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원목사 (지구촌교회)

그냥 그만 천국 가고 싶네요.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노래를 부르고 또 춤을 추고싶어 질 때가 있습니다. 소위 우리 인생이 잘 나갈 때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할 때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할 때, 성공이 우리를 부르고 손짓 할 때 우리는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들의 노래가 지속되지 못하는 내 인생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갑자기 한순간 우리의 노래를 그치게 만들고 춤을 추든 우리의 동작이 손을 들어 가슴을 치게 만드는 가슴 아픈 고통이 한순간 기대하지 않게 우리의 삶의 장에 엄습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을 배경으로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적 경험이였다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되어있는 출애굽기15장1절을 보시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15장1절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노래로 시작하죠? 네, 노래로 시작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신 하나님,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로 이 출애굽기15장이 시작합니다.
한번 20절을 보세요. 출애굽기15장20절입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아 지금 노래하고 춤추고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노래와 춤이 그렇게 오래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출애굽기 15장 24절을 보시면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뭐 한다고 그랬어요? 원망하며, 한순간 노래를 그치고 그 속에서 탄식과 신음소리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지도자를 원망합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고통이 찾아온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22절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구절에 보시면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며 그들이 나와서 수르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얼마를 행하였다고요?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더라’ 자, 홍해바다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간 후에 꼭 사흘을 지나갔습니다. 그러니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지 사흘만에 상황이 지금 역전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을 얻지 못했어요. 광야에서 사막에서 물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물을 얻지 못하고 목이 타는 갈증이 그들을 지금 괴롭히고 있습니다.

자, 그들이 마라라는 장소에 도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지나서 하루에 20킬로를 행군했다면 사흘을 지났으니까 약 60킬로를 걸었겠죠? 지금 성지순례를 하시는 분들은 KAL기를 타고 이집트의 카이로에 내려서 이제 스에즈 운하를 버스로 건너갑니다. 스에즈 운하를 지나가면 30분쯤 정도 버스 타고 가면 마라 라는 장소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지금 물을 얻지 못한 것이에요. 지금도 거기 모세의 우물 ‘아이윤 무세’ 라고 불리는 모세의 우물이라는 장소가 거기에 있습니다. 지금도 물을 마실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가면. 자, 어떤 사람들은 아마도 목 타는 갈증 때문에 물을 마셨지만 쓴 물 이여서 그들은 그 물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하나님과 모세에 대해서 원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 조금 전까지 노래하고 춤추면서 기뻐했든 이 백성들이 불과 사흘만에 지금 탄식하고 고통하고 신음하면서 원망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인생의 그림이 아닌가요? 그러나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의 노래를 빼앗아 가는 이런 신음과 고통을 경험할 때 우리의 춤동작을 멈추게 하고 우리의 가슴을 치게 만드는 이런 고통이 우리의 삶에 다가올 때, 이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가 있다면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고통을 당했을 때 고통 그 자체보다도 우리를 더 괴롭히는 것이 있다면 내가 왜 이 고통을 당하는 줄을 몰라요. 고통의 의미를 모르고 고통을 당할 때 그것은 훨씬 더 깊이 우리를 괴롭힐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아무리 고통이 심해도 내가 고통의 의미를 알 수 있다면 우리는 이 고통 속에서 견딜 것입니다. 버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통을 극복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고통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 이것처럼 우리가 고통이 우리의 삶의 장에 찾아올 때 중요한 과제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면 개인도 공동체도 더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내야할지 모릅니다.

아니 하나님은 이 고통의 레슨을 깨우치기 위해서 아직도 레슨을 깨닫지 못한 우리들에게 한동안 더 이 고통의 행군을 계속하도록 허용하실 지 모릅니다. 아니, 우리 앞에 또 다른 마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며칠 전에 3.1절을 기념했습니다. 우리가 일제의 치하에서 당한 수모, 이것은 우리 민족사의 가장 수치스러운 고통의 사건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3.1절은 이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는 아름다운 우리민족의 일어섬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와 여러분은, 우리민족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고통 속에서 고통의 레슨을 충분히 배우지 못한 까닭인지도 모릅니다. 고통의 의미를 발견했다면 고통의 레슨을 제대로 배웠다면 사실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통은 별로 두려워할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물어야 할 정말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고통의 의미, 무엇일까요?
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고통이 다가올까요? 이 고통의 의미, 도대체 무엇일까요?

