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중목사 (동안교회)

정작 자신은 한번도 가정의 행복을 누려보지 못했던 존 하워드 페인이라는 분이 "home sweet home"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이 세상에 쾌락과 궁전 가운데로 내가 돌아다닐지라도
나를 언제나 겸손케 하는 것은 내 집 같은 곳이 다시없음이로다.
가정은 하늘로부터 아름다움이 있는 곳
그리고 우리를 신성하게 만드는 곳
온 세상을 온통 다 찾아보아도 이런 아름다움을 다른 데에서는 찾을 수 없네.
가정! 가장 감미로운 나의 가정 같은 곳은 다시 없도다.
정다운 아버지의 미소짓는 무릎 아래에 앉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가.
그리고 나를 위로하고 달래시는 어머님의 어루만지심이 얼마나 다정한가.
다른 사람들이 새로운 쾌락을 찾아 배회할지라도
나에게는 나에게는 다만 가정의 즐거움만을 다오.
가정! 가정! 가장 감미로운 내 집 같은 곳은 다시 없도다.
많은 근심의 짐을 지고 나는 돌아오리라.
마음이 가장 사랑스러운 위로와 따스함이 거기서 나를 향해 미소하리라.
나는 다시는 그 오두막집을 떠나지 않으리.
그처럼 포근한 내 집 같은 곳은 다시없으리.
가정! 가정! 감미로운 내 가정 내 집 같은 곳은 다시 없도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우리 마음속에 묘한 푸근함과 향수가 떠오릅니다. 가정의 어떤 것이 푸근함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일까요? 우리 가정이 화려한 궁궐 같은 집이라서 그럴까요? 아니면 식탁 위에 산해진미가 있어서일까요? 아니면 은은한 불빛과 감미로운 음악이 있어서 그럴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가정에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언제나 쉴 수 있었던 어머니의 품, 지치고 힘들어도 돌아갈 수 있었던 넉넉한 어머니의 가슴, 한없이 울어버릴 마음의 아픔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머니의 품에 안겨버리고 나면 모든 시름이 사라지고, 새로운 용기가 솟아나는 그 어머니의 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가정을 생각하면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에 안정과 편안함 가운데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기댈 때마다 항상 받쳐주셨고, 폭풍우에 검은 비바람이 몰아치고 길이 막혀도 아버지가 헤쳐 나갔던 그 길 따라 온 식구가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시작되고 우리의 인생이 마감되는 그 곳, 가정! 얼굴을 맞대며 싸우고 울던 형제, 자매들, 형제 때문에 야단맞아도 그렇게 밉거나 싫어 할 수 없었습니다. 부대끼며 짜증나고 힘들더라도 돌아서서 다시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기에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맙니다.

그러나 아름다웠던 기억들과는 다르게, 가족들로부터 받은 상처와 아픔 때문에 생각하면 쓰리고 아픈 마음을 갖고 계신 분들도 적지 않으리라 생각되어집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향수와 푸근함을 기억하면서도 동시에 그렇지 못했던 어머니, 그렇지 못했던 아버지와 형제들, 원치 않는 가정의 아픔과 다툼과 비극 가운데 불행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에도 많이 있습니다. 따스함과 편안함을 주었던 부모님, 미소를 머금게 하는 그 형제, 자매들이 세월의 흐름 앞에 어느새 나의 짐이 되고 있고, 내 아픔과 고통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의 엘리멜렉 가정은 단란하고 아름다웠던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사람이 살고 있는 지역에 예기치 않은 흉년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흉년을 피해서 삶의 자리를 모압이라는 땅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모압 땅으로 옮긴 엘리멜렉의 가정은 흉년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옮겼지만, 가장과 갓 결혼한 두 아들이 죽고 세 명의 과부만이 남는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엘리멜렉의 가정에 불어닥친 흉년이 그랬던 것처럼 아름다운 꿈과 희망을 가지고 출발했던 우리 가정의 아름다운 기억들을 찢어놓고 갈라놓았던 일들은 없습니까? 가족 간에 이해와 사랑의 흉년이 들어 미움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소망이 없는 하루하루를 살면서 흉년 때문에 삶의 자리를 옳기지 않으면 안 되었고, 새롭게 살겠다고 시작했던 삶 속에 더 큰 어려움을 만나서 회복할 수 없는 중에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까?

