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희목사 (연동교회)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는 동화에는 체셔 캣이라는 말재주가 좋고 꾀가 많은 고양이가 등장합니다.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에서 빠져나가는 길을 찾다가 갈림길에 다다랐습니다. "어떤 길로 가야 하나요?" 엘리스가 체셔 캣에게 물었습니다. 체셔 캣은 되물었습니다. "어디에 가는데?" 앨리스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체셔 캣은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 아무 데도 갈 수 없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알아야 하며 좋은 길로 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로 가나 바로 가나 서울만 가면 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길, 바른 길을 갈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곳이 다 길인 곳은 길이 없는 곳입니다. 광야란 길이 없습니다. 길이 없는 곳이 사막입니다. 아무 길로나 가는 사람들은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길로 가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는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좋은 길을 두고 나쁜 길만 골라서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에게는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어떤 이는 좋은 길을 가고, 어떤 이는 나쁜 길을 갑니다. 어떤 이는 성공적 길을 가고 어떤 이는 실패의 길을 갑니다. 어떤 이는 가야할 길을 가고, 어떤 이는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갑니다.
사람에게만 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물에게도 길이 있습니다. 새에게 길이 있습니다. 바다의 고기들이 길이 있습니다. 작은 미물들까지도 다 길이 있습니다. 기러기들이 이동할 때는 V자 대형으로 떼를 지어 이동합니다. V자 대형은 굉장히 과학적인 이동 대형입니다. 공기 역학적으로 볼 때에 V자 형은 선두 기러기는 공기의 저항을 받지만 나머지 기러기의 공기 저항이 줄어듭니다. 선두에 선 기러기의 날개 짓은 공기 저항을 상대적으로 줄여 나머지 기러기들이 장거리 이동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 때에 선두 기러기는 가끔 대열 속에 들어와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다른 기러기가 선두에서 서고 충분한 휴식을 취한 다음 선두 기러기는 다시 선두에 섭니다. 만일 대열에 있던 기러기 중 한 마리가 지치거나 병이 들어 대열에서 낙오하게 되면 건강한 다른 두 마리가 양쪽에 따라 붙어 함께 가면서 기력을 회복할 때까지 간호하며 대열에서 완전히 떨어지지 않게 해줍니다. 이러한 상호 협력이 기러기의 장거리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길과 길을 가는 모습이 신비롭습니다.
욥기 38:25에는 "누가 폭우를 위하여 길을 내었으며 우뢰의 번개 길을 내었으며"라고 합니다. 태풍은 사납고 길을 잃은 것 같지만 그러나 태풍도 길이 있습니다. 태풍은 유익한 선물입니다. 태풍은 바다 밑에까지 산소를 공급합니다. 태풍이 오지 않으면 해산물이 흉작이 됩니다. 태풍도 하나님의 길을 따라 다닙니다. 구름도 길이 있습니다. 한반도는 거의 중국 쪽에서 오는 구름의 영향을 받습니다. 황사도 중국에서 옵니다. 한반도에서 대륙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길이 있는데 그 길이 다 하나님이 정하신 길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길은 좋은 길입니다. 자연의 길입니다. 그런데 유독 사람만 길을 헤매고 찾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21:8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사이에서 길을 잘못 선택하였습니다. 길 찾기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길을 몰라 헤맵니다.
시편 1편은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을 나눕니다. 마태복음 7장에는 좁은 길과 넓은 길을 나눕니다. 그리고 성경은 바른 길과 굽은 길을 제시합니다. 헤어라는 분은 "우리가 어떤 한 목적지를 가고자 할 때 우리는 그 길이 편안하고 안락한 길인가 아닌가에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그 길이 올바른 길인가 아닌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어느 길이 올바른 길인가? 어느 길이 좋은 길인가? 우리는 길을 잘 알고 좋은 길을 가르쳐야 합니다.

첫째, 좋은 길은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길입니다. 예수님은 좋은 길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길입니다. 그 길로 가야 구원받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십니다. 그 때에 도마가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라고 합니다. 도마의 이 말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천하에 유일한 길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길입니다.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는 길입니다. 히브리서 10:20에는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시는 유일한 길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길은 독일의 길 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가장 시원한 길은 미국의 길일 것입니다. 도로점유율에 비하여 가장 짜증스럽고 비효율적 길은 한국의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가장 좋은 길을 알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13-14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좋은 길은 넓은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좁은 길이며 힘든 길이며 짜증스런 길일지 모릅니다.
헨리 나우웬은 ''마음에서 들려오는 사랑의 소리''라는 자신의 책에서 "네 여정을 막는 사소한 일에 너무 신경을 쓰거나 꾸물거리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삶의 굳건한 터전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사소한 일들이 쌓이고 쌓여 네가 가는 길에서 영원히 끌어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사소한 일, 비본질적 일,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일은 때로 우리가 가장 좋은 길을 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장애가 됩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한 길도 있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길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필수불가결한 길입니다. 주님 가신 길은 십자가의 길이라도 좋은 길입니다. 주님 가신 길은 고독한 길이라도 좋은 길입니다. 주님 가신 길은 죽음의 길이라도 좋은 길입니다. 주님 가신 길은 비난의 길이라도 좋은 길입니다.

둘째, 좋은 길은 마땅히 행할 길입니다.