첫째로 본문은 가르치기를 이 고통은 하나님의 시험이라고 가르칩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한번 따라서 하세요 “고통은 하나님의 시험이다”
아니, 하나님의 시험이라니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즉각적으로 이런 반문을 하실 분이 있습니다. 아니, 성경에 내가 보니까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시험을 말하십니까? 이것은 성경 조금 알아야 이런 질문 할 수가 있겠지요?

야고보서 1장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사람들을 시험하지 않는다. 그런데 거기서 시험이라는 단어는 영어성경으로 그 단어를 읽어보면 Tempt라는 단어가 쓰여져요. 명사로 Temptation , Tempt. 유혹한다 이런 낱말로 번역될 수도 있지마는 본래 이것은 파괴적 의미의 시험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파괴적 의도를 가지고는 우리를 결코 시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른 의도로 우리를 시험할 수가 있어요. 교육적인 의도로는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든지 시험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시험,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Temptation, 파괴적 의도의 시험은 아니지만 이것은 교육적인 의도의 시험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시험을 내어주는 과제와 꼭 같습니다. 여러분, 공부하든 시절에, 아직 여러분 가운데는 공부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과거에 공부하든 시절에 시험날짜가 다가오면 어쩐지 나는 가슴이 설레고 시험이 기다려진다. 내 인생에서 시험처럼 기분 좋은 일이 없다. 이렇게 느끼신 분 혹시 계십니까? 한번 손들어보세요. 네, 그런 분 없으시겠지요. 그렇지만 시험이란 필요 없다 시험 없애자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 한번 손들어보세요. 네 아무도 시험을 엔조이 할 수는 없지마는 시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학생은 시험을 치러야 합니다. 그 시험을 통해서 객관적인 내 실력을 평가하고 점검을 받습니다. 거기서 나는 무엇이 부족한 것인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완할 때 시험을 통해서 우리는 성숙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의 비슷한 의도로 저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시험을 허용하신다고 생각해요. 본문의 시험은 그런 의미의 시험입니다.

자, 본문의25절을 한번 다시 읽어보시면 25절 우리 다시 한번 읽습니다. 다같이 시작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하나님이 이 사건을 통해서 법도와 율례를 정하십니다. 무슨 의도여요? 너희들이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 붙들고 말씀 그대로 살아가는 내 백성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의도로 시험을 하셨다 는 말입니다. 여기 시험하실새, 그 단어가 바로 오늘 이 본문의 이 단어가 영어성경에 보시면 그 단어가 테스트라는 단어로 되어있어요. 혹은 어떤 번역에 보면은 Proof라는 단어로 되어있습니다. Proof, 이렇게 증명한다 점검한다 테스트한다 그런 뜻입니다. 이것은 교육적 의미의 그런 시험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오늘 본문의 사건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시험하셨을까요? 자, 오늘 출애굽기 15장1절이 어떻게 시작했어요? 무엇으로 시작했습니까? 노래로, 춤으로, 왜 노래로 시작했습니까? 자 15장전에 몇 장이 있습니까? 네? 대답이 어렵습니까 14장이죠. 14장에 어떤 사건이 있습니까? 네, 홍해바다가 갈라졌어요. 자, 홍해바다 앞에서 죽을 줄 알았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홍해바다를 갈라주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은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갔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한 것입니다. 어찌 춤추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가 있어요? 죽음 가운데서 살아났고 원수들이 물 속에 장사 지내고 하나님의 기적을 보았든 이 백성들이 지금 춤을 추고 노래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흘 후에 하나님은 상황을 바꾸십니다. 자, 목이 타는 갈증 속에서 가까스로 물을 마셨지만 토해낼 수밖에 없는 쓴 물이었습니다. 왜 이런 상황을 허용하셨을까요? 저는 거기에 하나님의 이런 의도가 있다고 생각을 해요. 너 사흘 전에 너희들 내 기적을 보고 찬양했지? 그리고 감사했지? 그런데 내가 시험하고 싶다 그것이 뭐냐 하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때도 너 찬양 할 수 있니? 너는 내가 너희들에게 베푼 축복 때문에 찬양했고 감사했고 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했지? 그러나 이 축복이 계속되지 않는 것처럼 보여지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기적이 계속되지 않는 이 어두움과 메마름의 상황 속에서도 너는 아직도 여전히 나를 찬양하고 나에게 감사하고 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니?