이 본문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어둡고 험난했던 사사시대 가운데서도, 깨어지고 부서져서 실패한 가정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게 구원 사역을 준비해나가고 계신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서진 가정을 통해서 조차 하나님의 역사 무대에 존귀하고 아름답게 이뤄 가심을 보여줌으로 인해, 가정 때문에 희망을 잃어버린 아픈 우리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다시 시작할 수 없었던 세 명의 과부만이 남은 이 가정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 가정이 되었을까요? 더 나아가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가정의 풍요로움, 그 풍요로움을 지키고 누릴 수 있는 삶의 원리는 무엇일까요? 나오미와 룻이라는 한 가정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희망의 메시지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기다리고 있던 그 메시지가 아니겠습니까?

이 가정이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고 복되게 살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오미가 자기와 자기 가정 속에 닥친 불행과 어려움의 원인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다시 생각하고, 회개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20절에서 21절을 보면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고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룻기 1장에 보면 ''돌아가다''라는 단어가 8번씩이나 나옵니다. 나오미가 말할 때마다 "돌아가야 된다, 돌아가야 된다." 이야기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녀는 자신의 인생과 가정에 불어닥친 어려움의 원인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서 떠난 것에서 원인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은 하나님 백성이 당신의 백성답게 살 수 있도록 허락하신 축복의 땅이었습니다. 나오미는 흉년이라는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도록 가르치시기 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메시지를 듣는 것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고통과 아픔을 피하여 쾌락과 즐거움을 선택했던 자신의 삶과 자기 가정의 선택이 잘못 되었음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다시 돌아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육체적인 것에 더 관심이 있었고, 또한 자기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후손들로 기르는 것보다는 모압의 이방인들과 결혼시킴으로 하나님의 백성들과는 상관없는 백성으로 살아가게 만들 정도로 무감각해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보다는 내 편안함과 편익을 쫓아서 선택했던 나의 태도가 오늘 내 삶 속에 이러한 불행과 어려움을 불렀구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삶을 돌아보는 나오미는 하나님 앞으로 다시금 돌아가고자 믿음을 선택하여 자기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나오미의 홀로서기의 놀라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도록 되어있습니다. 특히 여인들은 더 합니다. 여인들은 평생 세 남자를 의지하고 산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릴 때는 아버지, 젊어서는 남편, 나이 들어서는 아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상황은 더욱 더 심각합니다. 나오미의 이런 모습을 토머스 풀러(Thomas Fuller) 라는 분은 풀핏주석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자는 남자보다 연약한 존재이며, 여자 중에서도 노년기의 여자는 더욱 약하다. 그 중에서도 과부는 더 불쌍하며 거기에 가난한 과부는 더더욱 측은하다. 나아가 가난한 노년기의 과부 중에서도 자식이 없는 사람은 더욱 처량하며 그곳도 먼 타국에서 객이 된 자식 없는 가난한 노년기의 과부는 실로 가련하며 불쌍하다. 진정 욥이 남자 중 가장 많은 고난을 겪었다면, 나오미는 여자 중 가장 처량한 지경에 빠진 여자」라고 묘사했습니다.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재기할 힘도 나이도 돈도 가족들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남은 두 사람, 며느리들을 돌려보내려고 합니다. 신체적으로 연약하기에 며느리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연령이지만 홀로 서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남편 의지하고, 내 돈 의지하고, 내 자식 의지했던 것에서 돌이켜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는 삶의 결단이 며느리들도 돌려보내며 홀로 하나님 앞에 돌아서겠다는 행동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 가정에 문제가 있습니까? 원치 않은 인생을 살아왔습니까? 뒤돌아 볼 때 후회하고 원망하고 계십니까?

