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각목사 (예담교회)

메뚜기는 보잘 것 없는 벌레입니다. 스스로 메뚜기라고 여기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자기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사명은 고사하고 자기가 가진 능력조차도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종과 같이 자기가 가진 한 달란트마저도 땅에 묻고 말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은 아낙 자손들 앞에서 스스로를 메뚜기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2-33).” 우리는 스스로 메뚜기가 되어서 안 됩니다. 얼마나 잘못되었고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하나님은 신앙의 대장부를 원하시는데, 스스로 메뚜기라고 하다니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스스로 메뚜기가 되어서 안 되겠고, 남들이 메뚜기라고 하여도 메뚜기이기를 거부해야 합니다.

1. 왜 스스로 메뚜기라고 생각합니까?

자기 자신을 낮게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분수를 모르고 교만한 것도 큰 병이지만,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낮게 평가하는 것도 큰 병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바벨탑을 쌓는 것은 잘못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바벨탑 보다 더 큰 탑도 쌓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해서 안 됩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다 나온 백성입니다. 군사적인 무장이 없습니다. 군대의 경험과 훈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쟁을 잘 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과연 가나안의 족속들을 이길 것인가? 그들은 성을 쌓고 좋은 무기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아낙 자손은 키가 큰 대장부입니다. 그들을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객관적인 전력으로 볼 때에는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약하다고 반드시 지는 것은 아닙니다. 힘이 약해도 이길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싸워 이겼습니다. 군사력에서는 절대적으로 아말렉에 열세였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기도하면 이기고, 모세의 손이 피곤해서 내려오면 졌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강한 적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오직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입니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 싸우는 방법이 한 둘이 아닙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지 않았습니까? 칼과 창이 아니라 물맷돌을 가지고 나가서 싸웠습니다. 평지에서 약하면 산지에서 싸우는 방법도 있습니다. 육지에서 약하면 바다에서 이길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안 되면 천둥 번개와 같은 자연 현상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야간 기습공격을 할 수도 있습니다. 작전상 후퇴도 할 수 있습니다. 심리전으로 이길 수도 있습니다. 기드온의 횃불 작전은 야간 기습 심리적입니다. 300명으로 미디안의 대군을 이겼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군사적으로 강하다고 싸워 보지도 않고 스스로 메뚜기라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장점과 능력이 있습니다. 타고난 능력도 있고, 나중에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은사로서 능력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대개 후천적인 은사로 능력을 나타냅니다. 전에는 공부를 못했는데, 은혜 받고 나니까 공부를 잘합니다. 전에는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했는데, 은혜 받고 나니까 절제하고 인내합니다. 자신을 다스려 이깁니다. 전에는 재주가 없었는데, 은혜 받고 나니까 숨은 재주가 발휘됩니다. 사람은 재주 덩어리입니다. 성령 받은 성도는 더욱 재주 덩어리입니다. 교회는 거대한 은사집단입니다. 교회에는 온갖 능력이 다 있습니다. 주일날 교회가 어떻게 움직이는가 보십시오. 온갖 재주가 다 모여서 자발적으로 교회가 움직이지 않습니까? 교회가 어수룩해 보여도 만만치 않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못이기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라는 고백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흠하신 거룩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위대한 창조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백 번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는 원수들 앞에서 스스로 메뚜기라고 기죽을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고백은 능력의 왜곡을 두고 하는 말이지, 짐승보다 못할 정도로 정말 무지하고 무능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이 얼마나 타락하고 왜곡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백 번 조심해야 합니다. 인간처럼 교활한 피조물이 없습니다. 남에게는 천사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마귀일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조심해야 합니다. 조금만 방심해도 우리의 능력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칩니다. 그러나 선한 뜻에서 선한 역사를 이루는데 아무 것도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한 일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지혜롭고 놀랄 만큼 능력을 발휘합시다. 일산복음화, 한국교회의 모범, 세계선교에 쓰임 받는 교회,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해야 합니다.