유명한 중세기 신학자 가운데 타마스 아카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 이렇게 공부하셨죠? 토마스 아퀴나스, 그런 신학자가 자주하든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들 가운데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내가 축복을 경험했기 때문에, 내가 신앙을 가진 것이 나에게 유리하고 나에게 훨씬 더 이익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아니 대부분 우리의 신앙생활의 출발은 어쩌면 이런 동기로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가 강조하고 싶어했든 것은 이것입니다. 그 차원에서 우리의 신앙이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할 지 모르지만 내가 그 하나님을 경험했더니 그 하나님과 관계했더니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들어갔더니 그 하나님이 너무 좋은 거여요 그래서 나중에는 하나님 지금은 제가 하나님을 너무 사랑해요. 조건 없이 사랑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좋은 거여요. 그래서 찬양하는 겁니다.

자, 우리가 부부로 남편과 아내가,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났을 때 조건이 없을 수는 없죠? 조건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저 남자를 만나면 저 여자를 만나면 내 인생이 훨씬 더 행복해지겠다 라는 어떤 판단 때문에 우리는 상대방을 내 배우자로 선택하고 우리는 결혼에 골인해서 부부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살아보니까 거기서 조건이 없는 인격적인 사랑이 싹터 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한, 어느 한 순간에 도달하면 이럴 수가 있어요. 여보, 난 당신이 그냥 좋아, 너무너무 좋아, 밥 안 해주어도 난 좋은 거야 너무 너무 사랑해! 저는 날마다 그렇거든요?

이것은 조건을 뛰어넘은 사랑이에요. 조건을 뛰어넘은 것이에요. 그 한 인격체에 대한 순수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런 사랑을 지금 시험하고있는 것이에요. 너 내 축복 때문에 사흘 전에 춤추고 노래했는데 내 기적 때문에 그렇게 찬양했는데 그 기적이 계속되지 않아도 오늘 이 메마른 광야 가운데서도 나는 너희들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이 있다. 너 오늘도 찬양할 수 있니? 이 사막에서도 찬양할 수 있니? 이 광야에서도 찬양할 수 있니? 그리고 메마를 광야에서도 마라의 쓴 물 앞에서도 나를 향한 사랑을 고백할 수 있니? 이것이 테스트여요. 이것이 테스트. 그러므로 고통이 올 때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테스트라는 것을,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알아차린 성도들은 이렇게 기도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 합격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저는 여러분과 저가 이 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통은 무엇일까요?

둘째로 고통의 의미, 고통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따라서 하세요. “고통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아니 아무리 고통이 소중한 어떤 레슨을 준다고 그래서 고통 그 자체가 목사님 어떻게 축복일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고통 그 자체가 어떻게 축복일 수가 있단 말입니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래요 두 가지 이유,

첫째 이유는 뭐냐하면 대부분 고통이라는 것은 우리를 또 다른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도록 인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성도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고통은 결코 고통 그 자체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것을 기억하세요. 우리가 제대로 이 고통 앞에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반응한다면 고통은 고통으로 끝나지 않아요.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또 다른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도록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자, 본문에서 어떤 사건을 볼 수가 있죠? 자 지금 마라의 쓴 물을 경험하고 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부르짖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기적이 일어났습니까? 그 쓴 물이 변하여 어떻게 되었어요? 단물이 되었어요. 거기 나무 가지 하나를 던졌더니 그 쓴 물이 변하여 단물로 바뀌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자, 그 단물이 얼마나 대단한 맛이었을까요? 그런데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해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부터 단물을 계속 맛보았더라면 그 단물이 얼마큼 실감나는 단물 이였을까요? 그러나 조금 전에 쓴 물을 맛보았기 때문에 마실 수 없고 토해 냈기 때문에 그래서 맛본 그 단물은 얼마나 더 감격적인 단물이였을까요?

