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수목사  

현재 우리의 생활방식은 경쟁체제입니다. 즉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때입니다. 그런데 강해진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을 하려하면 4700만 명 이상을 상대하여 물리쳐야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1명을 회사에서 뽑는데 친구와 둘이 입사시험을 치른다면 당연히 친구를 물리쳐야 입사를 할 수 있습니다.

경쟁한다는 것은 저쪽을 이겨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이쪽은 그보다 몇 배를 노력 해야만 됩니다. 저 사람이 여덟 시간 잘 때에 나는 다섯 시간만 자고 일하든지 공부를 하든지 해야 합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만 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편기자에게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을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말게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첫 번째로)

I.말씀으로 사는 자는 하나님 안에 구원과 약속이 있음을 의지합니다(41-42).

<41,42절에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구원을 내게 임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나를 훼방하는 자에게 대답할 말이 있사오리니 내가 주의 말씀을 의뢰함이니이다”>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당시 시편기자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주위에 온통 훼방자들 뿐이었습니다. 그를 죽이려는 자객이 항상 틈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습니다. 먼 곳에 있어서 손이 닿지 않을 때는 심하게 비방을 했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심히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시편의 저자는 구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기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미 그에게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악인들이 생명을 노리고 있지만 허사일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24시간 경호원을 붙여놓으실 것을 믿었습니다. 훼방자들은 하나님의 사람을 해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미 약속이 되어있습니다. 백 년 전에 예비 된 것이 아닙니다. 천년 전에 예비 된 것도 아닙니다. 창세전에 예비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임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마귀가 힘을 잃게 됩니다. 우리를 멸시했던 자에 대해서 담대함을 가지게 됩니다. 훼방자에 대해서 단호한 입장을 취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힘이 우리 영혼에 확신과 기쁨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성경을 읽으면 성경속의 인물들처럼 살고 싶습니다. 많은 믿음의 선배들처럼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마음뿐입니다. 실제상황이 따라주지 않습니다. 아브라함 같이 살자니 떠나라 할 때 떠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야곱같이 살자니 첫 번부터 얻어터지는 삶입니다. 이삭같이 살자니 순종이 몸에 배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활이 힘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데 성경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다윗인데 실생활은 사울입니다. 이 괴리감이 우리의 힘을 빠지게 합니다. 신앙에 기쁨이 없다보니 고난이 우리를 온통 차지하고 있습니다. 은혜가 충만하지 못하고 염려가 훨씬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의지할 이는 하나님뿐입니다. 이 세상의 인간들은 모두 경쟁 상대인데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주 예수그리스도만이 나를 지켜주십니다. 나의 염려를 제거하고 기쁨을 주십니다. 우리를 향한 인자하심이 주님께만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사랑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어떠한 공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주님의 인자하심과 주님의 구원이 내게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도움은 하나님의 이름을 의뢰할 때에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시인할 때에 이미 다가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손에 쥐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할 때 약속이 내 안에서 성취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말씀을 믿을 때에 담대해집니다. 삼손의 힘이 머리털에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힘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의 생활을 말씀으로 청산했습니다. 가나안에 입성하려고 했을 때 말씀을 앞세웠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여호수아였습니다.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강력하게 임하였습니다(수 1:1-9).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다면 가나안에 입성하지 못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무척이나 만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고 뽕나무까지 을라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려오라는 말씀이 없었다면 삭개오는 존재도 없었습니다. 지옥의 인구를 늘리는데 그칠 뿐이었습니다.

국군의 최고통수권자는 대통령입니다. 대통령의 말을 군인들이 무시한다면 그 군인들은 존재할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의 최고 통수권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구원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성취될 때에 우리 대적은 영원히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대적 앞에 떳떳하게 나설 수 있는 것은 주의 말씀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사는 자는 하나님 안에 구원과 약속이 있음을 의지할 뿐만 아니라 오늘 두 번째로)

II.말씀으로 사는 자는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입니다(43-44).

<43,44절에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 내가 주의 율법을 항상 영영히 끝없이 지키리이다”>

본 시편의 저자는 미상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의 앞에 겸손하게 엎드린 사람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고백은 절규에 가깝습니다.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나를 경호하는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모두 떠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떠나서는 안 됩니다.”라는 말입니다.