“나는 부족합니다”는 고백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에서 하는 것입니다. 나를 무능하게 여겨서 스스로 메뚜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겸손한 것과 스스로 메뚜기가 되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 교회에 겸손한 사람은 많이 나와야 하지만, 스스로 메뚜기라고 주저앉은 사람은 없기 바랍니다. 교회는 낙오자의 집단이 아니라 스스로 겸손한 자들의 집단입니다. 겸손한 사람을 낙오자로 취급해서 안되겠고, 낙오자요 무능한 사람이 겸손한 사람처럼 행세해서도 안 되겠습니다. 남들이 진심으로 하는 칭찬이라면 칭찬으로 떳떳하게 받읍시다. “수고했다”고 하면, 쥐구멍이라도 찾듯이 부끄러워하지 말고, “감사합니다” 하고 당당하게 받읍시다. “다음에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때는 말로만 칭찬하지 말고 큰 것으로 칭찬해 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성격 이야기 좀 하겠습니다. 한국인의 대부분은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도 내성적입니다. 내성적인 성격이 안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가 조사한 바로는 내성적인 성격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워커힐에서 일하는 분들은 내성적인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상식으로는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외향적이고 활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외향적인 사람은 덜렁거리다가 실수도 하고 상대방을 파악하기도 못하고 자기 기분대로 하기 싶다는 것입니다. 젊어서는 몰라도 나이가 40대를 지나면 내성적인 사람이 성공할 가능성이 더 많다고 합니다. 가급적 실수를 덜 하려고 애쓰고, 이런 저런 상황에서도 늘 참으면서 지낸 결과 마침내 그 자리에서 빛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외향적이고 튀는 사람은 잘못하면 감옥 가 있고, 잘하면 동네 반장한답니다. 신입사원 면접 때에도 고개 들고 말을 청산유수 같이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뽑히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대기업 인사담당자들은 오히려 말도 더듬고 고개를 못 들어도 그런 사람 중에 회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남들에게 잘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평가한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가진 것을 뒤집어 보면 미처 발견하지 보배들이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어디 성격만입니까? 우리가 가진 것을 생각해 봅시다. 손이 없습니까? 발이 없습니까? 의식이 없습니까? 말을 못합니까? 남들과 비교해서 모자라는 것이 많지만, 곰곰이 살펴보면 가진 것도 많습니다. 우리의 가능성과 능력을 어떻게 발휘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사람의 평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평가를 일률적으로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키 순서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큐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미모순서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힘센 순서대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 고려합니다. 다만 무엇을 우선시 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 자리와 장소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를 찾으면 됩니다. 그런 기회를 포착해도 능력입니다.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어떤 이유이든 스스로 메뚜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아이들을 메뚜기로 만들지 맙시다. 부모가 자기 자녀에 대해 과대 망상을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지나치게 억압하고 누르는 것도 문제입니다. 우리 아내와 남편을 메뚜기로 만들지 맙시다. 무능한 사람이라고 낙인을 찍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인을 메뚜기로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재능이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십시오. 우리 교역자와 목사님을 메뚜기로 만들지 맙시다. 세워주면 다 합니다.
무엇이 사람을 메뚜기로 만듭니까? 과소평가 하는 것입니다. 악평하는 것입니다. 불신하는 것입니다. 불신하면 모든 것이 다 삐딱해 보입니다. 부정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이 어두우면 모든 것이 다 어둡습니다. “가나안 땅은 우리가 차지하지 못할 땅이야, 그 땅에 들어가면 전쟁하다가 죽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 메뚜기 밖에 안 됩니다. 자신을 불신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 병은 무엇으로도 고칠 수 없습니다. 자신에 대해 믿을 것은 믿어야 합니다. 한두 번 실패했다고 불신해서 안 됩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다시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나를 믿어 주신만큼 내 자신을 믿어야 합니다. 자신에 대해 불만 하는 사람은 어디서도 행복을 살 수 없습니다. 부정적인 태도와 말과 습관은 자신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메뚜기로 만듭니다. 격려하고 칭찬합시다. 대장부가 변할 것입니다.
왜 스스로 메뚜기라고 합니까? 주변 환경과 주변 눈치 보기 바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의 여러 족속들 살피느라 정신 빠졌습니다. 그들의 높은 성벽을 보느라 정신 빠졌습니다. 그들의 무장을 보느라 정신이 빠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 정신이 없습니다. 10명의 정탐꾼이 안 된다고 하니까, 너도나도 안 된다고 합니다. 오른쪽으로 갔다, 왼쪽으로 갔다 요동합니다. 스스로 메뚜기가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주관이 없습니다. 남들이 한다면 하고, 남들이 안 하면 안 합니다. 급속한 전염병을 앓는 사람들입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여호수아 갈렙은 가나안 족속만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적들의 군사만 본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군대를 보았습니다. 사람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여론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문제입니다. 심지가 견고합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 같았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됩시다. 하나님을 묵상하고 하나님 편에 섭시다. 주변 환경과 여건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가 온다고 싫어할 것 없습니다. 금방 비가 그칠 것입니다. 여름이라고 힘들어 할 것 없습니다. 금방 가을입니다. 어렵다고 아주 어려운 것 아닙니다. 좋은 때가 반드시 옵니다. 직업의 전망도 세월 따라 얼마나 바뀝니까? 안정적인 교사직의 인기가 높아졌습니다. 이공계 보다 의사를 비롯한 전문직의 선호도가 높아졌습니다. 예체능계의 위상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또 어떻게 달라질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보고 있으면 반드시 기회는 올 것입니다.

2. 힘써 신앙의 대장부가 됩시다.