여러분 인생의 그 쓰디씀의 요소가 없다면 우리는 인생의 그 진정한 달콤함을 우리는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슬픔이 없이 기쁨의 의미를 알 수가 있을까요? 고통이 없이 환희의 의미를 알 수가 있을까요? 이별의 그 쓰라림이 없이 우리는 만남과 해후의 그 감격을 알 수가 있을까요? 상실의 고통 잃어버리는 고통이 없이 소유하고 있는 행복을 우리가 알 수가 있을까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얘기인데요 불란서의 그 루불 박물관에 그 유명한 모나리자 상이 일시적으로 도난 맞은 때가 있었다고 그랬지요? 그때 어떤 사건이 일어난 줄 아십니까? 가장 많은 숫자의 관광객이 루불 박물관을 찾았다는 거여요. 왜 그랬을까요? 그 도난 맞은 그 자리를 구경하려고 왔어요. 없어진 그 자리 구경하려고, 우리는 없어지고 나서 우리는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고통 때문에 이 고난 때문에 우리에게 축복은 비로소 축복으로 다가올 수가 있는 것, 그래서 고통은 또 다른 축복을, 그리고 또 다른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는 하나의 통로인 것을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고통 그 자체는 아픔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통 앞에서 감히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말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고통, 나는 알아 이 고통은 축복이야!

이 고통이 축복일 수가 있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제가 고통은 고통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고 강조했죠? 고통 저 건너편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축복의 자리까지는 결코 멀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고통을 넘어서면 그리고 고통을 견디고 나가면 축복은 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교훈입니다.

자,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이 어떻게 끝나는 줄 아십니까? 마지막 구절 우리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7절입니다. 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이 마라라는 장소에서 엘림까지는 불과 11km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거리여요. 그러니까 뭐 금새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여요. 11km정도, 네, 아주 가까운 거리죠. 네, 마라에서 조금 지나가서 이 엘림에 도달했더니 엘림에 뭐가 있어요? 우선 뭐가 있다고요?

물샘이 열두 개, 여러분 사막에서 단 하나의 샘물도 소중한데 그 샘물이 무려 열두 개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려나무가 몇 개가 있어요? 7그루가, 이것은 얼마나 황홀한 오아시스일까요? 얼마나 풍성한 오아시스여요? 자, 이 마라 바로 저 건너편에 멀지 않은 곳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 엘림, 이 풍성한 오아시스, 그런데 지금 마라에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하고 있습니까? 왜 원망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해요 엘림이 보이지 않아서 그래요. 엘림이 보이지 않아요.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엘림이 보이지 않아도 엘림은 존재합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일이 보이지 않아요 희망이 보이지 않아요 앞길이 보이지 않아요 끝없는 고통이 그대로 인생을 자폭해 버릴 것 같은 이 끝없는 고통의 터널이 오늘 나를 붙잡고 나를 괴롭힙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내일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엘림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엘림이 보이지 않아도 엘림의 존재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엘림이 보이지 않아도 엘림의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엘림이 보이지 않아도 엘림의 비젼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엘림을 준비하셨어요. 할렐루야! 엘림을 준비하셨어요.

옆에 있는 사람 한번 얼굴 쳐다보시면서 특별히 인상 쓰는, 옆에 사람 쳐다보시면서 엘림이 멀지 않았어요. 한번 해 보세요. 엘림이 멀지 않았어요. 그래도 계속 인상 쓰는 사람은 인생의 희망이 없습니다. 네, 엘림이 멀지 않았어요. 엘림이 멀지 않았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고통은 축복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만약 고통 앞에 제대로 반응하면 심지어 오늘 민족이 당하고있는 우리 민족적인 고통의 경험도 이것이 우리민족이 경험할 수 있는 위대한 엘림의 친구가 될 수가 있습니다. 이만하면 잘 통과할 수 있다는, 저는 우리 민족이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또 우리역사가 이 고단한 세월 속에서 하나님의 엘림의 비전과 계획을 붙잡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통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고통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것은 숨겨진 하나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고통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따라서 하세요 “고통은 하나님의 계시다” 그게 무슨 뜻일까요 고통이 하나님의 계시라니, 그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 고통이라는 장에서 하나님이 스스로를 계시해 주신다는 말이에요. 스스로를 보여주신다는 거여요. 그러니까 우리편에서는 내가 고통의 장에서 그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요. 고통의 장보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생생한 삶의 장은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26절의 말씀이 그 대답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지 않습니까? 26절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 하나님이 어떤 약속을 하고있어요? 내가 애굽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들에게 내리지 않겠다. 그 앞에 전제가 있어요. 만약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고 살면, 너희들이 질병을 넘어선다 극복한다 치유될 것이다. 또 오늘의 고통도 치유될 수 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마지막에 자신을 어떤 말씀으로 계시하셨습니까? 내가 누구라고 그랬습니까?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따라서 하세요.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이 하나님의 이름을 뭐라고 부릅니까? 여호와 라파 이렇게 말합니다. 다같이 “여호와 라파” 다른 말로 야훼 라파, 그 말의 뜻은 치료하시는 하나님, Healing God ,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

여러분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질병의 자리입니까? 질병 때문에 아파하고 고통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 질병 때문에 그 아픔 때문에 부르짖어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더니 하나님이 나를 고치셨다 나는 새롭게 경험하는 거여요. 어떤 하나님을? 아! 하나님은 분명해, 사람들이 들려준, 목사가 말한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정말 내가 경험해 보니까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야! 저는 여러분이 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치유의 하나님은 우리의 병만 치료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환경도 치료하십니다.