이 정도 되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살길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을 말씀으로 우리에게 기록하셔서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는 진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다는 것은 이 세상과의 이별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다는 것은 천국문을 마음대로 열고 닫을 수 있는 마스터키를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리와 법도를 소유하고 있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항상 여호와의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말씀을 취하여 가지 맙소서” 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돌밭과 길가 밭, 가시밭 같은 바꾸어야 할 밭이 있습니다. 그리고 옥토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밭은 고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옥토로 바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면 가능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정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오픈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개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초대교회 길선주 목사는 최초로 새벽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평양에서 시작했던 뜨거운 기도는 한국교회가 부흥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고개를 들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내게 성경을 준비케 하시고 말씀으로 강하게 하소서”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마귀에게 속아서 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무엇이 죄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힘 있는 자들의 말이 진리로 여겨질 것입니다. 소위 말해서 성현(聖賢)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말이 우리의 잣대가 될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악이 파도처럼 밀려 올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지 않아야 합ㄴ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지켜야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지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습니까? 3군(三軍)을 총동원하여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습니다. FBI(Federal Bureau of Investigation)를 동원해도 지키지 못합니다. 선지자와 제사장들에게 부탁해도 지키지 못합니다. 금줄을 띄우고 경비를 강화해도 지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입에 두어야 지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가슴에 두어야 지킬 수 있습니다. 나의 눈에 두어야 지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려고 작정해보십시오. 마귀로부터 융단폭격을 당합니다. 얼마나 심하게 쏘아댑니까? 거의 죽을 정도까지 쏘아댑니다. 그러나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있는 한 마귀가 우리를 손을 대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한 절대로 우리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마귀는 칼로 우리에게 달려듭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폭탄으로 사전에 폭파시켜 버립니다. 나사렛에서 태어나신 예수님께서 제조된 말씀의 폭탄은 그 성능이 항상 최신예 폭탄입니다. 그 폭탄을 지금도 계속 마귀를 향해 폭파시키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사는 자는 하나님 안에 구원과 약속이 있음을 의지하고 겸손할 뿐만 아니라 오늘 세 번째로)

III.말씀으로 사는 자는 자유롭습니다(45-48).

<45-48절에 내가 주의 법도를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행보 할 것이오며 46또 열왕 앞에 주의 증거를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겠사오며 47나의 사랑하는바 주의 계명을 스스로 즐거워하며 48또 나의 사랑하는바 주의 계명에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를 묵상하리이다>

후진국일수록 통제가 많습니다. 통제가 많다는 것은 움직이는데 불편합니다. 통제가 많을수록 자유가 없거나 제한됩니다. 교도소는 통제의 지역입니다. 통제가 많은 나라는 여행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북한은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평양에서 원산에 가려면 신고해야 합니다. 신의주에서 개성에 가려하면 신고를 해야 합니다. 갔다 오면 또 신고를 해야 합니다.

통제의 사회가 또 한 곳 있는데 군대생활입니다. 입대하면 통제로 시작해서 통제로 살아야 합니다. 제대할 때 통제가 해제됩니다. 군에서는 어디를 가든지 신고해야 합니다. 항상 보고체제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수시로 점호를 취해서 이상이 없는가 점검을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시편기자는 자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자유롭다고 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자유롭게 행한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말씀이 나를 통제해야 비로소 자유롭습니다. 우리가 율법으로 하나님과 계산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공덕과 선행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수행(修行)과 수양(修養)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절대로 우리를 해방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너희가 나에게 나오면 짐이 벗어진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날마다 1521kg이나 되는 율법의 짐을 지고 있습니다. 이 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아니라도 모든 사람들이 이 짐을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그 짐을 풀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거듭 태어나던 날 1521kg의 짐이 벗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유롭게 행보 할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있을 때 어느 누구에게라도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여러 사람들로부터 시기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적도 많았습니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말씀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꼭 붙잡고 있었습니다. 다른 것은 다 놓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꼭 붙잡았습니다. 그랬더니 수치를 당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무엇입니까? 짐을 벗겨줍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나타내는 우리들의 힘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이 영국을 무차별 공격을 했습니다. 각료회의를 끝낸 처칠은 템플 감독에게 라디오로 설교를 하도록 부탁하였습니다. 폭탄에 의해 지하로 산으로 뿔뿔이 흩어진 국민들이 그의 설교를 조용히 듣고 있었습니다. 공군들도, 육군들도, 해군들도 그의 설교를 듣고 있었습니다. 템플감독은 조용히 이렇게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국민여러분 우리가 어느 때 보다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할 때입니다” 그의 말이 전국에 라디오를 타고 전해졌습니다.

세계제이차대전에서 누가 승리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자가 승리했습니다. 초대교회 박해로 기독교가 로마제국에 뿌리를 내리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승리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자가 승리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시인은 손을 들었습니다. 이 자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예배드리기를 기뻐했습니다. 창14:22을 보면 아브라함이 여호와께 손을 들어 예배하였습니다. 시편기자는 주의 성소를 향해 손을 들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그 말씀을 믿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생을 지혜롭게 살았습니다. 가장 가치 있게 살았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있을 때 삶에 의욕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있을 때 자유롭고 편안합니다. 그리고 포근합니다.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은 자기가 있기 때문에 이 나라가 잘되어가고 있다는 착각 속에 있습니다. 경제인들 즉 재벌들 역시 자기들이 있기 때문에 이 나라의 경제가 원만히 돌아가고 있다는 착각 속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있기 때문에 이 나라가 지적인 나라가 되리라는 착각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지구상에서 망한 나라들을 볼 때에 정치인들이 있었습니다. 경제인들이 시대마다 있었습니다. 그래도 망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의인들이 없어서 망한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그랬고 바벨론이 그렇게 망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로마가 의인이 없어서 망했습니다.

지금 이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정치인들이 아닙니다. 경제인들이 아닙니다. 메달을 날마다 안겨주는 메달리스크들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찾는 의인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자가 필요합니다.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절실히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