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하나님은 인간을 어른으로 만드셨지만...

창세기 1장 26절 이하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하나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셨다.”라고 말씀합니다. 몇 절 아래로 내려가서 2장 7절에서는 “야훼 하나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고 말씀했습니다.

구약성경은 이 밖에 몇 군데서 사람의 창조에 대해서 얘기하지만 위에 인용한 두 구절이 가장 대표적인 구절들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때 창조된 사람들은 모두 ‘어른’들이란 사실입니다. 창세기에 따르면 인간은 창조될 때부터 어른으로 창조됐습니다. 물론 창세기가, 인간이 창조된 구체적이고도 세세한 과정과 방법을 말하는 책은 아니고 주로 하나님 및 피조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만 말하기 때문에 사람이 어른으로 창조됐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에서는 사람은 어른으로 이 세상에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아기로 태어나서 어른으로 자라는 것이기에 ‘사람’을 생각할 때 ‘어른’보다는 먼저 ‘아이’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이 마땅하리라고 봅니다.

사람은 저절로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아이가 핏덩어리로 태어나서 몸을 뒤집고 목을 가누고 웃고 말을 하고 일어서고 뒤뚱거리며 걷고 자기 의사를 표현하며 남의 말을 알아듣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그 어떤 다른 동물들보다 깁니다. 하나님께서는 동물들 중에서 인간의 성장속도가 가장 느리게 디자인하셨습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걷기까지는 걸리는 시간은 1년 정도입니다. 똥오줌 가리는 데는 2년이 걸리고 먹어도 되는 것과 먹으면 안 되는 것을 가리는 데는 4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4살이 되기 전에는 아이가 뭐든지 주워 먹게 만들면 그 아이는 죽고 맙니다. 아이가 넘어지지 않고 뛰는 데 걸리는 기간은 7년이라고 합니다. 강아지가 태어나 걷는 데 걸리는 기간은 이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짧습니다. 송아지는 어미 소 뱃속에서 나와서 불과 몇 시간만 지나면 걷기 시작합니다. 낙타는 태어나자마자 얼마 동안 뒤뚱거리고 휘청거리더니 곧 걷기 시작하더군요. 이런 동물들에 비하면 인간이 태어나 걷기까지 걸리는 시간인 1년은 너무 길게 느껴집니다.

생후 1년 동안 인간의 두뇌가 도달하는 성숙의 정도는 40% 정도라고 합니다. 인간의 뇌가 95%로 성장하려면 대략 10년 정도가 걸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원숭이의 뇌는 1년이란 같은 기간에 70%의 성숙도에 도달하고 2년이면 완전히 성장한다고 합니다. 물론 두뇌의 크기와도 관련된 문제이긴 하지만 어쨌든 주어진 두뇌의 성숙도에 도달하는 시간에 이토록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은 질문하는 존재

우리 인간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그 대답을 찾으며 살아갑니다. 그런 질문들 중에는 즉각적으로 답을 얻을 수 있는 질문도 있고 답을 얻는데 긴 시간이 필요한 질문도 있으며 영원히 답을 얻지 못할 질문도 있습니다. 객관적인 답이 있는 질문에 대해서는 언젠가는 답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답이 존재하지 않는 질문들도 있습니다. 답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물어볼 가치가 없는 질문일까요? 정말 그렇습니까? 저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결국 답을 얻을 수는 없는 질문이라 하더라도 묻는 것만으로, 답을 찾으려는 노력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질문들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기억에 남아 있는 질문들 중에서 가장 먼저 했던 질문이 무엇입니까? 저는 초등학교 1학년 또는 2학년 때쯤으로 기억하는데 거의 매일 한 번씩은 물었던 질문이 있었습니다. 밤에 잠을 자려고 자리에 누웠지만 아직 잠이 들기 전에 저는 거의 매일 ‘이렇게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면 어떻게 밝은 아침이 될까? 어떻게 이 캄캄한 밤이 어떻게 다시 환한 아침이 될까?’라는 질문을 던지곤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이 사실이 참으로 신기하고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고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질문을 부모님들께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저희가 어렸을 때는 부모님께 질문을 잘 하지 않았습니다.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이 그랬을 것입니다. 그때는 대체로 모두들 먹고살기 바빠서 아이들은 아버지를 볼 시간도 별로 없었고 어머니도 아이들의 질문에 성심껏 대답해줄 시간적인 여유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부모님들이 훨씬 여유가 있고 교육 기회도 많이 누리고 있으며 따라서 아이들의 질문에 답을 줄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의 대여섯 살짜리 아이가 “엄마, 불은 왜 뜨거워?”라고 물으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여러분 나름의 대답을 생각해보면서 제 얘기를 들으시면 좋겠습니다. 만일 “뜨거우니까 뜨겁지.”라고 대답했다면 그것은 ‘대답’이라고 부를 만하지 않다는 사실을 여러분 스스로 잘 아실 것입니다. 만일 “뜨겁지 않은 불도 있니?”라고 되물었다면 이건 아이의 질문이 가져다준 곤경에서 벗어나려는 구차한 역공일 따름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면 상황은 점점 악화일로를 걷게 됩니다. 더욱이 “너 그런 쓸데없는 거 자꾸 물어볼래?”라고 대꾸했다면 상황은 최악입니다. 부모에게서 이런 답 아닌 답을 들어 버릇하면 아이는 다음에는 질문하기 전에 망설이게 되고 눈치를 보다가 결국은 질문을 하지 않게 됩니다. 말하자면 질문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상황이 얼마나 비극적인지는 더 말씀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한 보수적인 신학교에 진학해서 한 학기를 다녔습니다. 결국 한 학기 만에 그 학교를 그만뒀는데 그렇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질문’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 학교에서는 한 강의를 수백 명의 학생들이 같이 듣곤 했습니다. 그러니 교수는 마이크를 사용해서 강의를 하고 학생들은 열심히 들으며 노트를 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학생이 질문을 하고 교수가 질문에 답을 하기가 어렵긴 했습니다. 그런데 교수가 하도 이해되지 않는 말을 하기에 제가 손을 들고 질문을 했습니다.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꽤 ‘파격적’인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몇 년이 지나서 어떤 자리에서 전도사 한 분을 만났는데 저를 기억하더군요. 그 수업시간에 질문을 했던 학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 교수는 질문에 대해 답을 주기는커녕 질문한 저를 야단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그 학교를 그만 뒀습니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만은 사실입니다.