나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 그리고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실 만큼 섬세하게 살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앞에 내 삶이 있다고 믿는다면, 내 삶에 문제의 원인을 어디서부터 찾아야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있으라고 명하신 그 자리와 나에게 살라고 명하신 삶의 모습들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 주시는 메시지, 즉 하나님 백성답게 살라하시는 메시지를 져버리고 편리한 대로, 유익한 대로, 육신의 보이는 대로 선택하여 살아왔던 내 삶을 돌이키며,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나오미의 모습처럼 우리의 모습도 그러해야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때, 그것이 회복과 쓰임의 첫 번째 걸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오늘 내 삶을 진정으로 회복시키시고 내 가정을 다시 회복시키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고, 그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길 밖에 없다고 살아온 인생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돌아보며 새롭게 정립하는 나오미의 모습이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한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식을 의지하셨습니까? 남편과 아내를 의지하셨습니까? 그럴 줄 몰랐다고 울고 있다면 진작 알았어야 할 내용입니다. 자녀도, 남편도, 아내도, 물질도 내 인생을 행복하게 하거나 평안하게 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을 진작 알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시작과 마지막이 나를 만드신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서 내 삶을 다시 시작하리라는 그 결단, 그것은 오늘 나의 삶 때로는 희망 없어 보이는 내 가정에 새로운 생명의 출발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부서지고 깨어지고 희망이 없던 이 가정이 회복되고 존귀하게 쓰임 받은 이유는 남아 있는 세 식구 속에 남다른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겨진 세 과부는 각자 인생 속에 다가온 불행을 받아들이면서 더 심각한 불행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 불행을 사랑으로 극복하는 놀라운 사랑이 남아있는 세 식구 속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을 보면 "함께" 라는 단어가 무려 5번 정도 나옵니다. 고통과 환난이 닥치면 가족들 간에 원망하고 원인을 다른 가족이나 사람들에게 돌리는 것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게다가 남편과 두 아들들을 잃어버리고 자손도 없는 늙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생애입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며느리가 잘못 들어와서 우리 집안 망쳤다고 원망할 것입니다. 두 며느리 입장에서 살펴보십시오.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어버렸다면, 부모의 죄 값으로 우리가 이렇게 산다고 부모를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내 남편이 아팠을 그 때 부모가 조금만 더 다정하고, 더 적극적으로 보살펴 주었다면 남편이 살 수 있었을 것인데 하는 서운한 마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남편을 잃어버린 여인의 마음은 이미 멍들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서운합니다. 섭섭합니다. 상처가 됩니다. 동시에 이제는 혼자 살아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인생의 거추장스러운 것은 다 떨쳐버리려고 합니다. 신경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신문과 TV에 한 여인이 나와서 울면서 호소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내 자녀를 찾아달라고, 내 자녀를 잃어 버렸다" 그런데 며칠 뒤에 사건의 전말이 밝혀졌는데, 아이를 죽인 범인은 바로 그 어머니였습니다. 아이를 죽인 이유는 새로 사귄 남자와 결혼하려고 하니, 남자가 아이가 있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아이를 자동차 속에 두고 호수 속으로 집어넣었던 것입니다.

내 인생을 출발할 때 거추장스러운 것은 자녀라도 떨쳐버리려고 하는 시대의 풍조 그것이 그 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시대 이혼하는 가정 가운데에서 자녀를 서로 양육하려 하지 않겠다고 하는 모습 속에서도 곧잘 발견하게 됩니다. 버려져서 고아원으로 가는 자녀들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은지를 특별히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보면 세 과부가 함께 일어납니다. 함께 같은 방향으로 걸어갑니다. 심지어는 어머니가 가는 유대 땅 베들레헴까지 동행하겠다고 두 며느리는 이야기합니다. 문화가 다릅니다. 그리고 풍속도 다릅니다. 언어도 다릅니다. 종교도 다릅니다. 모든 것이 낯설고, 모든 것이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익숙한 것과는 결별하는 선택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니면 두 아들과 남편을 잃은 저 어머니의 마음을 누가 알까?''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어머니와 동행하고자 하는 두 며느리를 보게 됩니다.