어떻게 하면 신앙의 대장부가 될 수 있습니까? 신앙의 문제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다른 10명의 정탐꾼과 다른 것은 신앙입니다. 다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가나안이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데에는 의견이 같았습니다. 눈으로 보고 그렇게 판단한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의견이 일치합니다. 가나안 족속들이 견고한 성안에서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일치합니다. 조금만 살펴보면 적의 상황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갈렙은 가나안은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 능히 차지할 수 있다고 했고, 다른 정탐꾼들은 절대 차지 못한다고 합니다. 결론은 다릅니다. 축복과 저주만한 차이입니다. 하늘과 땅 같은 차이입니다. 가나안 땅은 죽음의 땅이고, 지금도 많은 피를 요구하고, 앞으로도 가나안 땅을 지켜 나가는데 피를 흘려야 할 땅이라고 악평합니다.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32절).”
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까?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약속했습니다. 이 약속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힘은 부족해도 능히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가나안이 축복이 땅이라는 것보다, 가나안을 차지한다는 약속이 더 귀합니다. 갈렙은 이것을 믿었고, 다른 정탐꾼들은 이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서론은 같이 믿었지만, 결론은 믿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차이입니다.
믿을 것은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메뚜기입니다. 믿을 것을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의 대장부입니다. 눈으로 확인된 것은 믿었고, 앞으로 확인할 것 곧 가나안 땅을 차지할 것은 믿지 않았습니다. 메뚜기입니다. 가나안 땅을 밟고 보고 손으로 만진 것은 믿었지만, 하나님이 하신 장래의 약속의 말씀은 믿지 않았습니다. 메뚜기입니다. 육신으로는 믿는데, 영으로는 믿지 못합니다. 작은 것은 믿는데, 큰 것은 믿지 못합니다. 믿고는 싶은데 믿어지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메뚜기입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고백과 같습니다. 가나안이 좋은 줄은 아는데, 어떻게 차지할 수 있느냐고 불신합니다.
반면 신앙의 대장부는 어떻습니까? 보이지 않는 것, 손에 잡히지 않은 것, 미래에 되어질 것 다 믿습니다. 서론만 아니라 본론과 결론도 믿습니다. 이 사람이 신앙의 대장부입니다. 기도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응답 받는 기도가 중요합니다. 그럭저럭 믿는 것이 아니라, 오늘 죽어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좋을 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환란과 고난 가운데 감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만 많은 것이 아니라, 마지막 행동이 중요합니다. 아는 것이 다가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이 사람이 신앙의 대장부입니다.
신앙의 대장부가 됩시다. 날마다 하나님 만납시다. 하나님 만나지 않고는 아무도 신앙의 대장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만이 용감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만나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루터가 종교 재판을 받기 위해 보름스 회의에 소환되었을 때, “하나님이여, 내가 여기 섰나이다. 나를 도우소서”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담대하게 나아갔습니다. 갈렙은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가나안 사람들을 메뚜기로 보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신다고 말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하나님을 만나고 용기를 얻었기에 풀무불에도 던져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이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신상에서 절하지도 아니할 줄 아옵소서(단3:17-18).”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절대 메뚜기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36).”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 아래 있습니다. 무슨 사건이라도 다 하나님 아래 있습니다. 누구라도 다 하나님 아래 있습니다. 마귀와 사단도 하나님 아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사사롭게 말씀하신 분이 아닙니다. 언약하신 분입니다. 하늘을 증인으로 삼고 많은 사람을 증인으로 삼아서 언약하신 분입니다. 역사적으로 기록을 남겨서 대대로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즉흥적이거나 감정적이지 않습니다.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가장 객관성 있는 방법으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누구에게나 신실하게 만나주십니다. 그 언약의 말씀을 붙잡읍시다. 갈렙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대로 가나안을 주신다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말씀이 신앙을 불같이 일으킵니다. 메뚜기를 대장부로 고쳐 세웁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지켜 행합시다. 갈렙은 당장에 가나안에 올라가서 전쟁을 하자고 했습니다. 믿음은 가정법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아는 것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갈렙은 85세 되었지만 헤브론 땅을 전쟁으로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말씀을 행하는 자가 대장부가 됩니다. 다윗이 임종 전에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했습니다.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 아들 솔로몬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레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찌라(왕상2:1-3).” 모세가 죽기 전에 가나안 정복 전쟁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부탁했습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1:7-8).” 주일성수 하는 자가 신앙의 대장부가 됩니다. 십일조 드리는 자가 신앙의 대장부가 됩니다. 봉사하는 자가 신앙의 대장부가 됩니다. 전도하는 자가 신앙의 대장부가 됩니다. 집사의 직을 감당하는 자가 신앙의 대장부가 됩니다. 은혜를 받고 행하는 것도 일리가 있지만, 믿음의 사람은 은혜를 주실 줄 알고 먼저 행합니다.
메뚜기는 벌레이지만, 대장부는 사람 중에 사람입니다.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마음껏 발휘한다는 것만큼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힘써 신앙의 대장부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