성경은 패역한 자의 길과 마땅히 행할 길을 대비합니다. 좋은 길과 나쁜 길을 비교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과 패역한 길은 전혀 다른 길입니다. 패역한 자의 길은 가시와 올무가 있습니다. 영혼을 지키는 자가 멀리하는 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가시와 올무가 있는 가장 힘든 길을 편하다고 합니다.
패역한 자라고 하는 말은 구부린 자란 뜻입니다. 즉 구부려 사는 자입니다. 생각이 구부려져 있고, 삶이 구부려져 있는 자입니다. 잠언 2:15에는 정직한 길을 떠나 어두운 길로 행하는 자는 "그 길은 구부러지고 그 행위는 패역하니라"고 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은 늙어도 떠나지 아니하는 길입니다. 그의 성격에 맞는 마땅히 해야할 생활의 길을 의미합니다. 유대 랍비의 교훈에는 "아이에게 한 가지 직업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곧 도적질을 가르치는 것이다"란 말이 있습니다. 좋은 길을 가르쳐야 도적이 되지 않고 건강한 사회인이 될 수 있습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쳐 늙어도 떠나지 않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도적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옛 말에도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최근에 자연육아운동이라는 게 생겼습니다. "태아 때 교육이 여든까지", "청소년 문제, 뱃속에서부터 잡겠습니다"라는 표어를 걸고 제왕절개수술 반대와 부부태교를 강조합니다. 자연육아를 통한 0-3세 유아기의 정서적 안정이 청소년기 성격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제왕절개는 자연분만보다 7배 이상이나 산모와 아기의 건강에 해가 됩니다. 우리나라는 미국의 2배인 산모의 43%가 제왕절개로 아기를 낳습니다. 제왕절개는 문자적으로 왕이 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다보니 공주병, 왕자병을 많이 만들어냅니다. 제왕절개는 면역을 부족하게 만듭니다. 산모들이 자기가 편하려고 자기 아이를 약하게 만드는 꼴입니다. 태어날 때 건강, 지혜, 영성, 교육은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게 해야합니다. 이것이 부모의 도리입니다. 한자에서 거짓 위(僞)자는 사람(人)의 행위(爲)가 다 거짓되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6:5에는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는 말이 나옵니다. 사람들의 이 생각하는 것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릇되고 거짓되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편할 편(便)자는 사람(人)이 바뀌어야(更) 모든 것이 편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실은 시설, 제도, 조직이 바뀌어야 편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변해야 사회가 변합니다. 사람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야합니다. 사람이 바뀔 수 있도록 좋은 길을 가르쳐야 세상이 바뀝니다.
시편 107:7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사막 길을 방황하고 거할 성을 찾지 못할 때에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길은 좋은 길입니다. 하나님의 길은 마땅히 행할 길입니다. 아말렉과 전쟁을 하고 위태하지만 좋은 길입니다. 모압으로 돌아가고 모압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지만 그 길도 좋은 길입니다. 하나님의 길은 실패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길은 가장 안전합니다. 하나님의 길은 가장 편안합니다.

셋째, 좋은 길은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고 합니다. 좋은 길은 반드시 가르쳐야 합니다. 또 가르칠 책임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15에는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길을 가는데 바른 길을 떠나면 그릇된 길로 갑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점점 바른 길이 아닌 그릇된 길을 갑니다. 발람의 길을 갑니다. 이방 신을 섬기고 하나님을 비방하고 자기 중심적 길을 갑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의 딸들과 함께 합니다. 이런 아이들에게 바른길 가르쳐야 합니다.
어제 아침 모일간지에는 어떤 독자가 작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분인데 휘경역에 탔을 때에 어떤 젊은 여대생이 할아버지를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게 하고 팔을 꼭 부축하여 쓰러지지 않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시청역에서 내리셨는데 알고 보니 여학생은 할아버지와 아무 관계가 없는 학생인데 할아버지가 힘들어하셔서 그렇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착한 젊은이가 많이 있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저는 그 학생이 교회 다니는 학생이길 바랍니다. 저는 그 부모가 좋은 신자이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의 젊은이들이 그런 젊은이들이길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부모가 좋은 길을 가르치는 그런 부모이기를 바랍니다. 젊은 세대들에게 이 얘기를 하면 "하나를 봐서 어떻게 아냐?"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성세대에게 이 얘기를 하면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할 것입니다.
시편 25:4에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라고 시편의 기자는 말합니다. 누구나 주의 길을 배워야 합니다. 좋은 길을 배우지 않아도 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회환경이 우리 가정을 좋지 않은 길로 인도하고 약한 길로 유도합니다. 최근 미국에서는 TV끄기 운동이 한창입니다. "비만에서 청소년 구하자"고 하면서 아이들로 하여금 리모컨과 과자 봉지를 놓고 운동하러 나가게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는 책 읽고 그림 그리는 아이가 컴도사보다 창의력이 뛰어나다고 하였습니다. 아이들의 학습과 창의성의 관련 점수를 보면 독서가 31.6, 미술이 29.6, 블록 놀이가 28.2, 소꿉놀이가 27, 실외활동이 26.8, 음악이 26.8, 학습지가 25.9인 반면 컴퓨터는 24.4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컴퓨터 도사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길 없는 광야에서 구름과 불을 길을 가르치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길이 점점 모호해지는 시대에 우리가 삽니다. 하나님의 영광인 구름과 성령이신 불이 우리 자녀에게 길을 가르치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결론
솔로몬은 열왕기상서 8:36에서 "주는 하늘에서 들으사 주의 종들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 마땅히 행할 선한 길을 가르쳐 주옵시며 주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신 주의 땅에 비를 내리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죄가 가득하고 길이 모호하고 비가 오지 않는 이 땅에 절실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좋은 길을 가르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좋은 길을 하나님께로부터 배웁시다. 그리고 배운 좋은 길을 가르칩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자녀들이 좋은 길을 가는 지혜로운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