신명기 23장 3-4까지 보면 암몬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가도 이스라엘 회중에 들어가지 못하는 주변인의 신세로 전락할 것이 뻔한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니면 저 어머니의 마음을 누가 위로할까'' 헤아리며 따라가는 며느리들의 눈물겨운 사연들을 보십시오.

동시에 어머니 나오미의 모습을 보십시오.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진실된 사랑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7절, 8절 말씀에 「있던 곳을 떠나고 두 자부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행하다가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노라」 ''선대한다''는 히브리 단어 "헷세드" 의 원래 의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상황과 조건의 변화에 상관없이 일정한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는 그 마음을 헷세드라고 합니다. 나오미는 "너희들이 정말로 나와 내 가족들을 변함없이 진실로 사랑해준 것을 내가 알고 있다. 고맙다. 그런 사랑을 베풀었으니 하나님도 너희를 축복하기를 원한다. 이제는 되었다. 나도 내 삶에 너희들이 필요하지만, 이제는 너희들이 나를 따라오기에는 나는 너무 늙고 희망이 없고, 이제는 너희들의 삶을 살아서 나가" 라고 이야기합니다. 젊은 며느리들에게 그들 자신을 위한 삶이 있어야 하는 것을 이해하는 어머니와 함께 붙들고 우는 두 며느리의 모습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 눈물은 사랑의 눈물입니다. 서로의 처지와 형편을 이해하는 가족들을 하나님은 결단코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이러한 이해와 사랑이 있는 가정이 망하는 것을 저는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아무리 좋은 가정도 이 사랑이 없으면 부서집니다.