자, 마라의 쓴 물, 그 쓴 물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셨더니 하나님이 간섭하셨더니 그 마라의 쓴 물이 바뀌어서 무슨 물이 되었다고요? 단물이 되었어요. 환경을 치유하시는 하나님. 그렇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우리의 병든 가정, 오늘 고통 당하고있는 가정, 오늘 갈등 속에 딜레마 속에 빠져있는 우리의 가정도 하나님의 개입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료받을 수 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정을 치료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사회를 치료할 수 있는 하나님, 그리고 우리의 고단한 역사, 우리의 민족도 치료할 수 있는 하나님, 남북의 갈라져 있는 이 고통도 치료할 수 있는 하나님,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에요. 그러니까 고통은 그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는 야훼 라파,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경험의 계기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성경에서 욥기를 많이 읽죠? 욥기의 가장 중요한 교훈이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욥기를 대하고있는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합니다.
자 욥이 지독한 고난을, 고통을 받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이 버티고 견디었더니, 마지막 장에 보니까 욥기 제일 마지막 장에 보니까 마침내 욥이 축복을 갑절로 더불로 받았다 재산도 더블로 늘어나고 자식들도 갑절로 늘어나고 마누라도 더블이 되었다 그것이 욥기의 결론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과연 축복일까요? 나와 함께 삶을 그렇게 정겹게 나누었든 내 마누라가 죽고 그리고 다른 마누라 얻어서 더블로 축복 받았다 그게 축복일까요? 일찍 가신 마누라는 얼마나 가슴을 칠 일입니까?

저는 그것이 축복이 아니고 저는 욥기의 가장 중요한 결론이 있다면, 교훈이 있다면 욥기 마지막 장에 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욥기 42장5절에 욥이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서 이 고통 후에 회개하고 엎드리면서 하나님 앞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무어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 제가 전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주님에 대해서 귀로만 들었사옵더니 이제는 눈으로 뵈옵나이다. 무슨 얘기입니까? 저가 전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냥 귓결에 들었어요. 목사님을 통해서 설교자를 통해서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사람 통해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더라, 제가 하나님을 귀로 들었어요 그러나 하나님, 지금 저는 하나님에 대해서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있어요. 눈으로 뵙고 있어요 하나님을 만난 겁니다. 고통 속에서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고통 속에서 나에게 다가오시는 그 하나님을 실존적으로 그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하게 된 거여요.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계기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고통 속에서 만난 그 하나님이 사랑이시더라 나를 사랑하신다. 이것만 확인하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아무리 열악하고 아무리 나를 짓누르고 아무리 고통이 와도 내가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면 우리는 다시 일어 설 수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여기 그 모세가 이 쓴 물을 치료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서 나무 가지를 하나 탁 던졌어요. 그랬더니 물이 변했습니다. 좀 지나친 감도 있지만 이 말씀을 묵상하든 알프핑크 라는 성서주해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이 나무 가지에서 십자가를 본다. 나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나무를 본다.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을 치유하시는 방법중의 하나,
우리 베드로전서 2장24절에 보시면 십자가라고 그러지 않고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인류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 뭔 줄 아세요?
우리가 고통 당할 때 고통의 의미를 물어도 사실은 제가 설교하지만 속 시원하게 그 의미를 다 해결하거나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 속에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하면 한가지 분명한 대답을 얻어요.

