 안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지는 모습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드로가 모세에게 전했던 거룩한 꿈을 꿉니다. 그리고 이 꿈 속으로 교우 여러분 모두를 초대합니다. 이 꿈은 우리 모두가 함께 이루어가야 할 꿈입니다. 여러분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입니다. 여러분의 동참을 필요로 합니다. 이 꿈을 함께 이루어가지 않으시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