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희목사 (연동교회)

새해의 첫 주일입니다. 시작이 반이며 새해의 첫 주일은 중요한 주일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한 해를 승리하시며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올해는 좀더 열심히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교회를 봉사하고, 세상을 섬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전의 TV 뉴스에 보니 작년 태풍 매미로 말미암아 수 많은 쓰레기들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 바다가 오염되고, 쓰레기들이 그물에 걸려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물도 쓰레기 때문에 다 못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치울 수 없이 더러워진 환경입니다. 이미 이 세계는 깨끗케 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심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물이 가득합니다. 태풍이 아니라 미풍에도 마음은 오염됩니다. 햇볕은 햇볕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우리 영혼을 마구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맑고 티 없는 살아있는 영으로 만든 사람이 살인, 시기, 정욕, 탐욕, 질투 등 열거하기 조차 부족하고 부끄러운 것들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오염된 영혼은 상실한 마음 때문입니다. 그런데 도무지 치워지지 않는 오염된 심성을 가지고 살며 더러움에 무방비, 무감각의 중태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자정능력을 상실한 사회, 국가, 정치를 보세요. 국회의원 체포동의안이 부결되었습니다. 총무회담을 할 필요도 없이 의견일치를 보았습니다. 우리 사회의 총체적 부정과 부패를 한 눈에 보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나 우리 세계는 성령님의 특별하신 간섭 없이는 도저히 정화될 수 없는 최악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봅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나서면 깨끗케 되지 않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성령님은 깨끗케 하시는 능력입니다. 성령님은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을 깨끗케 하셨던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를 깨끗케 하시기를 기대하십니다. 다윗을 깨끗케 하였던 시를 통하여 우리도 다윗처럼 깨끗하게 회복되는 역사가 있어지는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죄를 죄로 깨닫고 자신의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다윗은 시적으로 강조하기 위하여 “죄과를 도말하소서”,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를 1절과 2절에 먼저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먼저 죄를 깨닫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3절에 다윗은 말합니다.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또 4절에 말합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이것이 다윗이 깨끗케 될 수 있는 비결이었습니다. 깨끗케 되는 조건이었습니다. 이것 없이는 절대로 깨끗케 되는 길이 없습니다.
다윗은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라고 합니다. 사람에게는 아닐 수 있지만 하나님께는 죄입니다. 사람들은 모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당시에 절대군주인 임금이 여자 하나 취한게 무슨 그리 큰 죄이겠습니까? 우리 나라에도 옛날에 군왕무치(君王無恥)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에게는 수치스런 일이라고 나무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남의 여자 하나 쯤 빼앗아도 임금은 수치스런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아니지만 하나님께는 죄입니다.
5절에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으며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합니다. 다윗에게 죄는 남의 여자를 취한 그 자체가 아닙니다. 다른 여자와 간음한 그 자체가 아닙니다. 다윗에게 더 큰 죄는 이미 어머니의 복중에 있을 때에 죄를 가지고 태어난 죄의 근본 뿌리를 고백합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죄의 근성, 즉 죄성을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여기서 누가 예외일 수 있습니까? 누가 이런 죄에서 제외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죄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죄 짓지 않을 자신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처음 만나 그물이 찢어질만큼 많은 고기를 잡는 횡재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기를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게 되었고, 그는 “나는 죄인입니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과 함께 그가 고백한 것은 “죄”였습니다. 그의 고백은 “나는 죄를 지었던 사람입니다”(I am a sinner)가 아닙니다. 그가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나는 지금까지 죄를 많이 지었고, 앞으로 또 죄를 지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I am a sinful man)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3:10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합니다. 로마서 3:23에는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습니다. 죄를 지을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죄와 무관할 수 없습니다. 요한일서 1:8에도 “만일 우리가 죄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합니다. 죄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자신을 속이지 않는 일입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이 깨끗케 되는 삶의 첫걸음입니다. 우리가 항상 죄에 노출되어 있고, 죄를 지었고, 또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십시오. 이것이 회개하여 깨끗케 될 수 있는 조건입니다.

둘째,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야 합니다.