그것은 뭐냐하면 아! 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같이 고통 하신다. 고통 속에 있는 나를 그대로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찾아오신 하나님, 그 십자가에서 그분도 애매하게 자신의 죄와 상관없이 그 고통 그 아픔을 당하신 그 주님, 그리고 내 고통을 이해한다고 말씀하시며 내게 다가오시는 그 주님, 그분을 믿었더니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 주님, 이 고통 속에 나를 그대로 버려 두지 아니하고 내 삶의 현장에 찾아오기 위해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내게 찾아오신 그 예수그리스도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난해한 고통의 한복판 속에서도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파요 힘들어요 그렇지만 제가 알아요 주님이 저를 사랑하는 줄을 저가 믿습니다. 이 사람은 다시 일어나요 다시 일어날수 있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따뜻함을 안겨다 주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읽는 그 책 가운데 세계적으로 치킨 스프 스토리 (Chicken soup for the soul)가 있죠? 그 중에 한 이런 아름다운 얘기를 제가 기억합니다.

미국의 중부 시골마을에 마샤 에븐스라는 틴에이저 소녀 하나가 살았습니다. 12살에서 13살이 되면서 틴에이저로 들어서면서 수술을 받게 되었어요. 입 근처에 신경조직이 잘못되어서 수술을 받는데 수술도중에 그 신경하나를 건드려서 이 마샤 라는 어린 소녀의 입이 삐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틴에이저 소녀가 입이 삐뚤어지니까 보통 그것이 자화상의 상처를 받는 일이 아니죠. 그러니까 친구 만나기 싫어하고, 학교 가기 싫어하고, 가기는 가도 말도 하지 않고, 친구들을 떠나게 되고, 집에 와서도 말하지 않고 엄마하고도 심지어는 대화를 끊었습니다. 우울한 소녀가 되어갔습니다.

그런데 13살, 그 해가 끝나 갈 무렵 자기의 생일날, 뜻밖의 그 생일날 이 소녀 앞에 그 선물소포하나가 배달이 되었는데 꽃이었어요. 치자 꽃 한 송이, 아주 아름다운 치자 꽃 한 송이가 배달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치자 꽃이 뭔 줄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런 꽃이 있다고 그러더라구요 있죠? 전 모르지만 있데요 하여튼 치자 꽃, 굉장히 아름다운, 하여튼 나는 무슨 꽃인지 잘 모르지만 하여튼 치자 꽃 하나가 배달이 되었답니다, 한 송이가. 그런데 누가 보냈는지 몰라요. 익명으로 배달이 되었어요. 단지 한마디 “마샤! I love you so much”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 치자 꽃을 보고 가만히 마샤가 있다가 처음으로 몇 달만에 엄마하고 대화를 열었습니다.

엄마한테 한다는 소리가, 엄마 이게 누가 보냈을까 도대체 이게 누굴까? 글쎄 말이야 누굴까? 아마 너를 좋아하는 남학생이겠지. 에이 누가 나를 좋아해 나 같은 사람을, 그래도 너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거야. 그럼 이름 쓰지. 수줍어서 아마 남자들도 뜻밖에 수줍어하는 사람들이 많더라 얘, 아마 그런 사람이 보냈겠지. 그럴까?.

녜, 아무것도 아닌 치자 한 송이 꽃 때문에 마샤는 말을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따뜻해지기 시작했어요. 그 다음에도 생일날 어김없이 치자 꽃 한 송이가 배달이 됩니다. 그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마샤는 밝아졌고 정상적인 삶을 살았고 좋은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혼 때까지도 계속 배달이 되었어요. 궁금했던 것이 결혼 후에도 이 꽃이 배달될까? 그런데 자기가 시집가고 결혼하자말자 결혼 직후에 불행하게도 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치자 한 송이는 더 이상 배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샤는 알았습니다. 누가 그 꽃을 보냈는지, 꽃이 마샤의 인생을 바꾼 것이 아니죠. 엄마의 사랑이 바꾼 거지요.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는 고백가운데 많은 고백은 이것입니다. 나는 십자가 앞에서 새로운 삶을 찾았다고, 십자가가 우리를 변화시킨 것일까요? 십자가라는 나무가 아닙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십자가가 우리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 하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지금 고통 속에 있지만 고통의 의미를 풀지 못하지만 그러나 이 고통 속에서 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리고 이 한가지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면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나를 창조하신 나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그 하나님 만나고 그 사랑을 확인하고 그 하나님 한번 붙들 수가 있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이 고통의 세월을 극복할 수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라에서 벌떡 일어설 것입니다. 그리고 엘림을 향하여 또다시 찬양을 부르며 춤추며 새로운 내일을 향해서 걸어갈 줄로 믿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이 하나님의 고통을 극복하는 하나님의 치유가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