가정생활 하면서 가장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우리의 부모님들이 아닙니까? 그 중에서도 특별히 우리 어머님들이 아닙니까? 어느 곳을 지나가다가 시판에 적힌 어느 시를 본 적이 있습니다. 심순덕님이 지으신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라는 시입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 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쳐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그 엄마의 사랑. 그러나 당연하게 받아들인 엄마의 인생 그 뒤안길에 한 여인이 느끼는 슬픔과 눈물, 한숨과 탄식을 이해할 수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한 가족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가정에 이런 사랑이 있습니까? 아니면 내 형편과 내 상황에 따라서 편안하게 생각하고 내 중심적인 사랑으로 가득차 있는 가정입니까? 이런 가정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어떤 시어머니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분은 아들을 결혼시키기 전에 27살에 혼자가 되어서 아들을 길렀습니다. 둘만 살았기 때문에 며느리를 맞이한다는 것이 너무나 기다려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친구들은 식구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그래, 내 아들만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6개월 정도만 같이 살다가 따로 살게 해 주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몇 번인가 다짐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이야기하면 화를 내고 역정을 내면서 ''나는 어머니를 떠나서는 살수가 없어요. 그럴 수는 없어요.'' 라고 이야기 하던 아들이 결혼하고 나서 1주일 뒤부터 눈치가 이상해졌습니다. 자신은 며느리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몰래 새벽에 일어나서 밥을 하고, 일도 없이 밖에 나가서 하루 종일 배회하고 놀다가 저녁에 피곤한 몸으로 돌아와서 며느리 오기 전에 밥을 해 놓고 기다리곤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들 내외는 4개월 만에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해 버렸습니다. 이제 혼자구나 라는 생각, 의지하고 있던 기둥이 뚝 부러지는 듯한 허탈감과 서러움 때문에 이사하기 전 날 어머니는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사하는 날 아침 따뜻한 밥을 준비해서 이제는 이것이 마지막 식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이야기 하면서 먹으려고 했는데, 아들 부부는 이사 가는 집 이야기를 하며 들떠서는 마음으로 울고 있는 엄마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전화 한 통 오더니 그 다음부터는 연락이 없었습니다. ''아! 30년 동안 돌아오던 아들이 이제 나보다 더 편안하고 좋아하는 곳으로 갈 곳이 있구나. 생각 하니 혼자 남은 외로움이 그 뼈 속을 파고들었습니다. 비가 오면 정신 잃은 사람처럼 우산을 들고 정류장에 가서 아들을 맞이하러 갈 때도 많았고, 혹 아들이 저녁을 먹으러 올까 밥을 많이 해 놓고 기다렸다가 밥 늦게 식은 밥을 몇 숟가락 먹은 적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어머니 마음을, 한 여인의 마음을 모른다면 우리는 한 가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편리와 우리의 이익과 유익을 찾아서 판단하며 우리의 필요를 따라서 생각하는 그런 사랑이라면 이런 사랑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회복할 사랑이 무엇입니까? 자녀들의 아픔의 소리를 듣습니까? 얼마 전 나온 책 중에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부모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기를 원했던 자녀의 마음을 생각해봅니다. 결국은 증오감 때문에 부모를 살해할 수밖에 없었던 한 아이의 절규가 책으로 나온 것입니다. 가족간의 대화가 없고 서로의 아픈 마음을 알아 줄 수도 함께 눈물을 흘릴 수도 없는 가정이라면 그 가정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깨어지고 부서진 이 가정이 다시금 하나님 앞에 쓰임 받고, 하나님의 역사 무대에 아름답게 쓰임 받았던 세 번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가정에는 하나님을 믿는 나오미와 룻의 공동 기도 고백과 신앙 고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같은 신앙 고백이 있었기 때문에 이 가정을 회복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신앙이 하나 된다는 것은 단순한 일치감이나 평안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특히 어려울 때일수록 그러합니다. 14절 말씀을 보면 시어머니 나오미가 자기의 자부들에게 자신들의 갈 길을 가라고 권고할 때에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붙좇았더라''라는 히브리어로 ''다브카''라는 단어입니다. 그것은 "굳게 결합하다. 붙들고 늘어지다." 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연상해 보십시오. 며칠 전에 일본 영사관 창살을 붙들고 자기 딸은 창살 안에서 보고 있는데, 끌려가지 않으려고 이 창살을 붙들고 늘어지면서 중국 공안원들에게 끌려가는 한 여인의 처절한 모습을 연상해 보십시오.

이것이 창세기 2장 24절에서는 아담과 하와와 ''결합하다''라는 단어와 동일하게 사용되었고, 시편 63장 8절에서는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에서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런 고백이 16절,17절에 나옵니다. 「어머니께서 유숙하는 곳에 나도 유숙하며,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니 어머님이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장사될 것이라.」라고 고백합니다. 엘로힘!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이 룻의 신앙 속에는 이미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이방 여인인 룻이 어디에서 그 신앙을 본받을 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설명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자부들에게 이야기할 때, 여호와 혹은 전능자라는 단어를 1장 속에 무려 7번이나 사용합니다. 대화의 주어에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7번이나 사용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남편이 죽을 때에도, 자신의 큰아들이 죽을 때에도, 둘째 아들이 죽을 때에도 죽음 앞에서도 철저하게 신앙 고백을 했던 그 나오미,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희망이 없어 좌절하여 주저앉아 울고 싶을 그 순간에 절망을 툭툭 털고 일어나서 ''내 삶이 하나님께 있노라. 내 운명이 하나님께 있노라. 내 축복이 하나님께 있노라.'' 고백하며 인생의 거친 길을 걸어가는 모습 속에서 룻은 하나님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의 어머니, 아버님들!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절망스러운 일이 오면 원망하고 불평하고 낙심하는 모습이 아니라, 나의 삶은 하나님께 있노라고 하나님을 의지하노라고 고백하며 툴툴 털고 기도의 자리에 서는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에서 천금으로도 살 수 없는 신앙의 아름다운 유산이 자녀들에게 물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며,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신앙이 전달될 때, 하나님은 나오미와 룻을 통해서 메시야의 조상으로 세워주셨던 것입니다.