어떤 대학 총장에게 누군가가 “당신네 대학은 어떤 대학인지 한 마디로 설명해보라.”고 말했더니 그 총장은 “우리 대학은 어려서부터 질문이 많았던 아이들이 오는 대학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몇 년 전에 제가 이곳에 있는 한 신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가르친 적이 있었습니다. 한 학기 만에 그만 두기는 했지만 그래도 제게는 의미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강의 중간에라도 질문이 있으면 언제든지 제 말을 자르고 들어와 질문하라고 수업 시간마다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은 거의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제가 꿋꿋하게 자꾸 질문하라고 얘기하니까 한 학생이 “뭘 알아야 질문을 하지요?”라고 말했습니다. 몇 달 전에 신문에서 한 은퇴 교수가 똑같은 내용의 글을 쓴 것을 보고 ‘나만 경험한 것이 아니구나.’하고 생각하며 웃었습니다. 그 학생의 말에 대해서 저는 “뭘 알면 왜 질문하겠는가? 모르니까 질문하라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제 말도 틀린 말이었습니다. 질문은 반드시 뭘 알면 안 하고 뭘 몰라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질문하고 대답하는 행위를 통해서 얻는 ‘지식’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질문을 하고 대답을 찾아가는 행위 그 자체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까짓 돌무더기가 뭐기에?

오늘 우리는 여호수아 4장에 나오는 얘기를 읽었습니다. 여호수아 4장은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기적적으로 건넌 후에 야훼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신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모두 열두 사람을 뽑아 돌 열두 개를 가져와 한 곳에 쌓아 놓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훗날 후손들이 “이 돌들이 무엇이냐?”고 묻거든 야훼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요단강 물이 끊어졌던 일을 영원히 전하는 기념비라고 대답하라고 이르셨습니다.

저는 구약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이지만 구약성경이 전하는 모든 내용을 다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더욱이 구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들이 모두 잘 한 일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한 짓들 중에는 잘못된 일들도 많고 가증스런 짓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 중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지른 죄악들도 많이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한 짓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신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을 본받고 따라야 할 모델로 보지 말고 그들의 장점과 약점을 있는 그대로 보고 따라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가려야 함을 가르치시려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읽은 여호수아 4장에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내용은 우리가 그대로 따랐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훗날 이스라엘의 후손이 “이 돌들이 무엇이냐?”고 묻거든 대답해주기 위해 돌들을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연히 누가 지나가다가 호기심이 생겨서 묻거든 대답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묻게 만들기 위해서 돌들을 쌓아두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우연히 물어보면 대답해주라는 뜻이 아니라 아이들을 그리로 수학여행이라도 데려와서 돌들을 보여주고 그들로 하여금 묻게 만들라는 뜻입니다. 돌무더기가 거기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묻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 우습지 않습니까? 기껏 돌무더기 열두 개 쌓아놓고 그리로 수학여행이라도 데려와서 묻게 만들라는 말씀이 우습지 않습니까? 이미 당시에 이집트에는 인류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는 피라밋이 위용을 자랑하고 우뚝 서 있었습니다. 그 높은 피라밋 꼭대기까지 어떻게 돌을 올려놓았는지 아직도 수수께끼입니다. 오죽하면 외계인이 했다는 말까지 하겠습니까. 메소포타미아에도 피라밋보다는 작지만 ‘지구랏’이라고 부르는 건축물들이 이곳저곳에 우뚝 서 있었습니다. 그런 건축물들은 보는 이들을 주눅 들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이런 건축물들은 모두 지배자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작 돌 열두 개를 쌓아놓고 그걸 기념하라니! 그 규모를 생각하면 비교할 수 없이 초라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건축물의 규모가 아니라 ‘질문’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 이 질문은 인간의 역사에 대한 질문이요 더 나아가서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내가 왜 여기 있는가,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할 것인가, 나의 궁극적인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와 더불어 생의 길을 걸어가는가에 대한 질문, 정작 중요한 것은 건축물의 규모보다는 이런 질문들이 아니겠습니까.

궁극적인 질문을 잊어버린 교회는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치열하게 묻지 않는 교회는 교회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 교회는 물이 썩어서 죽은 물고기가 둥둥 떠 있는 웅덩이와 같습니다. 살아 숨 쉬는 교회는 끊임없이 질문하는 교회이고 그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피땀 흘리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왜 여기에 있을까? 하나님은 무엇을 하라고 우리는 부르셨을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세상에 내보내셨을까? 우리 교회는 이런 물음들을 계속 묻는 교회였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확고한 대답을 얻을 수 없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