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일?

한 유대인이 고민이 있다면서 랍비를 찾아 왔습니다. "제 둘째 아들이 친구들과 어울리더니 그만 기독교로 개종을 하겠다고 나서지 뭡니까? 속상해 죽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를 막을 수 있을까요?" 이 말을 들은 랍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아들도 그렇습니까? 사실은 내 큰 딸도 친구 따라서 이슬람교로 개종하겠다고 해서 보통 골치 아픈 것이 아닙니다. 내가 명색이 유대교 랍비인데도 그 아이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전통을 경시하는 세상 풍조를 한탄하면서 자식들의 개종을 막아보려고 오랫동안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지만 뾰족한 수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자식들이 다른 종교로 개종을 하겠답니다. 이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들이 개종하는 것을 막을 을 알려주십시오." 그러자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문제는 내게 빌어봐야 소용없단다. 나도 하나밖에 없는 내 아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을 막지 못했느니라."

'자녀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하는 문제는 모든 부모가 갖고 있는 공통된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 부모 말 잘 듣는 자식은 없습니다. 자식이란 본래 부모 말을잘 듣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오죽하면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말이 있겠습니까. 한편 자식에게 완전히 만족하는 부모도 없습니다. 자식 때문에 속 썩지 않는 부모도 물론 없습니다. 모든 부모가 다 마찬가지이고 모든 자식이 예외 없이 다 그렇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부모는 자식이 자기를 닮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닮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서로 상반된 두 가지 생각을 다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식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교육은 스스로 모범을 보이는 것이란 모르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 되지는 않습니다. 나는 '바담 풍' 해도 자식은 '바람 풍' 하라고 가르칩니다. 많은 경우에 부모가 자식들에게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행동을 정작 자신은 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스스로 자식들에게 모범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부모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자신이 모델로 삼을 수 있는 좋은 부모가 어디에 있는가를 찾게 됩니다.


성경에는 모델이 없다

기독교인이 좋은 부모의 모델을 찾기 위해 가장 먼저 뒤져보는 것은 물론 '성경'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좋은 부모는 어떤 부모인가? 성경에 등장하는 부모들 중에 과연 내가 모델로 삼을만한 부모는 누구인가?'를 찾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많은 목사들이 성경에 좋은 부모의 모델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성경에 모든 답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모든 문제의 답이 거기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좋은 부모의 모델도 거기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 하지만 제가 보기에 안타깝게도 성경에는 좋은 부모의 모델이 없습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좋은 부모로서의 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좋은 부모의 미덕에 대한 얘기도 있지만(사실 성경에는 좋은 부모의 모델보다는 좋은 자녀의 모델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이 얘기합니다) 모델로 삼을만한 사람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선 구약성경은 철저하게 가부장적인 가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의 가정 형편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아버지의 권위는 절대적입니다. 오죽하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겠다는데 아들이 순순히 순종했겠습니까. 요새 같으면 아들이 '아니, 아버지 미쳤어요?' 하면서 힘없는 아버지를 때려눕히고서라도 도망하지 않았겠습니까
? 하지만 구약성경은 아버지가 한 마디 하면 누구나 무조건 순종하는 관습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부장 사회를 이상(ideal)으로 생각하지 않는 한 구약성경에서 이상적인 가정과 부모의 모델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신약성경은 어떨까요? 신약성경에서도 마찬가지로 좋은 부모의 모델을 찾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구약성경의 경우와 크게 다릅니다. 신약성경은 당장 이 세대가 가기 전에 예수님이 재림하고 세상이 끝장난다는 믿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종말이 오는데 재산이나 가정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가정 윤리가 무슨소용이고 좋은 부모가 뭐 그리 중요했겠습니까. 그래서 복음서는 복음을 위해서 부모도 버리고 재산도 버리라고 가르칩니다. 신약성경의 윤리는 인간 사회가 오래지속되리라는 전제 위에 세워진 윤리가 아니라 세상이 당장 끝장나리라는 믿음 위에 세워진 윤리이므로 2천 년째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오늘날 기독교인에게는 맞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오늘날에는 부모와 재산을 무조건 버리는 것이 올바른 기독교 윤리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쉽지만 오늘날 가정과 부모, 자식 관계에 대해 현실적으로 생각할 때 신약성경에서 얻을 구체적인 내용이 별로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에 본받을만한 모델이 없다면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가정 윤리 외에도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윤리가 많이 있습니다. 가까운 예를 들면 핵무기와 관련된 윤리적인 문제가 그렇습니다. 성경은 핵무기라는 것을 알지 못하므로 성경에서 핵무기와 관련된 윤리적 문제에 대한 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또 한 번 아쉽게도 여러분에게 좋은 부모의 모델을 제시할 능력이 제게는없습니다. 저도 자식을 키우고 있지만 자식 키우는 문제로 보통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모델을 제시하기는커녕 좋은 모델이 있으면 달려가 배우고 싶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는 제가 잘 알고 잘 실행하고 있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이렇게 노력해보자는 것뿐입니다.

저는 세 가지를 말씀하겠습니다. 첫째는 '그런 끔찍한 일은 내 가정에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지 말자는 것이고, 둘째는 부성애는 본능이 아니라 노력하여 추구해야 할 가치(value)라는 점이며, 셋째는 가정이 자녀들에게 안정을 보장하는 곳에 그치지 않고 호기심으로 가득 찬 모험을 자극하는 곳이 되게 하자는 점입니다.