각각 가정에 고난과 어려움이 올 때,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을 증거하고 나타낼 중요한 시기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도우시는 주님을 최악의 상태에서도 신실하게 믿고 오히려, 다른 가족들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는 부모님들이라면 말로만 물질로만 그리고, 인간적인 교양으로만 전달하는 삶의 영향과는 분명히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가정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원망이 많습니다. 그러기에 이혼율이 30%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고통과 다툼 그리고 무너짐의 소리들이 여기저기 들려집니다.

로마제국 멸망사를 기록했던 에드워드 기본이라는 역사가는 로마제국의 멸망이 바로 가정의 타락에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급속한 이혼율의 증가와 또 한 가지는 종교의 타락이었습니다. 절대성을 상실한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이 쾌락과 상황이라는 것에 도전을 받을 때, 튼튼했던 철의 나라 로마는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가시고기라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쓴 등대지기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님을 두고 삼 남매 사이의 심리적인 갈등과 다툼을 그린 이야기였습니다. 결국 어머님을 요양원으로 보내기로 했던 삼 남매의 결정 그러나, 어머님의 돌발적인 행동 때문에 막내아들이었던 재우라는 형제는 자기가 있던 외딴 섬 등대에 어머니를 보시게 됩니다. 성장하면서 어머니의 사랑을 남다르게 느껴보지 못했던 이 아들에게 어머니는 짐에 불과했습니다. 날마다 밥을 내놓으라고 하고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어머니, 자신의 삶의 리듬을 깨뜨리는 어머니를 모신다는 것은 그에게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태풍이 몰아치는 어느 날 밤 등대에 불이 나가서 불을 켜기 위해 나가게 됩니다. 가만히 있던 어머니가 여러 번 부릅니다. "재우야! 가지마. 가지마." 하지만 재우는 어머님께 "어머니, 저는 가야합니다. 여기 냉장고에 음식이 있습니다."라고 하며 갑니다. 등대에 올라가서 끊어진 퓨즈를 갈아넣고, 전기를 다시 연결시키는 순간 재우는 감전되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맙니다. 의식을 찾았을 때 그의 내장은 타 들어가는 것 같고 몸은 오그라들고 있었습니다.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 이대로 죽겠구나!'' 그렇게 자신을 포기하고 있을 때, 수 백 계단을 올라오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치매를 앓고 있던 자기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가 올라오면 분명 죽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머니 내려가세요." 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그는 힘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가까이 옵니다. 어머니가 또 이야기를 합니다. "너 왜 밥 안주고 여기 있어. 밥 줘!" 그러면서 동시에 "너 힘드니, 내가 너를 살려줄게." 그리곤 무릎에 아들을 눕힙니다. 빗물을 떠서 이 아들의 입에 넣어줍니다. 빗물이 들어갈 때 타 들어가는 속이 다 식어버리는 것 같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머니 돌아가세요! 여기 있으면 죽어요. 어머니, 돌아가세요." "아니야, 나는 네 곁에 있을 거야." 치매에 걸려 정신도 오락가락하는 한 노인 안에서는 동시에 모성본능이 싸우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옷을 벗습니다. 속옷을 벗고 속옷을 빗물에 적셔 아들 입에 넣어 줍니다. 나흘 뒤에 구조대가 왔을 때에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을 살리고 어머니는 죽었던 것입니다. 하반신 마비가 되었던 아들 그러나 잊혀져서 깨닫지 못했던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느꼈기에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머니의 이러한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의 삶이 오늘날과 같이 될 수 있었을까요? 이 이야기는 불행과 갈등 다툼과 고독을 다루고 있지만, 진정 행복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그리고 가족이 무엇인지 아니 어머니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어떠하십니까? 진정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