1절에는 다윗이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2절에는 이렇게 간청합니다.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이런 간청과 도우심이 있어야 죄를 깨끗케 씻을 수 있습니다.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자비, 이것 외에 우리 죄를 사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접근방법은 주님께 도우심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1절에 “죄과”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파샤’란 히브리어입니다. 이 말은 금지된 경계선을 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심각한 반항을 의미합니다. 2절에는 “죄악”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아원’이란 말입니다. 이 말은 원죄 또는 본성의 부패를 의미합니다. 또 같은 절에 “죄”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차타트’입니다. 이 말은 부족한 것, 표적을 못맞춘 것을 의미합니다. 즉 스스로 범한 죄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인간에게는 다양한 죄가 있습니다. 온갖 더러운 죄가 항상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7:19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라고 한탄합니다. 이런 온갖 죄로 포위 당하고 살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깨끗하게 해달라고 도우심을 청해야 합니다.
7절에서 다윗은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라고 합니다. 우슬초란 성전의식에서 피뿌릴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성전의식이란 죄사함의 의식입니다. 우리는 피흘림의 용서가 필요합니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9절에 다윗은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라고 합니다. 아예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회개한 죄를 기억도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그의 삶에서 깨끗한 것이라곤 그가 세탁했을 돈 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자신 재산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합니다. 남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를 갚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한번도 죄를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진정 만나면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입을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그가 개심한 다음에 어릴 때 옆집의 나무 열매를 따 먹은 것까지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가 애통한 죄를 결코 범하지 않는 사람이 자기가 범한 죄를 참으로 애통한다”. 우리 나라에 1907년 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도 평양 장대현교회의 길선주목사님께서 목사가 되기 전 남의 집에 있을 때 주인의 돈을 훔친 것을 고백하는 회개운동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런 회개의 운동이 깨끗케 되는 비결입니다.

셋째, 죄를 회개한 후 깨끗한 마음이 창조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10절에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회개한 다음에 정한 마음이 창조되고 정직한 영이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깨끗한 마음이 되는 것은 쉽지만 깨끗한 마음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11절에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강청합니다. 성령님의 지속적 내재를 요청합니다. 성령님을 받기는 쉽지만 성령님으로 충만하고 항상 충만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성령님은 다른 하나님입니다. 헬라어에서 “다르다”는 단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알로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같은 종류의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헤테로스’란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다른 종류를 의미합니다. 성령님은 ‘알로스’ 하나님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단지 서로 다른 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 속에 내재해야 지속적인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지속적으로 깨끗케 하십니다. 우리는 매일 깨끗케 씻는 삶이 중요합니다. 이미 목욕한 사람은 발만 씻으면 됩니다. 발은 매일 씻어야 합니다. 손은 자주 씻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내재는 매일 우리로 하여금 발을 씻게 하셔서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게 하십니다.
미국의 유명한 찰스 피니 목사는 “한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 믿는 것도 중요하나 이미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본래의 위치로 돌아오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알랜 레드패스(Alan Redpath)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깨지지 않은 단단한 영혼의 땅에는 당신 생명의 씨앗을 심지 않을 것입니다. 그 분께서는 이 씨앗을 성령의 회개로 깨어지는 곳에, 회개의 눈물로 젖은 땅에 심을 것입니다”. 우리가 원래로 위치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며 이 것이 깨끗케 되는 삶입니다.
우리의 도덕의 옷은 더럽기 그지 없습니다. 세탁하면 깨끗하게 됩니다. 세탁하려면 물이 필요하고, 비누가 필요합니다. 성령님은 물같이 역사하시고, 비누같이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더러워지지 않도록 날마다 씻어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 마음으로 지음 받아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깨끗한 마음이 창조되어야 이 일이 가능합니다.

결론

요한일서 1:9에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합니다. 당당한 사람이 되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다윗은 회개로 회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죄를 지었지만 철저하게 회개하고 깨끗하게 됨으로 성군이 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했지만 회개로 자신을 깨끗케 한 사람입니다. 그는 대제사장의 집에서 들어가 모른다고 했지만 완전한 회개를 하였습니다. 지적으로 회개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알았습니다. 정적으로 회개하였습니다.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의적으로 회개하였습니다. 대제사장의 집에 더 이상 머물지 않고 뛰쳐 나왔습니다. 이런 완전한 회개가 깨끗케 하실 수 있습니다.
변화의 모델은 예수님입니다. 새 해를 맞아 예수님의 변화처럼 변화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변화는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할 수 없을 만큼 희어져 눈이 부시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변화하여 세상에서 눈이 부시게 깨끗하게 삽시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마다 눈이 부심을 느끼게 합시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그들의 양심이 찔림을 받게 합시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자정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타정능력입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깨끗하게 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힘을 주시면 깨끗케 되지 않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베드로후서 3:14에는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점도 흠도 없이 티 없이 맑은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깨끗함을 통하여 세상이 깨끗하게 되는 한 해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보혜사 성령이여 깨끗케 하소서”. 이 표어가 한 해의 우리의 기도가 되고 꿈이 되고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