그런 일이 내 가정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첫째로, '그런 끔찍한 일은 내 가정에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지 말자는 얘기입니다. 요즘 세상에는 끔찍한 일들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우리 부모들은 '설마 우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랴.'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 부모들은 자기 가정에 일어난 나쁜 일들을 얘기하려 하지 않습니다. 쉬쉬 하고 숨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가정에는 영화에서나 봄직한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들에게 일어나는 일이 우리에게만 일어나지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매그놀리아"(Magnolia)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제를 굳이 찾는다면 '부성애'입니다. 이 영화는 몇 가정에서 일어난 끔찍한 일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덜 끔찍한 얘기만 잠시 해 보겠습니다. 과거 어렸을 때 퀴즈 왕이었던 도나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과거에 전국을 놀라게 한 퀴즈 왕이었지만 부모에 의한 강압적인 영재교육 때문에 불균형적으로 성장하여 지금은 무능하고 게으른 사람이 됐습니다. 그의 직장 사장은 이 무능한 도나를 해고하려 하는데 그는 엉뚱하게도 치아교정을 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며 사장에게 보너스를 달라고 합니다. 사장은 이 엉뚱한 도나를 해고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치아교정 비 5천 불을 훔치려고 자기가 다니던 직장에 밤에 도둑질을 하러 들어갑니다. 과거에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퀴즈 왕이 이렇게 망가졌던것입니다. 한편 현재 각광을 받는 퀴즈왕은 스탠리라는 아이입니다. 그 역시 아들을 퀴즈 왕으로 만들어서 큰돈을 벌려는 아버지에게 떠밀려 퀴즈대회에 나갑니다. 돈에 눈이 어두운 아버지는 당연히 자기 아들의 승리를 점치고 김칫국부터 마십니다. 스탠리는 대회 직전에 오줌이 마려워 화장실에 가고 싶다 했지만 아버지에 의해 거절당합니다. 스탠리는 퀴즈대회에서 일체 대답하기를 거부하고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그리고 오줌을 참지 못하고 바지에 싸고 맙니다. 그는 문제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외칩니다. "난 장난감이 아니에요. 인형도 아니고요. 난 똑똑해요. 하지만 똑똑하다고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돼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난 아는것이 많지만 화장실에도 가야 해요." 이렇게 외치고 스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갑니다. 쇼는 엉망이 됐고 아들을 통해 돈을 벌려던 아버지의 꿈도 무참하게 깨지고 맙니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부성애를 주제로 한 여러 에피소드들을 모아놓았는데 그 중에는 입에 담기도 끔찍한 얘기들도 있습니다. 영화는 현실의 반영입니다. 실제로 이런 일들이 오늘날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네 가정이라고 예외가 되라는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부성애는 본능이 아니라 가치

둘째로, 부성애는 '본능'이 아니라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가치'임을 말씀하고 싶습니다. 모성애와 부성애는 같지 않습니다. 글자 하나만 바꾸면 모성애가 부성애가 되지만 둘은 크게 다릅니다. 모성애는 '본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생명을 아홉 달 동안 태에 품고 있다가 죽음 가까이까지 가는 고통을 겪은 끝에 아이를 낳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미 모성애는 어머니의 본능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러나 부성애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겪는 과정을 겪지 않고도 남자는아버지가 됩니다. 아버지이기 때문에 부성애가 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부성애는 아버지가 되면 당연히 갖게 되는 본능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능을 거스르려고 노력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가치'입니다. 이 가치는 자연스러운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적이고 동물적인 것을 거부하는 데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부성애란 그런 것입니다. 아버지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노력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정이 자녀들에게 안정을 보장하는 곳에 그치지 않고 호기심과 모험을 자극하는 곳이 되게 하자는 것입니다. 가정은 세상에서 내 자식을 보호하는 보호구역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정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학교와 직장에서 돌아와 휴식하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부담 주지 말고 자극하지 말고 편안히 쉬게 하는 것이 가정의 기능이라고 말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저는 가정은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정은 아이들이 상상력을 기르는 곳이어야 합니다.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모험심이 생기도록 만드는 곳이어야 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닮기 원하십니까? 부모의 복사판이 됐으면 좋겠습니까?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한 '노예'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만일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가정이 모험으로 가득 차고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곳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유언무언으로 "세상을 이해하려 하지 말아라. 너는 아직 세상을 이해할 나이가 되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보냅니다. 그러나 이보다는 "세상에는 네가 바꿀 수 없는 현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네가 바꿀 수 있는 현실도 많단다."는 메시지가 아이들의 상상력과 모험심을 더 깊이 자극하고 적극적인 태도를 갖게 할 수 있습니다.

자녀 교육과 가정의 문제는 둘이 아닙니다. 가정이 엉망인데 자녀 교육이 잘 될 리 없습니다. 좋은 부모가 되는 것과 좋은 가정을 만드는 것도 둘이 아닙니다. 이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좋은 부모가 되어 자녀들에게 삶으로써 교육한다면 그것보다 좋은 교육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완벽한 부모가 아닐지라도 자녀들을 잘 기를 수 있습니다. 세세한 방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본정신이고 철학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말씀한 내용은 비록 단편적이지만 부모 됨과 가정의 기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